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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161화 (외전) (161/176)
  • 외전 1-1

    바이올렛의 작위 수여가 늦어진 것은 테오가 막 태어났기 때문도 있지만, 내내 이어지는 가뭄 탓이 컸다.

    왕실을 해체했다고 해서 왕실이 하던 일까지 한 번에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바이올렛은 왕실이 했어야 할 일을 분배하느라 테오가 태어난 이후 줄곧 이래저래 수면 부족에 시달리고 있었다.

    젠이 바이올렛의 등을 떠밀며 말했다.

    “제발 주무세요, 이제.”

    “이제 한낮인걸?”

    “원랜 아홉 시간은 주무시던 분이 도련님 태어나시고 서너 시간도 겨우 주무시잖아요. 이렇게는 안 돼요.”

    “테오 얼굴 보고 바로 잘게.”

    “도련님만 보고 바로 나오세요. 대표님께 잡히지 말고요!”

    젠이 거듭 강조하는 말에 바이올렛이 그러겠다고 성실히 대답했다.

    남편이 안에 있을 텐데, 테오의 방에 노크를 해도 대답이 없었다. 조용히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선 바이올렛의 얼굴에 저절로 미소가 걸렸다.

    침대조차 더웠는지 바닥에 깔아 놓은, 윈터가 특별히 신경 써서 제작한 고급 카펫 위에 부자가 잠들어 있었다. 새카만 머리칼에 똑같이 닮은 얼굴로 마주 보고 잠들어 있는 두 사람의 모습에 바이올렛이 작은 소리로 웃었다.

    “귀여워라.”

    그 옆에 잠시 앉은 바이올렛이 윈터의 머리맡에 펼쳐진 육아 수첩을 집어 들었다.

    오후 2시 30분, 테오 블루밍 로렌스 낮잠.

    매일 뭘 그렇게 열심히 적나, 했더니. 육아 수첩에는 테오의 일거수일투족이 꼼꼼하게 적혀 있었다. 즐거운 표정으로 수첩을 넘기던 바이올렛은 이내 윈터가 적어 놓은 긴 메모를 발견하고 손을 멈추었다.

    테오, 넌 언제쯤 걷고 언제쯤 뛰어 다닐까. 너와 산책하고 싶은데 얼마나 기다리면 되려나. 난 사냥을 해 본 적이 없는데 넌 좋아하면 어쩌지. 지금이라도 배워 둬야 하나. 넌 뭘 좋아하게 되고 뭘 싫어하게 될까. 내가 도련님으로 자라 본 적이 없어서 널 이해하지 못하게 되면 어떡하지. 혹시 내가 모르는 게 있어도 이해해 주겠니? 그런 면은 아내를 닮아야 할 텐데.

    윈터가 적어 놓은 걱정과 궁금함과 사랑이 담긴 글씨들이 바이올렛은 사랑스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평소라면 육아에 지쳐 잠든 남편을 깨우지 않았겠지만, 오늘은 도무지 견딜 수가 없어 윈터를 와락 끌어안았다.

    그러자 윈터가 곧장 눈을 떠서 상체를 일으키더니, 저를 놓으려 드는 바이올렛을 꽉 붙잡아다가 제 허벅지 위에 앉혔다. 그리고 두 손으로 아내의 허리를 감싸 안으며 물었다.

    “왜? 무슨 일 있어?”

    자다 깬 낮은 목소리와 갑자기 안 하던 짓을 하는 아내 덕에 걱정으로 좁아진 미간을 기꺼워하며, 바이올렛이 소곤거렸다.

    “사랑해요.”

    “중요한 일로 깨웠네.”

    윈터가 짐짓 심각한 척 대꾸하고는 금방 느긋하게 웃었다. 한번 이렇게 무릎에 앉혀지면 쉽게 벗어나기 힘들다는 걸 체득한 바이올렛이 윈터의 잠이 다 깨기 전에 몸을 일으키려 했다. 그러나 그 전에 윈터의 팔에 붙들리고, 자다 깬 탓에 느리고 평소보다도 뜨거운 입맞춤을 받았다. 바이올렛이 금방 제 치마 속으로 들어와버리는 그의 손목을 잡아채고, 겨우 그의 가슴팍을 밀어냈다.

