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화
바이올렛의 이야기가 끝나자마자 윈터가 앞자리 의자를 콱 발로 차며 몸을 일으켰다.
“우리 공주님이 멋진 말 하는데 왜 박수들을 안 쳐.”
그의 압력에 주변에 와 있던 참관객들이 얼떨결에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곧 바이올렛이 윈터를 흘겨 박수가 멈췄다.
곧이어 의장이 말했다.
“그럼 레클 강과 모든 섬에 대한 작위를 수정하는 법안에 찬반을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로빈 레위 의원.”
“반대합니다.”
“듈 올브라이트 의원.”
“반대합니다.”
초반에 나온 북부 귀족들 전부가 반대에 표를 던졌다. 이어서 필리체가의 의원 역시 반대했고, 남부의 워호슨이 호명되기 시작하였다. 가장 먼저 드루 블루밍이 말했다.
“반대합니다.”
워호슨의 종주, 블루밍가의 의원이 반대하자 순식간에 워호슨들의 표정이 굳었다. 블루밍가에서 반대를 하고 나설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던 탓이었다.
그러나 블루밍 가문의 전통대로 형이 작위를 받은 후, 의원의 자리를 이어받은 드루는 사업가이기도 했다. 지금 남부는 윈터 블루밍에 의해 이미 몰릴 대로 몰려 있었다. 여기서 윈터의 뜻을 거슬러 좋을 것 없다고 생각하여 나온 결론이었다.
이미 승패가 기울었다고 생각해 깍지를 껴 뒤통수를 받치고 뒤로 기대 있던 윈터가 마음에 들었는지 슬쩍 웃으며 아내를 보았다. 바이올렛은 동상처럼 반듯하게 앉아 오로지 의원 하나하나를 보고 있었다.
저를 다시 봐 주지 않는 건 섭섭했지만, 바이올렛이 원래 그런 사람이라는 건 이제 여기 있는 누구보다 가장 잘 알았다. 저를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녀는 원래 그런 사람이니까.
나중에 왜 자기 한 번을 안 봤냐고 투정 부려야겠다, 속으로 생각하는 사이 결정이 끝났다.
“모든 섬을 수정하는 안건은 전원 반대로 폐기되었습니다.”
그 순간 에쉬가 이를 꽉 물고 몸을 일으켜 바로 의회를 나가 버렸다.
그가 밖으로 나서는데, 그의 앞을 수도 경찰청 청장, 켄제스가 가로막았다.
“뭡니까, 켄제스 경?”
그러자 켄제스가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입을 열었다.
“방금 수도 중앙은행의 수사결과, 그리고 칼슨 로우의 자백으로 전하께서 마약상과 연계되어 있으시다는 것이 확인되었습니다.”
그의 말에 에쉬가 코웃음 쳤다.
“웃기지 마. 난 그런 적 없습니다.”
그는 자신이 있었다. 확실한 증거가 있을 것 같지도 않았고, 설마 있더라도 왕세자였던 그가 제대로 처벌을 받을 리도 없었다.
그때 에쉬는 인기척을 느끼고 뒤에서 걸어 나온 바이올렛을 돌아보며 말했다.
“너 진짜 미쳤어? 눈에 보이는 게 없어?”
그러자 바이올렛이 담담히 말을 이었다.
“말했잖아. 언젠가 은행장 역시 대가를 치러야 할 거라고. 너도 그렇고.”
“바이올렛!”
에쉬가 소리치고 다가가려는 순간 윈터가 뒤에서 아내의 귀를 막았다. 그러더니 믿기지 않는다는 듯 말했다.
“네놈은 어떻게 임산부 앞에서 그렇게 버럭버럭 성질을 못 죽이지? 내 아내에게 조금이라도 이상이 생기면 네놈은 내 손에 죽어.”
“켄제스 경! 저자가 살해 위협을……!”
에쉬가 윈터의 말을 듣지 않았냐고 돌아보는데 의회에서 나온 의원들이 기가 찬 표정으로 그를 보는 것이 느껴졌다.
“어떻게 임신한 여동생 앞에서 저렇게 큰 소릴 낼까.”
“세상에, 정말 믿을 수가 없군.”
그 자리에 있는 라크라운드에서 가장 강한 권력을 가진 이들 전부가 에쉬의 행동에 분노하고 있었다. 하물며 바이올렛이 언제 저희에게 복수할까 전전긍긍하며 두려워하던 워호슨들조차 임산부 앞에서 소리치고 있는 에쉬를 질색하는 표정으로 보고 있었다.
에쉬는 이 자리에 제 편이 아무도 없다는 것을 서서히 깨닫고 얼굴이 하얗게 질려 갔다.
그는 왕족이었고, 라크라운드의 왕실 로렌스가의 사내였다. 눈앞에 저를 체포하러 온 경관보다 명예가 추락하는 것에 더 큰 공포를 느꼈다.
바이올렛은 결혼을 통한 제 행동은 전적으로 저의 의지라 말했고, 의회의 모든 이는 받아들였다. 그 순간 그 결혼에 대한 에쉬의 공로는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다.
켄제스가 정중히 말했다.
“모시던 분을 끌고 가고 싶지 않습니다.”
“어차피 왕족은 끌고 갈 수도 없습니다.”
“하지만…… 전하께서는 이제 왕족이 아니십니다.”
켄제스가 안타깝다는 듯이 말했다. 에쉬는 포박을 하기 위해 다가오는 경관들을 발견하고 주먹을 꽉 쥐었다. 그와 함께 폴로와 사냥을 즐기던 자들은 전부 에쉬에 의해 금전적 이득을 보던 자들이었다. 그러나 그 금전적 이득이라는 것도, 윈터의 눈 밖에 나면 어느 누구도 장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에쉬가 부들부들 떨며 바이올렛을 보았다.
