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165화 (165/176)
  • 외전 1-5

    다음 해 봄, 에쉬의 결혼식이 있었다.

    에쉬는 사색이 되어 결혼식을 치렀고, 레위 가문의 분위기는 영 좋지 않았다.

    레위 가문의 가주, 허셔 레위는 굳은 얼굴로 윈터에게 악수를 청했으나 그는 무시했다. 결국 허셔는 제 인사를 거부하지 않을 바이올렛에게 고개를 숙였고, 이어서 그녀가 악수를 청했다.

    그녀가 내민 손을 잡은 허셔가 말했다.

    “카닉사에 폐를 끼쳤군요.”

    “의도하신 일이니 예법 어긴 정도라는 듯이 무마하시려 들면 안 됩니다.”

    대대로 거구인 레위 가문의 가주는 곰처럼 커다란 덩치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 허셔 앞에 선 마님이 걱정스러웠던 카닉사 직원들이며 경호원들이 하나씩 걸어와 그녀를 에워쌌다.

    허셔는 그녀를 따르는 자들에게 위협을 느끼며 입을 열었다.

    “제 딸이 국외 추방을 당하게 할 순 없으니, 충분히 배상금을 드리지요.”

    “그건 남편과 이야기하세요.”

    “아니요, 부인과 할 이야기입니다. 알고 계시겠지만 이제 곧 오라버니 되는 분께서 우리 가문에 데릴사위로 오게 될 텐데…… 아무래도 배상금은 신랑과 신부가 가문에서 나눠 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 말에 잠시 바이올렛이 대답이 없자, 허셔가 기회를 잡았다는 듯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앞으로 우리에게 이익이 없다면 이 결혼은 사기 결혼이나 다름없지요. 부인께서도 그게 얼마나 상대 가문을 화나게 하는지 경험하셨잖습니까.”

    “그렇게 되었군요.”

    바이올렛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옆에서 가급적 아내의 말에 끼어들지 않으려 할 말을 참던 윈터가 결국 입을 열었다.

    “그 자식이야 댁에서 죽이든 살리든 우리 알 바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경, 이게 무슨 무례입니까.”

    “무례 좋아하네.”

    윈터가 인상을 쓰고 말을 이었다.

    “사기 결혼이라니. 이건 경우가 다르지. 그쪽은 에쉬 그 망할 놈이 되도 않는 허풍을 떤 거고, 우리 공주님…… 아니, 내 아내분은 진심으로 이 결혼에 임했어. 그 계약을 깼던 것 역시 에쉬였지. 나도, 그쪽도 사기 결혼이라고 생각해야 한다면 그 원흉이 에쉬 로렌스여야 한다고. 어디서 내 아내를 끌어들여?”

    “흠.”

    “그리고 내가 무례를 저질렀으면 내 아내가 먼저 말했어. 그쪽이 내 아내보다 예법을 잘 아나?”

    윈터가 핀잔했다. 바이올렛은 별말 없이 웃고는 허셔에게 말했다.

    “말씀해 주신 것처럼 상대 가문을 화나게 하는 결혼이라는 게 쉬운 일은 아니지요.”

    “예, 잘 아실 테지요.”

    “하지만 방금 남편 말대로, 자기가 저지른 일이니 자기가 감내해야지요.”

    “부인.”

    “그리고 이제 에쉬는 로렌스가 사람이 아니라 레위 가문 사람입니다.”

    “…….”

    “어르든 달래든, 귀댁에서 하실 일이지 저에게 물으실 일이 아닙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데릴사위로 데려가시니 에쉬가 잘못을 한다면, 귀댁에서 부끄러워하실 일이 되겠지요.”

    바이올렛의 단정하고 정중한 목소리 속에서 느껴지는 비꼼에 허셔의 얼굴이 벌게지기 시작했다. 허셔가 기존에 알고 있던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그저 왕실 법도를 베이스로 해 만든 인형 같던 바이올렛 로렌스가 아니었다. 그녀는 로렌스가의 가주였고, 사업가의 아내였다.

    바이올렛은 부드러운 태도로 인사하고 몸을 돌렸다. 그녀의 인사를 기다리는 하객들이 많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윈터는 아내가 너무나 사랑스러워 바이올렛의 손을 두 손으로 감싸 잡고 손바닥이며 손가락에 몇 번이고 입을 맞추고 에쉬와 허셔를 돌아보며, 아내는 결코 하지 않을 비웃음을 실컷 지어 보였다.

    *

    그해 가을, 왕성에서 작위 수여식이 있었다.

    링어와 바이올렛은 서로 어느 정도의 합의를 보았다. 문장과 새벽의 종은 걸지 않는 대신, 장소는 역대 모든 작위 수여자들과 같이 왕성 안의 예배당으로 했다.

    그리하여 걸어야 할 세 개의 문장은 로렌스가의 문장, 로렌스 백작의 문장, 그리고 왕실이 아닌 블루밍가의 문장이 되었다.

