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화
한참이 지나서야 겨우 이성을 찾은 윈터는 아내 품에서 울고 있는 제가 너무 한심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그대로 주저앉는 바람에 바이올렛까지 같이 자리에 앉았다. 바이올렛이 웃으며 그의 눈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다 울었어요?”
그러자 윈터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당신이 아이를 가졌다고 했을 때 내가 그런 말을 해서. 내내 두려웠어.”
“으음, 그럼 이제는 내가 당신을 믿는다는 걸 확실하게 알았겠군요.”
바이올렛이 달래 주는 덕에 윈터는 안도감과 함께, 긴장이 풀리며 몰려오는 감정의 파도에 버티느라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배 속의 꼬마가 벌써부터 아버지를 한심해하겠어.”
“반가워서 우는 건데요. 같이 기뻐해 줄 거예요.”
윈터가 앉아서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 순간부터 안도감 너머에 있던 흥분감이 쏟아져 내렸다.
아이가 왔다는 소식에 그의 얼굴이 조금씩 풀어지더니 안 그러려 해도 점점 입꼬리가 끌려 올라갔다. 윈터는 울다가 웃느라 얼굴이 시뻘게져서 자리에서 일어나 바이올렛을 부축해 일으켰다. 그러더니 뒤이어 의자를 보며 말했다.
“당신 의자에 쿠션이 더 많이 필요해.”
“아직 괜찮아요.”
“소파를 옮겨다 줄까?”
“괜찮으니까 급하게 힘쓰지 말아요.”
윈터가 지금 당장 뭐라도 아내에게 해 줘야 하는데 해 줄 수 있는 게 없어 안달하자 바이올렛이 달랬다.
“자, 진정하고 북부 이야기 좀 해 봐요.”
“그것보다.”
북부 이야기가 나오자마자 위험한 짓 했다고 들을 잔소리가 남은 걸 눈치챈 윈터가 빠르게 이성을 찾고 말을 돌렸다.
“나머지 두 섬을 샀어. 당신의 어머님께.”
“어머니가 그걸 넘겨주셨다고요?”
“당신이 적합한 걸 아셨겠지. 어떤 종류의 권력이든, 에쉬 로렌스보다는 당신에게 어울려.”
윈터는 제 자랑 하듯 뽐내며 말했다.
“거봐. 당신만 한 적임자가 없는 거라고.”
바이올렛은 윈터가 전해 준 소식에 긴장감을 느꼈다. 그것을 가라앉히려 따듯한 음식을 먹어 볼까 하다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리는 것을 발견한 윈터가 물었다.
“입덧 시작했어?”
“아뇨. 그냥 조금 비위가 약해진 것 같아요.”
“나 없는 사이에?”
“그렇게 놀랄 것 없어요. 겨우 사흘이었는걸요?”
“겨우 사흘이라니. 내 아내가 입덧을 시작했는데 내가 저 멀리에…….”
윈터는 하루 만에 일을 해결하지 못한 제 능력치에 크게 충격을 받았다. 바이올렛은 벌써부터 어찌할 바를 모르는 윈터를 보니, 제가 본격적으로 입덧이 시작되면 어디 멀리 떨어져 있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바이올렛이 아무렇지 않은 척 식사를 하려고 포크를 들었다. 고기를 먹으려 했는데, 그렇게 좋아하던 버터 냄새가 오늘따라 역하게 느껴졌다. 그녀의 손이 웬일로 윈터를 위해 준비한 남부 농가 식탁에 주로 올라오는 채소 요리로 향했다.
원래라면 맛이 없어도 몇 개 집어 먹는 정도였던 채소 요리가 오늘따라 맛이 있었다. 바이올렛이 중얼거렸다.
“이상하네…… 왜 채소가 맛있지?”
“채소는 먹을 만해?”
“맛있어요. 아가가 당신이랑 입맛이 똑같은 걸까요?”
바이올렛이 고개를 갸우뚱하자 윈터가 저도 모르게 들떠서 대답했다.
“그건 모르겠지만 벌써부터 어머니 건강에 신경 써 주는 아가인 건 분명하군.”
“그런가요? 이상하게 요즘 당신이 해 준 음식들이 먹고 싶어요.”
“혹시 그래서 주방 들어간 거야? 나한테 밥해 달라고 하려고?”
금방 행복에 겨워진 윈터가 몸을 가까이 하며 놀리자 바이올렛이 그를 흘기며 대꾸했다.
“그건 아니에요. 정말로 내가 요리하려 한 거였다고요.”
“내 생일 선물로 주방에 안 들어가 주는 건 어때? 정 뭔가를 해 주고 싶다면 아침에 샌드위치를 만들어 줘. 빵은 대신 잘라 달라고 하고 당신은 잼을 발라 주면 되겠군.”
“그렇게 나를 못 믿어요?”
“전혀.”
