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163화 (163/176)

외전 1-3

파티는 수도 호텔 로비를 이용해 열렸다.

이것은 정신없이 뛰어다니는 바이올렛을 돕고자 로렌스 가문 여자들이 준비한 파티였다.

파티에 들어선 윈터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늘 느끼지만 바이올렛의 몸으로 보는 시선은 언제나 새로웠다. 윈터는 이것이 동경의 눈빛이라는 걸 늘 새삼스럽게 느끼곤 했다. 간혹, 그는 저도 아내를 저런 눈으로 보고 있을까 봐 두려울 때가 있었다. 사랑 가득한 눈빛이어야 할 텐데…….

그리고 그런 눈빛 속에서, 윈터는 블루밍 저택에서 열린 파티에서 아내의 몸으로 느꼈던 외로움을 떠올렸다.

그러자 저마저 아내를 외면했던 것에 대한 후회가 다시 그를 서글프게 했다.

그런 감상도 잠시, 제 아내를 넋 나간 시선으로 보는 청년과 눈이 마주친 윈터가 순식간에 욱해서 검지와 중지로 눈을 찌르는 시늉을 하자 안잘리가 다급히 막아섰다.

“제발 부인의 체면을 생각하십시오, 대표님.”

“저 자식이 내 아내를 쳐다보잖아. 어오씨, 미친 거 아냐. 왜 얼굴이 벌게져!”

윈터가 발로 차는 시늉을 하려 들자 안잘리가 필사적으로 막아섰다. 안잘리는 전혀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다짜고짜 눈을 찌르겠다 위협하는 윈터의 행동에 매력을 느꼈는지 청년의 얼굴이 정말로 붉어져 있었다.

“대표님! 이러시려고 오신 거 아니잖습니까!”

안잘리가 급한 마음에 언성을 높이자 뒤늦게 제가 여기 온 이유를 떠올린 윈터가 멈춰섰다.

“하긴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안잘리의 말대로 바이올렛이 나타나기 전까지, 윈터는 꼭 하고 싶은 것이 있었다. 그가 빨리 걸어가려 하자 안잘리가 다시 한번 막아세웠다.

“뛰시면 안 됩니다. 절대로.”

“꺼져.”

“절대로 안 됩니다. 부인께서는 공적인 자리에서 결코 뛰지 않으십니다.”

안잘리가 거듭 말하자 윈터는 그제야 부글부글 끓어 넘치는 성질머리를 꾸역꾸역 밀어 삼키고 후원금을 받고 있는 로렌스가의 청년, 아론 로렌스에게 걸어갔다. 그리고 미리 적어 온 후원금 봉투를 내밀었다.

그것을 열어 본 아론이 멈칫하더니 조용히 말했다.

“……숫자 확인하셨습니까?”

“안 해도 돼.”

“경께서 적으셨지요? 누님께서 한번 확인해 보시는 게…….”

“내가 적었어. 내가 이까짓 숫자 적는데 누구한테 일일이 허락받아야 되는 사람인가?”

윈터가 부하직원 다루듯 말하자 아론이 난처한 얼굴로 숫자 판을 돌아보았다.

오늘은 저 거대한 숫자 판을 돌려 후원금을 표시하는 것이 큰 이벤트였다. 결국 아론이 마지못해 후원금 봉투를 상자에 넣은 후, 숫자 판을 돌리기 시작했다.

숫자가 끝없이 올라가기 시작하자 사람들의 시선이 그곳으로 고정되었다. 목표 금액은 순식간에 넘어 버리고, 올해 열린 수많은 후원 파티에서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숫자가 표시되었다.

모든 사람이 그 숫자를 보고 경악해 행동을 멈췄으나, 아내를 외조하러 온 목표를 마친 윈터는 돌아서며 안잘리에게 짜증스레 말했다.

“배고파. 밥 먹자.”

“예, 대표님.”

“뭐 귀부인은 먹으면 안 되는 음식이라도 있나?”

“아, 아뇨. 없습니다.”

안잘리가 마지못해 대답했다.

그때 저 멀리서 링어 백작이 달려오는 것을 본 윈터가 안잘리의 발을 꽉 밟으며 말했다.

“저 자식은 뛰잖아.”

“아주 급한 일이 있으시겠죠. 그리고 남의 발을 밟는 게 예의일까요?”

“예의 아닌 걸 알고도 하고 있으니 내가 지금 얼마나 짜증났겠어.”

그사이 링어가 가까이 와서 숨을 몰아쉬었다.

“결정하셨습니까?”

“뭐. 아니…… 뭘요?”

“새벽의 종 말입니다.”

링어가 왜 모른 척하냐는 듯 말하더니, 이내 인상을 썼다.

“부인, 취하셨습니까?”

“왜 그렇게 생각하죠?”

