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171화 (외전 완) (171/176)
  • 외전 3-4(완)

    “벌써 우리 딸이 사고를 쳐서 학교에 오게 되다니.”

    윈터가 더없이 뿌듯한 얼굴로 학교를 바라보았다. 학교를 다니는지도 모르게 조용한 테오와 달리, 올리비아는 학교에 입학하자마자 폭풍을 몰고 다니고 있었다.

    윈터가 기분이 좋은 저와 달리 한숨을 쉬고 있는 바이올렛에게 핀잔했다.

    “테오가 당신 닮아서 지나치게 얌전한 거야. 입학식에 내가 폭죽을 터트렸다고 하루 종일 울상이었다고. 올리브를 봐. 자기 생일에 반 애들을 전부 호텔로 불러다 파티를 하는 애야.”

    “그게 자랑이에요?”

    “그럼. 한 명도 빼놓지 않고 챙기는 게 훌륭하잖아. 우리 딸은 뭐가 돼도 크게 될 거야.”

    바이올렛은 상상도 못 할 행동의 연속이었다. 교장실 문이 열리고, 윈터는 쌈박질을 해서 머리칼이 산발이 된 올리비아와 그 옆에 얼굴에 멍이 든 소년을 보았다.

    그 순간 표정이 싸늘해진 윈터가 소년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내 딸을 쳤어?”

    그의 살기에 소년이 움츠러들자 교장이 말했다.

    “그런 거 아닙니다. 올리비아 양이 일방적으로 폭력을 휘둘렀죠.”

    윈터가 내 천사 같은 딸이 주먹을 휘둘러 봐야 얼마나 휘둘렀겠냐고 말하려 하는데 바이올렛이 먼저 입을 열었다.

    “정말이니?”

    그러자 올리비아가 벌떡 일어서서, 바이올렛을 똑같이 닮아 사랑스럽기 그지없는 얼굴로 말했다.

    “제드가 나보고 고생 모르고 자란 부르주아라고!”

    그 말에 제드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틀린 말도 아니잖아.”

    그러자 올리비아가 윈터가 기가 찰 때 짓는 삐뚤어진 표정으로 코웃음 쳤다.

    “바보 아냐? 내가 어떻게 부르주아야? 우리 엄마 바이올렛 블루밍 로렌스야. 난 그냥 부자가 아니라 혈통 좋은 부자거든. 그러니까 부르주아가 아니지, 멍청아.”

    “뭐, 뭐? 그래서 때린 거였어?”

    “그럼. 틀렸으면 맞아 가며 배울 때도 있는 거지.”

    올리비아가 빈정거리며 2차전이 시작되려 하자, 먼저 온 제드의 부모와 인사를 나누던 바이올렛이 언성을 높였다.

    “올리비아 블루밍 로렌스!”

    “먼저 놀린 건 제드인데!”

    “그래서 폭력을 써도 된다고 누가 그랬니?”

    바이올렛의 서늘한 얼굴에 올리비아는 물론 교장실 안 모두가 움찔하며 입을 다물었다. 그녀가 교장을 보며 정중한 태도로 말했다.

    “처벌은 학교 측에서 결정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예? 아무리 그래도 올리비아 양에게 봉사 활동을 시키는 건…….”

    “좋습니다. 그렇게 하시지요.”

    그 말에 올리비아가 충격받은 표정을 지으며 바이올렛 앞으로 걸어가 그녀의 옷깃을 쥐고 물었다.

    “정말? 엄마는 내가 화단 가꾸기 같은 걸 해도 괜찮아?”

    “그건 나도 늘 하잖니.”

    “그, 그렇지만 올리브는 화단 가꾸기 안 좋아하는데?”

    올리비아가 뒤늦게 당황했는지 눈을 깜빡깜빡거리며 애교를 부렸다. 제 아버지를 닮아 위급할 땐 금방 애교를 떨고 마는 딸아이에게 바이올렛은 순간 넘어갈 뻔했으나, 눈을 질끈 감았다가 다시 뜨고 말했다.

    “그래도 해야지.”