    바이올렛은 남편과의 입맞춤을 정말로 좋아했기 때문에, 이렇게 밀어내는 게 그녀에게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일찍 자라던 젠의 말을 떠올리고 가까스로 남편을 거부해 낸 바이올렛이 얼굴로 또다시 유혹하려 드는 윈터를 흘겼다.

    “정말…… 무슨 말을 못 하겠어.”

    “뭔지 몰라도 당신이 엄청 날 기특해하고 있었어. 뭘 해도 봐줄 표정이었다니까?”

    윈터가 말하며 다시 입을 맞추려 들자 바이올렛이 바닥에 떨어져 버린 육아 수첩을 방패 삼아 집어 들고 그의 품에 안겼다.

    “이게 귀여웠어요.”

    그러자 윈터가 그것을 힐끔 내려다보더니 아내를 못 가게 하려고 어깨에 다시 얼굴을 비비며 말했다.

    “열심히 쓸게. 더 귀여워해.”

    요즘 아내의 출근이 잦았던 탓에 윈터가 온갖 수작을 부리며 그녀를 잡았다. 그 덕에 바로 잠을 청하려던 바이올렛의 마음도 조금씩 약해졌다.

    그래도 다시금 젠의 잔소리를 떠올리며 자리에서 일어나자 윈터도 별수 없이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는 포근한 카펫 위에 천사 같은 얼굴로 잠들어 있는 테오를 안아다가 요람에 눕혔다.

    잠시 후 유모가 들어와, 부부는 테오 방에 바로 붙은 부부의 침실로 들어섰다. 바이올렛이 바로 누우려는데, 여전히 포기를 못 한 윈터가 바이올렛의 허리를 두 손으로 부드럽게 감싸 안고 말했다.

    “내가 어쩌다 이런 여자랑 결혼할 수 있었을까.”

    “당신이 나와 만난 이유라면 당신이 공작 작위를 원해서였죠.”

    일부러 분위기를 깨려 바이올렛이 딱 잘라 말하자 윈터가 기가 차서 빈정거렸다.

    “그것 참 로맨틱한 대답이군.”

    “어쨌든 그게 맞잖아요.”

    “알았어. 다시 태어나면 좀 더 운명적으로 나타나지.”

    “음, 어떻게 나타날 건가요?”

    그건 좀 궁금했는지 바이올렛이 묻자 윈터가 기다렸다는 듯이 대꾸했다.

    “어떻게 할까? 그때도 당신은 공주님으로 태어날 건가?”

    “다음엔 당신이 공주로 태어날래요?”

    “그러지 뭐.”

    윈터가 짓궂은 얼굴을 하더니 우아하게 손부채질하는 시늉을 했다. 그러자 바이올렛이 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잘하네요. 이제 우리가 몸이 바뀌어도 구분 못 하겠어요.”

    “전혀. 바뀌는 순간 알아.”

    “왜죠?”

    “당신은 다리를 꼬고 앉지 않잖아.”

    “그렇게 배웠어요.”

    “꼬고 앉을 줄은 알아?”

    그가 놀리듯 묻자 바이올렛이 윈터의 품에서 벗어나 침대에 앉았다. 그러고는 다리를 꼬고 앉아 그를 올려다보았다.

    “알아요.”

    그러자 윈터가 저도 모르게 침을 삼키고 어깨를 으쓱였다.

    “좀 더 해 봐.”

    “음.”

    바이올렛이 고민하더니 오른손으로 침대를 짚고 몸을 기울였다. 고개를 조금 숙여 그녀를 내려다보던 윈터의 입꼬리가 저절로 올라갔다.

    “전혀 나 같지 않은데. 그렇게 앉아 있는데도 신기할 정도로 우아하시군, 우리 공주님은.”

    “그 정도면 편견이에요.”

    “옷이 너무 단정한가, 싶기도 하고.”

