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170화 (170/176)

외전 3-3

두 아이 다 어머니에게 줄 선물을 사서 나서는데 테오가 소녀에게 작은 상자 하나를 더 내밀었다.

“이건 선물. 네 거야.”

“이게 뭐야?”

샬롯이 질문과 동시에 상자를 열어 보니 향수병 모양의 브로치가 들어 있었다. 이 향수 가게의 시그니처 향수를 본뜬 것이었다. 샬롯이 얼굴이 환해져서 말했다.

“정말 예뻐. 고마워.”

“나야말로 고마워.”

“학교 갈 때 하고 갈 거야!”

샬롯이 장담하자 테오가 안심해서 눈웃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얼마 안 가 호텔 로비에서 바이올렛 부부를 발견한 테오가 자리에 멈춰 섰다.

부모님이 직원에게 제 행방을 묻고 있음을 어렴풋이 깨달은 테오가 서둘러 선물 상자를 등 뒤로 숨겼다.

집에서 볼 때는 몰랐는데, 밖에서 보니 제 부모는 압도적인 분위기를 풍겼다. 모든 사람들이 제 부모를 몰래 살피는 것이 느껴졌다.

테오는 자라서 제 부모를 객관적으로 보게 될수록 그들에게 제가 부족해 보이지 않을까, 하는 걱정에 휩싸였다. 그때 옆에 있던 샬롯이 말했다.

“테오는 부모님과 정말 닮았구나?”

“응? 아, 응. 아버지를…….”

“얼굴은 아버지랑 똑같고, 웃을 땐 어머니랑 똑같은 것 같아.”

샬롯의 말에 테오가 조금 자신이 생겨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테오의 부모가 두 아이에게로 다가왔다. 곤히 잠든 올리비아를 안아 들고 있던 윈터가 인상을 썼다.

“무슨 일이지? 올리브는 몰라도 넌 말없이 집을 나갈 녀석이 아닌데.”

“죄송해요.”

테오가 어쩔 줄 몰라 하며 대답했다.

열 살이 되도록 거의 혼낼 일이 없던 아이기는 하지만 질문 좀 한다고 이렇게 주눅 들 만큼 약한 아이도 아니었다. 윈터가 인상을 쓰더니 올리비아를 옆에 있던 직원에게 잠깐 맡기고, 아이의 앞에 무릎을 꿇어 올려다보았다.

“테오.”

“네.”

“화내는 거 아니야. 그런 표정 짓지 마.”

그러자 테오가 윈터를 보았다. 제 아들의 표정을 확인한 윈터가 한동안 눌러뒀던 날 것의 분노를 내비쳤다.

“무슨 일 있었어, 내 아들?”

그러자 뒤에 있던 샬롯이 얼른 무언가를 말하려다가, 저도 모르게 바이올렛의 눈치를 보더니 치마를 잡아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그 모습에 테오의 표정을 보고 다물렸던 바이올렛의 입꼬리가 의식적으로 올라갔다.

“편하게 대해 주렴. 무슨 일이니?”

“그게요! 아까 향수 가게를 갔는데, 거기 있던 가게 주인이 저 회색 눈이라고 못 들어오게 했어요!”

“……그랬니?”

“안에 테오가 있었는데 그거 듣고…… 괜찮아 보였는데 테오도 속상했던 거지?”

샬롯이 묻자 테오가 머뭇거리다가 곧 고개를 조금 끄덕였다. 그 이야기에 윈터도, 바이올렛도 표정이 굳었다.

윈터가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잠깐 여기 있어, 다녀올게.”

그의 말에 바이올렛이 미소로 대답을 대신하고, 아이들에게 말했다.

“그럼 온 김에 차라도 한 잔 마시고 갈까? 테오의 친구는 이름이…….”

바이올렛의 질문에 테오가 금방 기쁜 표정으로 대답했다.

“바이올렛인데, 보통 중간 이름인 샬롯을 쓴대요.”