    안 그래도 몰락한 귀족가 출신이라, 권력으로 보나 재력으로 보나 대륙 최고의 가문인 블루밍 로렌스가 아이와 아들이 싸움이 난 것에 겁을 내며 달려왔던 제드의 부모가 안도했다. 제드의 어머니가 교장에게 말했다.

    “먼저 시비를 건 것은 우리 아들이니, 제드에게도 같은 벌을 주시면 좋겠습니다.”

    양쪽 학부모가 저희 아이들에게 벌을 주라고 나서니 후폭풍을 걱정하던 교장의 얼굴이 한결 밝아졌다.

    “그럼 올리비아 양, 제드 군 둘 모두에게 봉사 활동 열 시간을 적용하겠어요. 주말에 화단을 가꾸러 나오세요.”

    교장의 결정이 끝나고 두 아이와 부모 모두 교장실을 나왔다. 바이올렛에게 한 소리를 더 듣고 난 올리비아가 불만 가득한 얼굴로 제드에게 걸어갔다.

    “제드.”

    “뭐.”

    제드가 움찔하며 묻자 올리비아가 말했다.

    “미안해.”

    “……나, 나도 미안.”

    “근데 너 나 좋아해?”

    올리비아의 말에 바이올렛이 충격으로 입이 열린 채 굳었다. 반면 윈터는 앞으로 10년은 뒤에나 겪고 싶었던 딸아이의 이성 문제에 표정이 굳었다.

    제드가 정색하며 되물었다.

    “왜,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혹시 좋아하면 좋아하지 말라고.”

    “어?”

    “나 올리비아 블루밍 로렌스야. 내가 나한테 시비 거는 애를 좋아하게 될 리가 없잖아. 너어무 잘해 줘도 거들떠볼까 말까 한데.”

    올리비아가 또박또박 말하더니 제드의 부모에게 공손히 인사를 하고 휙 돌아 바이올렛을 와락 끌어안았다.

    “사과했어! 엄마 이제 화 안 났지?”

    “응, 잘했구나…….”

    바이올렛이 충격받은 얼굴로 얼떨결에 대답하는 사이, 윈터가 올리비아를 안아 들었다.

    “자, 그럼 우리 딸. 내일은 아빠랑 봉사 활동 할 때 입을 옷 사러 갈까?”

    “화단에 심을 꽃도 사자. 이 기회에 학교에 제비꽃 심을래. 볼 때마다 엄마 생각나게.”

    “그래, 그래. 기특해라. 벌써 효녀야, 우리 딸.”

    윈터가 하늘의 별도 따다 줄 기세로 딸과 이야기하며 복도를 걸어갔다. 바이올렛이 제드의 부모에게 가볍게 눈인사를 하고 두 사람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세 사람은 자연스럽게 테오가 있는 학생회실로 향했다.

    왕립 학교는 각자 교복 외에도 200여 년 전 왕실 기사들이 입던 것과 같은 정복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을 특별한 행사 때 입곤 했는데, 오늘 회의가 중요한지 테오 역시 정복을 입고 있었다.

    올리비아가 말했다.

    “언니들이 다 오빠만 봐. 딴 사람들이 얘기하는데도.”

    그 말에 윈터가 혀를 차며 대꾸했다.

    “테오와 같은 학년 여학생들 성적이 떨어지면 우리 집에서 책임을 져야 할 지경이군.”

    그러더니 곧바로 아내를 보며 물었다.

    “당신도 저런 거 입었었어?”

    “물론이죠.”

    “그런데 왜 내가 산 그림 중에 없지? 누가 빼돌린 거 아냐?”

    “없는 모양이네요.”

    “잘하지도 못하는 거짓말 하지 마. 어디야. 당장 사람 보내게.”

    “그래서 안 돼요.”

    바이올렛이 거절하자 윈터가 이날을 위해 아껴 놓았던 무기를 꺼냈다.

    “기억이 나는군. 당신이 내 생일에 나에게 먹인 그 새카만 로스트 치킨.”

    “……학생회실 창고에 있을 거예요.”

    바이올렛이 마지못해 대답하자 윈터가 곧장 학생회실의 창고 문을 눈으로 확인했다. 학교 건물 하나 더 지어 주고 그림을 빼돌려야겠다고 계획을 세우고 있을 때, 가족을 발견한 테오가 반가워하며 잠시 학생회실을 나왔다.