“이까짓 걸로 내가 실형이라도 받을 것 같아?”
“이게 끝일 것 같아?”
바이올렛이 어이없다는 듯 되물었다.
“이건 시작이야.”
“입 닥쳐!”
그 순간 옆에서 기겁하는 분위기가 느껴지더니 어느새 사람들이 두 사람을 에워쌌다. 에쉬의 위협적인 태도에 혹시라도 바이올렛에게 위험한 짓을 할까 염려한 탓이었다.
여기서 무슨 짓을 해도, 더 떨어질 곳도 없는 명예가 바닥나는 것은 에쉬였다.
그는 분노와 두려움이 뒤섞인 얼굴로 경관들과 경찰서로 이동했다.
그들이 사라지고, 바이올렛이 휘청거리자 윈터가 그녀를 꼭 끌어안으며 물었다.
“힘들지? 안아서 옮겨 주면 안 되나?”
“사람들 보잖아요. 걸어갈게요.”
“쓰러진 척해.”
“네?”
“쓰러진 척하면 안겨서 나가도 안 이상해 보이고, 에쉬는 더 쓰레기 같아 보이니까.”
“……너무 속 보이지 않을까요?”
“아니. 당신은 안 쓰러지는 게 더 안쓰러워. 식사도 제대로 못 하고 여기까지 와서.”
“연기를…….”
“그냥 눈 감고 힘 풀어. 나 믿어.”
바이올렛이 잠시 생각하다가 눈을 감고 그대로 몸에 힘을 풀었다. 그 순간 단단한 팔에 부드럽게 몸이 안겨지고, 번쩍 들렸다.
“이런, 아내가 쓰러졌어! 빨리 마차!”
윈터가 소리치며 빠르게 사람들 사이를 걸어가는데 주변이 걱정에 소란스러워지는 것이 느껴졌다. 바이올렛은 민망해 얼굴이 새빨개졌지만 다행히 윈터가 코트로 감싸 주어 들키지 않을 수 있었다.
두 사람을 태우고 난 후, 문이 닫히자마자 마차가 출발했다. 윈터가 실실 웃으며 말했다.
“에쉬가 실형은 어떻게 피해 갈지 몰라도 평판만은 돌이킬 수 없겠군.”
“그럴 것 같군요.”
바이올렛이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말을 이었다.
“하지만 실형도 피해선 안 돼요. 에쉬가 마약을 손쉽게 구하게 해 주는 바람에 칼슨이 당신을 쏜 거잖아요. 원래 라크라운드는 이렇게 쉽게 마약이 유통되는 나라가 아니잖아요.”
“우리 공주님 미움을 단단히 샀네. 그럼 일단 실형을 받게 하고 다른 재소자에게 뇌물을…….”
“그런 농담도 하지 말아요. 애초에 왕족이었던 에쉬가 다인실을 쓸 리도 없지만요.”
“알았어, 안 할게.”
윈터가 실실 웃으며 대꾸하고는 고생했을 바이올렛의 다리를 마사지해 주며 집으로 향했다.
집으로 가는 도중부터 눈이 내렸다. 마차가 불 켜진 저택에 가까워진 덕에 날리는 눈이 보이자 바이올렛이 윈터를 돌아보며 물었다.
“잠깐 정원을 보고 싶다고 하면 싫어할 거죠?”
그녀의 말에 윈터가 능청스레 어깨를 으쓱였다.
“놀랍게도 당신이 오늘 정원을 보고 싶어 할 줄 알았어.”
“정말요?”
“응. 이제 마음의 여유가 생겼으니까. 당신이 가장 좋아하는 장소에 있고 싶겠지.”
윈터가 알아주자 바이올렛이 웃음을 터트렸다.
“알아줘서 고맙군요.”
두 사람은 저택 포치에서 내려 로비를 가로질러 정원으로 향했다. 두 사람을 반겨 준 사용인들이 오늘 일을 듣고 반가워했다.
“그럼 작은 마님께서 그 작위를 받으시는 거예요?”
“도중에 별 문제가 없다면 그렇게 되겠지?”
“아휴, 문제가 있으면 제가 가서 해결할게요!”
“저도요, 작은 마님!”
다들 흥겨운 분위기였다. 윈터가 로비 벽난로 앞을 턱짓했다.
“가볍게 한 잔씩들 하지. 좋은 날이니. 주방장은 가서 실력 좀 발휘하고.”
그의 말에 다들 신이 나서 벽난로 앞으로 달려가 작은 축하 파티 준비를 시작했다. 대부분 호텔에서 교육 커리큘럼을 받고 이곳으로 오는지라 누구나 파티 준비에 익숙했다. 가져온 장식품들을 벽난로며 벽에 걸었다.
“산책 빨리 하고 오세요!”
재빨리 그 틈에 낀 하옐이 그리 말하며 술병 트롤리부터 찾아 밀고 오자, 젠이 핀잔했다.
“술도 못 마시면서 뭘 그렇게 많이 가져와요?”
“한 잔은 마셔요.”
“한 모금이겠죠.”
두 사람이 티격태격할 때마다 행복한 표정을 짓는 바이올렛이 두 사람에게 시선을 뺏기자 윈터가 그녀의 어깨를 감싸 돌리며 말했다.
“쟤네 둘이 안 맞아. 그렇게 엮어 주고 싶어 하지 마.”
“잘 어울리는데.”
“안 어울린다니까.”
“우리도 처음부터 잘 맞진 않았는걸요?”
“그래도 어쨌든 첫눈에 반하긴 했잖아.”
“음. 그건 확실히 그렇군요.”
바이올렛이 납득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잠깐 뒤를 돌아 신이 나서 파티 준비 중인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행복한 표정으로 윈터와 함께 정원으로 나섰다.