“어머, 정말이니?”

바이올렛이 놀라자 샬롯이 대답했다.

“우리 부모님 아세요? 칼리본에 살고요, 엄마 이름은 낸시예요. 아빠 이름은 루토고요!”

“아…….”

바이올렛이 저도 모르게 샬롯을 꼭 끌어안았다.

“그럼, 당연히 알지. 네 첫 번째 생일에 칼리본에 가서 직접 얼굴도 봤었단다.”

“우와, 정말요? 거짓말인 줄 알았어요!”

“정말이야. 너의 어머니가 얼마나 멋진 사람이었는지. 칼리본에 사고가 났을 때 마지막까지 힘을 내서 사고를 알렸고, 그곳에서도 늘 다른 사람을 도와줬어. 너의 아버지는 마지막 사람들이 다 나가는 걸 보고 나서야 자기도 밖으로 나오겠다고 했지. 너희 어머니가 안전하다는 걸 듣고서야 정신을 잃더구나.”

바이올렛의 이야기에 샬롯의 얼굴에 자랑스러움이 가득 찼다. 샬롯이 바이올렛의 손을 당기며 말했다.

“더 얘기해 주세요!”

“그럴까?”

바이올렛이 즐거워하며 두 아이를 데리고 빈 객실로 향했다. 그리고 마음 편히 잠든 올리비아를 침대에 눕혀 주고 즐거운 티타임을 보냈다. 그사이 바이올렛의 연락을 받은 낸시가 샬롯을 찾으러 도착했다.

그녀는 도착한 김에 함께 차를 마시며 바이올렛에게 이것저것 칼리본 이야기를 해 주었다.

얼마 전 광산이 폐쇄되었으나 학교와 기차역이 생긴 덕에, 혼혈 아이가 있는 카닉 일족과 일족이 아닌 다양한 사람들도 이주해 와 북적거리는 활기찬 마을이 되었다고 했다. 샬롯은 카닉사에서 만든 장학금 제도를 이용해 수도로 데려왔다고 했다.

바이올렛은 이게 다 공주님 덕이라는 낸시의 호들갑을 말리며 티타임을 즐기다가 드문드문 테오와 샬롯의 얼굴을 살폈다. 이번만큼은 남편이 욱하는 걸 조금도 막고 싶지 않았다.

*

테오가 태어난 이후부터 윈터는 상당히 많이 성격을 누그러뜨렸다.

그러나 단 한 가지, 이전보다 더 크게 화내는 부분이 회색 눈에 대한 차별이었다.

저야 뭐 어떻게 대우받든지 큰 상관이 없었으나 제 아들은 아니었다. 테오는 아주 조금의 차별도 받아서는 안 되었다. 방금 본 테오의 주눅 든 표정을 떠올린 윈터는 분노가 온몸을 휘감아 소리 내어 웃기까지 했다.

“감히 내 아들 듣는 곳에서 그딴 소리를 지껄여?”

그러자 하옐이 서류를 확인 중인 카닉사 직원을 힐끔 보았다가 윈터에게 말했다.

“몰랐겠죠, 설마하니 대표님까지 등장하실 줄은.”

맹수의 새끼도 어릴 때는 귀여우니까, 라고 하옐은 속으로만 생각했다. 테오는 누구에게나 다정다감하고 사랑스러운 소년이니 순간 우습게 여길 수도 있었으리라. 그 뒤에 있는 저 거대한 짐승이 와서 물어뜯으리라고는 생각 못 했을 것이다.

서류를 확인한 직원이 말했다.

“네, 서류에 전혀 문제없습니다. 저 건물은 이제 대표님 겁니다.”

그러자 윈터가 하옐에게 말했다.

“가서 알려 줘.”

“뭐라고요?”

“나가라고.”

