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162화 (162/176)
  • 외전 1-2

    유모가 다시 테오를 데려가려는데 아이가 칭얼거렸다. 결국 아들에게 한없이 약한 윈터가 아이를 돌보기로 했다.

    윈터는 모든 직원들을 응접실에 가둬 두고 하옐에게 우선적으로 스파이일 가능성이 높은 직원을 색출하게 했다.

    심문할 대상을 골라내는 것을 기다리는 동안, 윈터는 제 집무실에도 설치되어 있는 아기 침대에 테오를 앉혔다. 그러곤 멀리 떨어진 곳에 다리미판을 두고 아들의 손바닥만 한 손수건들을 다리기 시작했다.

    다행히도 스파이 문제로 머리끝까지 올랐던 짜증은 취미 생활과 동시에 조금씩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특히나 개중에서도 테오가 유난히 좋아하는 분홍색 테두리 선이 있는 하얗고 보들보들한 손수건을 다릴 때는 흐뭇한 표정까지 지었다.

    “사내 녀석이 이렇게 귀여운 손수건을 좋아한단 말이지. 뭐 네가 원한다면 이 방도 이런 색으로 바꿔 주지. 넌 내 아들이니 하고 싶은 건 다 하고 살 수 있어. 물론 바이올렛이 반대하는 건 안 되지만 말이야.”

    그가 말을 걸면 테오는 무슨 말인지 몰라도 일단 신이 나서 까르륵 웃으며 박수를 쳤다. 그 사랑스러운 웃음소리에 윈터는 다리가 풀려 휘청거렸다.

    “아, 어떻게 저렇게 귀엽지?”

    손수건을 다 다려 마음의 안정을 찾은 윈터가 위험한 것들을 싹 치운 후, 바이올렛 몰래 주머니에 접어 숨겨 놓았던 종이를 펼쳤다. 그리고 아들에게 가서 펼쳐 보이며 말했다.

    “이것 봐. 커다란 요트야. 4층짜리지. 객실 열 개에 수영장도 있어.”

    “아브!”

    테오가 뭔지도 모르고 좋아하자 윈터가 침착하게 조기 교육을 시작했다.

    “지금 수주를 맡겼으니 네가 세 살 정도 되면 완성될 거다. 그래도 우리 집안에 전용 요트 하나는 있어야지. 너희 엄마는 요트 여행의 즐거움을 아직 잘 모르지만 생기면 알게 될 거야.”

    바이올렛은 윈터가 블루밍 로렌스 가문 소유의 요트를 제작 중이란 것을 알았지만 그게 제 상상을 초월하는 가격인 줄은 모르고 있었다. 게다가 그 요트에 제 이름이 붙게 될 거라는 것도.

    윈터는 나중에 들켜서 혼날 것을 걱정해 테오를 미리 제 편으로 만들 예정이었다. 테오가 제 편이라면 바이올렛도 포기하고 받아들일 것이다.

    윈터가 흐뭇한 얼굴로 종이를 다시 접어 주머니에 넣었다.

    *

    바이올렛 역시 그녀의 집무실로 향했다.

    오늘은 그녀 역시 손님이 있었다. 더 이상 작위 계승식을 미루면 안 된다며 들이닥친 전 왕실 의전 총괄 담당자, 링어 백작이었다.

    왕이 아닌 자가 레클 강과 모든 섬의 작위를 받은 것은 초대 백작이었던 올리비아 로렌스 이후 처음이라, 그는 고려할 것들을 산더미만큼 가져왔다. 바이올렛이 돌아오자마자 링어가 재촉하듯 말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계승식은 왕성 예배당에서 해야 하고, 예배당에는 꼭 왕실 문장을 걸어야 합니다. 로렌스가, 왕실, 로렌스 백작의 문장. 이렇게 세 개의 문장을 걸고 작위 계승식을 하는 건 의전을 넘어 상식이란 말입니다!”