찬바람 때문에 단단히 닫아 뒀던 문이 열리는 순간 바이올렛의 입이 절로 열렸다.
“세상에…….”
정원의 눈 쌓인 나무들에 조명들이 휘감겨 있고, 한가운데 모닥불이 타고 있었다. 얼음으로 조각한 꽃들이 겨울의 정원에 가득했다.
바이올렛이 넋이 나간 얼굴로 정원을 바라보는데 윈터가 그녀의 손을 부드럽게 당겼다.
“마음에 들지? 당연히 들겠지.”
“어, 언제 준비한 거예요?”
“계획은 오래 했고, 준비는 우리 떠난 사이에 속전속결로.”
윈터가 뽐내듯이 말하더니 유쾌하게 웃었다.
두 사람은 천장이 없는 하얀 마차에 타서, 바이올렛이 좋아하는 나무 아래에 내려섰다. 그 나무에는 알록달록한 유리 갓을 씌운 커다란 조명이 달려 있어 동화 속에라도 들어온 기분이 들었다.
그 아래 둔 카펫 위에 바이올렛이 올라서자, 윈터가 그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의 행동에 놀란 바이올렛의 눈이 동그래졌다. 윈터가 상자를 꺼내며 말했다.
“프러포즈 할 거니까 반지 말고 나에게 집중해 줘.”
“어머…….”
“우리 처음 결혼할 땐 못 했잖아. 이제 두 번째 결혼식을 할 테니, 이번이 기회야.”
“와, 프러포즈 처음 받아 봐요.”
바이올렛의 농담에 윈터가 웃었다.
“그거 놀라운 일이군.”
상자를 열자, 그 안에 올리비아 로렌스의 유산인 핑크 다이아몬드 반지가 있었다. 바이올렛이 놀라 하자 윈터가 잽싸게 말을 이었다.
“어떻게 구했냐고 물어보지 마. 이제 당신 거야.”
“이건…….”
“바이올렛 로렌스.”
“…….”
“당신의 남편이 되게 해 줘.”
윈터의 말에 바이올렛이 멈칫했다. 그러자 그가 그 당혹감을 예상했다는 듯 미소 지으며 말을 이었다.
“블루밍 공작가는 당연히 이을 거야. 하지만 그래도 당신의 성을 따르고 싶어. 작위와 성이 다른 경우도 얼마든지 있잖아. 정 안 된다면 작위를 포기하고. 난 어차피 돈이 많잖아.”
윈터가 농담을 섞는데도 바이올렛은 웃지 못했다. 윈터가 간절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어릴 때는 가족이 필요했고, 조금 더 커서는 돈이 많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그 다음에는 명예를 가지고 싶었어.”
“…….”
“그리고 지금부터 내가 죽을 때까지의 꿈은 당신의 남편이 되는 것 하나야. 그러니 내 꿈을 위해 당신이 나보다 하루라도 더 오래 살아 줘야겠지.”
남편의 짓궂은 표정과 말에 바이올렛이 눈물 고인 눈으로 실소했다. 그러더니 곧 입을 열었다.
“그럼 내 꿈은 당신의 아내가 되는 걸로 하겠어요. 그리고 당신보다 하루라도 더 오래 살게요. 약속해요.”
바이올렛의 해맑은 웃음이 섞인 대답에 윈터가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한 얼굴로 웃었다. 바이올렛의 손가락 위에 핑크 다이아몬드 반지가 끼워지고, 윈터가 몸을 일으켰다.
가슴이 벅찬 두 사람이 벌써부터 파티 분위기로 떠들썩한 저택으로 걸어가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었다.
바이올렛이 한 번 정리하듯 말했다.
“그럼 남자아이면 테오, 여자아이면 올리비아로 하는 거네요?”
“응. 둘 다 아주 마음에 드는군.”
그의 애정이 담뿍 담긴 대꾸에 바이올렛이 즐거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눈이 내리기 시작해, 중간부터는 커다란 우산을 펼쳤지만 두 사람의 걸음은 급해지지 않았고 오히려 이야기를 하느라 중간에 잠깐씩 멈추기만 했다. 그러던 도중에 젠과 하옐이 감기 걸린다고 성화한 후에야 두 사람의 걸음이 조금 빨라졌다.
당신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에필로그 1
라크라운드는 추위에는 강했지만 더위에 대한 대비는 잘 되어 있지 않은 나라였다. 물론 수도의 여름이 그리 더운 건 아니었지만, 윈터는 바이올렛을 위해 북부에 별장을 새로 마련해 그곳에서 여름을 나게 했다.
다행히 산달이 가까울 즈음 바이올렛은 식욕이 왕성해져 평소 제가 좋아하던 고기를 다시 먹기 시작했다.
윈터는 아이를 낳는 동안 옆에 있고 싶어 했으나, 바이올렛의 단호한 명령하에 진통이 시작되기 무섭게 밖으로 쫓겨난 상태였다. 전날 밤 쫓겨나 아내의 얼굴을 보지 못하고 이른 새벽까지 복도에 주저앉은 윈터는 당장 죽음이라도 앞둔 사람처럼 겁에 질려 있었다.
하옐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대표님, 여기 계속 앉아 계실 겁니까?”
“아내가 왜 날 안 만나 주지?”
윈터가 불안한 표정으로 묻자 하옐이 대꾸했다.
“작은 마님 진통하시는 거 보면 대표님이 둘째는 말도 못 꺼내게 하실 테니까요.”
“출산이 고통스러운 걸 모를 정도로 멍청하지 않아.”
“이론과 실제는 다르죠. 작은 마님께 미열만 있으셔도 난동을 부리시잖아요.”
하옐은 윈터를 최대한 침실에서 멀어지게 하고 싶어 설득했으나 그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문지기처럼 그 앞을 지키고 있었다.
