특별 외전 3화
* * *
파티에 초대한 현악 사중주 공연을 가만히 듣던 바이올렛은 어느새 제 뒤에 와서 허리를 끌어안는 윈터를 돌아보며 말했다.
“술 많이 마셨어요?”
“응. 엔나 부인께선 술을 정말로 빠르게 드시거든.”
“할머니는 다 좋은데 술을 너무 좋아하세요. 조금 줄이시면 좋은데.”
바이올렛이 걱정하자 윈터가 고개를 가까이 기울이며 말했다.
“내 걱정만 해. 딴사람 걱정하지 말고.”
“충분히 하고 있어요, 당신 걱정.”
“아, 하기야. 아까도.”
“아까도?”
바이올렛이 고개를 갸우뚱하자 윈터가 장난기가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얘기 중엔 상대방을 봐야지, 아까 자꾸 눈으로 날 찾던데? 공주님이 그래도 되는 건가?”
그 말에 바이올렛이 제 무례에 당황했는지 뺨이 조금 붉어져서 변명하듯 말했다.
“당신이 술 많이 마실까 봐 걱정돼서 그랬어요.”
“그러니까 내가 너무 좋아서 대화에 집중하지 못하는 무례를 범하셨다, 이거 아냐.”
“그걸 알면 당신은 무례라고 말하면 안 되죠.”
“이런 걸로 당신 놀릴 기회가 얼마나 된다고 안 된대.”
윈터가.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놀리자 바이올렛이 제 허리를 감은 두툼하고 단단한 팔뚝을 톡 때렸다.
그러자 윈터가 주변을 둘러보더니 아무도 안 보는 사이 손으로 바이올렛의 엉덩이를 톡톡 두들겼다. 기겁한 바이올렛이 그의 품에서 벗어나 윈터를 마주 보았다.
세상에 다시없이 파렴치한 작자를 보는 바이올렛의 그 표정에도 윈터는 느긋한 얼굴로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아무한테도 안 보여. 들켜도 우리가 부부인데 어쩔 거야.”
“악당 같으니.”
“그러게 누가 나 같은 놈이랑 결혼하래?”
윈터가 웃으며 아내의 팔을 당겨 제 허리에 감았다. 그러다 이내 웃음이 터져 윈터가 바이올렛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윈터의 뒤에 사람이 없어서인지, 바이올렛이 복수하려는 마음으로 그의 엉덩이를 손으로 나름 힘주어 쥐었던 것이다. 그녀 딴엔 당황하라고 한 것 이었는데, 윈터는 그렇게 웃다가 부족했는지 그대로 자리에 주저앉아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끅끅거리며 어깨를 들썩이고 웃었다.
그런 그의 행동에 당황한 바이올렛이 손으로 윈터의 어깨를 두들겼다.
“빨리 일어나요.”
안 그래도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하나둘 부부를 향하는 중이었다. 그렇게 웃던 윈터가 두 손으로 바이올렛의 손을 잡고 올려다보았다.
“바이올렛.”
“왜요.”
“나 사랑하지?”
“사랑한다니까.”
“나 없인 못 살겠지?”
그 말에 바이올렛이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자 윈터가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그럼 우리 같은 날 죽을까?”
윈터가 묻는 말에, 난처해하던 바이올렛이 남편의 얼굴에 시선을 고정했다.
안 그래도 아름다운 그의 얼굴이 달빛을 받아 더욱 반짝거리고 있었다. 눈동자에 가득한 사랑이 온전히 저를 향한다는 것이 바이올렛은 기뻤다.
그녀가 단호한 얼굴로, 윈터에게 잡힌 손을 들어 코를 톡 건드리며 말했다.
“우리 아이들이 독립 가능한 나이 이후라면요.”
“혹시라도 당신이 그 전에 죽으면 난 따라 죽을 거야.”
그러자 바이올렛이 정색하며 말했다.
“안돼요. 아이들 다 키워 놓고 죽어요.”
그 단호함이 바이올렛다워서, 윈터는 또다시 웃음이 터졌다.
그리고 말을 이었다.
“미안하지만 난 당신 없인 못 버텨. 그러니까 오래 살아. 책임감을 가지고.”