    윈터가 편안한 실내용 드레스를 턱짓하자 바이올렛이 살짝 인상을 썼다. 그러거나 말거나 윈터가 손을 뻗어 그녀의 드레스 목덜미에 있는 리본을 풀고, 드러난 그녀의 매끈하고 하얀 목에 입술을 묻어 붉게 자국을 남겼다. 천천히 바이올렛을 쓰러뜨린 윈터가 긴 치마를 걷어 올리며 물었다.

    “날 따라 하고 싶은 거야, 아니면 그냥 무례해지고 싶은 거야?”

    “둘 다.”

    “어떡하나, 우리 공주님. 둘 다 실패했는데.”

    “그런데 왜 이렇게 즐거워 보이는 거죠?”

    “귀엽긴 했거든. 야하기도 하고.”

    윈터가 눈을 마주치고 말하며 아내의 손을 잡아 제 어깨에 올리게 했다. 바이올렛은 타고나길 큼지막한 그의 골격을 만지작거리길 좋아했고, 윈터는 그녀가 본인은 느끼지 못할 고상한 손놀림으로 제 목이며 날개 뼈를 쓰다듬어 주는 것을 좋아했다. 부부의 잘 맞는 부분이었다.

    귓불이며 목덜미, 명치를 타고 쓰다듬어 내려가는 윈터의 손길에 움찔거리던 바이올렛이 살짝 눈을 뜨고 입을 열었다.

    “정말 이럴 생각이 아니었는데. 육아 수첩 때문에 마음이 약해졌어요. 키스도…….”

    아내의 솔직한 말에 윈터가 어깨를 들썩이며 키득거리곤 물었다.

    “그렇게 약점만 드러내면 어떡해?”

    “아…… 그러게요. 비밀로 할걸.”

    “사업하기는 틀렸어, 우리 공주님은.”

    윈터가 놀리듯이 말했다. 그 말에 웃던 바이올렛이 윈터의 입술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있잖아요.”

    “응.”

    “당신이 삐딱할 때도 가끔, 야할 때가 있어요.”

    바이올렛이 솔직하게 말하고, 어떤 반응인가 빤히 윈터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가 예상외로 웃으며 대꾸했다.

    “나도 알아.”

    “정말?”

    “내가 이제 굉장히 예의 바른 사람인데, 가끔 당신 보기 좋으라고 일부러 삐딱하게 구는 거야. 사실.”

    그의 능청에 바이올렛이 웃음을 터트렸다.

    “거짓말쟁이.”

    “내가 거짓말쟁이어도 사랑하지?”

    윈터는 누가 봐도 사랑에 푹 빠진 얼굴로, 장난치듯 물었다. 바이올렛이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행복에 겨워 어쩔 줄 몰라 하며 아내를 끌어안았다.

    *

    윈터가 출근을 뒤로하고 집에서 행복을 만끽하는 사이, 회사에서는 커다란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비행선 연구소에 스파이가 있었다는 것이 밝혀진 것이었다.

    다행히 스파이에 대한 대비가 철저하게 되어 있어 유출 직전에 꼬리가 밟혀 붙잡혔으나, 윈터는 내부에 또 다른 스파이가 있으리라 여기고 연구소 직원 전원을 소집했다.

    기밀 유출에 대한 책임이 있는 연구소 직원들은 하옐의 충고에 따라 그나마 윈터가 성질을 누그러뜨릴 곳에서 회의를 준비했다.

    윈터의 개인적인 평가로는, 최근 아빠라는 말을 거의 완벽하게 구사하는 아들 테오와 아내가 있는 집이었다.

    커다란 폭풍 예보라도 들은 얼굴로 모여든 직원들이 저택 응접실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서로를 마주 보았다.

    그중 가장 사람들의 부러움을 사는 것은 바이올렛의 친구이자 키론에서 딸과 함께 이주해 온 직원 핌이었다. 가장 스파이일 가능성이 유력한 것도 연구소의 중요한 전신을 다루는 핌이었지만 윈터는 아내의 친구인 그녀를 결코 닦달하지 않을 것이었다.