그때 침실 안에서 바이올렛이 괴로워하는 소리가 들리자 결국 윈터가 벌떡 일어났다. 그러자 하옐이 서둘러 막으며 말했다.
“대표님! 대표님 들어가시면 작은 마님이 진짜 안 본다고 하셨잖아요!”
“못 들었어? 아내가 소리를 질렀잖아! 뭔가 문제가 생긴 거 아냐!”
“진정하세요! 출산이 고통스러운 거 아신다면서요!”
“내 아내는 안 돼!”
이성을 잃고 버럭버럭 소리치던 윈터가 하옐을 밀쳤다. 그때 안에서 산파가 나와 주의를 주었다.
“산모께서 집중하고 계십니다. 밖에서 소란을 피우시면 안 됩니다.”
“아, 아내에게 문제가 생긴 건!”
“전혀요. 경과 달리 산모께서는 아주 잘하고 계십니다.”
아내에게는 한없이 인자하던 산파가 단호하게 말하더니 문을 닫아 버렸다. 그녀는 왕실에서 일하던 산파로, 바이올렛을 제 손으로 직접 받았던 사람이었다.
산파가 들어가고 다시 아내의 울음 섞인 비명 소리가 들리자 윈터가 가슴을 부여잡았다. 애간장이 녹는 고통에 눈물이 쏟아졌다. 아내를 아프게 한 이 아이를 용서하지 못할 것 같은 기분마저 들었다.
윈터가 몸을 덜덜 떨며 문에 손을 올렸다.
“망할, 내 아내가 내 대신 그렇게 오래 아팠는데. 오늘 같은 날…….”
그렇게 생각하던 윈터가 멈칫하더니 다시 자리로 돌아갔다. 그리고 침착하게 의자에 앉더니 두 손을 모았다.
제가 총을 맞던 날에도 아내가 대신 몸이 아플 수 있었다. 그러니 분명 산통도 어떻게 제가 가져올 수 있는 게 아닐까.
태어나서 처음으로 신에게 욕 없이 기도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바이올렛의 울음소리가 잦아들었다. 그와 동시에 윈터는 숨이 멎을 것 같은 통증이 온몸으로 퍼져 나가는 것을 느꼈다.
그가 욕설을 퍼부으며 몸을 구기자 하옐이 놀라서 다가왔다.
“대, 대표님?”
“뭐.”
“안색이 너무 안 좋으세요!”
“아내가 힘들어하는데 표정이 밝으면 그게 정상이냐?”
윈터는 성질을 냈으나 금방 즐거움에 입꼬리가 씰룩거리기 시작했다. 분명했다. 제가 아픔을 가져오고 있었다.
처음에는 조금씩 퍼지던 아픔이 어느 순간인가, 까무러칠 정도로 거세지기 시작했다. 윈터는 아픔을 가져오는 게 기쁘더니, 곧 아내가 어젯밤부터 이렇게 아팠다는 게 너무 미안해 눈물이 났다.
“대표님! 누우셔야 한다니까요!”
“닥쳐.”
윈터는 단호히 대답했으나 순식간에 식은땀으로 등이 흠뻑 젖어 들었다. 몸속에 폭탄이라도 들어 있는 것 같았다. 윈터는 정신을 차리려 안간힘을 썼으나, 서서히 뿌연 안개 속으로 정신이 가라앉는 기분을 느꼈다.
그 안개에 빠지는 사이, 멀리서 아기가 우렁차게 우는 소리가 들렸다.
*
번쩍 눈을 뜬 윈터가 상체를 일으켜 보니 제 침실이었다.
그는 멋대로 링거를 뽑아 버리고 정신없이 아내가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젠장!”
아이가 태어나는데 기절해 있던 제가 세상에서 제일 쓸모없는 인간으로 느껴졌다. 혹여나 제가 쓰러졌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을까 봐 겁에 질려 달려가 보니 탈진해 침대에 누워 있던 바이올렛이 제 쪽을 보았다. 그녀가 와중에도 걱정스러워하며 물었다.
“쓰러졌다고 들었는데. 괜찮아요?”
“당신이 왜 날 걱정해?”
윈터가 딱 잘라 말하더니 침대 옆에 모여 걱정하는 사용인들을 손으로 휙휙 쫓아냈다. 그리고 침대 옆 의자에 앉아 그녀의 손을 감싸고 말했다.
“미안해. 깜빡 잠들었어. 평생 혼내도 돼.”
“아닌 거 알아요. 갑자기 고통이 확 줄어들었는걸요. 순간 천국이라도 도착한 줄 알았다고요.”
“무서운 소리 하지 마.”
천국이라는 말에 윈터가 질색하더니 사용인들 쪽을 보았다. 혹여나 싶어 아내에게 묻지도 못하고 눈빛으로 아이의 행방을 묻는 걸 바이올렛이 눈치채고 그녀가 웃었다.
“당신 닮아서 제법 큰 편이래요.”
“그, 그렇대? 이 녀석은 왜 커가지고 어머니를 고생시켜?”
윈터가 어떤 표정을 지을지 몰라 얼떨떨해하더니 물었다.
“그럼 아이는?”
“낳자마자 잠깐 봤어요. 곧 다시 데려올 거예요.”
“어땠어?”
“직접 봐요.”
바이올렛이 생각만으로도 눈물이 그렁거려 손등으로 눈물을 닦아 내고 웃었다. 눈물이 많지 않은 아내가 울자 윈터는 마음이 찡해져 저도 모르게 몇 번이나 그녀에게 입을 맞췄다.
그때 문이 열리더니 룰루가 배냇보로 감싼 아기를 데려와 바이올렛에게 안겨 주었다.
“우리 도련님 좀 보세요. 세상에. 어쩜 이렇게 천사 같을까.”
