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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167화 (167/176)

외전 2-2

바이올렛 로렌스가 배에 탈 거라는 소식을 들은 이후부터 윈터는 내내 표정이 구겨져 있었다. 주머니에 손을 꽂은 그가 툴툴거렸다.

“그 공주님은 또 무슨 바람이 불어서 대륙을 이동하겠다는 거야?”

그러자 옆에 서서 꼼꼼하게 의전을 확인하던 하옐이 말했다.

“아직 라크라운드에 채무가 남아서 돈 빌리러 가신다잖아요.”

“밑도 끝도 없이 돈 빌려 달라는 공주님한테 퍽이나 빌려주겠군. 뭐, 또 모르지. 높으신 분들 입맛엔 맞을지도.”

크루즈 앞에 선 윈터가 연신 투덜거리는 사이, 저 멀리서 왕실 사람들이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로렌스가의 문장이 있는 마차를 하얀 말들이 이끌고 근처에 다가오자 하옐이 말했다.

“이번엔 웬일로 의전을 다 확인하시는 겁니까?”

“닥쳐.”

윈터가 위협적으로 잘라 말하고 가까운 곳에서 멈춘 마차를 보았다. 곧이어 그곳에서 바이올렛이 내렸다.

그녀가 다가와 앞에 서자 윈터가 태연히 먼저 입을 열었다.

“또 보네, 공주님.”

그의 무례한 태도에 바이올렛이 입을 열지 않고 빤히 윈터를 보았다. 하옐이 옆에서 한숨을 쉬는 것을 못 본 체하며 윈터가 다시 입을 열었다.

“전에 하누스에 호텔을 짓는 걸 허가받아 준 덕분에 큰 은혜와 손해를 입었어. 아주 똑똑하고 못된 공주님이더군.”

그녀에게 무례하게 굴어 왕실 소속 기사 몇이 앞서 나오려 하자, 바이올렛이 미소로 제지하고 다시 윈터를 보았다.

“정말 무례하시군요. 허가받지 못할 땅을 산 건 본인이었잖아요.”

“그렇게 도와주고 지분을 뜯어 갔잖아.”

“나라를 위해 소중하게 썼어요. 어디에 그 돈이 들어갔는지도 다 적어 드렸고.”

“어쨌든 내 입장에선 강탈당한 기분이야. 아무튼 그래서. 빚이 얼마나 남았는데 그렇게 대륙을 건너까지 구걸을 하러 가시나?”

“1천5백만 라크네가 남았어요. 그리고 구걸이 아니라 협력을 구하러 가는 거예요.”

윈터는 또박또박 대답하는 공주님에게 재미를 느꼈다. 그녀는 염치없게도 정말, 여러 번 윈터를 찾아왔다. 그렇게 두 번, 세 번 마주치고 나서 알게 된 것은 라크라운드에 정말로 나라 빚을 해결하려고 뛰어다니는 사람은 여기 이 공주님밖에 없다는 사실이었다.

그걸 알게 되니 그녀가 뻔뻔하지만 성실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솔직히 말해서, 그랬기 때문에 호텔 허가도 제 선에서 불법적으로 해결할 수 있었을 것을 공연히 그녀에게 맡겼던 걸지도 몰랐다.

“그렇게 도와줬는데 겨우 그거 갚았어?”

“힘들었어요.”

“뭐, 1천5백만 라크네라. 얼마 되지도 않네.”

“……당신에게나 그렇죠.”

윈터가 비웃듯이 키득거렸다.

그 정도면 그가 스물두세 살쯤에 모았던 돈과 비슷했다. 올해로 스물일곱이 되는, 살면서 단 한 번도 실패를 경험해 보지 않은 그에게는 만만한 돈이었다.

바이올렛이 돌아서서 먼저 크루즈에 올라섰다. 그녀의 한 걸음 뒤에 섰던 윈터의 미간이 조금 좁아졌다. 그녀가 입고 있는 드레스 밑단이 심하게 해져 있었다.

공주님이 험한 길을 걸어오지도 않았을 텐데 왜 이런가, 생각하면서도 윈터는 걸음을 옮겨 바이올렛이 머물 방을 안내했다. 크루즈 최고의 스위트룸을 왕족을 위해 제공하기로 했다. 귀족이라면 덮어 놓고 싫어하는 윈터로서는 굉장히 신선한 결정이었다.

바이올렛은 크루즈 스위트룸을 놀란 눈으로 돌아보았다.

“배 위에…… 이렇게 좋은 객실이 있는 줄 몰랐어요.”

“…….”

윈터가 대답이 없어, 바이올렛이 그를 돌아보았다. 그런데 윈터가 문을 잠그고 있는 것이 아닌가.