    “부럽습니다, 핌 씨…….”

    발명가인 솔린이 울먹이며 핌에게 말했다.

    “이상하게 대표님은 제가 아무 말도 안 해도 절 미워하신단 말이죠. 함께 칼리본 광산에도 다녀와 드렸는데 왜일까요…….”

    “그러게 말이에요. 왜 이렇게 솔린 씨를 구박하시는 건지. 세상에 이렇게 순수한 사람이 어디 있다고. 언제 말실수라도 한 거 아니에요?”

    “제가 기억하는 한은 없어요…….”

    사람들이 모여들었을 때 문이 쾅 열리고 서슬이 퍼런 윈터가 들어섰다. 눈물바다이던 응접실이 개미 돌아다니는 소리가 들릴 듯이 조용해졌다.

    뒤에서 서류를 의지하듯 꼭 끌어안은 하옐이 표정으로 미리, 윈터가 평소보다도 기분이 안 좋다는 주의를 주었다. 덕분에 응접실에는 아름다운 초가을에 어울리지 않는 살벌함이 흘렀다.

    윈터가 두 손바닥으로 쾅 테이블을 쳤다. 그 행동만으로도 저 거대한 체격이 보이는 것 이상의 힘을 가졌으리라는 것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기회를 줬는데도 한 놈도 자수를 하지 않았더군.”

    응접실 안에 침묵이 흐르자 윈터가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이며 말을 이었다.

    “됐어. 이제부터 하나씩 족치면 나오겠지.”

    “저, 저는 죄가 없습니다, 대표님!”

    솔린이 번쩍 손을 들고 말했다. 그 말을 듣자마자 윈터가 걸어가 멱살을 잡아 쥐자 하옐이 기겁해서 달려가 그의 팔에 매달렸다.

    “대표님! 가까운 곳에 작은 마님과 도련님이 계신다는 것을 잊지 말아 주세요!”

    하옐이 필사적으로 말린 탓에 윈터가 멱살을 놓았다. 눈물을 글썽거리는 솔린을 밀치고 돌아선 윈터가 말했다.

    “지금부터 한 사람씩 돌아가면서 면담할 테니 그런 줄 알아.”

    “대, 대표님, 저 퇴근은…….”

    발명가 중 하나인 세라의 말에 윈터가 테이블을 걷어찼다.

    “이 망할 발명가 놈들은 왜 하나같이 눈치가 없어? 싹 다 손잡고 나가게 해 줄까?”

    “그, 그럼 제 대출금은!”

    “닥치란 소리잖아!”

    윈터가 성질이 돋아 버럭 소리쳤을 때, 멀리서 아기 우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가 들리자마자 눈이 커진 윈터가 정신없이 테오의 방으로 달려갔다.

    먼저 도착한 바이올렛이 제 목을 끌어안고 서럽게 우는 테오를 토닥이며 달래고 있었다. 바이올렛이 윈터를 보더니 아들에게 말했다.

    “테오, 아빠 왔네. 아빠한테 갈까?”

    그러자 엄마 품에서 살짝 울음을 그친 테오가 윈터 쪽을 보았다가, 그쪽으로 아장아장 걸어갔다. 그런 테오를 기특하게 바라보던 윈터가 곧 아이를 안아 들었다.

    “우리 아들 놀랐어? 아빠가 미안해.”

    윈터가 언제 성질을 부렸냐는 듯이 다정다감한 얼굴로 달랬다. 윈터가 한참을 달래 주고서야 울음을 그친 테오는 하고 싶은 말이 많았는지 열심히 옹알이를 했다.

    “아맘.”

    “아냐, 난 아빠야. 아빠, 해 봐. 아빠.”

    “뺘!”

    “그래, 그래. 아빠 여기 있어.”

    윈터가 바로 칭찬해 주고 흐뭇해하며 바이올렛을 돌아보았다.

    “당신도 들었지? 아빠라고 하는 거. 우리 아들은 천재야.”

    그의 확신에 찬 모습에 바이올렛이 웃음을 터트렸다.

    당신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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