도련님이라는 말에 윈터는 그제야 사내아이란 것을 알았다. 아이를 받아 든 바이올렛의 손이 떨리고,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툭툭 떨어졌다.
“안녕?”
그녀가 울음 섞인 목소리로 인사했다. 그러자 그 말을 알아들은 것처럼 테오가 눈과 입을 여는 게 아닌가. 그 모습에 부부는 시선을 뺏겨 멍한 표정을 지었다.
마치 윈터를 그대로 빼다 박은 것 같은 검은 머리칼에 회색 눈동자였다. 혹여나. 정말 만에 하나 회색 눈이라고 한 소리 하면 크게 화를 내려고 바이올렛이 윈터를 보는데, 그가 넋이 나가 입을 열었다.
“눈이 날 닮았네.”
“완벽히 당신 눈이죠.”
“이렇게…… 손바닥만 한 녀석이 당신을 살리겠다고 대신 아팠던 건가?”
그의 말에 바이올렛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죠.”
“자기도 이렇게 작은데.”
“네, 이렇게 작은데.”
“당신이 낳아서 천사인가 봐.”
윈터가 조심스럽게 아이를 안아 보았다. 그리고 한참 동안 제 아들을 바라보던 그가 입을 열었다.
“지금부터 회색 눈을 보고 한 마디라도 부정적인 소릴 하는 놈이 있으면 머리통을 날려 버리겠어.”
“윈터, 아가가 들어요.”
“들어야지. 너도 혹시 누가 너 깔보면 두들겨 패고 들어와라. 아빠가 다 책임질 테니까.”
윈터가 건강한 아내와 아이를 보니 안심이 되어 능청을 떨었다. 그러나 이미 하도 울어 눈이 시뻘게져 있었고, 다시 또 울음이 나는지 이를 악물어 눈물을 참았다가 또 아내와 아이를 보았다가 하고 있었다.
“테오 블루밍 로렌스.”
그가 이름을 말해 보더니 행복에 겨워 말을 이었다.
“당신 말대로야. 벌써 사랑에 빠진 것 같아.”
“나도 그래요.”
곧 하녀 중에 미리 뽑아 두었던 유모가 다시 아기를 데려갔다. 바이올렛은 아이가 제 손을 떠나기만 해도 슬픈 표정이 되었다. 그러자 윈터가 그녀를 꼭 끌어안으며 말했다.
“고생했어. 이제 좀 자야지.”
“테오와 있고 싶은데…….”
“내가 가서 볼게.”
윈터가 몇 번이고 아내를 달래고 연신 입을 맞춰 준 후에야 바이올렛이 마음을 가라앉혔다. 둘만 남아 잠시 조용해진 후에야 그들은 저희가 무사히 부모가 되었음을 실감했다. 그러자 두 사람의 얼굴에 저절로 행복한 미소가 번졌다.
*
바이올렛은 아이가 벌써부터 저를 엄마라고 알아차리는 것이 너무나 신기했다. 유모와 제법 많은 시간을 보내도 바이올렛만 보면 서러웠다는 듯이 울며 안겨 들었다.
엄마 품에서 실컷 배를 채운 테오가 언제 울었냐는 듯이 새근새근 잠들었다. 그사이 바이올렛의 침실을 따듯하게 데운 하녀들이 침대에 모여들었다.
“아기 도련님은 어쩜 벌써부터 이렇게 잘생겼을까요?”
“제가 장담하는데 라크라운드의 아기들 중에 제일 귀여울걸요?”
“작은 마님이랑 대표님을 닮았는데 당연하죠.”
모두가 모여 테오를 구경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원래도 저택은 늘 분위기가 좋았지만, 새로 아기 도련님이 도착한 후부터는 한겨울 추위가 무색하게 활기찬 생기로 가득했다. 바이올렛은 즐거워하던 중에도 드문드문 늦어지는 윈터를 걱정했다.
테오가 태어난 후로 일을 팽개치고 육아에 전념하던 윈터는 사흘 전, 더는 도저히 일을 미룰 수가 없어 출장을 떠났다. 가뜩이나 나가길 싫어했는데, 눈 때문에 돌아오는 시간이 더 늦어지고 있었다.
그녀가 창밖을 보며 걱정하고 있을 때 문이 벌컥 열렸다. 길이 온통 빙판이라 느려 터진 마차를 팽개쳐 버리고 눈길을 걸어온 윈터가 서 있었다. 하녀들은 또 시장 바닥을 만들었다고 혼날까 봐 얼른 인사하고 침실을 나갔다.
윈터에게서 차가운 공기가 느껴졌다. 그가 놀란 아내의 표정에 능청스레 웃어 보이더니 눈이 녹으며 푹 젖어 버린 코트를 벗고는 물었다.
“별일 없지?”
“그건 내가 할 질문 아닌가요?”
“오는 내내 우리 아내랑 꼬마 걱정을 하도 해서. 일단 물어봤어.”
말을 마친 윈터가 침대에 걸터앉았다. 그때 테오가 한기 때문인지 잠깐 눈을 뜨고 윈터를 보았다. 그러더니 길게 하품을 하고 방긋 웃는 게 아닌가.
윈터가 충격받은 표정을 지었다.
“……방금 나 보고 웃은 건가? 내가 자기 아빠인 거 아나?”
“아무래도 그런 것 같죠?”
“사흘이나 나가 있었는데? 이 꼬마 인생에서는 엄청 긴 시간 아닌가? 그런데도 날 기억하다니 천재 아냐?”
“진정해요.”
“진정할 때가 아니야. 천재는 육아가 더 까다롭대. 당신도 알지?”
오늘 오후까지도 날이 서서 일하던, 신경질적이기 그지없던 카닉사의 대표는 사라지고 제 아들 앞에서 나사 풀린 얼굴로 아기 표정 살피기에 여념이 없는 사내만이 남았다.
