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3-2
부부는 일곱 살 난 딸아이가 가는 방향으로 먼저 이동했다.
테오조차도 모르고 있지만 두 아이의 경호는 지나칠 정도로 철저했다. 세계 재벌인 윈터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행동이었다.
레클 강 주변에서 한 달에 한 번씩 서는 라크라운드에서 가장 큰 시장의 입구에 도착하자, 윈터가 망원경을 꺼내 들었다.
“저기 있네.”
그가 확인한 후 바이올렛에게 건네주자, 그녀가 남편이 왜 망원경을 들고 다니는 건가 의아해하며 시장을 보았다. 그런데 웬만한 사람들보다 목 하나가 큰 윈터와 달리 바이올렛의 시야에는 딸이 보이지 않았다.
“안 보이는…… 위, 윈터!”
윈터가 바이올렛을 안아 들어 주자 그녀가 당황하면서도 망원경으로 올리비아를 찾았다.
그제야 샛노란 가방을 메고 당당하게 걷는 올리비아와 그 뒤에 모른 척 따라 걷는 경호원들이 보였다.
바이올렛은 병아리 같은 딸이 귀여워 당장 달려가 끌어안아 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우리 딸은 어쩜 저렇게 귀여울까.”
바이올렛이 혼잣말하자 그녀를 내려 준 윈터가 물었다.
“찾으러 갈까?”
“음, 생각하는 바가 있어서 모험 중인 것 같네요.”
“좀 놔두고 미행해?”
윈터가 묻자 바이올렛이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이 살금살금 딸아이를 따라가 보니, 주변은 보지도 않고 꿋꿋하게 직진만 하던 올리비아가 멈춰 서서 꽃가게를 보고 있었다. 올리비아는 가방끈을 꼭 쥐고 도중에 들켜 주고 딱 달라붙어 호위하던 프란에게 말했다.
“꽃 살 거야.”
“꽃이요?”
“응. 엄마는 나랑 꽃을 제일 좋아해.”
올리비아가 제 노란 배낭을 열더니 꼼꼼하게 접은 5라크네 지폐를 꺼냈다. 망원경으로 그걸 살핀 바이올렛이 표정을 찡그리고는 윈터를 흘기며 물었다.
“올리브한테 지폐가 왜 있을까? 용돈은 매주 동전으로만 주는데.”
그러자 윈터가 움찔하며 시선을 피했다.
“아니, 우리 딸이 너무 귀엽잖아…….”
“그렇다고 일곱 살짜리 애한테 저렇게 큰 돈을 줘요?”
“올리브가 까치발 들고 두 손 내밀면 뭘 사 달라고 해도 거절을 못 한다니까? 애초에 내 딸한테 일주일에 1라크네라니 너무 적잖아. 저 꼬마가 신탁에서 돈을 꺼내 쓸 줄 아는 것도 아니고…….”
윈터가 열심히 변명하는 사이, 올리비아가 꽃집으로 들어가 제 키보다 높은 계산대를 향해 힘껏 팔을 뻗었다.
“안녕하세요. 화이트 재스민 주세요! 그리고 이거 만들어주세요!”
아이가 지폐와 함께 준 그림을 받아든 직원이 계산대에 엎드리다시피 해 몸을 내밀었다. 그녀는 올리비아가 귀여워 함박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이렇게 예쁜 걸 직접 그렸어요, 꼬마 아가씨?”
“네! 엄마 줄 거예요!”
올리비아가 해맑게 하는 말이 가게 밖까지 들려서, 밖에 서 있던 바이올렛이 두 손을 가슴에 올리고 감동한 표정을 지었다.
한참 뒤 직원이 준비해 준 꽃과 거스름돈을 받아 들고 신나서 꽃집을 나선 올리비아는 문밖에 서 있는 부모를 발견하고 입이 크게 열려 신나게 달려갔다.
“엄마랑 아빠다!”
윈터가 달려온 올리비아를 훌쩍 안아 들었다.