    “벌써 오셨어요?”

    윈터가 대꾸했다.

    “올리비아가 작은 사고를 쳤어.”

    “맞아. 작은 사고였어.”

    올리비아가 맞장구쳤다. 테오는 걱정스러웠지만 이내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제 거의 마무리 중이에요.” 테오가 그렇게 말하고 들어가려는데 테오의 친구들로 보이는 사내아이 셋이 우르르 나와서 말했다.

    “테오 아버님! 저희 학년 연말 파티 아버님 호텔에서 하면 안 될까요!”

    “테오가 아버님께 여쭤보지도 못하게 합니다!”

    그러자 테오가 당황하며 친구들을 밀어 문 안으로 넣었다.

    “안 된다고 하잖아.”

    “왜 안 돼? 내 아들한테 내가 그 정도도 못 해?”

    윈터가 인상을 쓰자 바이올렛이 대신 대답했다.

    “호텔을 사적으로 이용하고 싶지 않은 거죠. 당연히.”

    “꽉 막혔군, 우리 공주님 닮아서.”

    그의 말에 바이올렛이 흘겨보자, 윈터가 금방 아내 쪽으로 관심을 뺏겼다가 그녀가 테오를 보라고 눈짓하고 나서야 다시 정신을 차렸다.

    “수도 호텔을 써. 이벤트 홀을 빌려줄 테니까. 비용은 내가 내지.”

    그 말에 기겁한 아이들이 물었다.

    “예? 테, 테오 아버님께서 전부 다 내신다고요?”

    “꼬마들이 써야 뭘 얼마나 써.”

    윈터가 핀잔했다. 테오는 안절부절못하면서도 친구들의 환호와 함께 다시 학생회실로 돌아갔다. 잠시 후 테오의 입에서 연말 파티를 수도 카닉 호텔에서 하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나오자마자 학생들이 환호했다.

    연말 파티 장소가 정해지고, 비용까지 생겼으니 학생들의 회의는 오히려 길어졌다. 한참이 지나 회의가 끝나고 테오가 나왔다.

    학교 건물을 나서며 바이올렛이 손을 내밀자 테오가 배시시 웃으며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 테오의 다른 손은 올리비아가, 아이의 다른 손은 윈터가 잡았다.

    네 사람이 교정에 나서니 아까부터 내리던 눈이 그새 쌓여 있었다. 가족들은 곧바로 개방한 왕성 건물 중 하나인 라크라운드 미술관으로 향했다.

    이제 막 문을 여는 미술관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북적거리고 있었고, 바이올렛의 가족들이 나타나자 환호하며 그들을 맞아 주었다.

    테오가 부모님을 얌전히 따라다니며 소개해 주는 어른들에게 공손히 인사를 하는 사이, 올리비아는 또래 친구들과 빠르게 사귀어 까르륵까르륵거리며 눈밭을 뛰어다녔다.

    그런 딸아이를 보며 별수 없이 웃던 바이올렛이 테오의 등을 떠밀었다.

    “테오도 나가서 놀아.”

    “전 이제 열 살이니까 이따가 놀아도 돼요!”

    “이따가 부를 테니 놀고 있으렴.”

    바이올렛의 말에 안 그래도 놀고 싶어 하던 테오가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이고 제 쪽으로 달려오는 학교 친구들과 함께 눈밭으로 나갔다.

    그사이 따듯한 와인을 두 잔 가져와 한 잔을 아내에게 건넨 윈터가 기막혀하며 바이올렛에게 물었다.

    “저 녀석들은 오늘이 얼마나 중요한 날인지 모르는 거지?”

    “그렇게 중요한 날도 아닌걸요.”

    “하긴, 애들이 뭘 알겠어.”

    윈터가 웃어 버리고는 커다란 액자가 걸린 위를 바라보았다. 그곳엔 역대 라크라운드의 왕의 초상화가 있었고, 마지막에 하얀 천으로 덮인 액자가 있었다.