곧 다시 잠든 아기를 따듯한 요람에 눕히고 나서 두 사람은 일주일간 하지 못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윈터는 바이올렛이 잠들기 전의 시간을 잠깐도 놓치고 싶지 않아 그녀를 꼭 끌어안고 말을 이었다.
“결혼식 준비는 잘 되어 가고 있다더군. 작위 계승식은 언제쯤부터 준비를 하면 되는 거지?”
“로렌스가와 의회에서 이야기가 끝나면 정할 수 있겠죠?”
“왜 그렇게 이야기가 오래 걸리는지 모르겠어. 날짜 잡는 게 뭐 어렵다고.”
윈터가 투덜거리더니 아내의 턱을 부드럽게 감싸 잡고 입을 맞추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바이올렛의 허리를 안아 제 허벅지 위에 앉혔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다시 입을 맞추기 시작했다. 할 이야기가 많았는데, 한번 입술이 닿고 나니 두 사람 다 서로에게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윈터가 제 셔츠 단추를 푸는 바이올렛을 꿀이 떨어지는 눈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나 보고 싶었지?”
“보고 싶었어요.”
“출장 가서 미워?”
“아뇨.”
“밉다고 해 줘.”
“그럼 미워요.”
“못 가게 해, 이제.”
그의 낮은 목소리와 야릇한 눈빛에 바이올렛은 저도 모르게 몸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남편은 종종, 제가 없으면 당장 죽을 듯한 표정을 지을 때가 있었다. 예전엔 그게 염려스러웠는데, 남편에게 안정감이 느껴지기 시작한 이후부터는 오히려 만족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바이올렛이 윈터가 각각 감싸 쥔 두 팔을 올려 남편의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이제 출장 가지 말아요.”
“좀 더 강하게 명령해야 듣지. 나 같은 놈은.”
“명령이에요, 윈터 블루밍 로렌스.”
바이올렛의 말에 윈터가 어깨를 들썩이고 웃었다. 그러더니 그녀를 쓰러뜨려 눕히고 목덜미에 입술을 묻으며 말했다.
“사랑스럽네.”
“사랑스러우라고 한 거 아니에요. 정말로 명령이에요. 출장 가지 말아요. 앞으로.”
“……진심 같네?”
“네. 당신 돈 많잖아요. 다른 사람을 고용해서 보내요.”
“나랑 하루 종일 같이 있고 싶어?”
여전히 바이올렛이 주는 사랑을 신비하게 여기는 윈터가 재촉하듯 물었다. 그러자 바이올렛이 부끄러운지 시선을 피하며 솔직하게 말했다.
“당신 출장 가는 거 정말로 싫어요. 당신과 다른 침대에서 자는 거…… 정말 너무 싫어요.”
“나만 그런 줄 알았어.”
윈터가 처음 달콤한 맛을 느낀 어린아이처럼 푹 빠진 표정을 지었다. 그러더니 바이올렛의 품에 얼굴을 묻으며 중얼거렸다.
“나만, 이제 혼자 못 자게 된 건 줄 알았어. 어린애처럼.”
“나도 그래요.”
“다행이군. 우리 공주님도 나와 같아서.”
그의 말에 바이올렛이 웃었다.
“정말…… 당신도 나와 같네요.”
당신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에필로그 2
이듬해 5월, 두 사람은 그들이 사는 저택 정원에서 두 번째 결혼식 준비를 마쳤다.
아침 햇살과 함께 눈을 뜬 바이올렛은 중간에 깨서 울던 제 아들부터 안아 다시 재우고 있는 윈터를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테오는 당신을 정말 좋아해요.”
“놀랍군. 난 내 아버지가 싫은데.”
“당신은 좋은 아버지이고 좋은 남편이에요.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어요?”
바이올렛이 그리 말하며 침대에서 천천히 일어나 그의 곁으로 걸어갔다. 아내의 말에 한껏 우쭐해진 윈터가 조심스럽게 테오를 내려놓으려 하자 아이가 내려놓지 말라고 칭얼거렸다. 윈터가 다시 아이를 안아 들자 그제야 테오가 꾸벅꾸벅 졸았다.
바이올렛이 그런 테오를 사랑스럽게 바라보며 말했다.
“당신이랑 똑같이 닮았어요.”
“내가 이렇게 귀엽다고?”
“난 당신 어릴 때를 보고 왔잖아요. 딱 이렇게 생겼어요. 얼마나 귀여웠는데.”
바이올렛이 실제로 증인이기까지 했지만 여전히 윈터는 저를 닮은 아이가 이렇게 사랑스럽다는 걸 믿지 못했다.
테오가 완전히 잠든 후에야 요람에 내려놓았다. 유모들이 아이를 돌보는 사이 두 사람은 예복으로 갈아입기 위해 각자의 드레스 룸으로 향했다.
잠시 후 웨딩드레스로 갈아입고 난 바이올렛이 앞에 놓인 거울을 보았다.
부부가 선택한 것은 심플하면서도 완벽한 실크 드레스에 긴 소매의 레이스 볼레로를 걸친, 클래식하고 우아한 순백드레스였다. 레이스에는 로렌스와 블루밍 가문의 문장, 그리고 눈의 결정과 제비꽃이 섬세하게 수놓여 있었다.
그사이 바이올렛의 머리칼을 둥글게 틀어 올린 젠이 말했다.
“다 됐어요.”
“어머나, 정말 마음에 쏙 드는구나.”
“이제 티아라 올릴게요.”
“그래.”
바이올렛이 부담스러워하며 티아라를 보았다.
백금과 투명한 다이아몬드만을 가지고 만든 티아라였다. 젠이 장갑을 끼고 크게 한숨을 쉰 후 티아라를 들어 올렸다.