    “왕실이 없는데 어떻게 왕실 문장을 건단 말입니까.”

    “그럼 어떡합니까? 문장은 반드시 세 개를 걸어야 합니다. 반드시. 그러지 않으시면 로렌스가의 선조들께서 찾아오실 겁니다. 올리비아 로렌스께서도요!”

    “정작 올리비아 로렌스께서 이 작위를 받으실 때는 왕실 문장을 걸지 않았습니다.”

    “그야 당시에는 후계자의 견제를 받고 있으셨으니까요!”

    “아무튼, 걸지 않았던 건 사실이지요.”

    의전에 살고 의전에 죽는 링어였으나 바이올렛은 설득하기 어려운 상대였다. 그녀는 예법과 역사에 대해 저만큼이나 잘 알고 있었다. 억지 부리는 것도 아니고, 다 근거가 있으니 말싸움은 끝이 나지 않았다.

    링어는 속 터져 하면서도, 모처럼 실컷 의전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사실에 행복감을 느꼈다. 그래서 모든 걸 빨리 결정하고 싶은 마음과 동시에 최대한 이 회의를 오래 끌고 싶은 모순이 들었다.

    “좋습니다. 문장은 올리비아 로렌스께서도 걸지 않으신 예시가 있으니 안 걸 수도 있다고 칩시다. 하지만 새벽의 종은 반드시 거셔야 합니다.”

    새벽의 종은 라크라운드 왕의 상징이었다. 새 왕이 즉위하면 그 왕을 위한 문장을 만드는데, 그 모든 문장에 이 새벽의 종이 그려져 있었다. 그러나 그 종은 왕실이 해산되며 더 이상 걸리지 않게 되었다.

    바이올렛이 담담히 대꾸했다.

    “새벽의 종이야말로 왕의 상징입니다.”

    “이렇게 생각해 보십시오, 부인.”

    링어가 최종 목표였던 이것만큼은 관철시키기 위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지금 라크라운드에서 가장 강한 힘을 가진 게 누구입니까?”

    “음, 생각해 본 적 없는 일이군요. 그동안은 에쉬였을 텐데…….”

    “윈터 경입니다.”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저뿐만이 아니라 모든 귀족들이 그렇게 생각할 겁니다. 나라를 흔들어 박살 낼 수 있을 재력을 가진 데다가 부인을 통해 구석구석 손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지요. 그런데 그걸 막을 수 있는 사람이 하나 있습니다. 누구겠습니까?”

    “그런 사람이 있나요?”

    제 남편보다 더 힘이 강한 자가 있다는 소식에 바이올렛이 내심 경계를 비쳤다. 그런 그녀를 어이없어하면서도, 링어가 말을 이었다.

    “바이올렛 부인이십니다.”

    “제가요?”

    “예! 국민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고 있는 게 바로 부인이시란 말입니다. 라크라운드 역사상 최초로 세 명의 평민들이 의정 활동을 시작한 이후로는 이 나라를 지켜 줄 왕의 재목이 있는데 왜 왕실을 비워 두느냐는 원성이 하늘을 찌릅니다. 거기에 지금도 그렇지요. 가뭄 드는 지역에 도움을 구하러 다니시느라 계승식을 무기한 연기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걸 라크라운드 사람들이 모를 것 같습니까? 만약 왕이 선출직이라면 부인밖에는 왕이 될 사람이 없지요. 즉! 부인께서 왕실의 문장을 걸든 새벽의 종을 치든 화낼 사람이 없단 말입니다!”

    “화를 내지 않는다고 다 해도 되는 건 아닙니다. 왕실은 문제를 일으켰고, 제가 동의했던 건 아니나 에쉬 로렌스가 그 사과의 의미로 왕실을 해산시켰어요. 그 사과의 행동을 손바닥 뒤집듯이 바꿔도 되는 건 아닙니다.”

