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172화 (특별 외전) (172/176)

특별 외전 1화

행복 I

눈보라 치는 능선을 걸어가는 하옐의 눈에 눈물이 그렁거렸다.

“도련님! 이러다 우리 죽겠어요!”

“닥쳐! 나도 지금 뒈질 것 같으니까!”

“예? 안 들려요!”

“닥치라고!”

“예? 덥다고요?”

윈터가 짜증이 나서 돌아보니 모자에 달린 귀마개의 끈을 턱 아래에 꽁꽁 묶고 있는 하옐이 보였다.

얼마 전 열여덟 살 생일을 지난 윈터는 아직도 키가 자라고 있었고, 그만큼 엄청난 양을 먹어 치워 덩치를 불리고 있었다. 반면 워낙 못 먹고 자란 하옐은 여전히 비실비실해서 추위를 더 심하게 타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그냥 다시 돌아서서 걸음을 옮겼다가, 욕설을 하며 제 목도리를 풀어 하옐의 얼굴에 집어 던졌다. 그리고 다시 앞장서서 걸었다.

다행히 두 사람은 그로부터 아주 멀지 않은 곳에서 산장을 발견했다. 산장 문을 낑낑거리며 닫은 하옐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이내 분통을 터트렸다.

“그 롱 리우드 땅만 안 샀어도 인부들과 같이 올라왔을 거고, 그럼 길 안 헤맸을거 아닙니까!”

“필요하니까 샀다고!”

“농사도 안 짓는 분이 그 땅이 왜 필요하냐고요, 도대체!”

“거기도 기차역이 지나갈 것 같다니까!”

“지나갈 것 같아서 사는 게 어디 있어요! 이게 도박이랑 뭐가 다릅니까!”

“젠장, 그렇게 안정적으로 살고 싶었으면 남이 만든 가게에서 일했지, 이런 개고생을 왜 해!”

두 사람은 눈보라를 뚫고 나갈 정도로 고성을 지르며 싸워 댔다.

윈터가 정말로 열이 받는다면 얻어맞을 수도 있다고 하옐은 늘 생각했으나, 이런 필요한 업무적인 다툼은 그도 원하는 것이었다.

지금까지 벌어들인 막대한 돈을 싹싹 긁어서, 자라는 건 밀과 약간의 포도밖에 없는, 끝을 알 수 없는 규모의 농지를 사들인 윈터의 결정을 하옐은 몇 번이고 지옥으로 걸어가는 길이라 평했으나 이미 돌이킬 수 없었다. 하여튼 타고난 뭐가 있든지, 그냥 미친 도박꾼이든지 둘 중 하나였다. 지금 하옐이 보기엔 후자가 99.9%였다

윈터는 곧바로 하옐의 키만 한 배낭을 내던지고 부싯돌을 꺼냈다. 산장 한 벽이 다 장작인 것을 본 그가 투덜거렸다.

“장작 괜히 가지고 왔네. 무거워 뒈지겠는데.”

그가 말하며 불을 붙이는 사이 하옐이 윈터의 가방을 들어 보았다. 두 팔로 낑낑 거려도 밀리지도 않는 걸 저 인간은 도대체 어떻게 들고 여기까지 온 건가, 기함할 따름이었다.

장작이 얼어서 불이 잘 붙을까, 싶었는데 윈터는 능숙하게 불을 피워 순식간에 크게 키웠다. 저 도련님은 어릴 때 얼마나 고생을 했길래 저렇게 생활력이 좋은 건가. 하옐은 궁금해하며 제 가방에서 독주 한 병과 육포를 꺼내 윈터에게 내밀었다.

윈터가 술을 마시며 몸을 녹이는 사이 하옐은 담요를 꺼내 몸을 칭칭 감고 벽난로 앞에 앉아 육포를 뜯었다. 끔찍하게 고생스러운 나날이었다.

“길에서 구걸할 때가 나았어요. 그땐 춥진 않았다고요.”

“여기서 쫓겨나고 싶지 않으면 꿍얼대지 마.”

윈터의 핀잔에 하옐의 입술이 댓 발 튀어나왔다.

산장 창문이 끊임없이 덜그럭거렸다. 벽난로 앞에 담요를 덮고 누웠는데 그 소리에 겁이 나 하옐은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았다..”

“이러다 산장이 날아가는 거 아니에요?”

“…….”

윈터는 벌써 잠들었는지 답이 없었다.