윈터가 당연한 걸 뭘 묻냐는 듯 대꾸했다. 그는 할 일이 끝나 다시 호텔 방향으로 몸을 돌렸고, 하옐은 얼떨떨해하는 직원을 다독여 가게로 향했다. 이제 저 상인은 수도는커녕 라크라운드에서도 장사를 하기 어려울 것이었다. 평소라면 말렸겠지만, 솔직히 하옐 역시 테오에게 상처를 준 자를 그대로 놔두고 싶지 않았다.

*

윈터가 호텔 객실에 들어서 보니 시간이 늦어 바이올렛이 잠옷 차림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아내에게 쪽 입을 맞춘 윈터가 물었다.

“애들은?”

“샬롯은 아이 부모가 데려갔고, 우리 아이들은 자고 있어요. 일은요?”

“잘 끝내고 왔어.”

곧 두 사람은 아이들이 잠들어 있는 침대로 향했다.

테오와 올리비아는 한 침대 위에 곤히 잠들어 있었다. 저희 성격이라도 보이려는 듯 올리비아는 두 팔을 넓게 벌려 태평하게 자고 있었고, 테오는 올리비아 쪽으로 몸을 기울여 얌전한 자세로 잠들어 있었다.

윈터가 흐뭇하게 제 아이들을 바라보다가 바이올렛의 귀에 속삭였다.

“내 가족을 건드리는 놈들은 절대 가만두지 않을 거야.”

“나도 그래요.”

“그래서. 테오는 뭘 사 왔어?”

“향수요. 재스민으로.”

“이 꼬맹이들 서로 짜고 왔나 보군.”

“그런가 봐요.”

바이올렛이 즐겁게 웃더니 다시 걸어가 벗어 두었던 화관을 머리에 쓰고, 테오가 사 온 향수를 손목과 목에 조금씩 발랐다. 그러더니 윈터의 앞에 서서 물었다.

“향기 좋죠?”

고개를 들고 묻고는 대답을 기다리는데, 윈터가 몸을 숙이더니 그녀에게 입을 맞췄다. 그녀의 몸이 뒤로 밀리지 않게 허리를 두 손으로 감싸 잡고 진하게 입을 맞추고 난 윈터가 입술이 닿은 채로 대답했다.

“천사 같아.”

“향기 좋냐니까…….”

“솔직히 난 당신이 무슨 향수를 쓰든 안 쓰든 다 좋아. 뭐, 우리 아들이 사 온 거니 개중엔 좋겠지만.”

“정말이지.”

윈터가 바이올렛을 훌쩍 안아 들었다. 그러곤 다른 한 손으로 아이들이 잠든 침실 문을 닫으며 다른 침실로 향했다. 바이올렛이 침실 문을 잠그는 윈터의 목을 끌어안으며 물었다.

“올해 생일에도 아침 식사 만들어 줄 거예요?”

“당연하지.”

“저녁에는 데이트를 하고?”

“응, 저녁에는 데이트를 하고.”

“그리고 밤에는…….”

“여기서 자자. 엘라 부인께 아이들 맡기고.”

엘라는 1년에 한 번, 딸아이 생일이면 제 집에서 자고 가는 손주들을 연중 최고의 행복으로 여겼다. 그리고 아이들을 데리러 온 바이올렛 부부와 아침 식사를 했다.

그것이 엘라와 사적으로 만나는 전부였으나, 그녀는 그것만으로도 만족했다.

윈터는 제가 씻는 동안도 바이올렛과 떨어져 있는 게 싫어 그녀를 욕실로 데려가서는 거기 놓인 의자에 앉혀 두고 옷을 벗기 시작했다.

바이올렛은 한심하다는 듯 한숨을 쉬었으나, 시선으로는 그의 몸을 천천히 살폈다. 역삼각형으로 떨어지는 뒷모습에 근육이 탄탄히 들어선 엉덩이와 제 허리만 한 허벅지는 아무리 봐도 질리질 않았다.

윈터가 커튼이 둘러진 욕조 안으로 들어가며 말했다.

“들어와.”