“이 녀석, 말도 없이 집을 나가면 어떡해?”
“이거 사러 나왔는데?”
올리비아가 재스민을 베이스로 아름답게 엮은 화관을 두 손으로 쥐고 눈을 깜빡깜빡거리자 윈터가 전혀 화를 못 내고 사르륵 녹아서 말했다.
“그랬어? 잘했네.”
“윈터.”
“그래도 앞으로 절대 그러면 안 돼.”
바이올렛이 혼내듯 이름을 부르자마자 윈터가 단호하게 혼을 냈다. 그러나 전혀 통하질 않아서, 올리비아는 헤헤 웃으며 바이올렛에게 화관을 내밀었다.
“엄마 생일 선물이야. 시들까 봐 빨리 주려고 했는데 잘 왔네.”
올리비아가 어른 같은 말씨를 쓰자 바이올렛도, 윈터도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바이올렛이 씌워 달라는 듯 머리를 가까이 해 주자 올리비아가 조심조심 화관을 올려 주었다. 바이올렛이 행복한 표정을 지으며 윈터에게 물었다.
“어때요?”
“환상적이야.”
윈터가 진심으로 대답하곤 올리비아에게 말했다.
“어떻게 저런 선물을 줄 생각을 했어? 우리 딸은 정말 똑똑하네.”
“아빠도 눈치챘구나? 올리브 똑똑한 거.”
올리비아가 어깨를 으쓱으쓱하더니 배시시 웃었다.
“이제 꽃은 내가 살 거니까 아빠는 사면 안 돼. 알지?”
“그래, 그래. 우리 딸 하고 싶은 대로 해.”
윈터가 대답하는데 바이올렛이 살짝 인상 쓰는 시늉을 해 보이며 말했다.
“하지만 자꾸 몰래 용돈 주고 하면 안 돼요. 너도 달라고 하지 말고, 올리비아.”
그녀의 말에 윈터가 뭐라 말하려 하자 올리비아가 바이올렛 몰래 어깨를 톡 때리고는 순순히 대답했다.
“응, 이제 아빠가 줘도 싫다고 할게!”
올리비아의 대답에 바이올렛이 미소 지으며 딸아이 뺨을 두 손으로 감싸 이마에 쪽 입을 맞췄다. 그러곤 화관이 정말로 마음에 들었는지 꽃집 유리창에 비친 제 모습을 이리저리 살피며 행복한 얼굴을 했다.
“우리 올리브 정말 대단하구나. 너무 예뻐. 고마워.”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올리비아가 윈터에게 소곤거렸다.
“일단 알겠다고 하고 몰래 줘야지!”
“……우리 딸 아빠 닮았구나?”
“응. 하옐이 그랬는데 올리브는 성격이 아빠 닮았대.”
“어떻게 우리 딸한테 그렇게 심한 말을…….”
무심코 성질을 내려 했던 윈터가 고개를 갸우뚱하는 올리브를 보고 슬며시 웃어 보이며 말했다.
“꽃 좋아하는 거랑 얼굴은 바이올렛을 쏙 빼닮았어.”
“그러니까. 그건 엄마랑 똑같아.”
윈터의 서재에는 그가 멋대로 돈을 얹어 주고 강탈해 온 바이올렛의 초상화들이 걸려 있었다. 올리비아는 그중에서도 지금 제 또래의 바이올렛을 그린, 교복을 입고 있는 초상화를 유난히 좋아해 종종 그 앞에서 똑같이 근엄한 자세를 취해 보이곤 했다.
실컷 행복한 선물을 감상하고 난 바이올렛이 손짓했다.
“자, 이제 테오 데리러 가요.”
*
부모님께 말을 하지 않고 외출을 한 건 테오 블루밍 로렌스 인생 처음이었다.
자식에 대한 윈터의 과보호는 정말 심각한 수준이라,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까지 갈 때 마차가 흔들리면 안 된다며 새로 길을 깔았다. 거기에다 도대체 학교에 얼마를 지원한 건지 테오가 교장실을 딱 한 번 찾아갔을 땐 대체 무슨 일이냐며 사색이 되어 달려 나왔었다.