“잠깐만 숨 참아 주세요. 떨어뜨릴까 봐 무서워요…….”
“응. 숨 참을게.”
티아라 중앙에 물방울 모양의 거대한 다이아몬드가 있고, 그 양옆에 두 개의 절반 크기의 다이아몬드, 그리고 수도 없이 많은 작은 크기의 다이아몬드들이 촘촘하게 티아라를 장식하고 있었다. 이 티아라만을 관리하는 직원이 따로 존재했고, 라크라운드 역사상 최고가의 보석 보험료가 걸려 있었다.
하녀 셋이 붙어서 티아라를 완벽하게 올리고 고정했다. 마지막으로 관리원이 잘 고정된 것을 확인한 후에야 하녀들이 모두 손을 뗐다. 젠이 제 아름다운 작품을 매우 만족스럽게 바라보며 말했다.
“전 이제부터 사진사예요. 오늘을 위해서 기술을 익혔죠.”
“아, 기대되는구나.”
젠이 적성을 찾은 것을 바이올렛이 흐뭇해하고 있을 때 대기실로 꽃바구니를 든, 키론에서 옆집에 살던 꼬마 리나가 달려 들어왔다.
“바이올렛!”
“아, 리나 왔니?”
바이올렛이 손을 내밀어 리나의 손을 잡았다. 젠이 긴 치맛자락을 정리해주며 리나에게 물었다.
“작은 마님 어때, 리나?”
“오늘은 세상에서 제일 예뻐! 역시 공주님이라서 그런가 봐!”
“정말? 리나의 엄마보다도?”
“응. 오늘만이야. 비밀이지, 바이올렛?”
리나가 묻자 바이올렛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당연히 비밀이지.”
리나가 내민 새끼손가락에 같이 손가락을 걸어 준 바이올렛의 얼굴에 해맑은 웃음이 가득 퍼졌다. 눈꽃을 뿌려 놓은 듯한 바이올렛을 넋 놓고 보던 리나가 얼른 정신을 차리고 제 본분을 떠올려 냈다.
“난 오늘 꽃 뿌리러 왔지, 참. 내가 꽃 골고루 뿌려 줄게.”
어른스럽게 말하고 먼저 달려 나간 리나가 귀여워 바이올렛이 젠과 마주 보며 다시 웃음을 터트렸다.
잠시 후 하옐이 들어와 발코니에 단단히 쳐 둔 커튼 앞에 섰다.
“준비되셨죠, 작은 마님?”
“응. 다 됐네.”
“자, 그럼 열겠습니다.”
하옐이 심호흡하더니 커튼 밖으로 조심스럽게 나갔다. 이윽고 단번에 커튼이 양옆으로 열렸다.
그 순간 박수 소리가 들리며 커튼 너머 발코니에 서 있던 윈터와 눈이 마주쳤다.
이상하게도 그 순간, 바이올렛은 눈물이 날 것 같아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그건 윈터도 마찬가지인지 울컥한 표정으로 이를 꽉 악물고 있었다.
머리칼을 말끔히 넘기고 근사한 턱시도를 차려입은 윈터가 손을 내밀었다. 그가 중얼거렸다.
“당신은 나에게 천운이야.”
“윈터…….”
“내가 이렇게 행복해질 줄이야.”
그의 말에 바이올렛 역시 행복한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 윈터가 몇 번의 심호흡 끝에 진정을 하고 그녀의 손을 잡아 발코니로 에스코트했다.
두 사람이 계단 위에 서자 중간에 서 있던 리나가 계단에서부터 사제가 있는 곳까지 길게 깔려 있는 새하얀 실크 위로 폴짝폴짝 걸어가며 야무지게 꽃을 뿌렸다. 기자들은 어떤 귀족 가문에도 속하지 않은 아이가 이 대륙 전체의 관심을 받는 결혼식에서 꽃을 뿌리고 있음에 대해 열정적으로 받아 적었다.
그 사이, 바이올렛이 리나의 야무진 손놀림에 웃음 짓자 윈터가 허리를 숙여 소곤거렸다.
“스파이네 꼬마가 화동 노릇을 톡톡히 하네. 우리 공주님 표정을 이렇게 풀어 주고 가다니.”
“그러게 말이에요. 정말 똑똑한 아이예요.”
두 사람이 걸음을 옮겼다. 바이올렛은 정면을 바라보다가 잠깐 이 두 번째 성대한 결혼식을 축하해 주러 온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정원에서 박수를 치고 있었다. 대륙에서 내로라하는 귀족들은 물론 사용인들도 일을 잠시 중단하고 전부 버진 로드로 모여들었으며, 칼리본과 알리카 사람들, 카닉사 사람들까지, 아무튼 부부를 축하해 주고 싶은 사람은 누구라도 정원에 들어섰다.
곧 두 사람은 바이올렛이 직접 디자인한 웨딩 아치 아래 섰다. 바이올렛이 감상하듯 버진 로드를 바라보았다. 그 양옆에 쳐진 울타리에 긴 흰색 리본이 연결되어 있고, 그 줄에 제비꽃이 가득 핀 꽃바구니가 걸려 있었다.
5월의 정원은 향긋하고 눈이 부셨다. 세상 어디에도 없을 아름다운 정원은 이 찬란한 봄, 이곳에 자리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로맨틱함으로 가슴을 차오르게 했다.
사제가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기다가 남편을 올려다본 바이올렛이 웃음을 지었다. 그 시선을 느꼈는지 윈터가 아내 쪽으로 몸을 숙여 귓가에 소곤거렸다.
“당신 정말 천사 같아.”
“당신도요.”
“천사 같아?”
“네.”
