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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166화 (166/176)

외전 2-1

외전 2 IF 연애결혼

윈터는 기가 찬 표정으로 대표실이 떠나가게 웃은 후, 의자에 삐딱하게 기대앉아 문 가까이에 서 있는 공주님을 바라보고 있었다.

“공주님, 나라가 나한테 해 준 게 없는데 내가 왜 돈을 내야 합니까?”

“반드시 갚겠습니다. 어떻게든.”

“웃기지도 않네.”

윈터는 비꼬았으나, 바이올렛 로렌스는 표정 하나도 바뀌지 않았다.

그 모습이 윈터는 아까부터 상당히 신기했었다. 천한 이방인 사업가가 10분 넘게 비웃고 조롱하는데도 저 여자는 내내 담담하기만 했다. 그저 꾸준하고 성실하게 설득을 하고 있을 뿐.

저 공주님이 이곳에 직접 행차하시기 전, 부대표이며 명문가에서 태어난 안잘리가 말했었다. 공주가 왕성으로 부르지 않고 직접 행차한다는 것 자체가 그녀 입장에서는 굉장히 숙이고 들어오는 일이라고. 그러니 왕족을 집무실에서 맞아서는 안 되고, 차를 준비해야 하며, 기본적인 예의를 갖춰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귀족들의 생활과는 거리가 멀게 자라 온 윈터 입장에서는 제가 왜 돈 빌리러 온 사람에게 그렇게 대우를 해 줘야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으므로 모든 것을 생략했다.

바이올렛은 달밤에 어울리는 조용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지금 갚지 않으면 빚이 더 늘어나기만 할 겁니다. 일단은 나라가 파산하는 것을 막아야 사업도 편안한 마음으로 하실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거 좋은 정보네. 이민을 준비해야겠군.”

윈터는 빈정거렸으나, 동시에 그녀가 요구한 돈을 빌려주면 그녀에게 받아 낼 수 있는 게 무엇인가 머리도 굴렸다.

왕실이 해체되고, 빚은 왕실이 아닌 나라의 것이 되었다. 그 책임을 져야 할 왕위 계승자 에쉬 로렌스는 망명해 버렸고, 모든 책임은 바이올렛 로렌스에게 쏟아졌다.

이민을 준비하겠다는 말을 듣고 아마 피신한 제 오빠를 떠올렸을 것이다. 그 덕에 잠시 대답이 없는 바이올렛을 바라보던 윈터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얼굴도 반반한데 결혼이라도 하지 그러십니까? 돈 많은 놈이랑.”

“그럴 생각입니다. 일단 혼자 있을 때 일부라도 갚고…….”

“……그럴 생각이라니?”

그때 모처럼 윈터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돈을 받고 결혼했다가 무슨 꼴을 당하려고?”

“본인도 제안해 놓고 날 비난하는 건 무슨 경우인가요?”

바이올렛이 의아해하며 되물었다. 그러자 윈터가 책상을 주먹으로 쾅 내리쳤다.

“비꼰 거잖아!”

“말을 높여 주세요, 윈터 블루밍 공자.”

“아이고, 이걸 어쩌나. 내가 천하게 자란 천것이라 말 높이는 법을 모르는데.”

윈터가 몸을 일으켜 제 쪽으로 걸어오자, 바이올렛의 어깨가 조금 떨렸다. 나름 제가 손님이라 생각해 호위도 건물 앞에 떼어 놓고 들어와 있었으나, 그녀도 두렵지 않아 이렇게 당당한 것은 아니었다.

앉아 있을 때도 체구가 커보이던 그가 바로 앞으로 다가오니 위압감이 느껴졌다. 저를 한 팔로 번쩍 들어 올릴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연신 귀찮게 굴어 어떻게 되는 것 아닌가, 바이올렛이 생각했다. 윈터는 겁을 줘서 그만두게 할 요량이었으므로 그녀가 물러서는 것을 눈으로 보면서도 다가가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바이올렛의 등이 문에 닿자, 윈터가 가까이에 고개를 기울이고 서서 입을 열었다.

