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화
바이올렛이 엄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이게 무슨 무례입니까? 앞뒤 설명도 없이 무작정 언성을 높이시다니요.”
“죄, 죄송합니다, 급한 마음에…….”
바이올렛이 당황한 은행장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안에서 찾고 있으니 어서 들어가시지요.”
그러자 옆에서 젠이 정색하고 말했다.
“우리 작은 마님이 감기라도 걸리면 책임지실 겁니까? 아니, 책임은 당연히 져야 하는데 어떻게 지실 겁니까?”
그에 정신이 없어 그저 덜덜 떨던 은행장이 바이올렛에게 급히 말했다.
“도대체 뭘 알아내시려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그러자 바이올렛이 조용히 말했다.
“그러게 말입니다. 그것은 켄제스 경께서 아실 일이지요.”
“도대체 무슨 자격으로! 월권 아닙니까!”
“북부의 마약상들에게서 에쉬 로렌스의 서명이 적힌 수표가 한 장 나왔답니다.”
“어, 어떻게 흘러들어갔는지도 모를 한 장으로 이러시는 겁니까? 게다가 마약이라면 얼마 전 마약에 취해 부군께 총을 쏜 칼슨 경이 경로이지 않겠습니까? 에쉬 전하와 어려서부터 어울리셨으니까요!”
“그건 조사를 통해 확인하게 되겠지요.”
바이올렛의 말에 은행장이 숨을 제대로 못 쉬고 사색이 되었다.
그녀는 언젠가 이것을 되갚기 위해 칼을 갈고 있었음이 명백했다. 은행장이 겁에 질려 정신없이 은행으로 달려 들어갔다.
그 모습에 젠이 분개하며 말했다.
“아휴, 우리 작은 마님 재산을 3년 내내 해 먹었다니. 무조건 감옥에 처넣었으면 좋겠어요!”
“그러게 말이야.”
“에쉬 도련님께서도 말이에요. 무슨 자신감으로 마약 거래를 하셨을까요.”
“왕실 재산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권력을 휘둘러 금고를 다시 채울 생각이었겠지. 쉽게.”
“그래도 결국은 걸릴 텐데…….”
젠의 말에 바이올렛이 저까지 수치심을 느끼며 대답했다.
“왕이 되면 수사가 면제되니까. 라크라운드의 낡은 법이지. 왕세자일 때 아무리 문제를 일으켜도 즉위하면 그걸 파헤칠 수 없으니 문제를 일으키는 자들이 종종 있었다고 들었어.”
“으으, 에쉬 도련님은 어떻게든 다시 왕위를 받을 생각이셨군요? 자기가 왕실을 해체해 놓고?”
젠이 질색하자 바이올렛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그래 보이는 구나.”
그녀는 그 사실에 점점 더 큰 수치심을 느꼈다.
그때 바이올렛이 두통을 느끼고 신음하자 젠이 기겁해서 담요로 그녀의 몸을 한 번 더 꽁꽁 둘러쌌다.
“빨리 저택으로 돌아가요, 작은 마님. 아휴, 아무리 초기는 지났다지만 벌써 이렇게 험한 데까지 오셔 가지고…… 두통 심하세요?”
아프단 소리를 잘 하지 않는 바이올렛이 머리를 감싸고 몸부림치더니 욕설을 내뱉었다.
“젠장, 심하냐고? 당장 뒈지겠어!”
그 욕설에 젠이 바로 바이올렛과 윈터의 몸이 바뀐 걸 알고 놀라서 소리쳤다.
“대표님!”
“약 가져와, 약!”
“어, 없어요! 작은 마님께서 아기님께 안 좋다고 약은 거들떠도 안 보세요!”
“그렇다고 어떻게 이 상태로 놔둬? 나가서 사와!”
그의 호통에 젠이 급격히 침착해져서 물었다.
“예에? 작은 마님이 아프신 것도 아닌데…… 대표님은 맨날 아픈 거 아니니까 좀 참으시면 안 될까요?”
울렁거리는 데다 두통이 심해 성질부터 내려던 윈터는 젠의 말이 논리적이라 생각했는지 표정을 있는 대로 구기고 뒤로 기대 혀를 찼다.
“개 같은 신…….”
“그래도 작은 마님 잠시라도 쉬실 수 있어서 다행이죠!”
“그건 그렇지만, 지금 내가 괴로우니 그 망할 이방인의 신은 죽여 버릴 거야!”
바이올렛은 그럭저럭 약한 몸에 적응했지만 윈터는 아니었다. 도대체 이 상태로 어떻게 뭔가를 먹어 왔던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윈터는 제가 잠깐이라도 대신 아파 줄 수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동시에 신을 죽여야겠다는 말을 무한히 반복했다.