아무튼 그런 게 아니더라도, 올해로 열 살의 테오는 이미 수려한 외모와 반듯한 태도로 학교에서 모든 여학생들의 관심을 독차지하고 있었다.
알린이 부모 손을 잡고 가다 말고 넋 놓고 테오를 돌아보는 꼬마 아가씨들의 시선에 킥킥 웃으며 소년을 놀렸다.
“이야, 우리 도련님 열 살부터 벌써 이렇게 인기가 많아서 어떡합니까? 나중에 어른 되면 아가씨들 피해 다녀야겠는데요?”
“과장하지 마, 알린. 그 정도는 아니야.”
“그 정도예요. 솔직히 다들 도련님 얼굴만 봐도 저렇게 홀리는데, 도련님에 대해서 더 잘 알고 나면 상사병에 걸리게 될걸요?”
기회만 있으면 제 도련님에 대해서 자랑을 늘어놓기 바쁜 알린에게 익숙해진 테오가 말없이 웃고는 제 어머니에게 배운 단정한 자세로 걸음을 옮겼다.
리스트를 미리 써 오긴 했지만 자신이 없었다. 역시 직접 봐야 할 것 같아 모든 가게를 꼼꼼하게 들어가 살폈다.
리스트에 향수가 있어 가까운 향수 가게에 들어섰던 테오는 입구에서 다툼이 일어나자 무심코 고개를 돌렸다.
“네까짓 이방인이 들어올 곳이 아니라니까!”
“저 애도 회색 눈인데 왜 안 된다는 건데요!”
“저분은 카닉사 대표님의 아드님이시라고. 돈이 있으시단 얘기지. 너 같은 게 동일시할 분이 아니야.”
그 모습에 테오가 문 쪽으로 향했다. 그러고는 카닉 일족의 아이를 가로막고 서 있는 가게 주인을 보았다.
소년이 가게 주인을 향해 입을 열었다.
“나 들으라고 하는 말인가?”
“예, 예?”
“내게 카닉 일족의 피가 흐른다는 걸 알면서 내가 보는 앞에서 저 손님을 막아서는 건, 나에게도 들으란 걸로 들리네.”
“그, 그런 거 아닙니다, 도련님! 그렇게 느끼셨으면 제가 무릎을!”
“이미 자네가 날 우습게 여기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무릎을 꿇은들 그게 진심으로 보일까.”
두 걸음 뒤에 서 있던 알린은 제 도련님이 저런 서늘한 분위기를 낼 수 있다는 사실에 감격했다. 테오가 곧이어 입구에 서 있는 또래 여자아이에게 말했다.
“같이 갈래? 수도 호텔 안에 다른 향수 가게가 있어.”
“어? 저, 정말요?”
“편하게 말해도 돼. 우리 학교 상급생이지?”
“응? 나 알아?”
“알아. 우리 어머니와 이름이 같아서.”
테오의 말에 여자아이가 크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가게 주인에게 혀를 날름 내밀어 놀리고, 곧장 테오를 따라나섰다.
수도 호텔 방향으로 향하기 전, 테오가 자리에 멈춰 서더니 한 손을 가슴에 얹고 정중하게 말했다.
“내 이름은 테오 블루밍 로렌스야.”
어린 신사의 인사에 순간 얼굴이 빨개져 테오를 보고 있던 소녀가 얼른 정신을 차리고 인사했다.
“우리 학교에 널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어. 아, 그리고 내 이름은 바이올렛인데 다들 미들 네임인 샬롯을 써. 공주님 이름이라서 부담스럽대.”
“그렇구나. 나도 우리 어머니 성함이니 샬롯이라고 부르는 게 편할 것 같아.”
샬롯이 뒷짐을 지고 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사실 내 이름은 너희 어머니 성함을 딴 거야.”