“대가를 가져오셔야지. 빌어먹을 애국심에 호소하려 들지 말고. 아니면 애초에 본인 스스로를 대가로 내놓은 건가?”

“…….”

“알긴 아는 모양이군. 본인이 상품성이 있다는 걸.”

이쯤하면 포기하겠지. 윈터는 제가 드리운 그림자 속으로 들어가 버린 바이올렛의 푸른 눈동자를 노려보며 생각했다.

그녀가 여기 들어오는 순간부터 심장이 멎을 것 같았다. 기분이 들쑥날쑥했다. 입을 열기 시작하니 더 미칠 것 같아서 당장 쫓아내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세상에 뭐 이렇게 아무것도 모르는 공주님이 다 있나. 흔들림 없이 제 책임을 다하려는 이 여자를 마주 보고 있으려니 당분간 여기 가둬 놔야겠다는 생각이 엄습했다. 쓸데없이 위험한 짓 좀 안 하게.

그가 그런 생각을 할 때, 바이올렛의 연한 붉은빛의 입술이 열렸다.

“사람은 상품이 될 수 없어요.”

“……뭐?”

“그리고 사람에게 천하다고 말하는 거 아니에요.”

“…….”

“…….”

“말 다 했어?”

“다 했어요.”

윈터가 헛웃음을 짓더니 뒤로 두 걸음을 물러났다. 그러지 않으면 그녀에게 해코지라도 할 것 같았다. 감정만으로 이렇게, 몸에서 괴로워할 정도로 어지러운 기분이 들 수가 있나.

겁을 주면 겁을 내긴 하는데 제 할 말은 다 해 버리고, 조롱하려고 했는데 비참해하지 않는다. 그는 생전, 이런 사람을 처음 보았다.

윈터는 그대로 돌아서서 제 수표책을 꺼내 숫자를 휘갈겨 적은 후 뜯어서 바이올렛의 손에 쥐여 준 뒤 문을 열고 그녀를 밀어냈다.

“받고 꺼져. 다신 오지 마.”

“잠깐…….”

바이올렛이 문을 잡아 보려 했으나, 윈터는 그대로 문을 닫아 버렸다.

*

복도에 선 바이올렛은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쓰러질 것 같았으나 가까스로 몸을 꼿꼿하게 세웠다.

사람들이 윈터 블루밍은 미치광이라고 했다. 천한 데다 길들여지지 않은 짐승과 같다고 했다. 실제로 만난 그는 소문 이상으로 사나웠으나, 소문으로는 결코 담아낼 수 없는 강렬한 매력이 있었다.

“대가를 가져오셔야지. 빌어먹을 애국심에 호소하려 들지 말고. 아니면 애초에 본인 스스로를 대가로 내놓은 건가?”

바이올렛은 그의 표현이 머리가 빙빙 돌 만큼 끔찍했으나, 놀랍지는 않았다. 다른 귀족들도 돌려 말해서 그렇지 결국 의미는 같지 않았던가. 결혼해서 혈통 좋은 아이를 낳으라는 말. 그럼 생각해 보겠다는 말.

특히 노골적으로 그것을 내비치는 것은 그녀의 친구인 칼슨의 가문인 로우가였다. 그들은 현재 비어 있는 것이나 다름없는 왕좌를 제 둘째 아들에게 넘기려는 야욕을 태연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바이올렛이 윈터가 쥐여 준 수표를 펼쳐 보았다.

다시 찾아가지 않는 대가라고 하기엔 너무 큰 돈이었다. 요즘 경제 공부를 하며 여기저기 뛰어다니며 알게 된 바로, 서너 층짜리 건물 두어 개는 너끈히 살 돈이었다.

바이올렛은 저를 보던 윈터 블루밍의 눈빛을 생각했다. 저와의 결혼에 가치를 매기고 있었던 게 분명했다. 만약 정말로 그와 결혼을 하게 된다면 얼마를 받을 수 있을까.

그녀는 사람에게 가치를 매기는 사람이 아니었지만, 정략결혼에 있어서는 익숙했다. 사업적인 합병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은 책임을 떠맡았고, 그러니 해결을 해야만 했다.

