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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156화 (156/176)

156화

윈터의 북부행은 매우 중요했고, 그만한 성과가 있었다.

이글린이 에쉬와 연계되었을 가능성이 큰 마약상의 거래 장소를 알려준 후, 윈터는 야니스와 급습 계획을 주고받았다.

모든 것은 그들의 계획대로 진행되었다. 예정된 시간에 마약이 작은 낚싯배에 실려 부두로 들어왔다.

부하들을 끌고 온 야니스 헤스턴이 급습하고 윈터 블루밍이 인근에 있던 낚싯배를 전부 빌려 무장한 직원들을 통해 퇴로를 막게 하니 마약상 일당에겐 도망칠 구멍이 없었다.

윈터가 밧줄로 포박한 일당의 머리를 총구로 툭툭 건드리며 야니스에게 말했다.

“의회가 우리 공주님이 작위 받는 것을 허락하고 나면 다음엔 마약과 관련된 놈들이 총을 소지하는 걸 불법으로 하는 안을 상정해 줬으면 좋겠군. 약쟁이가 총을 들고 다니는 게 말이 돼?”

“경께선 총상이 있으시니 충분히 발언권이 있을 겁니다.”

야니스가 말을 이었다.

“덕분에 우리 북부도 썩은 곳을 도려냈습니다. 협력 감사합니다.”

“협력은 네놈이 나한테 한 거지.”

“참 꾸준히 무례하시군요. 여전히 부인께서 어떻게 참고 사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엘라 부인과 대화해 봤어? 우리 공주님 정도면 잔소리가 없는 편이야.”

“몰랐네요. 저는 잔소리 들을 일이 없어서요.”

한껏 빈정거린 야니스는 그의 욕설이 돌아올 걸 예상했으나, 윈터는 딴생각을 하는지 대답이 없었다.

“경.”

“어.”

윈터가 뒤늦게 반응했다. 야니스가 인상을 쓰며 물었다.

“무슨 일 있으십니까?”

“우리 친구 아니다, 꼬마야. 전에도 말했는데.”

“다른 청년들에겐 도련님이라고 빈정거리면서 왜 저에겐 꼬마라고 합니까?”

“네놈이 친구라고 착각하니 선 긋는 거다. 눈치껏 알아들어.”

윈터가 짜증을 내고 야니스에게 물었다.

“저놈들은 어떻게 할 생각이지?”

“북동부 지역의 대형 범죄는 경찰서와의 합의하에 헤스턴가가 담당합니다.”

“내 아내가 들으면 기겁할 유착이군.”

“헤스턴 가문이 북부를 지키는 건 라크라운드의 역사와 함께 이어지는 유구한 전통입니다만.”

야니스가 담담히 말하고 부하들에게 마약상들을 끌고 가게 했다. 그러고는 윈터에게 물었다.

“취조할 건데, 헤스턴가에 들르시겠습니까?”

“싫어. 네놈 아버지가 내 아내와 결혼할 뻔했잖아.”

“그건 죄송합니다.”

“바로 아내에게 가 봐야지.”

“한번 두 분을 식사에 초대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친구 없어? 왜 굳이?”

윈터가 표정을 구기고 묻자 야니스가 대꾸했다.

“두 분과 잘 지내 두면 좋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뿐입니다. 유력자니까요.”

“눈치가 완전히 없지는 않군.”

윈터가 실소하고 그대로 돌아섰다.

*

윈터는 마약상 일당을 헤스턴가에 넘긴 후 취조를 부탁하고 곧장 수도로 돌아왔다.

잠깐 잠든 틈에 그는 알리카의 신전에서 본 장면들을 다시 꿈으로 꾸었다.

그날 길에 쓰러져있던 열두 살의 윈터는 어른들 품에 안겨서 저 멀리 마차로 가는 귀족 꼬마 애의 뒷모습을 보았다.

누군 맞는 게 싫어서 이렇게 길에서 잠드는데, 누군 저렇게 좋은 옷을 입고도 모자라 어른들의 품에 폭 안겨서 이동하는구나.

‘재수 없는 귀족 꼬마.’

윈터가 그렇게 생각하는데, 어른들 몇이 그에게로 다가왔다.

도망치려 했지만 어른 여럿에게 붙잡히니 빠져나갈 수 없었다. 그러고는 진찰을 하겠다고 이것저것 살피는 통에 짜증이 나 돌아 버릴 뻔했었다.

다행인 것은 그때 그 의사가 진찰을 하고 난 이후 몸이 한결 나아졌다는 점이었다. 순간순간 생기던 빈혈이나, 가슴 통증이 그 이후 다시는 느껴지지 않았다.

아마 그 의사가 뭔가 조치를 취한 게라고, 윈터는 생각했었다. 그런 귀족들은 그렇게 실력 좋은 의사를 데리고 다니는구나. 한 번 살펴보는 것만으로도 병을 낫게 해 주는 대단한 의사.

