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 외전 2화
* * *
“대표님?”
“…….”
“대표님, 무슨 편지인데 그런 표정이십니까?”
하옐이 거듭 묻는 말에 윈터가 제가 들고 있던 편지를 접었다.
아내가 보였던 증상이 상상 임신이 아니라, 제 부모가 준 약에 의한 것이라는 내용의 편지였다. 아내가 떠나기 전 그녀의 주치의였던 자가 쓴 것이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서다가 비틀거리며 그대로 자리에 주저앉았다. 놀란 하옐이 달려와 윈터의 팔을 붙잡아 부축했다.
윈터가 그 팔을 확 뿌리치더니 굳은 얼굴로 말했다.
“오겔 화원으로 가자. 엔나 부인을 뵈어야겠어. 지금쯤이면 아내의 편지를 볼 수 있을거야.”
“의사부터 부르세요, 대표님.”
“말대꾸하지 마.”
윈터가 그의 팔을 뿌리치고 몸을 일으키더니 제가 마차를 잡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하옐은 바닥에 떨어진 편지를 들어 확인하고 이내 그것을 접어 챙긴 후 윈터를 따라나섰다.
그는 불안한 걸음으로 복도를 걷는 윈터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도대체 왜 그는 바라던 것을 이루고도 행복하지 못한 것인가를 생각했다. 오히려 그의 삶은 점점 더 불행해져 갔다.
언제쯤이 되어야 그는 행복해지나.
언젠가 행복해지기는 하는 걸까.
하옐은 알고 싶었다.
엔나는 눈 속을 뚫고 나타난 윈터를 발견하고 혀를 쯧 찼다.
바이올렛이 키론으로 떠난 후, 윈터는 종종 이렇게 오겔 화원의 주인이자 아내가 무척이나 따르는 어른인 엔나 부인을 찾아왔다.
그녀가 떠난 지 1년 가까이 지났건만, 오늘은 그 타격이 유난히 더 큰지 윈터의 얼굴에 어둑한 우울함이 드러워 있었다.
“우산이 괜히 있는 게 아닐 거네만.”
엔나가 말을 걸어 봐도 윈터가 한동안 입매를 굳히고 서 있더니, 손으로 머리칼과 얼굴에 묻은 눈을 대충 훑어 내고 한 걸음 들어섰다.
“아내에게서 온 편지는 더 없습니까?”
윈터가 바로 목적부터 말하자 엔나가 혀를 찼다.
“몸이나 녹이고 말하게.”
“가져온 게 있는데.”
윈터가 제 할 말만 하기에 엔나는 저 사내가 영 남의 말을 못 듣고 있구나, 하고 알았다.
윈터가 대충 천으로 감아 온 나무 통을 열고 와인을 꺼냈다.
“전승 기념일 100주년 와인입니다. 좋아하신다고 들어서.”
“맙소사, 그걸 어떻게 구했나? 이제 고작 스무 병 남았다는 걸.”
“스무 병이나 남았더군요.”
윈터가 혼잣말하듯 중얼거리며 뒤따라온 하인들에게 손짓했다. 그러자 하인들이 스무 병의 와인이 든 상자를 집 안에 내려놓았다.
엔나는 거의 표정 변화가 없는 사람 중 하나임에도 라크라운드에 스무 병 남은 와인을 몽땅 찾아 손에 넣는 재주에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엔나가 기막혀하며 물었다.
“혹시 내가 편지를 내주지 않을까 봐 준비한 겐가?”
그 말은 들었는지 윈터가 음울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엔나가 마지못해 편지를 내주자 윈터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눈이 녹으며 축축해진 장갑을 벗어 주머니에 구겨 넣었다.
두 손으로 조심스럽게 편지를 받아 든 윈터가 그것을 펼쳤다.
할머니. 키론은 정말 따뜻한 곳이에요. 11월인 지금도 그리 두꺼운 옷이 필요하지 않네요.
게다가 볕이 얼마나 좋은지 몰라요. 햇살이 좋으니 늘 경쾌한 기분이에요.
거리 화가가 그린 키론 풍경을 동봉해요. 그림에 보이는 그대로의 사랑스러운 장소예요.
윈터는 마치 이 편지가 겨울에 더없이 부족해진 햇살처럼 느껴져, 손가락 끝으로 한참을 어루만졌다.