하옐은 이불을 머리까지 뒤집어쓰고 두 손으로 귀를 틀어막았다. 수도 기차역 근처에서 또래의 빈민굴 아이들과 몰려다니며 구걸을 하던 삶이 더 낫다고는 할 수 없었다. 그래도 최소한 이제 인신매매당할까 봐 날카로운 걸 들고 다닐 필요는 없었으니까.

하옐이 장작을 끌어다가 몇 개 더 던져 넣고 다시 이불을 뒤집어썼다.”

“무서워 죽겠네…….”

그러자 잠든 줄 알았던 윈터가 입을 열었다.

“이런 날에는 산짐승도 안 나와. 다행인 줄 알아.”

“총 있잖아요.”

“맞힐 자신 있어?”

“……더 무서워졌잖아요.”

하옐이 입을 삐죽거리며 담요를 꼭 쥐었다.

무섭긴 해도 제 인생은 이전보다 나아졌다고 생각했다. 저 인상 더러운 이방인 도련님을 따라나선 건 제 인생에서 가장 잘한 선택이었다고 하옐은 확신했다. 가난하게 자란 우리는 더 많이 성공해서 더 많이 행복해질 수 있으리라, 소년은 생각했다. 그것은 돈에 대한 윈터 블루밍의 강렬한 신념이 전염된 것이기도 했다.

*  *  *

다음 날 아침엔 눈보라가 그럭저럭 그쳤고, 보호받을 곳 일절 없던 능선도 끝나 끝없이 하늘로 솟은 나무숲으로 들어서게 되었다.

숲을 걷고 또 걸어가니 그 깊숙한 곳에 그들이 찾던 마을이 있었다.

라크라운드에서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머리에 작은 뿔이 난 사람들이 사는 마을이었다.

“……와, 진짜 뿔이 있어.”

“있다니까.”

“어떻게 아신 거예요?”

“열두 살에 왔었어. 길을 잃어서.”

“네, 네에? 여기를요? 누구랑요?”

“혼자.”

“혼자 어떻게 왔어요?”

“그땐 길에서 죽으나 여기서 죽으나 마찬가지였어.”

윈터가 담담히 대꾸했다. 두 사람이 걸어가자 어린아이들이 말똥말똥한 눈으로 그를 보며 무언가 말을 걸었다. 그러나 윈터도, 하옐도 그 말을 전혀 알아들을 수 없었다.

하옐이 소곤거렸다.

“뭐라는지 모르겠어요.”

“나도 몰라. 쟤네 언어겠지.”

두 사람이 계속 걸어가는데 아이들이 따라왔다.

안으로 계속 들어간 두 사람은 드디어 숲 한구석에서 윈터가 찾던 풀을 발견했다.

“이거야.”

“와…….”

하옐이 윈터가 말한 풀을 뜯어 킁킁 냄새를 맡아 보았다. 싸한 냄새가 났다.

그러자 옆에서 아이들이 틀렸다는 듯이 손을 마구 휘젓더니 주저앉아 풀을 헤집었다. 그러곤 그들이 뜯은 작은 풀이 아닌, 꽃까지 핀 큰 풀을 뜯어 내밀었다.

하옐이 그것을 받아서 아이들을 따라 입에 넣고 우물거리니 온몸에 느껴지던 근육통이 조금 가시는 게 느껴졌다. 하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지, 진짜로 근육통이 사라집니다!”

“그렇다니까.”

윈터가 만족스럽게 씨익 웃더니 가방을 열었다.

그리고 그 안에 들어가는 데까지 채워 온 색색으로 염색한 가는 실타래를 들어 보였다.

“이 약이랑 바꾸자.”

그러자 아이들의 눈이 한없이 커졌다.

이내 아이들은 잠깐 있어 보라고 손짓하고 실타래 하나와 풀 한 움큼을 뜯어 어디론가 달려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금방 마을 어른들이 모두 몰려 나왔다.

그제야 하옐이 둘러보니 마을 아이들은 짐승 가죽으로 만든 옷 위에 알록달록한색실로 만든 장식품을 달고 있었다. 그러나 염색 기술이 좋지는 않은지 다 흐릿한 색깔을 띠고 있었다. 라크라운드 수도에서 가져온 강렬한 색감의 실과는 아주 달랐다.

윈터가 말했다.

“이 사람들이 날 구해 줬는데, 내 옷을 바느질한 실에 엄청 관심을 가지더라고. 초록색 실이었거든.”

“그렇군요?”

“여긴 가는 실도, 염색약도 없는 모양이야.”