윈터가 괴로워하면서 작은 마님이 잠깐이라도 입덧에서 벗어났다며 은근히 신이 난 젠에게 종이와 펜을 달라고 한 후 해야 할 일을 적었다.
“넌 가서 이것 좀 전신으로 보내고 와. 이 미팅도 꼭…… 잠깐 이것도. 아, 미팅에서 혹시 키트로 제작해 줄 수 있는지 다시 물어봐. 절대 안 된다고 할 거야. 그럼 멱살 잡으라고 해.”
“네!”
젠이 신나서 마차에서 달려 내려갔다. 그 뒤, 윈터는 길에서 나는 모든 냄새에 고통스러워하며 빨리 집으로 가자고 마부를 재촉했다.
*
대표님의 몸에 바이올렛이 들어와 있음을 알자마자 하옐은 들떠서 어쩔 줄을 몰라 하고 있었다. 그가 젠이 보내 준 목록을 읽어 주며 폴짝거리고 따라 걸었다.
“자, 미팅은 잘 끝났으니까 이제 서류 좀 보시다가 다음 미팅 들어가시면 됩니다.”
“집에 가 봐야 하는 거 아닌가?”
“아뇨! 지금이 기회입니다. 대표님은 작은 마님 걱정 때문에 일에 집중을 못 하시거든요. 이렇게 목록을 보내 주신 건 바뀐 김에 일을 대신 해 달라는 거 아니겠습니까?”
“하기야. 그럼 이따가 식사 자리에서 식사도 실컷 해야겠네. 남편이 나 때문에 덩달아 아무것도 못 먹어서.”
“좋은 생각이십니다.”
미안한 말이지만 바이올렛은 잠깐이라도 입덧에서 벗어나니 세상 모든 것이 아름답고, 모든 냄새가 향긋하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그녀가 미팅을 위해 복도를 걸어가는데 회사 사람들마다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추, 축하드립니다!”
그들은 그렇게 인사하고는 혹시 뭐가 날아올까 봐 잽싸게 뒤로 물러났다. 이런 축하를 해 봤자 윈터가 성질내며 뭘 집어 던질 거라 예상한 듯했다.
그러나 바이올렛은 미소를 지으며 사람들에게 가볍게 악수를 청했다.
“고맙네.”
“……제가 뭐 잘못했습니까?”
“곧 아버지가 될 텐데 일희일비할 순 없지 않나.”
“그, 그렇습니까?”
바이올렛의 악수를 받을 때마다 직원들은 제가 해고되는 게 분명하다고 생각해 곧바로 인사과로 달려갔다.
남들이야 당황하거나 말거나 하옐은 싱글벙글이었다. 미팅에서 테이블도 안 뒤집고, 아내가 걱정되니 집에 가겠다는 소리도 하지 않았으며, 직원들에게 일일이 트집 잡지 않아서 원성도 들리지 않았다. 그는 지금 당장 대륙 전체의 호텔 출장을 다 다녀오면 안 되냐고 묻고 싶을 지경이었다.
게다가 일 문제가 생길 때마다 바이올렛이 집으로 전신을 보내면 알아서 하라고 하던 평소와 달리 윈터가 성실하게 대답해 주기까지 했다. 하옐은 두 사람의 몸이 자주 바뀌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바이올렛의 등을 떠밀었다.
바이올렛은 식사 겸 미팅 자리를 성공적으로 끝내고, 다른 급한 일까지 처리한 후 맑은 정신으로 마저 연설문을 쓰기 시작했다. 도중에 하옐이 부탁할 일을 잔뜩 안아들고 집무실로 들어서자, 그녀가 말을 걸었다.
“남편의 몸은 종일 일해도 지치질 않으니 참 부럽네.”
“그러니까요. 자기만 안 지치지, 남도 안 지치는 줄 안다니까요. 작은 마님께서 말씀 좀 해 주세요.”
“거듭 말해 보겠네.”
“대표님만 나타나시면 회사가 살얼음판이거든요. 그래서 대표님이 없을 때 사람들이 더 즐거워지는 장점도 있긴 하죠. 공공의 적이라고 해야 하나.”
“이해하네.”
“그보다 아가님 이름은 뭐로 하실 겁니까?”
“벌써부터?”
바이올렛이 웃자 하옐이 재촉했다.
“그래도 태명을 지으셔야지요!”
“로렌스가는 대대로 태명을 길게 짓는 편이네. 부르기 어려울 정도로. 그래야 아무리 아가여도 왕족에 대한 위엄을 갖출 수 있다고 하여…….”
“대표님은 꽃 이름이 좋으시답니다!”
“……남편이 나에겐 안 한 말을 자네에게 했어?”
“그럼요. 로렌스가의 태명은 기니까요. 감히 말을 못 하시죠.”
“어떤 꽃이 좋다고 하던가?”
“로즈요. 로지.”
“사내아이일 수도 있는데.”