그 잠깐의 햇빛이 사라지고, 윈터의 얼굴이 도로 밤처럼 어두워지자 엔나가 안쓰러운 마음으로 물었다.
“그렇게 그리우면…… 답장할 때 뭐라도 동봉해 줄 테니 편지라도 써 보는 게 어떤가?”
“그건 안 됩니다.”
“왜?”
“아내가 제 발로 와야 해요. 제가 잡으면 안 됩니다. 제가 잡으면 혹시 또.”
“또?”
“또다시…… 나쁜 생각을 할지도 모르니까.”
바이올렛의 편지를 보고 난 윈터는 잠깐이나마 반가워하다가 금방 더 큰 상처를 입어 눈가루처럼 산산히 흩어져 버릴 것 같은 상태가 되곤 했다.
엔나가 미간을 좁혔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알고 싶었으나 그 질문이 저 사내의 목을 조를 것 같아 그럴수도 없었다.
그저 종종 찾아오면 술이나 한 잔씩 같이 해 주는 것 뿐, 도리가 없었다. 어른이 되어서 젊은이들에게 해 줄 수 있는 게 없음이 서글펐다.
* * *
엔나는 무심코 그날 일을 떠올리고 있었다.
엔나는 저에게 새로 손주들이 생긴 이후, 손주들을 초대하는 행사에 더더욱 열을 올리기 시작했다.
요즈음도 오겔 화원에서는 그녀가 젊은 시절 사교계에서 사귄 인맥들이 여전히 우정을 과시하며 지속적인 정찬을 이어 가고 있었다.
그러나 손주들이 오는 날에 비하면 준비가 소홀해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었다.
샤론과 바이올렛의 아이들에게 인사를 받고 나서, 아이들 입맛에 맞추어 준비한 긴 점심 식사가 이어졌다.
식사가 어느 정도 끝나 아이들이 정원으로 뛰쳐나가자 윈터가 가져온 와인 한 병을 들고 엔나의 맞은편에 와 앉았다.
그러자 엔나가 불쑥 말했다.
“왜 이제야 꺼내 놓나? 안 가져온 줄 알았지.”
“그렇게 사람보다 와인을 더 반기는 거 무례한 거 아닙니까?”
윈터가 툴툴거리자 엔나가 담담히 대답했다.
“무례라니. 내가 이 나이가 된 뒤로는 자네같이 대드는 청년을 본 적이 없네.”
“청년기는 지났을 나이인데요.”
“건방 떨지 말게. 내 눈엔 새파랗게 어리니까.”
엔나는 무뚝뚝한 얼굴로 말하면서도 집사를 시켜 그가 가져온 와인을 개봉해 잔에 가득 따르게 했다.
좋은 와인을 한 모금 즐긴 엔나가 샤론 부부와 이야기하며 웃고 있는 바이올렛 쪽을 보곤 말했다.
“저 아이는 자네를 정말로 사랑하는구나.”
엔나의 말에 윈터가 입꼬리를 씰룩이며 말했다.
“그건 저도 알지만, 왜 그렇게 생각하시는지는 알고 싶군요.”
“잘 보게. 바이올렛이 자네와 이야기하며 두리번거리는 거 본 적 있나?”
“아뇨.”
“바이올렛은 왕실 예법이 몸에 익어서 누구와 이야기할 때에도 실수하지 않으려고 상대방 이야기에 집중하는 아이야. 그런데 보게.”
윈터가 바이올렛을 보았을 때, 그녀가 잠깐 시선으로 윈터를 찾았는지 눈을 마주치고 부드럽게 눈꼬리를 휘어 웃었다.
그러다 다시 샤론과 아우스 쪽을 보았다.
엔나가 말했다.
“저 애만큼 사랑에 빠졌을 때 알아보기 쉬운 사람도 없지. 저 반듯한 아이가 다른 사람과 이야기하면서도 정신이 온통 자네에게 있잖나.”
엔나의 말을 듣고 나서 윈터는 저도 모르게 바이올렛을 뚫어져라 바라보게 되었다. 그런데 그 시선을 어떻게 알고, 바이올렛이 다시 그를 보더니 엔나 쪽을 보라며 단호한 얼굴로 눈짓했다.
그런 아내를 보고 나니 윈터의 가슴속에 참을 수 없이 큰 행복이 퍼져 나갔다.
그 빤한 얼굴에 엔나가 말했다.