    액자에 달린 줄을 누군가가 끌어당겨 천을 벗기자 바이올렛의 초상화가 드러났다. 그리고 그 아래, 의원 중 하나가 명패를 박아 걸었다. 그곳에는 라크라운드의 마지막 왕이라는 문구와 함께 바이올렛의 이름이 적혀 있었고, 즉위 기간이 0일이라고 되어 있었다.

    바이올렛이 웃으며 말했다.

    “즉위 기간이 0일이라니. 재미있는 기획이었어요.”

    “기획이라니. 라크라운드 사람들은 당신을 사랑하고, 의회 입장에서 앞으로도 툭하면 당신한테 대외 업무 해 달라고 징징거려야 하는데, 당신이 하도 고집부리니까 어떻게든 이름만 올리려고 겨우 타협 본 거 아냐.”

    “아닌 건 아닌 거니까.”

    “그래, 그래. 당신이 심각한 고집쟁이인 것까지 사랑하지, 내가.”

    윈터가 놀리듯 말하자 바이올렛은 웃음이 터졌다. 그리고 제 명패 아래 적힌 문구들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이제 정말로 완벽히, 왕정은 끝났군요.”

    “당신이 깔끔하게 마무리해 주신 덕이지.”

    “‘깔끔하게’ 마무리된 건 당신 덕이죠.”

    윈터는 아내의 손을 잡아 손등에 몇 번이고 입을 맞추며 말했다.

    “그럼 우리가 잘한 걸로 해.”

    “좋은 결론이군요.”

    “내가 사랑한다고 말했나?”

    “하루도 빼놓지 않고 매일.”

    “내가 당신을 얼마나 많이 사랑하면 그러겠어, 우리 공주님.”

    윈터의 능청에 바이올렛이 다시 웃음을 터트리고 대답했다.

    “나도 사랑해요.”

    그녀의 말에 윈터는 마치 사랑한다는 말을 처음 듣기라도 한 사람처럼 들뜬 표정을 지었다.

    행사가 끝나 파티가 시작되자, 바이올렛은 축하 인사를 하러 오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였다. 동시에 그 와중에도 어떻게든 사업 이야기를 하려는 사람들에게 적당히 대꾸해 주던 윈터는 문득 바이올렛을 바라보았다. 바이올렛은 커다란 눈사람을 만드느라 여념이 없는 테오와 올리비아를 창문을 통해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얼마 안 가 그녀가 다시 축하 인사를 받아 주느라 사람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윈터는 아내가 저와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사실에 행복해하며 바이올렛에게 다가갔다.

    “잠깐 시간 좀 내줘.”

    그러자 이야기하던 귀부인들이 그를 흘기며 말했다.

    “온종일 붙어 계셔 놓고 또 부인을 어디로 데려가려고요?”

    “맞아요! 한창 재미있었는데.”

    한 소리 듣고도 윈터는 태연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제가 원래 아내 없으면 죽는다고 소문 다 났을 텐데요? 사람 살리는 셈 칩시다.”

    윈터가 태연히 말하고는 바이올렛의 손을 잡아끌고 문으로 향했다. 바이올렛이 겨우 빠져나와 윈터에게 소곤거렸다.

    “고마워요.”

    “빨리 우리 꼬마들이랑 놀자.”

    바이올렛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부부가 미술관 밖으로 나오자 올리비아가 신이 나서 앞으로 달려가 팔짝거리고 뛰었다.

    “우리 눈사람 크게 만들자! 엄청 크게!”

    “안 그래도 그러려고 나왔지.”

    윈터가 대답하더니 이미 큼지막하게 만들어진 눈덩이를 굴리기 시작했다. 테오가 옆에서 같이 또 하나의 눈덩이를 굴리며 말했다.

    “집에 가면 오늘도 코코아 해 주세요.”

    “아, 나도!”

    올리비아가 신나서 말을 덧붙이자 바이올렛이 즐겁게 말했다.

    “당신이 만든 코코아를 좋아하는 건 온 가족이 똑같네요.”

    “그래 보이는군. 그보다 바이올렛, 당신도 와서 눈사람 만드는 데 참여해야 코코아가 더 맛있게 느껴질걸?”

    “맞는 말이군요.”

    바이올렛이 동의하곤 웃으며 올리비아의 손을 잡고 눈사람을 만들기 위해 걸어갔다.

    -fin.

    < 당신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