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159화 (159/176)
  • 159화

    바이올렛은 하옐이 불쌍한 눈을 하고 내미는 일들을 거의 사흘 밤낮없이 처리한 후 겨우 집으로 향했다.

    그녀가 집에 와 보니 윈터가 얼마나 패악을 부렸는지 사용인들 얼굴이 죄다 울상이었다. 말은 안 했지만 다들 윈터와 바이올렛의 몸이 바뀌었음을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특히 작은 마님을 대하는 젠의 태도가 평소와 완전히 달라 그 가설이 더욱 힘을 얻었다.

    바이올렛이 끙끙 앓고 있는 윈터의 옆에 앉아 물었다.

    “괜찮아요?”

    “도대체 이 상태로 어떻게 채소 스튜를 먹었어?”

    “아이를 위해서 먹었죠.”

    “난 못 먹어.”

    윈터가 단호하게 말하더니 아내의 얼굴에 금방 장난기가 돌아 물었다.

    “솔직히 행복하지, 지금?”

    “미안해요.”

    “아니란 소린 안 하는군.”

    “어쩌겠어요. 당신 신이 바라는 일인데.”

    바이올렛이 놀리는 말에 윈터가 울상이 되어 헛웃음을 지었다.

    “나도 싫기만 한 건 아냐.”

    “고마워요.”

    “그래도 할린이 당신 임신했단 소식에 알리카에서 입덧약을 보내 줬어. 의사에게 확인하고 먹어 보니 좀 낫네.”

    “정말요?”

    바이올렛이 기쁜 듯이 묻는 순간 두 사람의 몸이 바뀌었다. 몸이 바뀌자마자 윈터가 한숨을 깊이 쉬더니 아내의 손에 얼굴을 묻으며 말했다.

    “이 정도로 괴로우면 표현을 해야 할 거 아냐.”

    “정말 훨씬 나아졌네요.”

    바이올렛이 안도하더니 몸을 일으켜 보았다. 그때 하인 하나가 오들오들 떨며 차를 가져왔다.

    “자, 작은 마님. 이, 이번에도 차 온도가 안 맞으시면 다시…… 정말 죄송합니다…….”

    미리 울먹이며 사죄하자 바이올렛이 기겁을 하며 윈터를 보았다. 그러자 그가 태연한 얼굴로 어깨를 으쓱였다.

    “기분이 안 좋았어.”

    바이올렛이 골치 아파 하면서도 서둘러 차를 받아 한 모금 마시고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온도가 이렇게 딱 좋은걸. 고생했네.”

    “네, 네?”

    “늦었는데 들어가서 쉬게.”

    바이올렛의 다정한 말이 끝나기 무섭게 하인이 복도로 달려 나갔다.

    “자, 작은 마님이 돌아오셨다!”

    그러자 온 사방에서 우울해하던 사용인들이 달려왔다. 그러더니 거의 반은 울며 바이올렛에게 말했다.

    “이제 저희가 잘할게요, 작은 마님…….”

    “무슨. 어떻게 이것보다 더 잘해줘?”

    “아뇨! 이건 잘하는 게 아니었어요! 날로 먹고 있었단 말입니다!”

    사용인들의 대환영에 바이올렛은 도대체 윈터가 얼마나 행패 부린 건가, 골치 아파했다. 사용인들이 모두 떠나고, 바이올렛이 윈터에게 핀잔했다.

    “도대체 얼마나 괴롭힌 거예요?”

    “안 그래도 다들 당신 몸에 당신이 없는 걸 알더군. 작은 마님이 이럴 리가 없다면서.”

    그러더니 바이올렛이 화를 내기 전에 능청을 떨며 말했다.

    “정말 끊임없이 잠이 오고 짜증나더라. 나도 경험해봤으니까 제발 참지 말고 나한테 실컷 짜증내.”

    그러자 바이올렛이 웃어버리고는 제 옆으로 오라고 침대를 톡톡 두들겼다.

    윈터가 곁에 앉자 바이올렛이 말했다.

    “고마워요, 입덧 대신 해 줘서.”

    “왜 벌써 바뀐 거야. 우리 공주님 고생하는데.”