“그래?”
테오가 그건 몰랐는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자 샬롯이 말을 이었다.
“내가 태어나기 전에, 우리 아빠가 광산에 매몰된 적이 있었대. 그때 바이올렛 공주님이 오셔서 마을 사람들을 구해 주셨어. 그 직후에 엄마가 임신을 해서 내 이름을 바이올렛이라고 지었대.”
“그렇구나.”
테오가 여전히 미소 띤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을 이었다.
“그럼 샬롯도 내가 태어날 무렵에 몸이 아팠겠네.”
“맞아! 그때 마을 사람들이 다 같이 감기에 걸렸어. 나도 그렇고. 엄마가 그러는데, 우리가 공주님의 아픔을 조금씩 나눠 가진 거랬어. 아기가 무사히 태어날 수 있게.”
“……응.”
테오의 대답이 느려지자 샬롯이 눈이 동그래져서 소년을 돌아보며 말했다.
“그 후엔 공주님 부부가 고맙다면서 우리 마을에 학교를 지어 주셨고, 아직까지도 학비가 전액 무료야.”
“고마워.”
“뭐가?”
“내 대신 아파 줘서.”
테오의 말에 샬롯이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에이, 공주님이 아니었으면 난 태어나지도 못했는걸. 그보다 너 정말로 그렇게 부자야? 다들 엄청 궁금해하던데. 너 입학할 때 요트로 레클 강 항해하면서 폭죽 터트린 거 정말 너희 아버지가 하신 거야?”
“……응.”
그날, 테오는 요트에 제 이름이 있다며 수치스러워하던 어머니의 마음을 십분 이해했다. 그나마 저는 좀 낫지, 올리비아가 입학할 땐 비행선에 현수막을 걸었다. 올리비아가 신나서 좋아했으므로 바이올렛도 그것을 말리지 못했었다.
샬롯이 중얼거렸다.
“정말 부자구나…….”
“그런가. 난 평생 우리 집에서만 살아서 특별히 모르겠어.”
“매일 고기 먹을 수 있어?”
“아, 집에 목장이 있어.”
“세상에, 너 정말 부자구나! 집도 막 다섯 채씩 있어?”
“그게, 우리 집은 그다지 집이 많을 필요가 없어서…….”
“왜에?”
샬롯이 의아해서 고개를 갸우뚱하는데, 테오를 발견하자마자 호텔 직원들이 사색이 되어 달려왔다.
“저 사람들 왜 다 달려와? 아, 그러고 보니까 여긴 왜 카닉 호텔이지? 우리 일족이랑 관계가 있나?”
“아, 그, 그게…….”
차마 저것도 아버지 거라 대답하기 곤란해 테오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그런 소년의 속도 모르고 달려온 직원들이 다급하게 물었다.
“도, 도련님! 무,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계신 곳으로 마차를 부르시지, 이 험한 길을 걸어오신 겁니까?”
“어서 들어오십시오! 식사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모두의 호들갑에 샬롯이 안절부절못하고 울상이 되었다. 테오는 귀가 빨개졌지만, 곧 침착한 태도로 어른들을 달랬다.
“그저 산책 중에 향수 가게에 가 볼까, 갑자기 마음먹은 겁니다. 연락 없이 찾아와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도련님! 당연히 연락 없이 오셔도 되지요!”
“맞습니다! 대표님이 오신 것도 아니고, 도련님이 오신 건데요! 자주 오세요!”
예상 못 한 호들갑에 샬롯이 돈이 든 작은 동전 지갑을 끌어안았다. 그러자 테오가 바로 소녀 쪽으로 몸을 돌려 돌아섰다.
“에스코트해도 될까?”
그리고 정중히 손을 내밀자 얼굴이 확 빨개진 샬롯이 고개를 여러 번 끄덕이고는 손을 마주 잡았다. 두 아이가 향수 가게로 향하는 사랑스러운 모습은 모든 직원들의 하루 피로가 날아가게 했다.
당신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