사람들이 실을 황홀한 표정으로 살펴보더니 이내 온몸으로 교환에 응하겠다는 표현을 했다. 그리고 두 사람을 데려다 따뜻한 불을 피운 곳에 앉히고 차와 먹을 것을 가져다주었다.

하옐이 드디어 석 달 만에 육포나, 육포 끓인 수프가 아닌 제대로 된 식사를 하며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그사이 아이 하나가 앞에 와서 앉더니 나뭇가지로 바닥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아이의 그림을 보니 저 풀을 뜯어서, 건조하고, 갈아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윈터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아이 머리통을 쓱쓱 문질러 주었다. 아이가 배시시 웃더니 말이 통하거나 말거나 이 두 이방인 사이를 비집고 앉았다.

하옐이 말했다.

“우리가 낯설 텐데도 되게 반겨 주네요.”

“어.”

윈터가 모처럼 보는 맑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그러니 여기가 있는 건 비밀이야.”

“인부들은 일부러 안 데려온 거군요?”

확실히 외부인이 들어와서 득 될 것 없는 마을로 보였다. 윈터의 어머니가 속한 카닉 일족처럼 이들도 하나의 일족이 여기에 모여 살고 있는 모양이었다.

하옐은 힐끔 윈터를 살폈다. 그는 성격이 못됐고, 돈을 벌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하는 사람이었으나, 나름으로 만들어 놓은 선이 있었다.

약재를 만드는 데 걸린 일주일이 지난 후, 두 사람은 가져온 실타래를 전부 꺼내고 대신 자루 가득 약재를 챙겨 다시 눈보라 치는 능선을 걸었다.

*  *  *

그들이 남은 여정을 마치고 라크라운드로 돌아왔을 땐 거의 반년이 지나 있었다. 그러나 약재를 팔고, 몇 번의 거래를 거친 그들의 손에는 고생한 보람 이상의 돈이 쥐어져 있었다.

그 돈을 은행에 넣고 나서, 두 사람은 수도의 숙박업소에 들어가 한동안 내리 먹고 자기만 했다.

그 후 두 사람은 드디어 블루밍 가문으로 돌아가기 위해 기차에 올랐다.

블루밍 가문에 가려면 기차를 두 시간 타고, 거기서부터 사흘 정도 마차를 타고 가야 했다.

창밖을 바라보던 하옐이 물었다.

“그나저나 귀족 도련님인데 반년씩 집에 안 가도 돼요?”

“우리 부모님은 그런 거 신경 안 써.”

하옐도 부모가 제대로 된 축은 아니었던지라, 그러려니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기차는 남부로 향하는 마지막 기차역에서 멈춰 서고 있었다.

기차에서 먼저 내린 하옐이 무언가를 발견하고 기겁해서 윈터를 불렀다.

“도련님! 도련님!”

“왜.”

뒤이어 느긋하게 내린 윈터가 짜증을 내다가 하옐이 가리킨 곳을 발견하고 눈이 커졌다. 그러더니 곧바로 지나가던 역무원을 불렀다.

“저기!”

그러자 역무원이 인상을 썼다.

잘 차려입은 이방인이 마음에 안 든 게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윈터가 다급하게 물었다.

“저기 선로가 연결돼?”

“그걸 네놈이 알아서 뭐 하게.”

“되냐고!”

성질 급한 윈터가 언성을 높이고 멱살을 움켜쥐었다. 그제야 겁을 먹은 역무원이 말했다.

“그, 그래! 지금 롱 리우드까지 가는 선로를 놓고 있지. 조만간 화물 기차가 다닌다더군…… 저, 저 망할 이방인이!”

윈터는 멱살을 놓자마자 신이 나서 무작정 선로를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하옐이 낑낑거리며 그 뒤를 따라 달려왔다.

어느 정도 달려가 선로 중간에서 멈춘 윈터가 말했다.

“나는 부자가 될 거야.”

그 말에 하옐이 숨이 차서 헉헉거리며 그의 뒷모습을 보았다.

윈터가 끝없이 펼쳐진 평야와 그 평야 끝으로 사라지는 선로를 바라보며 한 번 더 중얼거렸다.

“나는 이 대륙에서 가장 큰 부자가 될 거야. 그래서 다신, 누구도 날 보고 이방인이라 부르지 못하게 할 거야.”

그 말에 하옐이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부자가 되겠다고 말하는 열여덟 청년은 드물게 즐거워 보였다. 아마 그가 부자가되면, 그때가 되면 언제나 오늘 같은 즐거움을 느끼게 될 것이라.

하옐은 확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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