“난 목욕했어요.”

“또 해. 내가 씻겨 줄게.”

“글쎄…….”

바이올렛이 말끝을 흐리는데 물기에 흠뻑 젖은 윈터가 걸어오더니 젖은 몸으로 아내를 안아 들었다. 바이올렛은 옷이 젖는다고 한 소리 하면서도 그가 잠옷 채로 저를 욕조에 끌고 들어가는 것을 내버려 두었다.

윈터가 다시 제 체구에 비해 작은 욕조에 몸을 구기고 반쯤 드러누워서 제 배 위에 앉힌 아내의 잠옷에 따듯한 물을 끼얹어 흠뻑 적시며 말했다.

“우리 공주님은 화나도 내 몸 보면 풀리지?”

“자만하는군요.”

“자만하다니. 내가 당신 눈에 예쁘려고 얼마나 운동을 하는지 알아?”

“음…….”

“됐다는 말은 안 하는군. 그래, 앞으로도 쭉 노력할 테니까 쭉 예뻐하기나 해.”

윈터가 능청을 떨자 바이올렛이 즐겁게 웃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

바이올렛의 생일은 올해도 성대하게 치러졌다. 바이올렛은 도대체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 이해를 못 했지만, 윈터는 매해 아내의 생일이면 신문에 광고를 내고 카닉 호텔 모든 지점에 아내의 생일을 기념하는 특별 메뉴를 만들어 내놓았다.

바이올렛은 남편의 어린 시절이 마음에 남아 있어 보육원에 유난히 많은 관심을 기울였는데, 윈터는 제가 무슨 과한 행사를 하든 아내가 잔소리할 수 없도록 동시에 막대한 돈을 아내 이름으로 세워진 보육원들에 기부했다.

그해 겨울, 바이올렛은 저녁 파티에 가기 위해 일찌감치 격식 있는 드레스를 차려입었다. 학교에 들러 두 아이를 데리고 가야 했고, 준비할 것들도 있었다.

아침부터 준비를 시작했는데, 점심시간이 지나서까지 그것이 끝나질 않았다. 바이올렛이 드레스에 떨어지지 않게 조심해서 비스킷을 먹고는 다소 지친 얼굴로 젠을 보았다.

“젠, 오늘은 평소보다 좀 더…… 음, 신경을 많이 쓰는 것 같네.”

그녀가 이건 너무하는 거 아닌가 하는 마음을 꾹꾹 누르고 돌려 말하자 젠이 되레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오늘 행사는 정말, 정말 중요한 행사란 말이에요! 더 일찍 일어났어야 하는데! 마님께서 아침잠이 많으신 바람에! 시간이 모자라요!”

“그건 고맙지만 이제 슬슬…….”

“조, 조금만 더 시간을 주세요!”

젠이 억울한 표정으로 붙잡는데 문이 벌컥 열렸다. 문 앞에 선 윈터가 살짝 들뜬 표정을 지으며 날아온 전신을 흔들었다.

“바이올렛, 우리 딸이.”

“우리 딸이?”

바이올렛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묻자 윈터가 기가 차 웃으며 말했다.

“같은 반 녀석이랑 싸웠대.”

“……뭐라고요?”

“다친 곳은 없다니 걱정 마. 역시 내 딸이군. 우리 딸이 더 많이 때렸…….”

태연하게 말하던 윈터는 저와 달리 한없이 복잡해지는 바이올렛의 표정을 보다 슬슬 말끝을 흐리다가 냉큼 말을 바꿨다.

“을 리 없지. 사고를 치다니, 이 녀석. 혼나야겠어.”

윈터가 그리 말하더니 아내의 손을 잡아 일으켰다. 바이올렛은 소중한 걸 뺏긴 표정의 젠을 미안한 듯 돌아보긴 했으나, 올리비아가 사고를 쳤다니 정신이 없어 뭐라 말도 건네지 못하고 급하게 마차로 향했다.

당신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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