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5화
마지막 확답에 옆에 있던 젠이 못 참고 바이올렛을 꼭 끌어안았다. 맞은편에 있던 룰루도 바이올렛의 손을 꼭 잡고 있었다.
이내 룰루가 벌떡 일어서더니 손으로 눈물을 닦아 내고 말했다.
“대표님이 얼마나 기뻐하실까! 돌아오시는 시간에 맞춰서 정찬을 준비하실 거지요?”
“응. 아, 룰루와 주방장이 신경 써 줄 일이 많겠네. 부탁하네.”
“아휴. 말만 하세요, 작은 마님. 세상에, 뭘 준비하면 좋을까. 왜 자꾸 눈물이 나는지 모르겠어요. 이렇게 좋은 소식에.”
룰루가 눈물을 닦는데 이미 옆에서 울음이 터진 젠이 훌쩍거리며 말했다.
“그렇게 고생을 하셨으니까요……. 대표님이 전에 작은 마님이 마련한 정찬에서 임신 소식 듣자마자 화낸 거 저 생생하게 기억한단 말이에요!”
“그래, 아가. 네 말이 맞아. 눈물이 나는 게 당연하지!”
그렇게 말하던 룰루까지 결국 눈물을 쏟아, 바이올렛은 어쩔 줄 모르고 양옆에서 울음이 터진 두 사람을 달랬다.
그래도 바이올렛은 저만큼이나 감격해하는 두 사람이 고마워 마음이 따듯해져 오는 것을 느꼈다. 제가 이렇게 저를 위해 주는 사람들 속에서 살고 있음이 더할 나위 없이 감사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전 일이 준 상처가 너무 깊게 남아 있는지 의사 셋이 확인해 주었음에도 정말 임신이 맞는 건가, 괜한 우려가 들었다.
바이올렛은 그 상처를 애써 외면하며 그저 남편이 출장에서 돌아오자마자 이 소식을 알릴 생각에 집중했다.
“남편이 빨리 돌아왔으면 좋겠네.”
바이올렛이 혼잣말하듯 말하자 룰루도, 젠도 고개를 끄덕였다.
*
중간에 대화가 중단되었으나 윈터도, 엘라도 식사 중에 일어나지 않았다. 여느 때의 윈터였다면 대화가 끝나자마자 시간 아까워 일어나 나갔겠지만, 장모님 앞이라고 끈기 있게 자리에서 버티는 중이었다.
식사가 끝나고 차까지 마신 후에야 두 사람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윈터가 받아다 준 코트를 다시 걸친 엘라가 말했다.
“내가 두 섬을 준다고 해도, 에쉬가 ‘모든 섬’ 부분을 아예 지워 버리면 그 작위는 당연히 둘 중 손위 형제인 에쉬에게 돌아갈 걸세.”
“예. 대비하고 있습니다.”
윈터가 한 ‘대비’라는 말이 제 아들에게 매우 위험하리란 것을 엘라는 어느 정도 짐작했다. 그러나 만약 그것이 제 아들이 죄를 저질러 생기는 문제라면 엘라 역시 감싸 줄 수 없었다. 윈터의 말대로, 그녀는 아이들의 어머니이기 이전에 이 나라의 왕비였던 사람이었다.
승강기에 두 사람만이 타 조용해지자 엘라가 말했다.
“조건이 있네.”
“예. 말씀하시죠.”
“딸아이와의 식사 자리를 만들어 주게. 1년에 한 번이어도 좋고, 2년에 한 번이어도 좋으니.”
“식사요?”
윈터가 예상 못 한 말에 되묻자 엘라가 담담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그 애가 나에게 많이 화가 나서, 마음이 많이 돌아섰다네.”
“그렇습니까.”
“쉽게 돌이킬 수 없는 것도 알고, 늦은 것도 알아. 그래도…….”
“설득해 보지요. 하지만 아마, 아내는 식사 자리를 특별히 거절하지도 않을 겁니다. 거듭 거절하는 것도 무례한 일이라고 생각할 테니.”
“그런가.”
“그 이후에 마음을 돌리는 것이야 뭐. 두 분이 할 일이니까요.”
윈터가 말하는 사이 승강기 문이 열렸다. 그가 그냥 가려다가 뜨끔해서 되돌아와 서자 엘라가 혀를 찼다.
“……정말 내 딸은 자네에게 불만이 없는 겐가?”
“가끔 있지만 시정 중입니다.”
윈터가 말을 마치곤 슬쩍 웃었다. 협상이 끝나자 사업가에서 다시 사위로 돌아오는 모양이었다. 저 스스로도 제가 매력적인 걸 알고 짓는 그 미소며 얼굴이 워낙 뛰어나 엘라는 태도가 저래도 얼굴 때문에 바이올렛이 봐주며 사는 게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엘라가 물었다.
“자네는 ‘모든 섬’이라는 말을 아예 지우는 것을 반대할 생각인가? 그럼 여기 하구 섬은?”