윈터가 당당히 대꾸했다. 그러더니 턱을 괴고 바이올렛이 식사하는 걸 누가 봐도 행복한 얼굴로 바라보자, 그녀가 의아해서 물었다.
“배 안 고파요?”
“고팠는데 이제 안 고파. 좋아서 그런가 봐.”
“그런 게 어디 있어요?”
“진짜야. 안 먹어도 배부른 게 이런 건가 봐. 아, 내가 얘기했나?”
“뭘요?”
“고맙고 사랑한다는 말.”
윈터의 얼굴이 너무 싱글벙글이라 바이올렛은 식사하라고 재촉하려던 것도 잊고 두 손으로 입을 가리고 웃었다.
그 직후부터 바이올렛은 심한 입덧을 시작했다. 음식은커녕 물 마시는 것도 힘들어했다. 게다가 자고 또 자도 피곤해서 내내 졸고 있는 기분이었다.
주변 사람 모두 발을 동동 구르며 뭐라도 먹여 보려고 애썼지만, 윈터만큼 심각하지는 않았다.
그는 바이올렛에게 집중하느라 출근은커녕 본인도 식사를 잘 하지 못했다.
그나마 다행히 바이올렛이 먹는 것이 샤론이 알려 준 차와 토마토, 그리고 채소 스튜였다. 지금 계절에는 신선한 채소를 구하기가 힘들어 윈터는 사방에서 신선한 채소를 구하기에 바빴다.
윈터가 빨갛게 잘 익은 토마토를 잘라 조금씩 먹는 바이올렛을 보며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거라도 넘어가니 다행이군.”
“당신은 식사해요.”
“아내가 못 먹는데 나 혼자 먹으면 무례하잖아.”
“마음이 불편해요.”
바이올렛이 핀잔하고 토마토 한 조각을 더 억지로 눌러 넣었다.
“내가 입덧 대신 해 줄 순 없나.”
윈터가 씁쓸하게 중얼거리는데 룰루가 들어섰다.
“작은 마님, 엘라 필리체 부인께서 편지를 보내주셨어요.”
룰루가 바이올렛에게 편지를 건네주고는 반쯤 비어 있는 그릇을 보며 뛸 듯이 기뻐했다.
“아이고, 세상에. 반이나 드셨네. 잘하셨어요.”
그러자 바이올렛이 작게 소리 내어 웃으며 대답했다.
“토마토 조금 먹었다고 이렇게 칭찬 듣기는 처음이네.”
“외출하고 싶으시면 이건 다 드시고 나가셔야 해요. 꼭이요.”
“응. 꼭 다 먹고 나갈게.”
바이올렛이 다짐하듯 말하자 룰루가 흐뭇한 표정으로 방을 나갔다. 그 모습에 윈터가 모처럼 웃으며 놀리듯 말했다.
“기특하네, 우리 작은 마님.”
“놀리지 말아요. 얼마나 힘들게 먹고 있는데요? 칭찬받을 만했다고 생각해요.”
“어어, 나도 그렇게 생각해.”
윈터는 걱정하는 와중에도 연신 놀리는 말투였고, 바이올렛은 그런 남편이 밉지 않은 게 신기하다고 생각하며 웃고는 편지를 펼쳤다.
나의 사랑하는 딸에게.
아이를 가졌다니 뭐라 축하를 전해야 할지 모르겠구나.
처음 손주를 보게 된다니 벌써부터 가슴속이 기쁨으로 가득하다.
아이가 태어날 즈음 꼭 기별을 보내 주렴.
네 남편이 찾아와 나에게 두 섬을 받아 간 이야기는 들었으리라 본다.
그날 윈터 경이 나에게 했던 말은 나를 크게 움직였단다.
나는 네가 알다시피 지금껏 에쉬가 받아야 할 왕위를 잃은 것에 대해서만 슬퍼했었다. 결혼을 하겠다던 너의 결심이 고결한 것이었음을 이제야 알게 되었으니 나는 참 어리석다. 네가 계속 남부에 있었다면 네가 얼마나 왕녀다웠는지는 여전히 모르면서 영원히 내 아들의 잃어버린 왕위만을 애도했겠지.
언젠가는 나를 용서해 주길 바라지만 오늘은 사과를 바라고 이 편지를 보낸 것이 아니다.
레클 강과 그 강의 모든 섬의 백작 작위는 당시 왕위 계승 서열 3위였던 올리비아 로렌스에게 내려졌었지. 나라를 가뭄에서 구하려 당시에는 도적으로 가득하던 바이델린 산맥을 넘어 수원을 찾아갔다고. 그녀가 왕이 되기를 바라는 국민들을 달래려 작위를 내렸으나 만족하지 못하여, 결국은 국민들의 뜻으로 왕위에 올랐음을 잘 알고 있으리라 본다. 그 이후 그것은 라크라운드의 왕만이 가질 수 있는 명예로운 칭호가 되었지.