그녀가 생각에 잠겨 복도를 걷고 있을 때 맞은편에서 누군가가 바이올렛을 발견하고 걸어왔다. 윈터 블루밍의 동생이자 블루밍가의 후계자인 디에브 블루밍이었다.

“바이올렛 왕녀님, 오신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그 형과 달리, 여러 번 마주쳤던 디에브 블루밍의 얼굴에 바이올렛의 표정이 빠르게 굳어졌다. 디에브가 제 형의 집무실을 보고는 곧 부드러운 얼굴로 말했다.

“저런 이방인에게 도움을 얻어야 할 정도로 어려우신 모양이군요.”

“형님 되시는 분을 그렇게 표현하는 건 예의가 아닙니다.”

“전 그렇게 생각 안 하니까요. 천한 일족일 뿐이죠.”

바이올렛이 뭐라 더 말하려는데, 디에브가 끊고 말을 이었다.

“쉬운 방법도 말씀드렸잖습니까. 결혼.”

“생각해 보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만.”

바이올렛은 한 걸음 가까워지는 디에브의 행동에 입을 다물었다.

이상하지. 방금 전 윈터 블루밍도 이런 태도였는데, 아까와는 기분이 달랐다. 아까는 압도적인 상대에 대한 두려움이었고, 지금은 너무도 기분이 나빴다.

디에브가 허리를 숙이자 바이올렛이 마지못해 손을 내밀었다. 디에브가 그녀의 손을 움켜쥐어 입을 맞추었다. 바이올렛이 손을 빼내려 했으나 그는 놓아주지 않고 입을 열었다

“다른 가문에서 내 봤자 얼마나 내겠어요. 하지만 블루밍가는 상당 부분 갚아 드릴 수 있습니다.”

“놓으세요.”

“대답을 듣고 싶은데요. 이제. 생각해 보겠다고만 하고 있잖아요.”

“이렇게…… 마음대로 행동하시니까 생각이 길어지는 거지요.”

“왕녀님께서 저를 등지시면, 남부 워호슨 전체를 등지게 되시는 겁니다. 아시잖아요? 애초에 나라에 빚이 생긴 것도, 저희 워호슨 눈 밖에 났기 때문인 거.”

바이올렛이 힘주어 제 손을 빼내려 애썼다. 그러나 디에브가 놓아주지 않아 그녀가 언성을 높였다.

“놓으라고 하잖아요!”

그 순간 쾅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바이올렛이 놀란 얼굴로 돌아보니 인상을 쓴 윈터 블루밍이 보였다. 가까이로 걸어온 그가 디에브를 떼어 냈다.

“미친 새끼.”

윈터가 주먹을 쥐어 그대로 디에브의 머리통을 갈겼다. 디에브가 비명을 지르고 머리를 손으로 감싼 후에도 한 대를 더 치려 하는데 바이올렛이 기겁해서 그의 팔을 잡았다.

“뭐, 뭐 하는 거예요!”

“그냥 패고 싶어서 패는 거고, 이 새끼한테는 깽값 줄 테니까 끼어들지 마.”

“그만해요!”

바이올렛이 간절하게 말리자 윈터가 기가 찬 얼굴로 주먹을 폈다. 그리고 뇌진탕이 올 정도의 충격에 비틀거리는 디에브를 노려보며 말했다.

“당장 꺼져.”

“부모님께서…… 가만히 계실 것 같아?”

디에브가 한 손으로 맞은 곳을 감싸며 말하자 윈터가 태연히 대꾸했다.

“부모님께도 아쉽지 않으실 만큼 돈 챙겨 드릴 테니까 염려 말고 의사나 찾아가지 그래. 여기서 죽고 싶지 않으면.”

디에브는 싸움으로는 절대 상대가 되지 않을 걸 알았기 때문에 심호흡을 하며 분노를 가라앉히고 휙 돌아섰다. 윈터가 친 사고를 수습하려 비서실에 있던 하옐이 달려와 디에브를 부축해 떠났다. 그 모습을 끝까지 바라본 윈터가 바이올렛 쪽으로 돌아서며 말했다.

“지금부터 내 말 가만히 듣고 있어.”