“와인 가져온 보람이 있지?”
테이블에 한 팔을 걸고 있던 윈터가 엔나 쪽으로 고개를 조금 기울이며 말했다.
“전 원래 사업가라 이득이 없는 상대에겐 선물 안 하는데요.”
“그게 자랑인가?”
핀잔을 듣고서도 윈터는 실실 웃었다. 그렇게 엔나와 술을 몇 잔 더 마셔 준 후, 윈터는 바이올렛에게로 다시 걸음을 옮겼다.
* * *
샤론과 아우스의 아들인 에단은 외동이라, 엔나가 식사에 초대할 때마다 또래인 테오와 그 동생인 올리비아를 만날 수 있다는 것에 너무나 기뻐했다.
혹여나 추울까 윈터가 두툼하게 챙겨 준 옷을 입고 정원을 살피는 올리비아의 다섯 걸음쯤 뒤에서 따라 걷는 테오에게 에단이 소곤거렸다.
“올리브 지금 뭐 하는 거야?”
“우리 가족은 날씨가 좋으면 늘 정원에서 산책을 하거든. 그때 어머니가 꽃 이름을 많이 알려 주셨어. 그래서인지 올리비아는 정원에 가면 늘 모르는 꽃이 있나 저렇게 찾아봐.”
“그렇군.”
에단이 고개를 끄덕거리고는 힐끔 테오를 보았다.
도착하자마자 정원을 헤집고 다녀 입고 온 옷이 흙투성이인 올리비아에 반해 테오는 머리끝부터 구두까지 깔끔하고 단정했다.
저 애들이 같은 집 녀석들이라고 누가 믿을까, 생각하던 에단이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려는 올리비아를 빠르게 눈치채고 팔을 붙잡았다. 그러곤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일으켜 놓고 테오에게 말을 이었다.
“너희 정원은 엄청 크니까, 여기에 모르는 꽃이 없을지도 몰라.”
그 모습을 보고 있던 테오가 놀랍다는 듯이 말했다.
“꽃에 관해선 잘 모르지만, 네가 정말 운동 신경이 좋다는 건 알겠어.”
“너도 좋잖아.”
“성격도 좋고.”
에단은 제 눈에 완벽한 저 소년이 왜 저를 칭찬하는지 잘 이해하지 못하며 말했다.
“넌 참 좋은 점부터 보는구나?”
그사이 올리비아가 풀 하나를 발견하고 눈이 동그래졌다.
“우리 집에 없는 거다!”
그러자 에단이 말했다.
“그거 잡초야.”
소년의 말에 올리비아가 발끈해하며 말했다.
“아무튼 우리 집에 없는 거잖아.”
“그건 이름도 없을걸.”
“내가 지어 줄 거야, 멍청아!”
“잡초도 못 알아보는 네가 멍청해.”
그 말에 올리비아가 씩씩거리더니 휙 돌아서 엔나 부인에게 달려갔다. 그러더니 그녀의 손을 잡아끌고 오며 말했다.
“할머니! 내가 우리 집에 없는 풀 발견했는데, 에단이 잡초라고 자꾸 뭐라고 해!”
그러자 엔나 부인이 아이를 따라 몸을 숙여 보고 입을 열었다.
“이건 북부 민들레구나. 어쩌다가 여기까지 날아왔을까? 신기하구나.”
“신기해?”
“그럼. 수도에서 본 건 처음이구나. 올리브가 대단한 걸 발견했네. 곧 있으면 여기서 주황색 민들레가 핀단다.”
“주황색 민들레라니!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올리비아가 깜짝 놀랐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이의 이 뜨거운 호응에 늘 무뚝뚝하던 엔나가 소리 내어 웃었다.
엔나는 평생 제가 가장 사랑하던 것인 화원에 대한 이야기를 그보다 더 사랑하게 된 올리비아와 함께 나눌 수 있다는 사실에 더할 수 없는 행복을 느꼈다.
그사이 올리비아가 봤냐는 듯 에단을 보니 그가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엔나는 몸을 일으켜 아픈 손가락이던 바이올렛과 그의 남편을 바라보았다. 두 사람은 견고했고, 편안하며, 기쁨으로 가득했다.
이제 저들은 별로 걱정할 일이 없으니, 그녀는 마음 놓고 사랑스러운 꼬마들 쪽으로 관심을 돌려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