그날 대단했던 건 의사가 아니라 제게 다가왔던 여섯 살짜리 아이었음을 이제야 알았다. 그 이후 저 역시 혼자 남겨져 앓고 있던 바이올렛을 도왔음을 알게 되었으나 전혀 마음이 편해지지 않았다.

결국 자신은 몇 번이나 아내를 아프게 하면서 살아남았던 것이었다. 지금 이 순간까지.

“대표님!”

하옐이 부르는 소리에 윈터가 눈을 번쩍 떴다. 하옐이 걱정스럽게 말했다.

“도착했습니다. 무슨 꿈을 꾸신 거예요?”

“퇴근이나 해.”

윈터가 건성으로 말하며 마차에서 내리다가 휘청거리자 하옐이 기겁해서 따라 내려 그를 부축했다. 그러나 윈터는 곧 짜증스레 하옐의 손을 뿌리치고 제 집으로 향했다.

그가 들어서자 룰루가 마중을 나왔다.

“다녀오셨어요?”

“집엔 별일 없어 보이는군.”

“네, 그럼요. 별일 없지요.”

윈터는 ‘별일 없다’는 말에 안도하느라 룰루가 씰룩거리는 입꼬리를 주체하지 못하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는 제가 저 몰래 임신 사실을 확인하려는 아내의 계획을 그대로 모르는 척 눈감아 주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었는지에 대해 생각했다. 이전이었다면 당장 달려들어서 왜 몰래 확인하는지, 저를 떠날 생각은 아닌지 집요하게 물었을 것이다.

아내는 끊임없이 사랑을 속삭이는데, 왜 자신은 영원 같은 불안 속에 잠겨 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것은 영구한 상처였다.

“아내는.”

“침실에 계세요. 몸이 안 좋으셔서 내내 누워 계셨어요.”

“내가 가 볼 테니 들어가.”

“네, 대표님.”

룰루가 총총 떠난 후 윈터는 아내의 방 문 앞에 섰다.

인사를 중요하게 여기는 아내가 마중을 못 나올 정도라니 몸이 적잖이 아픈 모양이었다.

“몸이 아픈 건가, 마음이 아픈 건가.”

그가 혼잣말하더니 심호흡하고 미소 짓는 연습을 했다.

어느 쪽이든 아내가 원하는 대로 잘 풀리지 않은 게 분명했다. 그렇다면 저는 아내가 바라던 그대로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처럼 웃어 줘야 했다. 그게 아내가 원하는 일이라면.

윈터가 필사적으로 여상한 얼굴을 하고 경쾌하게 문을 두드렸다.

“공주님, 아프다며.”

“들어와요.”

안에서 바이올렛의 목소리가 들려 윈터가 문을 열었다.

이내 윈터는 예상과 달리 잠옷이 아닌 가벼운 외출용 드레스를 입은 아내의 모습에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어디 갈 곳이라도 있어?”

“네? 아뇨. 그냥…… 좋아하는 옷이라서요.”

“당신이 좋아하는 옷인 건 알아.”

윈터가 저도 모르게 바이올렛의 팔을 붙잡았다. 그러자 바이올렛이 물었다.

“식사했어요?”

“아직.”

“다행이네요. 나도 아직인데.”

아내가 외출용 드레스를 입었다는 생각에 충격받은 윈터가 바이올렛에게 끌려가 테이블 앞에 앉았다.

해가 지기도 했지만 테피스트리에 온 창문이 가려져 더더욱 어두웠다. 게다가 오늘은 전구가 아닌 근사한 촛대에 초를 켜 테이블을 밝혀 두었다.

윈터가 마주 앉자 바이올렛이 테이블에 둔 작은 종을 흔들었다. 그러자 문이 열리며 사용인들이 들어와 근사한 만찬을 테이블에 차렸다. 신경 써서 미리 준비해 둔 음식이었다.

윈터는 아내가 매우 심각한 말을 할 거라는 것을 예감했으므로 필사적이던 표정 관리에 실패했다.

그는 두려움에 떨리기 시작한 두 손을 테이블 아래로 내려 꽉 맞잡았다. 그걸 눈치챈 바이올렛이 걱정스레 물었다.

“북부에서 무슨 일 있었어요?”

“아니.”

“긴장한 것 같아요.”

“사실 있었어.”

윈터가 그제야 다시 의식적으로 미소 지으며 말을 이었다.

“에쉬 로렌스가 관여된 마약상을 찾아냈지.”

“어머. 정말요?”

“지금 헤스턴가에서 취조 중이야. 의회에 참석하기 전에 밝혀지면 에쉬 로렌스를 한 방 먹일 수 있겠지.”

“설마 당신도 마약상 찾는 것에 함께한 건 아니죠?”