    윈터는 테오를 안아 들고 오른쪽에 마련된 상석에 앉아 있었고, 그 옆자리에 테오가 앉아 있었으나 곧 아버지 무릎에 올라앉았다.

    윈터는 엄숙한 분위기가 무서운지 제 목덜미에 매달리는 테오에게 작게 소곤거렸다.

    “이제 곧 엄마가 올 거야.”

    “엄마 뭐 하고 있어?”

    이제 제법 또렷하게 말을 하게 된 테오가 묻자 윈터가 말했다.

    “꼭 해야 할 일을 하고 있어.”

    “있어어?”

    테오가 알아들었는지, 모르겠는지 알쏭달쏭한 표정을 지었다. 그 목소리며 표정이 너무나 사랑스러워 윈터는 물론이거니와 주변 사람들까지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특히 테오의 외할머니인 엘라 부인은 어떻게 한번 손자의 관심을 끌어 보고 싶어 이런 엄숙한 자리에서 꺼낼 리 없는 부채를 꺼내 흔들어 보였다.

    다행히 윈터의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신뢰감이 전해졌는지, 칭얼거리던 테오가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돌렸다. 그러더니 붉은 융단을 걸어 대사제 앞으로 향하는 바이올렛을 발견하고 손을 뻗었다.

    “엄마!”

    테오가 방긋 웃자 윈터가 아들의 머리에 입을 맞추고 등을 토닥이며 말했다.

    “잘 봐 둬, 테오. 엄마가 어떻게 걷는지, 어떤 표정으로 다른 사람을 맞이하는지.”

    아내는 언제나 다정하게 타인을 맞을 준비가 되어 있지만, 샛길로 빠질 생각은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녀의 걸음걸이 하나만 보더라도, 바이올렛 블루밍 로렌스가 얼마나 보수적인 사람인지 알 수 있었다.

    잠시 후 바이올렛이 도착하자 대사제가 입을 열었다.

    “로렌스가의 유일한 적녀이자 라크라운드의 마지막 왕녀. 로렌스가의 가주이자 블루밍가의 후계자 윈터 블루밍 로렌스의 아내 바이올렛 블루밍 로렌스 부인.”

    바이올렛이 고개를 들어 대사제를 주시했다. 사제가 말을 이었다.

    “라크라운드의 수도를 가로지르는 레클 강, 그리고 그 강의 모든 섬의 주인은 모든 행동이 고결해야 하며, 이 나라에 충성해야 합니다. 서약하시겠습니까.”

    대사제의 말이 끝나자 양옆에서 다른 사제들이 두 손으로 레클 강과 그 강의 모든 섬의 주인을 의미하는 문장이 새겨진 검은 망토를 내밀었다. 바이올렛이 그 망토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그러지요.”

    그녀가 대답하는 말투와 목소리는 분위기와 반대로 다소 거만하게 들렸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윈터가 테오에게 소곤거렸다.

    “이건 보통의 작위가 아니라, 왕에게만 수여하는 이름이란다. 그렇기 때문에 그 대답이 결코 복종하는 듯이 들려서는 안 돼. 신이 아니라 사제의 앞이기 때문이지.”

    그리고 어느 순간 제 어머니를 집중해서 보고 있는 테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자, 이제 저 망토를 어깨에 걸쳐 줄 거야. 그동안 부르는 노래에는 저 망토의 주인들의 이름이 들어가 있지.”

    그 소곤거림에, 뒤에 서 있던 엘라는 사위가 겉보기와 달리 예법에 대하여 굉장히 많은 공부를 해 왔음을 알게 되었다. 아니면 그저 제 아내에게 돌아갈 칭호에 대해서만 철저하게 외워 둔 걸지도 모를 일이다.

    노래가 끝나자, 잠시 사제와 참관객들이 모두 고개를 숙이고 바이올렛 블루밍 로렌스를 위한 기도를 시작했다. 고개를 숙이지 않는 것은 바이올렛과 어린 테오뿐이었다. 아이의 눈 속에 어머니를 제외한 모든 이가 고개를 숙이고, 그런 이 상황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어머니의 모습이 황홀하게 담겼다.

    잠시 후 기도가 끝나고, 사제가 선언했다.

    “레클 강과 그 강의 모든 섬의 주인, 바이올렛 블루밍 로렌스 백작.”

    사제가 두 손으로 건네준 셉터를 받아 든 바이올렛에게 모두가 박수로 축하를 건넸다.

    그 모습을 애정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던 윈터가 테오에게 소곤거렸다.

    “네 어머니의 가장 놀라운 점이 뭔지 알아?”

    테오가 동그란 회색 눈동자로 윈터를 바라보자, 그가 말을 이었다.

    “그 사람은 본인이 어떤 자리에 있든지 상관없이 우리를 사랑할 거란 거야.”

    “아빠랑 테오랑 사랑해?”

    “응. 우리는 평생, 바이올렛에게 변하지 않는 사랑을 받게 될 거야.”