윈터가 아내의 말씨를 흉내내는 와중에도 공격적으로 묻자마자 안잘리가 다급히 몸을 돌리게 하며 링어에게 말했다.

“죄송합니다, 부인께서 많이 취하셔서.”

그러더니 안잘리가 윈터를 구석으로 데려가 말했다.

“새벽의 종은 왕의 상징입니다. 왕가가 아니라 왕이요. 왕이 즉위하거나 결혼하거나, 죽을 때 꺼내서 왕성 종탑에 겁니다. 종의 색이 마치 새벽의 하늘 같다고 해서 새벽의 종이지요.”

“근데.”

“부인의 계승식에 새벽의 종을 올리겠다고 하셨던 거겠죠.”

“내 아내는 반대하고?”

“그런 분이시잖습니까.”

“아, 내 아내는 다 좋은데 이런 일에 유연함이 없어. 답답해 죽겠네.”

“권력욕도 없으시죠. 그리고 더 이상 링어 백작과 대화하는 건 안 좋은 생각입니다.”

“왜.”

“다른 사람은 다 속여도 의전 담당자는 못 속이니까요. 바이올렛 부인의 몸에 익은 예법들을 링어 백작은 다 눈치챌 겁니다.”

그 말에 잘 됐다는 듯 윈터가 안잘리의 등을 떠밀었다.

“가서 저 작자랑 얘기하고 있어.”

“어디 계실 겁니까?”

“여기가 내 호텔인데 내가 갈 데가 없나?”

윈터가 말하고 휙 멋대로 사라져 버렸다. 그 사나움에 매력을 느낀 청년들의 시선이 아쉽게 그 뒷모습을 따르자 안잘리가 황당함에 혀를 찼다.

*

바이올렛은 다시 집무실로 불려 온 전산실 직원 주디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남편을 흉내 내 다리를 꼬고 의자에 삐딱하게 기대앉아 상대방을 대하려니 괴로운 기분이 들었다.

바이올렛이 겁먹은 표정으로 서 있는 주디를 향해 입을 열었다.

“어느 가문 사람이지?”

“펠스요.”

“이력서에는 수도 사람이라고 쓰여 있는데.”

“네. 기차역 근처예요.”

“으음.”

바이올렛이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서랍을 열어 하옐이 가져다준 시가를 꺼냈다.

“긴장한 것 같네. 시가라도 줄까? 난 안 피우지만 아내 것이 있어서.”

“주세요.”

“시가를 피우는 모양이지?”

라크라운드에서 시가는 대부분 귀족들이 피웠다. 하다못해 이렇게 막대한 돈을 벌어들인 윈터조차 귀족 가문에서 태어나지 않았으니 피우지 않았다. 그녀의 질문에 주디가 곧 태연한 얼굴로 대답했다.

“아뇨, 그냥 궁금해서요.”

“그러시면 뭐.”

바이올렛 역시 담담히 대답했다.

주디는 대표가 몸을 돌렸을 때 입술을 힘주어 물었다.

평소 그녀가 알던 윈터 블루밍은 다혈질이고, 예법을 귀찮아하는 사내였다. 그러던 그가 정중한 태도를 보이자, 무슨 수작인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바이올렛이 다가와 불붙인 시가를 내밀었다. 주디가 시가를 받아 들고 서툰 척하는데 바이올렛이 돌아보며 말했다.

“마실 건? 긴장도 풀 겸. 술도 좋고. 아니면…….”

“전 커피를 주세요.”

북부 사람.

바이올렛은 확신했다. 북부 사람들은 커피를 마시며 시가를 피우는 것을 즐겼다. 예전에 북부에는 커피가 매우 귀했으므로, 구하기 어려운 시가는 구하기 어려운 커피와 즐기는 것이 적합하다 여겼던 것이었다.

북부에 스파이짓을 할 귀족 가문이라면 단 한 가문뿐이었다. 바이올렛이 문을 열자 앞에 서 있던 하옐이 소곤거렸다.

“대표님께선 필요한 거 있음 그냥 버럭버럭 소리치시는데요, 작은 마님.”

그의 말에 저도 몰래 미소를 띤 바이올렛이 주디에게 들릴 정도의 목소리로 말했다.

“레위 가문의 가계도를 가져다주겠나?”

“레위 가문이요?”

하옐이 대답하는 순간, 주디가 벌떡 일어나더니 곧바로 도망치기 위해 창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그보다 빠르게 바이올렛이 달려가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바이올렛은 윈터의 몸이 가진 빠른 반사 신경과 움직임에 놀라며, 다른 한 손으로 열려 있던 창을 닫았다.

“하옐, 경관을 불러 주게. 아, 그리고 귀족 아가씨를 오래 붙잡고 있을 순 없으니 하녀들도.”

“네! 대표님!”

작은 마님이 심문으로 스파이를 찾아내자, 하옐이 들뜬 얼굴로 달려 나갔다.