“제가 그 말 했더니 사내아이 이름이 로지인 게 뭐가 어떻냐고 하시던데요. 아니면 골드로 하고 싶으시대요.”
“골드?”
“네.”
일찍 떠난 제 큰오빠 웨인의 애칭이었다. 바이올렛은 남편이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 더없이 잘 알았다.
한 번 윈터가 아들이면 이름을 웨인으로 해도 된다고 말했었다. 그러나 반대한 것은 바이올렛이었다. 웨인이 오래 살지 못했으니까, 제 아이는 오로지 남편만을 닮아 건강하길 바랐다.
그래서 더더욱 윈터가 저에게 말하지 못했으리라.
바이올렛이 미소를 지었다.
“골드…….”
“작은 마님?”
“그걸로 하면 좋을 것 같네, 나도.”
“정말이십니까?”
하옐이 반색하며 묻자 바이올렛이 고개를 끄덕였다.
“매번 자네에게 신세를 지네.”
그렇게 말하는 바이올렛의 다정한 눈빛에 하옐이 멈칫하더니 중얼거렸다.
“대표님 얼굴로 그렇게 보시니까 굉장히…….”
“응?”
“……불편해집니다. 아무래도 전 난폭함에 익숙해졌나 봐요.”
“저런.”
“불쌍해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하옐이 한숨을 폭 쉬며 말했다. 그때 밖에서 요란한 소리가 들려오더니 표정이 구겨진 에쉬가 들어섰다.
“윈터 블루밍!”
그 옆에는 차마 에쉬를 막지 못한 경호원들이 난처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바이올렛이 골치 아픈 표정을 지었다. 이렇게 다짜고짜 제 오빠가 찾아올 줄은 몰랐었다. 설마 이전에도 이렇게 종종 찾아왔던 것일까.
그렇게 생각하니 말할 수 없이 남편이 안쓰러웠다.
“뭐지?”
“네놈이 어머니께 부탁해 섬을 다 샀다면서? 게다가 북부 마약상이 나와 연계가 있다는 억지까지 부리고 있다더군!”
“억지라니. 증거가 있는데.”
바이올렛의 담담한 대꾸에 에쉬가 분노하며 이를 악물더니 말했다.
“나는 뭐 바이올렛의 약점을 아무것도 못 잡은 줄 알아? 너 칼슨과 바이올렛의 혼담이 어디까지 오갔는지는 아는 건가?”
“들었어. 심지어 가문 회의 때 아내에게 술을 부었다는 것도, 그 자리에서 날 미천하게 여기는 말을 했다는 것도 들었지.”
“있는 그대로 말해 준 건데. 그나저나 바이올렛이 아이를 가졌다며.”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바이올렛이 걸어가 에쉬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윈터라면 할 법한 행동이라 생각했으나 에쉬의 표정이 하얗게 질렸다.
“무, 무슨 짓이야!”
그대로 복도를 지나 뒷벽에 쾅 소리가 나게 에쉬를 밀친 바이올렛이 말했다.
“다시 말해 봐. 이방인이니 속물이니.”
“위, 윈터 블루밍!”
“그리고 임신에 대해서도 뭐 할 말이 더 있었던 거 아닌가?”
“……그건 아니었어.”
멱살잡이에 놀라는 에쉬의 표정을 보니, 바이올렛은 지금껏 윈터가 제 성질을 죽이고 그를 봐주고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바이올렛이 혀를 차더니 손을 놓고 뒤로 물러났다. 그러자 에쉬가 노려보며 말했다.
“네놈이 어떻게 감히 내 멱살을 잡아.”
“감히?”
바이올렛이 고개를 조금 기울이더니 물었다.
“난 블루밍 가문의 후계자네. 자네가 나에게 ‘감히’라고 부를 주제가 안 될 것 같은데. 직접 왕실을 해체해 놓고 왜 여전히 자기가 왕족인 줄 아는 겐가?”
“뭐, 뭐?”
에쉬는 상대방이 제가 평소에 알던, 아내를 약점으로 잡혀 있던 윈터 블루밍이 아니란 것을 깨달았다. 고고한 자세와 눈빛이 에쉬를 압도했다.
그녀가 윈터의 몸으로 입을 열었다.
“작위를 바라면 어디 데릴사위로라도 가지 그래.”
“이, 이…….”
“잠깐. 자네와 결혼하는 숙녀분은 무슨 죄인가. 그것도 그만두게.”
“닥쳐!”
“그렇게 언성을 높이는 법은 어디서 배웠을까. 봐 줄 수 없을 정도로 무례하군.”
동생을 약점으로 잡아 윈터를 이용하려던 에쉬는 여기 와서도 그 무엇도 얻을 수 없음을 느끼고 있었다. 표정을 구기던 그는 결국 휙 몸을 돌려 빠르게 자리를 피했다.
당신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