윈터가 웃는 얼굴로 고집을 부리자 바이올렛이 한숨을 푹 쉬고 힘주어 그의 팔을 당겨 일으켰다.
높은 굽을 신었는데도 일어서면 휙 시선이 높아져 버리는 남편을 올려다보며, 바이올렛이 입을 열었다.
“정말 나 죽으면 따라 죽을 거에요?”
“장례식 치르고 바로.”
“나 없인 못 살아서?”
“응.”
대꾸하던 윈터가 아내의 팔을 감싸 쥐며 말했다.
“그런데 이런 얘기 그만하자. 무서우니까.”
바이올렛은 고개를 끄덕이곤 물었다.
“아까 할머니와 무슨 얘기 했어요?”
“당신이 사랑에 빠지면 알아보기 쉽다는 얘기.”
“즐거운 이야기 같던데.”
“숨통이 트이더군.”
윈터의 말에 그럼 됐다는 듯 바이올렛이 미소를 지었다.
정원에서 실컷 뛰어놀던 두 아이가 드디어 지쳤는지 부모에게로 달려왔다. 부부는 두 팔을 벌려 아이들을 반겼다.
* * *
아이들은 둘 다 윈터를 닮아 아주 건강했다. 바이올렛은 그 사실에 안도하며 언제나 제 신과 남편의 신에게 감사의 인사를 했다.
주말 오후, 연일 업무가 쏟아져 늘 바쁜 바이올렛이 침실에서 낮잠을 잤고, 두 아이와 윈터는 정원에 나와 있었다.
윈터는 나무 그늘 아래 누워 한 손으로 뒤통수를 베고, 다른 손으로 책을 들어 읽었다. 부모가 독서를 해서 아이들에게 모범이 되고 어쩌고 하는 가정 교사들의 잔소리 때문에 별수 없이 책 읽는 시늉이라도 하는 중이었다.
그사이 윈터가 특수 주문하여 제작한 어린이용 의자에 앉아, 테이블에 팔꿈치를 올리고 꽃받침처럼 턱을 괸 올리비아가 한숨을 폭 내쉬었다.
“오빠는 맨날 책만 읽어. 도대체 누구를 닮은 걸까?”
그러자 테오가 책에서 눈을 떼지 않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버지도 독서 중이시잖아.”
“아빠는 귀찮은데 할 수 없이 읽는 거잖아.”
“그럼 어머니를 닮았나 봐.”
“얼굴은 아빠랑 똑같은데!”
“맞아. 올리브가 어머니랑 똑같이 닮은 것처럼.”
“응. 그래서 난 내가 세상에서 제일 예쁜 것 같아.”
자신만만하게 말하는 올리브가 귀여워서 테오는 웃음을 짓고, 동의한다는 의미로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튼 엄마를 닮았다는 말을 제일 좋아하는 올리비아는 무척이나 신이 난 상태였다.
아이는 이내 휙 의자에서 뛰어 내려가 힘 있게 땅을 박차며 나무 아래 누워 있는 윈터에게로 달려갔다. 그리고 올리비아도 옆에 누우려 하자 윈터가 책을 내려놓고, 누우려는 올리비아를 대롱대롱 안아 든 후, 다른 한 손으로 바닥에 천을 깔았다. 본인은 아무 곳에나 누워 있으면서 다른 가족들이 그러는 건 두고 보질 못했다.
“나는 뒤질 만큼 고생하면서 컸다고. 너흰 내가 이렇게 곱게 키우니 날 닮으면 안 돼.”
윈터는 늘 그렇게 말하지만, 올리비아는 아버지를 따라 하는 걸 좋아했고, 테오에게도 언제나 남자로서 가장 닮고 싶은 사람은 아버지였다.
소년은 책 너머로 다시 드러누워 잠든 올리비아와 윈터를 보았다. 그러다가 바이올렛에게 선물 받은 책갈피를 꽂아 책을 덮어 놓고 그들에게로 향했다.
올리비아는 금방 코를 골며 잠들어 테오는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그리고 조심스레 제가 입고 있던 재킷을 벗어 올리비아의 배에 덮어 주는데, 윈터가 소곤거렸다.
“테오도 들어가서 다시 두꺼운 거 입고 와.”