    “그래도 며칠 바뀌었던 덕분에 연설문을 다 썼는걸요.”

    “그건 다행인데.”

    “그리고 태명을 골드로 하는 건 좋은 생각이네요. 그렇게 해요.”

    바이올렛이 미소 어린 얼굴로 말하자 윈터가 슬쩍 같이 웃었다.

    *

    며칠 뒤 의회 출석일이 되자, 바이올렛은 아침 일찍부터 일어나 단장을 시작했다.

    준비해 놓은 단정한 복장에 머리칼도 왕정의 법도에 따라 틀어 올리고 모든 장식은 로렌스가의 상징과도 같은 진회색 진주들로 했다.

    먼저 준비를 마치고 온 윈터가 아내에게 다가와 허리를 숙이고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당신은 진주가 잘 어울려.”

    그러자 바이올렛이 부끄러움에 웃고는 제 머리칼을 올리는 데 장식한 진주에 손을 올려 만져 보며 물었다.

    “이 진주는 어디서 구한 거죠? 왕성에 있을 때도 이렇게 좋은 진회색 진주는 본 적이 없어요.”

    “전에 본 그 진주 상점 주인이 구해 온 거야.”

    “아, 정말 대단하네요. 그리고 할린이 보내 준 약초 말이에요. 그걸 먹고부터 입덧이 많이 가라앉았어요.”

    “그 망할 놈들이 미미하게 도움이 되는군.”

    안 그래도 바이올렛에게 겨울바람이 조금이라도 닿을까 안절부절못하던 윈터는 입덧을 직접 경험한 후 그녀가 무슨 얇은 종이로 만든 작품이라도 되는 듯이 느끼는 듯했다.

    윈터는 마차를 타는 동안에도 흔들림에 바이올렛이 멀미를 할까 봐 염려했고, 의회 앞에 도착해 바이올렛의 발이 땅을 디디자 불안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내내 정원에도 카펫을 깔고 카펫 위로만 다니게 했는데 여기서는 그럴 수가 없었다. 윈터가 불만스럽게 말했다.

    “땅이 너무 딱딱한 거 아냐?”

    “얼었으니까요.”

    “땅이 얼 정도로 추운 곳을 임신한 몸으로 돌아다녀도 되는 건가?”

    “거듭 말하지만 이제 위험할 때는 지났다고 의사가 그랬잖아요.”

    “의사가 뭘 알아. 난 의사 안 믿어.”

    윈터는 출산이 가까운 여름이 되면 바이올렛이 더위를 느낄 것을 걱정해 이미 북부에 새로 별장을 짓고 있었다. 수도가 더운 것도 아니니 그럴 필요 없었지만 바이올렛은 말리지 않았다. 윈터에게 별장이라도 짓게 해 주지 않으면 정말로 바이올렛만 바라보고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이 건물로 들어서려는데, 멀리서 다급하게 블루밍 공작 부부가 다가왔다.

    “바이올렛! 윈터!”

    부부의 모습이 보이자마자 윈터가 정색하며 바이올렛을 제 등 뒤로 숨겼다.

    “제정신입니까? 두 분이 제 아내에게 임신으로 무슨 장난을 치셨는데 여길 나타납니까?”

    그러자 수척해 보이는 캐서린이 말했다.

    “의회에 들르려고 온 거란다. 그보다 윈터.”

    “신탁이요.”

    그들이 하려는 말을 알고 윈터가 묻자 제임스가 서둘러 말했다.

    “부탁이니 동결 좀 풀어 주렴. 디에브의 돈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그 애는 감옥에서 나올 수가 없어!”

    그 말에 윈터가 기가 차서 비웃으며 물었다.

    “설마 저택을 팔지 않고, 그냥 자식을 감옥에 두시려는 겁니까? 원, 친자보다도 돈이 좋으셨군요.”

    그의 질문에 캐서린이 울먹이며 물었다.

    “저택까지 팔면 우린 어디에 가서 살라는 거니!”

    “좀 더 작은 집이요.”