바이올렛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말을 이었다.

“돈 벌고 싶으면 내가 시키는 대로 해. 내가 아까 준 돈, 그대로 가지고 가서 북동부 송로를 사. 싹 다. 보통은 한 가문이 1kg 이상 못 사게 되어 있지만 당신은 공주님이니까 법을 뜯어 고쳐서라도 독점해.”

“…….”

“올해 북서부 송로는 이미 몽땅 다른 나라로 밀수출해서 북서부 송로 나오는 시기엔 매물이 하나도 없을 거야. 그때 귀족들에게 열 배든 백 배든 받고 싶은 대로 받고 팔아. 알겠어?”

“…….”

“알겠냐고!”

바이올렛이 멈칫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불안한 듯 제 팔을 꽉 붙들고 있는 윈터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물었다.

“그 다음에는요?”

“뭘 그 다음까지 생각해?”

“당신에게 찾아와서 물어봐도 돼요?”

“염치도 없군.”

“그러게요. 원랜 이 정도로 염치없는 사람이 아니었는데…….”

바이올렛이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도무지 견디기 힘든 하루였는지 그 말을 끝으로 한 걸음 떼기도 전에 쓰러지려 해, 기겁한 윈터가 바이올렛을 부축했다. 그러다 이내 그녀를 들쳐 어깨에 얹고 제 집무실로 들어가 소파에 눕혔다.

“이럴 줄 알았지. 딱 봐도 몸이 안 좋은데 왜 내내 앉지도 않고 서 있었어? 자존심 세우는 건가, 그 와중에?”

윈터가 이제야 아까 답답해하던 것을 묻자 바이올렛이 눈을 둥그렇게 뜨며 말했다.

“당신이 의자를 내주지 않았잖아요.”

“그게 뭐?”

“당신이…….”

윈터가 그 말에 미간을 좁히고 물었다.

“그러니까. 내가 의자를 내주지 않아서 서 있었던 거야? 여기 널린 게 의자인데?”

“신사라면 응당 그래야죠.”

“아주 심각하게 귀족짓을 하는 공주님이군.”

“왕족이에요.”

“손님이 무슨 죄인이야? 앉으라고 안 하면 못 앉아?”

“인사도 안 한다고 누구 하나 죽는 건 아니죠. 예의니까 하는 거지.”

“망할 예의를 왜 나에게서 찾지?”

“당신은 블루밍 공작가의 장남이잖아요. 당신이 신사적으로 행동하길 바라는 게 잘못된 건가요?”

“이방인이잖아.”

“그래서요?”

바이올렛이 이해가 안 간다는 듯 되물었다.

그 고지식한 눈빛에 윈터가 혀를 차고 욕설을 내뱉은 후 말했다.

“그러니까 내가 의자를 내줬어야 한다고?”

“질문인가요, 비꼬는 건가요?”

“질문이야. 난 그런 예의를 배운 적이 없으니까.”

“왜죠?”

“기회가 없었어.”

“말도 안 되는 소리예요. 당신의 부모는 블루밍 공작 부부잖아요. 당연히 당신에게 예법을 가르쳤어야 했어요. 그건 부모의 의무이고, 당신의 권리예요.”

바이올렛이 인상을 쓰고 말하더니 곧 납득이 안 간다는 듯 말을 이었다.

“당신의 부모에게 편지를 적어야겠네요.”

“왜.”

“왜 예법을 가르치지 않았는지 알아야겠으니까.”

“친자식이 아니어서 그랬겠지.”

윈터의 퉁명스러운 대답에 바이올렛이 정색했다.

“그걸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건가요?”

“오히려 그걸 당연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을 처음 봐서 놀랍군.”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는 바이올렛 로렌스의 푸르른 눈동자가 윈터의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쉬어. 내가 나갈 테니까.”

윈터는 그대로 집무실을 나가 쾅 소리가 나게 문을 닫아 버렸다.

“망할 공주님.”

윈터는 아까부터 장기가 너도나도 펄떡거리는 것이, 저 염치없는 공주님 때문에 화가 나서라 여겼다.

앞으로는 마주치지도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당신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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