“안 추워요! 그리고 저도 남자예요.”
“감기가 남자는 피해서 걸리는 병도 아니고.”
윈터는 투덜거렸지만 이내 별수 없다는 듯 주변을 더듬거려 제가 벗어 놨던 재킷을 찾아 테오에게 건네주었다.
테오가 아직 터무니없이 큰 재킷을 입어 소매를 여러 번 접은 후, 올리비아의 옆에 누웠다. 그리고 햇살이 부서지는 나뭇잎들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저는 언제쯤 아버지처럼 될까요?”
“……나 왜?”
“멋있고, 세상에 어머니 빼고는 무서운 것도 없고, 그리고…….”
“계속해 봐.”
윈터가 내심 기대하며 말하자 테오가 말을 이었다.
“사람들의 편견도 신경 쓰지 않고요.”
이방인의 눈동자에 대해, 테오는 살아가며 거의 말을 하지 않았다. 자라는 동안 본인 스스로가 세상과 충돌하며 알아 갈 뿐, 부모에게 칭얼거리는 성격이 아니었다.
테오는 이렇게 완벽한 울타리 안에서 자라는 자신도 가끔은 편견을 느끼는데, 그 차별이 몇 배는 심하던 시절을 보낸 윈터는 아무런 보호막 없이 어떻게 버텨 왔는지가 궁금했다.
그러자 윈터가 태연히 말했다.
“어릴 땐 신경 썼지.”
“정말요?”
“응, 근데, 내가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내 아들의 눈이 회색이니까.”
윈터의 능청스러운 말에 테오가 베시시 웃었다.
그 순간 어떻게 귀신같이 알고 윈터가 저택 쪽을 보았다. 낮잠에서 깬 바이올렛이 그들에게 오고 있었다. 윈터가 천을 하나 더 꺼내다 벌레를 발견하고 말했다.
“어이씨, 젠장. 우리 공주님 벌레 무서워하는데.”
“그런 말을 쓰면 어머니께 이를 거예요.”
테오가 말하고 장난인지 모처럼 아이답게 웃었다. 그 사랑스러운 웃음에 윈터의 입꼬리가 절로 올라갔다.
“맘대로 해. 바이올렛은 나의 그런 모습까지도 사랑하니까.”
윈터가 태연하게 말했다.
그때 그림자가 지더니 위에서 그가 기다리던 목소리가 들렸다.
“뭘 이른다는 걸까?”
멀리서도 들렸는지, 허리를 숙인 바이올렛이 물었다.
그러자 윈터가 몸을 일으키고 세상모르고 잠든 올리비아를 안아 들며 말했다.
“내가 저급한 말을 썼다고.”
“저런. 아이들 앞에선 안 된다는데도.”
“어, 그랬는데도.”
윈터가 그리 말하고는 바이올렛의 이마에 입을 맞추고 놀리듯 말했다.
“어쩌다 그런 저급한 놈이랑 결혼해서 애까지 둘을 낳아 버렸네, 우리 공주님이.”
“…….”
저급한 놈이라는 말에 바이올렛의 미간이 좁아졌다. 그러더니 이내 그를 흘기며 말했다.
“그런 말 한다고 내가 염려해 줄 줄 알아요?”
“예전엔 해 줬잖아.”
“거듭 말하지만 그때는 당신이 본인을 저급하다고 착각하고 있었고, 지금은 아니란걸 알면서 날 놀리는 거잖아요.”
그런 그녀의 말에 윈터가 씩 웃더니 아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테오, 바이올렛의 모든 부분을 닮아도 좋지만 저건 닮지 마라. 바람둥이 돼.”
그의 농담에 바이올렛이 한 소리 하려는데, 테오가 ‘네’ 하고 대답하며 까르륵 웃었다. 놀리는 건 얄밉지만 아이들이 즐거워하니 됐다고, 바이올렛은 생각하며 저도 웃어버렸다.
올리비아까지 잠에서 깨자, 그들 가족은 저녁 식사를 하고, 거실에 모여 앉아 이것저것 이야기하며 간식을 먹었다.