    “우린…… 집을 사 본 적이 없다. 게다가 지금 살고 있는 곳은 대대로 블루밍 가문이 이어받은 집이야. 이 집을 팔 수는 없어!”

    그러자 뒤에서 듣고 있던 바이올렛이 한 걸음 나서며 말했다.

    “제 남편에게 넘기시면 되지 않습니까?”

    “뭐, 뭐?”

    “대대로 블루밍 가문이 이어받은 집이니, 제 남편에게 넘기세요. 작위와 함께.”

    캐서린이 소리칠 기미를 보이자 윈터가 표정을 사납게 구기고 아내의 귀를 손으로 감싸 막으며 말했다.

    “어디 아내 앞에서 소리만 질러 보십시오. 다신 저와 이야기하실 기회도 없을 테니.”

    “윈터…….”

    블루밍 공작 부부의 저택에는 가문의 모든 역사가 있었다. 벽에 가문의 조상들의 초상화가 줄줄이 걸려 있었고, 대대로 물려내려 온 가구들이 있었다.

    그런 역사가 담긴 저택을 판다는 것은 가문을 팔아넘기는 것과 다름없었다. 그리고 바이올렛은 그 가문을 남편에게 쥐여 주고 싶어 설득을 시작했다.

    “두 분이 부동산에 대해서 아는 건 아무것도 없으시잖아요. 남편에게 맡기는 게 낫지요.”

    “…….”

    “이방인이면 어떻고 서자이면 어떻습니까. 블루밍 가문 사람인 건 변함이 없지요. 게다가 제 남편은 뛰어난 사람입니다.”

    아내의 말에 윈터가 저도 모르게 구겼던 표정을 풀고 슬쩍 웃었다. 제가 엘라에게 하던 설득을 바이올렛도 제 부모에게 하고 있었다.

    그 말에 제임스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럼 빚은…….”

    그 말엔 윈터가 딱 잘라 대꾸했다.

    “그건 알아서 해결하세요. 제가 뭘 더 합니까?”

    “이러다 가문이!”

    “그러니까 제가 덜 망하게 할 테니까 팔고, 작위 주고 떠나세요. 집 사는 거 어려우시면 제가 도와 드리죠. 물론 수수료가 좀 있을 겁니다만.”

    “수, 수수료?”

    “그걸 말이라고 하십니까. 하여튼 경제관념이 이렇게 없으니 이 모양이 된 거 아닙니까.”

    블루밍 공작 부부가 충격받은 표정을 지었지만 윈터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그럼 돌아가서 기다리세요. 우리 아내 눈에 띄지 말고요. 아이 태어날 때까지 절대 안정입니다.”

    “우리 손…….”

    “손주 같은 소리 하지 마시고요. 우리 아이지, 두 분 손주 아니니까.”

    윈터가 핀잔한 뒤 아내의 어깨를 감싼 채 다시 안절부절못하며 건물로 들어서고는 말했다.

    “저 쓰레기들 때문에 추운 곳에 서 있었잖아.”

    “조만간 작위는 당신이 가지게 되겠네요.”

    “응. 당신 덕에.”

    “당신 능력 덕인데요.”

    “무슨 소리야. 우리 공주님이 말해 주지 않았으면 엄두도 못 냈을 텐데. 게다가 아직 저 쓰레기들이 날 사랑한다고 믿었겠지.”

    윈터가 블루밍 공작 부부에게 들리도록 말하고 회의장으로 들어섰다.

    회의장은 매우 크고 화려한 곳이었다. 동쪽에 참관객들의 자리가 있었고, 서쪽에 원형으로 의자가 있었다. 그중 참관객을 마주 보는 자리에 열여덟 명의 의원들이 앉아 있었고, 오른쪽에는 바이올렛이, 왼쪽에는 에쉬가 앉았다.

    자리에 앉은 바이올렛은 맞은편에 앉은 에쉬가 죽일 듯 자신을 노려보는 것을 마주 보았다. 그는 어떻게든 ‘모든 섬’이라는 문구를 빼려 들 것이고, 만약 그것이 에쉬의 뜻대로 된다면 그가 레클 강으로 무슨 장난을 칠지 알 수 없었다.