바이올렛은 어느 정도 윈터 블루밍에 대해 알고 있다 여겼으므로, 할 말이 있는 모양이라 여기고 윈터를 바라보았다. 그가 바이올렛의 코앞까지 다가와 말했다.

“소매 뒤집어 봐.”

“왜죠?”

“뒤집어. 내가 억지로 하기 전에.”

윈터의 날 선 목소리에 바이올렛이 그를 노려보면서도 제 소매를 뒤집어 보였다. 그 소매 안에 남의 이름이 자수로 적혀 있었다.

“남이 입던 거잖아.”

“그래서요.”

“세상에 어느 공주님이 중고로 드레스를 사!”

“어떻게 알았어요?”

“밑단이 다 해져 있으니까. 당신이 진흙탕을 걷진 않았을 거 아냐. 이건 야외에서 실컷 파티를 즐기고 난 옷이잖아.”

“눈썰미가 좋네요.”

“안 팔아 본 게 없으니까.”

윈터가 골치 아픈 표정을 지었다. 바이올렛은 소매를 다시 정리하며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당신 말대로, 구걸하러 가는 사람이 새 옷을 입는 것도 이상하죠.”

“협력을 구하러 가는데 중고 드레스를 입고 가는 건 정말 무례한 거 아닌가? 하누스 왕실을 우습게 보는 거야?”

“……남들은 당신만큼 눈썰미가 좋지 않아요.”

바이올렛이 조금 당황한 목소리로 말했다. 윈터가 신경질적인 얼굴로 혀를 찼다.

“배에 여분 드레스가 있으니 가져오게 하지.”

“왜 그런 게 있어요? 아…….”

“애인 거 아니야.”

“그럼요?”

“갑판에 나갔다가 바람이 불거나 크루즈가 좀 흔들려서 와인을 쏟는 경우가 드문드문 있더군. 여분이 없는 귀족들에게 판매하려고.”

“그렇군요.”

바이올렛이 신기한지 고개를 끄덕이고 가만히 윈터를 바라보고 있었다.

윈터는 처음 그녀를 만나던 날부터 이런 묘한 기분에 휩싸이곤 했다.

몇 번 더 만나고 나서, 이제 와 생각해 보니 성욕 같았다. 저 단정하고 성실한 공주님을 그리 멀지도 않은 침대에 짓누르고 싶었다.

차라리 성욕뿐이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1천5백만 라크네는 지금 윈터 블루밍에게 사실 그렇게 큰 돈이 아니었다. 제가 가진 많은 호텔 중 두 개 정도 처분하면 충분히 나올 돈이었다. 아니, 거기까지 가지 않아도 제 자산 일부를 떼면 만들 수 있을 돈이었다.

문제는 그것이다. 이 공주님만 보면, 공연히 제가 큰 손해를 보는 가정을 하게 되는 것이다.

바이올렛은 아까부터 저를 잡아먹을 듯 바라보는 윈터의 회색 눈동자를 관찰하듯 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그녀가 물었다.

“화가 났나요?”

“뭐가.”

“내가 염치가 없어서.”

“그거야 당연히 화가 나지.”

“그럼 사과할게요.”

“…….”

“사과로 될 일이 아니었나요?”

그녀의 입술이 움직일 때마다 윈터는 알 수 없는 감정에 휘말렸다. 머릿속이 어지럽고, 토할 것같이 화가 치민다.

“내 부모에게 결국은 한 소리 했더군. 날 버릇없이 키웠다고.”

“그렇게까지 말한 건 아니지만…… 그것도 사과할게요. 미안해요.”

뒤집으면 남의 이름이 나오는 소매처럼, 그녀의 속도 뒤집으면 타인으로 가득 차 있으리라. 제 인생은 어디로 사라지고, 눈앞의 여자는 천하디천한 저에게 몇 번이고 사과를 하고 있었다.

윈터가 담담한 얼굴로 말했다.

“키스하면 대가를 줄게.”

“……뭐라고요?”

“입맞춤 한 번이면, 당신이 원하는 만큼 돈을 주지. 어때?”

저런 여자는 단절해 버리는 게 상책이다.

미쳐서, 제가 미쳐서 저런 여자를 사랑하게 되기라도 하면 제 손해였다. 어차피 저런 공주님이 미천한 저를 좋아해 주지도 않을 텐데. 아니, 같은 인간으로 보이기나 할까.

윈터가 하는 말을 듣고 있던 바이올렛의 담담하던 얼굴이 서서히 틀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녀의 떨리는 손이 세게 윈터의 뺨을 때렸다.

그러더니 왈칵, 울음이 터졌다. 윈터는 예상대로 못 견뎌 상처를 드러내는 바이올렛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 말도 없이, 울고 있는 여자는 남자를 노려보고, 남자는 여자를 바라보았다. 한참이 지나 윈터가 체념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냥 가져가.”