“아, 제 겁니다.”
내내 행동을 지적하던 엘라가 처음으로 말문이 막힌 채 그를 보자 윈터가 어깨를 으쓱이며 능청을 떨었다.
“제가 살 땐 별로 안 비싸서요.”
“거참.”
“그보다 마음 정하셨으면 오늘 바로 문서 넘겨주시면 안 됩니까? 어려운 건 빨리 해결하고 아내를 보러 가고 싶은데요.”
윈터가 저보다 한참 체격이 작은 엘라에 맞게 허리를 숙이고 싱긋싱긋 웃으며 애교 섞인 투로 물었다. 보수적인 사람들로 둘러싸여 살아온 엘라는 저렇게 아양을 떠는 사람을 본 일이 없어 어쩐지 마음이 약해졌다. 아마 저 사내는 살아오는 내내 거칠었다가 아양을 떨었다가 멋대로 굴며 이렇게 세를 불려 왔을 것이었다.
어쩌면 고지식함의 극단에 있는 딸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저런 유연한 사람이 아닐까.
엘라는 처음으로 두 사람이 천생연분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
하옐은 조마조마한 상태로 마차 앞에 서 있었다.
오늘 윈터는 그의 예상과 전혀 다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지금쯤 북부에 도착하고도 남았어야 하는데, 밤중까지 수도 일정이 끝나지 않았다.
저택에 연락을 해야 하나, 그가 안절부절못하는데 엘라가 먼저 나와 마차에 탔다. 뒤이어 나와 마차에 탄 윈터가 흥분한 얼굴로 말했다.
“문서까지 아내 이름으로 넘겨받았어.”
“정말이십니까?”
“이제 레클 강의 모든 섬은 다 내 아내 것이 되는 거야. 아내에게 알려 주고 싶으니 바로 저택으로 가지.”
그의 말에 눈이 커진 하옐이 급히 말했다.
“부, 북부 먼저 가셔야죠! 일정이 바쁜데!”
“밤새 가면 될 거 아냐.”
윈터의 핀잔에 하옐은 식은땀이 흘렀다.
그와 일하기 시작한 초창기부터 느꼈던 일이지만, 윈터에게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육감 같은 것이 있었다. 무언가 뒤로 꿍꿍이가 있다 싶으면 그걸 귀신같이 알아차렸다.
지금 집에 가면 안 된다고 해 봤자 더 의심을 살 것이 뻔해, 하옐은 말리지도 못하고 함께 마차에 올라탔다.
윈터가 하옐의 타는 속도 모르고 자랑을 늘어놓았다.
“생각보다 쉽게 해결됐어. 장모님도 아시는 거지, 딸이 그 쓰레기와 비교할 수 없이 훌륭하다는 걸.”
“예, 예. 작은 마님 훌륭하시죠.”
“강의 주인이라니, 위엄 있군. 안 그래?”
“그거 아니어도 위엄 있으세요.”
하옐이 대충 맞장구치며 걱정하는 사이에도 마차는 저택에 가까워졌다.
저택 앞에 다다랐을 때, 하옐의 우려가 괜한 것이 아니었다는 듯 안쪽에서 수도의 가장 큰 병원의 문양이 새겨진 마차가 달려 나왔다.
그 모습에 윈터가 인상을 쓰며 마차를 세우게 했다.
“……병원?”
혼잣말한 그가 잠시 생각하더니 순식간에 얼굴이 하얘졌다.
주치의가 있음에도 병원 마차가 들어섰다는 것은 아내가 큰 병원에 가야 할 정도로 아프다는 사실밖에 되지 않았다. 그가 무서운 기세로 마차에서 내려 저택으로 달려 들어가려 들었다. 그러자 하옐이 울상이 되어 온몸으로 그를 막아서며 실토했다.
“임신 여부를 확인하러 온 의사들입니다!”
“뭐?”
윈터가 멈춰서 표정을 구겼다. 그러자 하옐이 말을 이었다.
“작은 마님께서…… 확인을 해 보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일전에 있었던 일도 있고 해서 주치의가 아닌 다른 의사에게도 확인을 해 보시는 겁니다. 워낙 충격이 크셨잖아요, 예전에.”
“그걸 왜 나 모르게 해!”
“아직 별달리 입덧을 하거나 건강에 문제가 없으셔서요. 아닐 가능성이 더 크다고 생각하신 것 같아요.”
“…….”
“대표님 생각해서 그러신 거예요.”
하옐의 말을 머리로는 이해해도, 윈터의 가슴이 철렁한 것은 별수 없는 일이었다.
아내와 함께 기대하고, 함께 실망하고 싶었다. 그런데 제가 의지할 만한 남편이 못 되니 아내가 혼자 확인하려 드는 것이 아닌가.
시간이 지났어도, 바이올렛은 여전히 이전에 겪었던 아픔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것이 분명했다. 그녀가 단 한 번 임신 소식을 알렸을 때 제가 했던 폭언을 윈터 역시 전부 기억하고 있었다.