    갑자기 강물을 식수로 사용하는 모두에게 어마어마한 세금을 매기겠다고 들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리고 결국은 제 목표인 왕위를 얻어내리라.

    바이올렛은 담담히 제 연설문을 보았다. 그때 에쉬가 연설을 시작했다.

    “여기 계시는 지적이고 합리적인 여러분 모두 알고 계시겠지만 레클 강과 모든 섬에 대한 권리는 왕의 권한입니다. 왕실을 해체했던 제 입으로 이렇게 말씀드리기 송구스럽습니다만, 제가 가졌어야 할 자리이지요.”

    바이올렛이 물끄러미 에쉬를 바라보았다. 그가 말을 이었다.

    “지금 그 모든 섬을 가진 사람이 누구입니까? 제 여동생인 바이올렛 블루밍입니다. 계승 서열 2위, 라크라운드의 정통성과 법으로 제 뒤에 있어야 할 그녀가 오로지, 남편의 돈으로 그 자리를 뺏으려 하는 겁니다. 예, 돈으로 말입니다. 작위는 돈으로 사고파는 것이 아닙니다.”

    그때 바이올렛이 발언권을 부탁해 의장이 허락하자 그녀가 말했다.

    “두 개의 섬을 저에게 넘겨주신 건 엘라 필리체 부인이십니다. 제 어머니 엘라 필리체 부인은 돈으로 명예를 팔 사람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저에게 넘겨주셨다는 건, 제가 그 자리에 어울린다고 생각하셨던 게지요.”

    그러자 에쉬가 표정이 일그러지는 것을 가까스로 견디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건 본인에게 유리하게 해석한 것뿐 아닙니까? 이 자리는 당연히, 이 나라 왕실의 제 1 계승 서열을 가진 저, 에쉬 로렌스가 받았어야 할 자리입니다. 만약 ‘모든 섬’이라는 문구가 그 전통을 막는다면 수정되어야 마땅하리라 생각합니다.”

    에쉬는 연설을 마치고 자리에서 내려왔다. 그 후 바이올렛이 자리에 섰다. 그녀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정통성에 대하여 이야기한다면 먼저 말씀드릴 이름이 있습니다. 라크라운드의 3대 왕이었던 테오 로렌스는 선왕의 조카였습니다. 그는 계승 서열로 다섯 번째였고, 전쟁에서 라크라운드를 구했습니다. 다음, 8대 왕이며 두 번째 여왕이었던 올리비아 로렌스는 차녀였습니다. 위로 오빠 하나와 언니 하나가 있었지요. 또한, 기나긴 가뭄에서 라크라운드를 구한 영웅이었습니다.”

    그녀가 조용히 말을 이었다.

    “라크라운드는 보수적인 나라이되 그 보수적임이 나라를 좀먹게 했을 때는 그 태도를 버리고 국민을 최우선에 두는 나라였습니다. 그들에게 정통성이란 가장 적합한 자를 찾는 것이었지, 가장 순서가 높은 자를 택하는 것이 아니었지요.”

    바이올렛이 잠시 에쉬를 보다가 제 연설문을 보았다. 온갖 예법과 겸손으로 가득한 저의 연설문이었다. 그녀는 다시 고개를 들어 남편을 보았다.

    그는 제 위엄을 사랑했다. 윈터와 눈이 마주치자, 결국 그녀는 살아오며 단 한 번도, 제 입으로 말하리라 생각하지 못했던 말을 내놓았다.

    “저는 물론 제 남편을 목숨 이상으로 사랑하지만, 윈터 경과 얼굴 한 번 보지 못한 상태에서 결혼을 선택한 것은 온전히 라크라운드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또한 어느 누구의 강요도 아닌 저의 선택이었지요.”

    그녀가 더없이 평온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저는 저의 오라버니인 에쉬 로렌스와 비교해 제가 낫다고 생각해 이 자리에 있는 게 아닙니다. 저 스스로를 결혼으로 이 나라를 위기에서 벗어나도록 도운 공이 있는 자라 판단하여 이 자리에 있는 겁니다. 저에게는 그럴 자격이 있으니까요.”

    당신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