    윈터는 그렇게 말하며 아내가 향하는 문 쪽으로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먼저 문에서 기다리다가 바이올렛이 도착하자 팔을 내밀었다. 바이올렛이 웃으며 팔을 손으로 감싸 잡았다.

    “어두워서 테오가 울까 봐 걱정했는데 다행이네요.”

    “당신에 대해서 알려 줬거든. 아주 열심히 듣더군. 당신 닮아서 모범생이 되려나 봐.”

    윈터의 말에 바이올렛이 웃음을 터트렸다.

    “준비가 철저하군요. 나도 당신에 대해 알려 줘야겠어요.”

    이야기를 마친 두 사람의 곁으로 인사를 하러 사람들이 모이려는데, 어디선가 종소리가 들려왔다.

    윈터가 무심코 중얼거렸다.

    “왜 또 갑자기 종소리가…….”

    “그러게요.”

    “응? 당신도 들리는…… 아, 진짜 종소리였지.”

    윈터가 뒤늦게 깨닫고는 성큼성큼 걸어가 문을 활짝 열었다. 그리고 종탑을 올려다보곤 유쾌하게 웃고 말았다.

    “공주님! 어서 나와 봐!”

    그가 부르는 소리에 바이올렛이 서둘러 예배당을 나와 윈터가 가리키는 종탑을 올려다보았다. 종탑 위며 근처에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와 있고, 그 위에 종이 걸려 웅장한 소리를 내며 울리고 있었다.

    윈터의 품에 안긴 테오는 깜짝 놀란 표정이었으나 종소리가 마음에 들었는지 배시시 웃었다.

    “아빠, 저거는 뭐지?”

    “종이야. 종.”

    “종!”

    테오가 종이라는 단어를 배우고 있을 때, 저 멀리서 선거로 뽑힌 세 명의 의원들이 달려왔다.

    “부인!”

    “새벽의 종에 대해 들은 시민들이 꼭 저 종을 올려야겠다고 해서…… 저희가 몰래 꺼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라크라운드 사람들이 꼭 울리고 싶어 하는 걸 어떡합니까?”

    서로 열심히 변명을 하던 그들은 바이올렛이 종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걸 알고 슬쩍 미소를 지었다.

    바이올렛은 이 풍경 속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영원히 잊지 않기 위해 차근차근 눈에 담았다.

    그녀는 기쁨보다 무거운 책임감을 느꼈다. 왕실이 사라졌으므로, 결코 왕족으로서 행동하지 않겠다고 결심했었다.

    그러나 만약 사람들이 저에게 바라는 것이 있다면,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그 책임을 회피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지금 이 순간 제 눈을 통해 알아 가고 있었다.

    바이올렛이 시선을 피하는 윈터에게 물었다.

    “당신이 도와줬나요?”

    “뭐, 이미 울리기 시작했으니. 당신 남편이 종을 꺼내라 했다고 종지기에게 편지를 썼지. 바로 열어 주더군.”

    “고마워요.”

    그녀의 인사에 윈터가 어깨를 으쓱였다.

    “이건 내 선물이 아니라 라크라운드 사람들이 주는 선물이야.”

    “그렇군요.”

    “당신은 라크라운드 사람들의 마음속에 마지막 왕으로 남을 거야.”

    바이올렛이 미소를 지었다. 이 행복한 순간을, 제가 가장 사랑하는 두 남자와 함께할 수 있다는 사실이 더없는 축복으로 느껴졌다.

    그사이 종소리에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 나왔고, 두 사람을 축하하며 자연스럽게 파티가 시작되었다.

    축하의 파티가 시작되자, 정작 주인공인 바이올렛은 사람들이 마음 편히 놀 수 있도록 귀가를 결정했다. 남편의 극진한 에스코트를 받으며 마차에 타려던 바이올렛이 멈칫했다.

    그러더니 이내 눈이 동그래져서 윈터를 보았다.

    “윈터.”

    “응? 왜?”

    “아무래도…….”

    바이올렛이 윈터에게 손짓해 그가 몸을 숙여 주자 그녀가 소곤거렸다.

    “임신일지도 모르니 의사를 불러야겠어요.”

    “뭐, 뭐?”

    윈터가 화들짝 놀라는 바람에 잠들어 그의 품에 안겨 있던 테오가 꼼지락거렸다. 윈터가 서둘러 목소리를 낮추고 먼저 테오를 태운 후 바이올렛을 조심스럽게 앉히고 제 재킷을 벗어 아내의 무릎을 덮었다. 그리고 불안함과 행복함을 감추지 못하고 아내의 손을 꼭 쥐고 집으로 향했다.

    그리고 집에 도착해서 곧바로, 바이올렛은 새벽의 종이 울리던 그때, 제 둘째 아이도 함께하고 있었다는 행복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윈터가 흥분해서 달려가서는 잠들었던 테오를 깨워 저택에서 소소한 파티를 열었다. 테오는 동생이 생길 거란 소식에 너무도 기뻐하며 온 저택을 뛰어 다니면서 사람들에게 그 사실을 자랑하고 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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