“…….”

“하누스에 가서는 식사나 대접받아. 그리고 돈은 나한테서 가져가.”

윈터가 여전히 눈물에 젖어 있는 바이올렛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나 아무래도 당신 좋아하는 것 같아.”

“…….”

“그래서 그래. 개 같지만 아마도. 최소한 입맞춤이라도 받아 볼까, 했지. 그래도 큰돈 나갈 테니까.”

그러자 바이올렛이 겨우 입을 열어 물었다.

“내가 좋은데 왜 당신은 그렇게…… 나쁜 말만 하는 거죠?”

“방금 말했잖아. 어차피 걷어차일 거, 입맞춤이라도 받고 싶었다고.”

“나도 당신을 좋아할 수도 있잖아요.”

“당신이 이런 미천한 놈을 왜 좋아하겠어. 손님에게 의자도 내줄 줄 모르는데.”

“벌써 3년 전 일인데요.”

“당신을 3년이나 알았나.”

말을 마친 윈터가 방을 나가려고 하는데 바이올렛이 팔을 붙잡아 윈터를 다시 제 쪽으로 돌렸다. 그러자 윈터가 혀를 차며 말했다.

“차였어도 돈은 준다니까…….”

그의 말이 도중에 끊기고, 그 위에 보드랍고 달짝지근한 입술이 닿았다. 그리고 바로 떨어지려 하기에 윈터가 바이올렛의 허리를 한 팔로 감아 끌어안고 다시 입술을 눌렀다. 바이올렛이 놀라서 그의 어깨를 할퀴었으나, 윈터는 신경 쓰지 않고 그녀의 입술을 아프지 않게 깨물었다가 혀를 밀어 열고 자그마한 치열을 쓸었다.

처음엔 어쩔 줄 몰라 하던 바이올렛의 두 손이 점점 윈터의 목을 끌어안았다. 이성이 사라진 윈터의 손이 그녀의 허리며 배, 가슴까지 올라가려는 순간 바이올렛이 확 그를 밀쳤다.

윈터가 짧고 더운 숨을 끊어 쉬며, 두 손으로 스스로의 입을 틀어막아 버린 바이올렛에게 물었다.

“무슨 짓이지?”

“미안해요.”

바이올렛이 난감한 표정을 짓더니 말을 이었다.

“당신이 입 맞추고 싶다고 해서…… 동의를 구한 거라고 생각했어요.”

“당신이 내 동의를 왜 구해? 그게 무슨 소리지?”

“난 처음부터. 만약에…… 결혼으로 돈을 구할 수 있다면 당신과 결혼하고 싶었어요.”

“……뭐?”

“당신 말대로 다른 사람과 결혼하면 쉬웠겠죠. 그런데 당신 아니면 안 될 것 같은데, 당신은 청혼하질 않으니까.”

바이올렛이 3년이나 머뭇거린 제가 답답해 다소 언성을 높였다. 그녀의 말을 멍하니 듣고 있던 윈터의 얼굴이 이해를 얻은 어느 순간 확 새빨개졌다. 그가 부끄러움을 억누르느라 괜히 목소리가 커져서 말했다.

“누가 공주님 아니랄까 봐. 자기가 먼저 청혼할 생각은 못 하나?”

“그럼 돈 때문이라고 생각했을 거 아니에요?”

바이올렛의 말이 맞았으므로, 윈터가 더 이상 멋쩍음을 감추지 못하고 물었다.

“그거야…… 그런데. 아니, 그보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네? 내가 좋아?”

“좋아요.”

“제정신이야?”

“그러는 당신은요?”

“제정신이 아니니 감히 공주님을 좋아하는 거지.”

“그럼 나도 제정신이 아닌 모양이죠.”

그렇게 대답한 바이올렛이 그의 뺨으로 손을 뻗었다. 그 순간 윈터의 표정이 구겨지자 바이올렛이 손을 다시 내리며 물었다.

“아파요?”

“엄살떨고 싶어.”

“안 아프군요.”

바이올렛이 안도했다. 그런데 방금 바이올렛이 손을 내린 게 거슬린 듯, 윈터가 제 뺨을 만지라는 것처럼 몸을 숙였다.

바이올렛은 다시 조심스럽게 손을 들어 그의 뺨을 감싸 보았다. 그러자 윈터가 입꼬리를 올리며 웃어서, 바이올렛이 저도 모르게 따라 웃었다.

세상에 이렇게 불안정한 남자는 없다고 생각했는데 왜인지, 그녀는 지금 커다란 안정감과 행복을 느꼈다.

그가 그런 표정이라 그런 모양이다.

당신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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