    바이올렛이 그렇게 말하고는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그 모습을 조금 떨어진 곳에서 보며 젠은 답답함에 가슴을 부여잡았다.

    ‘작은 마님은 고집불통이야!’

    작은 마님은 너무 고지식한 사람이었다.

    게다가 옆에서 말해줘도 라크라운드 사람들이 그녀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실감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이럴 때 대표님과 몸이 바뀌면 얼마나 좋을까, 싶어졌다. 그럼 대번에 왕실 문장 거는 것을 받아들일 텐데.

    젠이 그리 생각하다가 잠시 시계를 확인하고 바이올렛에게 말했다.

    “작은 마님, 이제 가뭄 기금 마련 후원 파티에 가셔야 해요.”

    “아, 그렇구나. 고마워, 젠.”

    시간이 다 되는 바람에 별수 없이 링어가 일어섰다. 그는 하인에게 제 실크해트를 받아 쓰며 배웅을 나선 바이올렛에게 말했다.

    “필히 마음을 바꾸어 주세요, 부인.”

    “고려하지요.”

    바이올렛이 부드럽게 인사하고 그를 보낸 후, 파티에 갈 준비를 끝냈다. 그리고 윈터가 있는 응접실로 걸음을 옮겼다.

    저녁에 가까워지자 사용인들이 저택 여기저기의 전구를 켰다. 이곳은 윈터가 바이올렛을 그리워하며 보수에 보수를 거듭한 집이었다. 건축 자재며 내부 장식 하나하나 다시 구하기 어려운 좋은 물건들이었다.

    화려한 저택의 복도를 걸어간 바이올렛이 응접실로 들어섰다. 그러자 윈터의 집무실과 응접실을 오가던 하옐이 그녀를 반겼다.

    “아, 대표님은 집무실에 계십니다. 면담 중이세요.”

    “그럼 집무실에…….”

    “아뇨! 아닙니다. 여기 계셔 주세요, 작은 마님.”

    하옐이 서둘러 말리고 제가 집무실로 달려갔다.

    바이올렛이 손님들을 돌아보며 눈인사를 하는 사이 핌이 다가왔다.

    “바이올렛!”

    “아, 핌. 상담은 했소?”

    “했어요. 상담하고 바로 가려고 했는데 다들 나더러 있어 달래요. 대표님이 폭발하시면 저더러 바이올렛에게 알려 달라고.”

    “저런.”

    바이올렛이 안쓰러워하며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 문이 열렸다. 그 소리에 뒤를 돌아본 그녀가 상대방과 눈이 마주쳤다. 바이올렛보다 서너 살 어려 보이는 여자가 그녀를 바라보더니 무언가 하려던 말을 그만두고 입을 다물었다. 바이올렛이 눈인사를 하자 그녀가 곧 말을 이었다.

    “대표님께선 일정 있으셔서 이제부터 상담은 소장님이 하신답니다.”

    그 말에 응접실에 안도의 한숨이 흘렀다. 그사이, 바이올렛의 시선은 여자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그녀가 저를 쳐다보는 걸 알았는지, 여자가 고개를 옆으로 기울여 다시 인사했다. 그때 턱시도를 차려입은 윈터가 들어섰다. 내내 직원들을 들들 볶던 그는 아내의 손을 잡아 입을 맞추고 말했다.

    “드레스 잘 어울리네.”

    아내에게만 들려주는 윈터의 나긋한 목소리에 응접실 안 직원들이 모두 질색하는 표정을 지었다. 바이올렛이 그 눈빛을 느끼고 서둘러 윈터를 응접실 밖으로 떠밀었다.

    “고마워요. 그런데 윈터.”

    “응.”

    “마지막에 당신이 상담한 사람은 유력한 가문 사람인 것 같더군요.”

    “그 전산실 직원? 전혀. 귀족이 아니야.”

    “하지만 방금…….”