주디가 신경질적으로 팔을 빼 보려 애쓰다가 포기하고 물었다.

“어떻게 알았죠?”

“시가와 커피를 같이 한다고 해서.”

“대표님은 그런 거 모르잖아요!”

“요즘 아내에게 배우는 중이라.”

“그럼 알겠네요, 숙녀의 신체를 이렇게 힘줘서 잡으면 안 된다는 걸!”

그녀의 말에 바이올렛이 미간을 좁혔다.

“잘못해 놓고 빠져나갈 구실로 예법을 이용하지 말게. 그건 다른 숙녀분들께도 무례한 발언이니.”

그 단호한 대답에 주디가 멈칫했다.

정말로 이상했다. 제가 알던 그 무례하고 성질 더러운 윈터 블루밍이 아니었다.

잠시 후 하녀들이 와서 주디가 도망치지 못하게 집무실 창과 문을 막아섰다. 그제야 바이올렛이 주디를 데려다 의자에 앉히고 놓아주자 그녀가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바이올렛이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

“레위 가문에 비행선 기술이 왜 필요하지?”

“강한 군대가 강한 라크라운드를 만들 테니까요.”

“레위 가문은 강한 군대를 만들어 파는 가문으로 알고 있는데.”

과거에는 용병, 지금은 군수 사업을 통해 부를 누적한 것이 레위 가문이었다. 바이올렛이 말을 이었다.

“군수품을 사 줄 것이 약속되어 있지 않다면 레위 가문에 비행선 기술이 필요하지는 않을 것 같군.”

“자기만족이라는 게 있잖아요.”

“군수품을 어디에 팔 생각이었는지 알고 싶은데.”

“안 팔아요.”

“주디 양.”

“왜요.”

“카닉사는 분명히 정보를 빼돌리려 한 대가를 레위 가문에 물을 거야. 막대한 금액이 될 것이고, 레위 가문이 할 수 있는 일은 둘 중 하나가 되겠지. 배상금을 물거나, 자네를 경찰에 넘기거나. 레위 가문 정도의 가문에서 범법자가 나오게 할 순 없을 테니 배상금을 물려 하겠지.”

“…….”

“그렇다면 자네 입장에서는 아무래도, 그 배상금을 나눌 사람이 있는 편이 좋겠지.”

주디는 윈터 블루밍의 예의 바른 말씨와 거만한 눈빛에 오싹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이 남자가 진작 이런 남자였다면, 자신은 이 회사에 잠입한 날부터 짝사랑에 앓았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한참 입을 열지 않으려 하던 주디는 저를 가만히 바라보며 기다리는 상대에게 큰 압박을 느꼈다. 게다가 지금의 상대는 바른 자세로 불필요한 움직임 없이 서 있어, 조금도 틈이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한참이 지나서, 주디가 입을 열었다.

“언니가…… 에쉬 로렌스와 결혼을 하기로 했어요.”

예상했으나, 떠올리고 싶지 않았던 이름에 바이올렛이 멈칫했다.

미리 예상했던 것처럼, 마약 거래 정도로 에쉬를 처벌하는 건 불가능했다. 바이올렛 부부가 꽤 애를 먹었음에도 에쉬에게는 가택 연금 정도의 처벌이 내려졌다. 주디가 말을 이었다.

“군수품을 사 주기로 했죠.”

“강한 군대가 강한 라크라운드를 만들 거라면서?”

주디가 한 말을 그대로 묻자 주디가 고개를 끄덕였다. 바이올렛이 이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계약이 깨지게 생겼군.”

“비행선 기술이 없다고 레위 가문에서 군수품을 못 만드는 건 아니에요.”

“라크라운드는 의회가 움직여. 에쉬 로렌스 마음대로 군수품을 사고팔아선 안 되네.”

“하지만!”

“하지만 같은 건 없어.”

바이올렛의 냉정한 대답에 주디가 말문이 막혀 입술을 잘근잘근 물었다. 그리고 곧 분노가 역력한 눈으로 말했다.

“그렇다면 레위 가문은 결코, 에쉬 로렌스를 가만두지 않을걸요.”

“……나쁘지 않은 소식이군.”

“뭐라고요? 바이올렛 부인께서 들으시면!”

“기뻐하겠지.”

“…….”

“분명히, 기쁠 거야.”

바이올렛이 그렇게 말하고는 미소를 지었다.

주디는 말문이 막혀 더 이상 아무 말도 못 하고 팔짱을 끼고는 휙 고개를 창으로 돌렸다. 바이올렛은 경관과 함께 온 하옐 쪽을 확인하고, 곧 주디에게 정중히 인사했다.

“실례했습니다, 주디 레위 양.”

그러곤 후원 파티에서 남편을 구출해 주기 위해 곧 걸음을 옮겼다.

당신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