“왜 아니야.”

윈터가 무심코 말했다가 다급히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이미 바이올렛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당신은 바로 얼마 전에 마약에 취한 자에게 총상을 입었어요.”

“알아.”

“그런 당신이 어떻게 또 마약과 연관된 자들을 만나요? 겁도 없이?”

바이올렛의 목소리가 조금 떨리기 시작해, 윈터가 그녀를 마주 보았다. 바이올렛이 떨리는 숨을 내쉬고 물었다.

“당신. 살고 싶기는 해요?”

“갑자기 그건 왜?”

“난 당신이…… 자기 목숨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것처럼 느껴져요.”

“그렇지 않아.”

“그런데 왜.”

“정말로, 그렇지 않아.”

윈터가 앞에 놓인 샴페인을 한 모금 마신 후 말을 이었다.

“난 그냥 당신에게 모든 걸 해 주고 싶어. 당신에게 반드시 필요한 일이라면 목숨도 아깝지 않아. 하지만 당신과 관여된 게 아니라면…… 살고 싶지, 당연히.”

“…….”

“당신과 오래, 행복하게 살고 싶어.”

윈터의 말에 바이올렛이 조금, 눈물이 고인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불안해 보이는 거죠?”

“나도 모르겠어.”

윈터가 그제야 실소하며 말했다.

“당신을 너무 사랑해서 그런가.”

“윈터, 이제 나는…… 당신을 많이 알아요. 당신을 떠나려 할 때와는 모든 게 달라졌어요.”

“뭐가 달라?”

윈터가 서글픈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난 그대로야. 고작 당신이 외출복 입은 걸로 심장이 철렁해. 당신만 자라나봐. 난 왜 계속 그대로인지 모르겠군.”

“아. 윈터.”

바이올렛이 떨리는 숨을 내쉬더니, 의외로 웃으며 그를 보았다.

“나는 뭐 안 그런 줄 알아요?”

“당신이 왜?”

“나도 무서워요. 나도 질투해요. 갑자기 나쁜 생각만 들 때도 있다고요. 지금 당신에게 그런 소리를 듣고 나니 한바탕 욕이라도 해주고 싶어요. 어떻게 사람을 이렇게 걱정 시켜요?”

아내가 그런 기분을 느낀다는 사실에, 윈터가 진심으로 놀라서 중얼거렸다.

“몰랐어. 당신은 나에게 너무나 완벽해 보여서.”

“몰랐다면 이제 알아줘요. 혼자 불안한 것보다는 같이 불안한 게 낫지 않아요?”

그녀의 다정한 눈빛에 윈터의 손 떨림도 서서히 멈췄다. 그가 한숨 쉬더니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말했다.

“젠장, 한심하기 짝이 없군. 걱정시켜서 미안해.”

“나 걱정하는 거 알았으면 다신 위험한 짓 하지 말아요. 알겠어요?”

“안 할게.”

“그래도…… 아이가 생기면 사람들이 위험한 짓을 하지 않게 된대요. 당신도 이제 곧 아버지가 될 테니 달라지겠죠.”

“그럼. 나중에 아버지가 되면…… 어?”

윈터가 손을 천천히 내리더니 미간을 좁히고 바이올렛을 보았다.

그러자 그녀가 이 말이 하고 싶어 견딜 수가 없었다는 듯, 해사하게 웃으며 말했다.

“알리카에 있을 때 신전에서 들었어요. 우리 아이가 내가 아프지 않게 지켜 주고 있었다고. 그리고 그 애의 아픔을 다른 카닉 일족 사람들이 조금씩, 우리와 함께하던 아이들도 조금씩 가져가 무사히 아이가 태어나게 될 거라고. 카닉 일족은 아픔을 나누는 사람들이라고 말이에요. 그리고.”

“……그리고?”

“그리고 이번에…… 임신한 것을 확인했어요. 염려 말아요. 세 명이나 되는 의사에게 확인했으니까.”

“…….”

“우리에게 아이가 생겼어요, 윈터.”

바이올렛의 행복한 목소리에도 한동안 윈터는 말이 없었다. 그러다 한참이 지난 어느 순간 주르륵 눈물이 흘렀다. 바이올렛이 놀라서 일어섰다.

“우, 우는 건가요?”

그녀가 다가오자 윈터가 다급하게 아내의 허리를 끌어안고 품에 얼굴을 묻었다. 요 며칠 임신 소식에 우는 사람으로 둘러싸였던 바이올렛이 웃으며 윈터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왜 다들 우는지 몰라요. 좋은 소식에.”

늘 본인이 어디에도 의지할 필요 없다고 자부하던 윈터는 고개를 떨구고, 어깨를 들썩이며 울었다. 윈터가 울 것을 예상했던 바이올렛은 그저 그를 놀리듯 맑은 웃음을 터트렸다.

당신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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