내 사랑하는 딸.
너는 레클 강과 모든 섬을 지키는 자에게 주는 백작 위를 가질 자격이 충분하다는 말을 전하려 이 편지를 적었단다.
편지를 확인한 바이올렛이 미소를 지었다. 그러더니 윈터의 눈가에 부드럽게 입을 맞춘 후, 다시 토마토를 먹기 시작했다.
그릇을 다 비운 바이올렛이 심호흡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 먹었으니 외출을 해야겠어요.”
“꼭 나가야겠어?”
“그럼요. 마차로 고작 30분도 못 갈 만큼 건강이 나쁘지는 않아요. 당신도 이제 회사에 가야죠. 하옐이 울잖아요.”
윈터는 괴로운 표정이었으나 아이가 태어날 때까지 바이올렛을 집에만 있게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별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
바이올렛이 향한 곳은 수도의 한 건물 앞이었다.
그녀가 온다는 소식을 미리 들었던 경찰청장이자 왕실 근위대장이었던 켄제스가 경관들을 이끌고 나와 있었다.
“오셨습니까, 부인.”
“오랜만에 뵙습니다.”
“아기님 소식 전해주셔서 감사했습니다만, 하마터면 유델이 따라 나올 뻔했습니다.”
켄제스의 아내이자 어린 바이올렛의 가정 교사였던 유델의 이름이 나오자 바이올렛이 웃으며 물었다.
“유델 선생님께서요?”
“예. 아내는 아직도 부인께서 어린아이인 줄만 아시는지, 이런 험한 일을 하면 안 된다고 성화입니다. 아기님까지 가지셨으니 더더욱 좋은 것만 봐야 한다면서요.”
“그랬습니까. 덕분에 마음이 따듯해집니다.”
바이올렛의 말에 켄제스가 멋쩍어하더니 바구니 하나를 내밀었다.
“이건 아내가 구운 쿠키들입니다. 입덧을 가라앉히는 데 좋은 것들을 많이 넣고 만들었답니다.”
“어머나, 감사해라.”
바이올렛이 놀라 하더니 바로 바구니를 살폈다.
“세상에. 요즘 식사가 힘들었는데, 이건 얼마든지 먹을 것 같군요.”
“엘라 부인께서 입덧하실 때도 곁에 있던 게 아내 아닙니까. 아마 잘 알고 만들어 드린 것 같습니다.”
“유델 선생님께도 따로 편지드리겠지만, 이렇게 가져다줘서 고마워요, 켄제스 경.”
“별말씀을요. 미리 보내 주신 자료는 감사히 검토했습니다. 그보다 하필 은행부터 들어가시려는 이유가 뭡니까?”
켄제스가 묻자 바이올렛이 수도 중앙은행 건물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수도 중앙은행 은행장이 에쉬와 공모해 남편이 저에게 준 롱 리우드의 땅을 왕실 재산으로 돌린 적이 있다는 기사를 보신 적이 있나요?”
그러자 켄제스가 이해가 간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 수도 중앙은행에서 자금 이동에 대해 파헤쳐 보면 마약상과 연계가 나올 수 있겠군요.”
“네.”
바이올렛이 고개를 끄덕였다.
라크라운드의 수사권은 경찰청에 있었으므로, 경찰청장인 켄제스가 등장하자마자 은행이 발칵 뒤집어졌다.
그 사이 바이올렛은 은행 앞에 세워 둔 마차 안에서 젠과 함께 유델이 준 쿠키와 따듯한 차를 즐기고 있었다. 젠이 마차를 둘러보며 말했다.
“대표님이 그렇게 신경쓰시더니 정말 마차가 하나도 안 흔들려요. 그렇죠, 작은 마님?”
“응. 정말 신기하구나. 이제 남편도 마음을 좀 놓았으면 좋겠네.”
“에이, 아직도 시작도 안 하신걸요. 만삭에 더울 거라고 북부에 별장 지을 곳 알아보고 계시던데.”
젠이 그 말을 하던 중간에, 다급하게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젠이 바이올렛의 허락하에 문을 열자 얼굴이 새하얘진 수도 중앙은행 은행장이 보였다.
에쉬와 수렵장에서 사냥을 즐기던 그는 경관에게 연락을 받고 정신없이 달려온 참이었다.
“부, 부인! 이게 도대체 무슨 소란입니까!”
그가 다짜고짜 언성을 높이니 바이올렛의 미간이 좁아졌다.
그 엄한 눈빛을 마주하는 순간, 은행장은 예전에 바이올렛이 롱 리우드를 지참금으로 달라며 에쉬와 협상하던 날 저에게 했던 말을 떠올렸다.
“두 사람이 공모해 내 재산에 손을 댄 것은 변함없는 사실 아닙니까? 그러니 만약 내가 은행장에게 크게 손해를 입힐 날이 온다면 언제든 주저하지 않을 겁니다.”
당신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