바이올렛의 말에 윈터가 씨익 웃었다. 사제가 이야기하는 내내 그의 시선은 아내에게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하객들은 누구나, 이 눈부시게 아름다운 부부가 행복해하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
결혼식이 끝나고 파티가 시작되기 전에 작은 행사가 있었다. 사람들은 저택에서 조금 떨어진, 유인비행선을 세워 둔 넓은 공터로 몰려 나갔다.
작년 여름, 윈터의 비행 사업은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파일럿 하나가 무사히 바다를 건너 옆 대륙에 다녀온 것을 시작으로 그해 겨울, 최초로 관광객들이 탄 비행선이 라크라운드를 한 바퀴 돌고 내려왔다.
오늘 결혼식은 모든 것이 사람들의 관심사였다. 그러니 이만큼 좋은 홍보의 기회를 윈터가 놓칠 리 없었다.
“가방은 전부 직원들에게 맡겨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티스컷가에서 오신 두 분 어디 계신가요! 바로 탑승하세요!”
소란 속에서 사람들이 황홀한 얼굴로 비행선에 올랐다.
결혼식을 진행할 때까지만 해도 바이올렛 부부 역시 비행선을 탈 생각이었다. 그러나 두 사람 다 테오를 바라보기만 할 뿐 잠시 움직임이 없었다.
잠시 후 윈터가 먼저 입을 열었다.
“테오가 비행선을 탈 수 있을 때까진 그냥, 타지 말까?”
“그럴까요?”
바이올렛이 기다렸다는 듯이 되물었다.
테오는 아직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비행선에 태울 수 없었고, 두 사람은 아이를 여기 두고 비행선에 타고 싶지 않았다. 비행선의 안전을 가장 자신하는 것이 윈터였다. 그럼에도 혹여나 아이를 세상에 혼자 둘지도 모를 일은 만들고 싶지 않았다.
두 사람 다 비행선을 정말로 좋아했고, 정말로 타고 싶어 했으므로 두 사람의 고민은 마지막까지 이어졌다. 결국 부부는 비행선을 타지 않기로 결정했다.
윈터가 바로 올라가라고 파일럿에게 손짓해 보이고는 중얼거렸다.
“자식 때문에 마음이 약해져서 저런 모험을 포기하다니. 재미없는 어른이 됐군.”
“강한 삶의 의지가 생겼으니 좋은 일이네요.”
“언제나처럼 긍정적인 부분부터 보시는군요?”
윈터가 짓궂은 얼굴로 대꾸했다.
잠시 후 비행선이 위로 떠올랐다. 윈터가 비행선에 환호하는 사람들 소리에도 깨지 않고 유모차 안에 새근새근 잠들어 있는 테오를 허리 숙여 내려다보며 말했다.
“네 녀석 때문에 우리가 모험을 포기했어. 알아줬으면 좋겠네.”
그 말에 바이올렛의 웃음소리가 들리자 윈터가 따라서 입꼬리를 끌어 올리고는 말을 이었다.
“널 위해서 오래 건강하게 살아야 하거든, 우리가.”
윈터가 몸을 바로 하자 바이올렛이 그의 손을 꼭 쥐었다. 이어 바이올렛이 손을 당기며 말했다.
“둘째가 있으면 더 좋겠죠?”
“당신이 그렇게 원하니 말릴 수는 없지만, 하나도 기적인데 두 번이 있겠어?”
“노력해보겠어요.”
바이올렛의 또렷한 목소리에 윈터가 웃었다.
“하긴, 끈기는 당신의 장점이지.”
윈터는 아내가 얼마나 성실하게 제 목표를 이루려 할지 벌써부터 두근거렸으나 애써 침착한 척을 했다.
그리고 이내 서로를 마주 본 두 사람은 제가 목숨을 바쳐도 아깝지 않을 상대와 평생을 함께할 약속을 다시금 맺었다는 사실에 새삼 감격했다.
그들은 스스로가 이렇게 삶에 집착하게 될 거라고는 생각해 보지 못했었다. 모든 순간순간이 행복으로 가득 차 다음 순간을 기대하는 삶을 살게 될 것이라고는.
비행선은 두 시간 동안 이동하다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고, 탑승객 모두 황홀함에 푹 빠져 있었다.
“파티 하러 가자.”
윈터의 말에 바이올렛이 웃으며 대답했다.
“마치 파티를 좋아하는 사람처럼 말하네요. 늘 중간에 도망치면서.”
“솔직히, 파티 싫어.”
“파티가 수도 없이 열리는 호텔 대표가 파티를 싫어하면 어떡하죠?”
“그러니까 하는 말이지. 나한테 파티는 일의 연장이야.”
윈터의 투덜거림에 바이올렛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럼 우리 잠깐만 있다가 들어가서 테오와 놀아요.”
“세상에, 그렇게 좋은 생각을 하다니. 우리 아내는 천재인가 봐.”
윈터가 짓궂게 말하더니 유쾌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고는 바이올렛의 허리를 끌어안고 눈꼬리를 휘어 웃으며 말했다.
“사랑해.”
그의 말에 바이올렛이 대답 대신 윈터의 목을 끌어안아 입을 맞췄다. 윈터는 야외에서 이렇게 입을 맞춰 오는 아내의 대담함에 어깨를 들썩이고 웃었다. 다른 사람들도 바이올렛이 그런 행동을 한다는 것에 다소 놀랐으나, 이 부부의 결혼식이었으므로 다들 유쾌하게 받아들였다.
두 사람은 저희가 믿을 수 없이 다른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드물게 보이는 공통점들을 기쁘게 받아들였다. 어쩌면 반대여서 그 공통점이 더 반갑게 느껴지는 걸지도 모르겠다고 부부는 생각했다.
부부가 테오, 그리고 첫 번째 생일을 맞은 딸아이 올리비아와 함께 비행선에 탄 것은 그로부터 3년이 지난 후의 일이었다.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