    바이올렛은 좀 전의 그 직원이 저를 발견하자 하려던 말을 멈추던 것을 떠올렸다. 그것은 왕족에 대한 예의를 어려서부터 배워 온 사람이 무심코 보이는 행동이었다. 지금이야 그렇게 가르치지 않지만, 바이올렛이 어렸을 때까지만 해도 왕족보다 먼저 말을 하는 것을 몰상식하게 여겼다.

    그래서 그 설명을 하려던 바이올렛은 순간 속이 울렁거리는 것을 느끼고 인상을 썼다.

    그리고 두 사람이 서로를 마주 보았다. 짐작한 것처럼 테오가 태어난 이후 처음으로 두 사람의 몸이 바뀌어 있었다.

    “뭐야, 또.”

    윈터가 짜증을 내더니 곧 욕설을 툭 내뱉었다. 제 몸으로 내뱉는 욕설에 어이없어 웃던 바이올렛이 말했다.

    “잘됐네요. 확인하고 싶은 게 있었는데.”

    “뭘?”

    “아무래도 그 전산실 직원이 스파이 같아요.”

    그러자 윈터가 뒤따라오던 하옐을 돌아보며 말했다.

    “마지막에 상담한 직원 다시 집무실로 오라고 해.”

    “주디 씨요? 네, 알겠습니다.”

    삐딱해진 말투로 몸이 바뀐 걸 바로 눈치챈 하옐이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달려갔다. 그러자 윈터가 잽싸게 말했다.

    “그럼 내가 후원 파티 먼저 가 있을 테니 당신은 스파이 심문하고 와.”

    “그 말 하려고 하긴 했는데…….”

    “나 먼저 갈게. 천천히 와.”

    왠지 모르게 신이 난 윈터가 달려 나가는 모습에 바이올렛은 하마터면 제 몸으로 뛰지 말라고 소리를 칠 뻔했다.

    “말괄량이 같으니라고.”

    바이올렛이 남편의 뒷모습을 보고 한숨 쉬듯 말하곤 집무실로 몸을 돌렸다. 그녀는 늘 윈터가 답답하다 투정하는 나비넥타이를 풀며 중얼거렸다.

    “답답하긴 하구나.”

    이제는 파티에 도착하기 전엔 넥타이를 안 해도 된다고 허락해 줘야겠다고, 바이올렛은 생각했다.

    *

    가뭄을 위한 기금 마련 후원 파티는 수도 호텔에서 열렸다.

    아무리 제가 들어 있어도, 아내가 혼자 파티에 있는 모습을 보이기 싫었던 윈터의 급한 연락을 받고, 회사에서 야근 중이던 부대표 안잘리가 달려왔다.

    안 그래도 회사에 윈터 몸을 한 바이올렛이 나타날 때마다 어림짐작하던 안잘리가 자초지종을 듣고도 담담히 말했다.

    “그럼 제 말을 따라 주셔야 합니다, 대표님. 부인의 이미지에 손상 가지 않게.”

    “까불지 말고 필요할 때만 말해.”

    바이올렛의 얼굴로 짜증스레 핀잔하는 것에 안잘리는 황당했으나 일단 받아들이기로 했다.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안잘리가 가만히 기다리자 윈터가 어쩌란 거냐는 듯 노려보았다.

    “……숄 주시죠.”

    “왜? 아, 어.”

    윈터가 뒤늦게 숄을 풀어 안잘리에게 건네자 그가 한숨 쉬며 숄을 맡기고 돌아왔다. 그러자 윈터가 불쾌하다는 듯 말했다.

    “내 아내 얼굴 보고 한숨 쉬지 마. 이 천사 같은 얼굴을 보고도 불만이 생겨? 어?”

    윈터가 인상을 쓰고 묻자 안잘리는 뭐라 대답해야 할지 몰라 다시 나오려는 한숨을 눌러 참았다. 저 천사 같은 얼굴을 보고도 불만이 생기게 만드는 그의 인성이 놀랍긴 했다.

    당신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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