벌써부터 장사를 할 계획을 세우는 올리비아에게서 거상의 새싹을 본 윈터는 지금 당장 딸의 계획을 구체화시켜야 한다며 흥분해, 테오와 바이올렛이 가라앉히느라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여느 때처럼 한참을 웃으며 수다를 떨다가, 부부는 아이들을 하나씩 재워놓고 방을 나왔다.
문 앞에서 바이올렛이 살짝 손등이 위로 가게 손을 내밀어 보이자 윈터가 흐 웃고 그녀의 손을 깍지 껴 잡았다. 그러곤 당겨서 바이올렛의 보드라운 손등에 입을 맞췄다.
복도를 걸어 침실로 가다가, 윈터가 부부 침실까지 가는 것도 못 견디겠는지 슬쩍 빈방 문을 열고 바이올렛을 끌어당겼다. 못 이기는 척 따라 들어가 주니 윈터가 문을 닫자마자 그녀를 안아 들어 테이블 위에 앉히고 입을 맞추기 시작했다.
바이올렛은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몇 걸음만 더 가면 침실인데…….’
그녀는 커다란 창밖으로 새어 들어오는 달빛이 너무 밝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다른 생각을 하는 걸 알았는지, 윈터가 입술을 댄 상태로 흐흐 웃었다.
“보나 마나 달이 너무 밝네, 테이블 위는 앉는 곳 아니네, 그런 생각 하고 있겠지.”
“그걸 알면서 꼭.”
바이올렛이 민망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자 윈터가 귀여워 못 견디겠다는 듯 그 잠깐 사이에도 그녀의 눈꺼풀이며 콧등, 입술에 쪽쪽 입을 맞추면서 말했다.
“복도에서 키스하면 혼낼 거잖아.”
“여기는 좀 다른가요?”
“물론이지, 보는 사람이 없잖아.”
“하늘이 알고, 땅이…….”
“당신이 침실에서 나한테 안길 때도 하늘과 땅은 알아.”
그가 약 올리듯 말하자 바이올렛이 윈터의 어깨를 톡 때렸다.
얄밉다는 듯이 그를 흘겨봐도 윈터는 점점 더 그녀를 제 쪽으로 바짝 당기기만 했다.
게다가 바이올렛 본인 역시, 그와의 입맞춤이 끊어진 게 아쉬워 팔로 감은 목을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그러자 윈터가 눈꼬리를 휘어 웃으며 그녀의 허벅지를 손으로 당겨 제 몸에 다리를 감게 하고, 배를 바짝 붙였다.
그러고는 야릇한 시선으로 아내를 바라보았다. 바이올렛은 윈터가 작정하고 저런 눈으로 바라보며 유혹할 땐, 늘 못 이겨 넘어가 버리고 말았다.
결혼 초기엔 상상도 못 하던 일들이, 그와 살아가며 매일같이 일어났다.
윈터가 그녀의 붉어진 뺨에 입을 맞추고 장난스레 말했다.
“안 밀어내네. 무례할 텐데.”
그러자 바이올렛이 속삭여 대답했다.
“당신을 사랑하니까.”
“……”
“아직도, 당신에게 익숙해지는 중이에요. 느리게 느껴질지는 몰라도…….”
그녀의 말에 윈터가 깊게 한숨을 쉬더니 바이올렛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그녀의 한 손을 붙잡아 제 심장에 올려놨다.
그녀의 손을 눌러 바이올렛의 얼굴이 붉어질 정도로 박동을 느끼게 한 윈터가 말했다.
“궁금한 게 있는데 말입니다, 공주님.”
저 말투는 분명 뭔가 음담패설을 하거나 놀리려는 거였다.
바이올렛이 뭔지는 몰라도 말을 못 하게 하려고 손으로 그의 입을 막으니 윈터가 더욱 장난스러워진 얼굴로 그녀의 손가락이 닿은 입술을 움직였다.
“나한테 익숙해지면 나중에는…….”
윈터가 그녀의 귀에 무언가 속삭이자 바이올렛이 기겁을 했다.
“어, 어떻게 그렇게 파렴치한 생각을!”
아이 둘이 태어나 학교에 들어갔는데도 상상 못 한 음담패설에 바이올렛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게 웃기고 귀여워 죽겠는지 그녀를 끌어안고 웃느라 윈터는 정신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