아무것도 아닌 여자라고 했었다. 그때의 저는 아내의 이야기를 들어주지도 않으면서 아내가 제 손에서 빠져나갈까 봐 전전긍긍할 줄만 아는 한심한 사내였으니까.
윈터가 입을 꽉 다물고 저택으로 한 걸음 걸었다가 그대로 멈춰 섰다.
그는 제가 참 성장이 더디다고 생각했다. 아니면 혹독하게 자라면서 필수적인 성장 과정 몇 가지가 빠져 이제야 겪고 있는 것인지.
이런 상황이 닥치니, 아직도 그는 아내가 사라지는 것이 두려웠다. 제 폭언을 기억하는 그녀가 또다시 떠나는 것이. 저를 믿지 못할까 봐 주저앉을 만큼 두려웠다.
“대표님, 들어가실 겁니까?”
“…….”
“다시 말씀드리지만 임신이 아닐 가능성이 큽니다. 그럼…… 물론 대표님이 곁에서 달래 주시는 것도 좋은 생각입니다만.”
그는 아내를 사랑했고, 아내도 저를 사랑했다. 그러나 그 확신에 달라붙은 그림자처럼, 그의 불안은 사라지는 법이 없었다.
“……아내가 말할 때까지 기다리지. 북부로 가자. 내일 마약 거래가 있단 줄을 잡았으니 증거를 찾아와야지.”
윈터는 끊임없는 고통을 짓눌러 내고 몸을 돌렸다. 지금 들어가 봤자 왜 저에게 말해 주지 않느냐고 어린애처럼 우는소리나 할 텐데, 그건 안 될 말이었다. 그는 제가 아내가 의지할 만한 어른이기를 바랐다.
마차에 탄 후에도 그는 말 한 마디가 없었다.
*
바이올렛은 오히려 더 들뜬 두 사람을 진정시키느라 제가 임신을 했다는 사실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할 틈이 없었다. 게다가 연이어 그녀에게 슬픈 일까지 닥쳤다.
룰루가 찬바람 근처에도 가면 안 된다며 바이올렛이 그렇게 좋아하는 발코니에서 2m 떨어진 곳에 태피스트리를 걸어 막기 시작한 것이었다.
“룰루, 내가 알아서 발코니 쪽으로 안 가면 안 되는 건가?”
“죄송해요, 작은 마님. 어쩔 수 없어요.”
“그래도 그렇지. 이래서는 아예 정원이 안 보일 거 아닌가.”
“그래서 막는 거예요. 정원이 아예 안 보여야 이쪽으로 올 생각을 안 하시죠.”
“아직 몸도 말짱한데 벌써부터 이렇게 염려할 것은 없네.”
정원을 보고 싶었던 바이올렛이 최대한 고집을 부리며 룰루를 설득하려 들었다. 그러자 젠이 나서서 바이올렛을 침대로 데려가며 말했다.
“잘 생각해 보세요, 작은 마님. 대표님 오시면 이것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을걸요?”
“그야…….”
“집사님이니까 2m 거리에 걸어 주시죠. 대표님 오시면 아예 침대랑 벽난로를 담요로 에워싸실지도 몰라요.”
“…….”
남편은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라, 바이올렛은 대답을 하지 못했다. 젠이 침대에 앉은 바이올렛을 담요로 감싸며 말을 이었다.
“이 정도로 만족하세요. 지금 정원에 볼 것도 없잖아요. 날씨 풀리면 어련히 알아서 다 걷어 드릴까 봐요.”
누구보다 저를 잘 아는 젠의 설득에 바이올렛이 체념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온 방에 거듭 방한 장치를 해 놓고 나서야 바이올렛은 침실에 혼자 남을 수 있게 되었다.
바이올렛은 그제야 제가 아이를 가졌다는 사실에 대해 생각할 여유가 생겼다.
의회 출석에 관한 서류를 확인하며 그날 제가 할 발언을 적던 그녀는 뒤늦게, 납작한 제 배 위에 손을 올려 보았다.
임신을 하면 금방 알 줄 알았는데, 이상하게 아직도 믿기지가 않았다. 어쩌면 과거의 상처 때문에 부정하는 것일 수도 있고, 아니면 아가가 아직 너무 작은 걸지도 몰랐다.
“아가야.”
그래서 그렇게 말을 걸고 나서 보니 이상하게도, 그제야 눈물이 나기 시작했다.
바이올렛이 손으로 눈물을 닦아 내며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어서 남편 얼굴을 보며 알려주고 싶어. 세 밤을 어떻게 보내나…….”
빨리 그가 보고 싶었다. 빨리, 남편에게 안기고 싶었다.
그래야 정말로 기쁨이 찾아올 것 같았다.
제가 남편이 옆에 없으면 살기 힘들게 되었다는 걸, 바이올렛은 오늘 밤 사무치게 느끼고 있었다.
당신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