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화
회사에서 급한 일을 처리한 윈터는 점심시간쯤 본사를 나섰다. 먼저 나와 마차에 그의 여분 정장을 싣고 있던 하옐이 물었다.
“대표님, 바로 북부로 가실 거죠?”
“아니, 우선 처리할 일이 있어.”
“예?”
윈터가 마차에 타자 하옐이 초조한 얼굴로 물었다.
“제가 모르는 일정이 있단 말씀이십니까?”
“그럴 수도 있지. 왜 그렇게 놀라?”
“아뇨…….”
북부에 도착하면 윈터가 수도에 없다는 것을 젠에게 알려 주기로 했던 하옐이 말끝을 흐렸다. 윈터가 말했다.
“아내가 의회 출석을 하기 전에 레클 강의 모든 섬을 살 거야.”
“그건 들었습니다. 사람도 없는 그 섬을 왜 사시려는 겁니까?”
“사람이 없다니. 두 가구씩은 살아.”
윈터는 아내에게 들은 정보를 바탕으로 하옐에게 레클 강에 관한 작위를 설명했다. 윈터가 마부에게 유명한 레스토랑 이름을 말하고 의자에 털썩 기대앉자 하옐이 물었다.
“하구 섬을 제외한 나머지 두 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누구인데요?”
“엘라 필리체 부인. 원래는 선왕의 것이었으니까.”
“그렇군요.”
“에쉬 로렌스는 당연히 그 두 섬을 자기에게 물려줄 거라 생각하고 있겠지. 하지만 난 그 섬을 받아 내고, 아내는 의회에서 ‘모든 섬’을 지우는 일을 막을 거야.”
“그럼 레클 강과 모든 섬에 관한 작위를 작은 마님이 뺏어 올 수도 있겠군요?”
“뺏다니? 합법적인 거지. 어떻게 작위를 그딴 쓰레기가 가져가. 내 아내처럼 고귀한 공주님이 계시는데.”
윈터는 이제 제가 아내를 얼마나 우러러보는지에 대해 숨길 생각조차 없었다. 하옐 역시 작은 마님을 진심으로 아꼈으므로 그것에 대한 불만은 없었다.
“그럼 지금 엘라 필리체 부인을 뵈러 가시는 겁니까?”
“응. 뵙기로 했어. 아내에게 연락 받자마자 미리 기별드렸거든.”
“그렇게…… 모녀 사이가 친근한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만.”
부모 이야기만 나오면 삐뚤어지는 하옐의 말에 윈터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내도 그렇다고 하더군. 물론 우리가 못마땅한 어른들을 보고 자란 건 사실이지만, 만에 하나 우리에게 아이가 생기면 그래도 할머니 하나는 있어야지. 엘라 부인이든…… 내 친모이든. 물론 자주 보진 않겠지만.”
“…….”
“아, 몰라. 아내는 라크라운드에 잘 도착했다고 내 친모에게 몰래 기별을 했잖아.”
“‘몰래’인데 그걸 알아내신 쪽이 잘못하신 겁니다.”
“그래서 나도 아무 말 안 했어.”
“작은 마님은 항상 인사 편지를 보내는 다정한 분이니까요.”
“내 아내는 내가 잘 아니까 닥쳐.”
윈터가 짜증을 냈다.
바이올렛도, 윈터도 본인의 부모 이상으로 상대방의 부모에게 모질지를 못했다. 윈터는 어디에도 공통점이 없을 것 같은 제 아내와 제가 외로움만은 공유하고 있음을 알았다.
그러므로 그는 조금씩 그 외로움조차 달콤한 것으로 느끼게 되는 와중이었다. 사랑이 사람을 미치게 한다더니, 이럴 때 쓰는 말인 모양이었다.
잠시 후 마차는 윈터가 약속한 레스토랑 앞에서 멈춰 섰다. 그가 잠시 서 있으려니 이내 필리체 가문의 문장이 새겨진 마차가 서고, 엘라가 내렸다. 엘라는 여느 때처럼 서늘한 눈으로 윈터를 보았다. 윈터가 말했다.
“들어가시죠.”
“그렇게 하시게.”
엘라가 무표정으로 앞장서 레스토랑으로 들어섰다.
*
바다를 바라보는 5층의 레스토랑은 이전에 윈터와 바이올렛이 식사를 한 적이 있는 곳이었다. 본론에 들어가기에 앞서, 두 사람은 매우 어색하고 불편한 상황 속에서 식사를 시작했다.
엘라는 결혼 전부터 사위를 영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그가 나라에 닥쳤던 큰 경제적 위기를 넘기게 해 준 것은 사실이지만, 이방인이며 서자이기까지 한 자가 로렌스가 사람과 결혼한 것은 여전히 충격적인 일이었다. 직계에서 멀어져도 그럴진대 하물며 바이올렛은 선왕의 적녀이고, 라크라운드의 마지막 왕녀였다.
이전까지는 그것이 윈터 블루밍에 대한 평가의 전부였다면, 이제는 제 딸을 남부에 고립시킨 자들 중에 하나라는 평가까지 더해졌다.
어느 정도 침묵이 지나고, 윈터가 못마땅한 표정으로 식사하는 엘라에게 말을 건넸다.
“연락은 받으셨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는군.”
엘라의 말에 윈터가 멈칫했다. 그제야 아내가 늘 잔소리하던 인사치레가 필요했음을 몸소 깨달은 그가 성질을 꽉 누르며 말했다.
“그간 안녕하셨습니까.”
“참 빨리도 묻네.”
“……죄송합니다.”
윈터는 제가 아내뿐만 아니라 아내의 친구, 아내의 어머니에게까지 맥을 못 춘다는 사실에 매우 고통스러워했다. 그뿐인가. 심지어는 아내가 아끼는 사용인들에게까지 꼼짝을 못 했다. 아마 그들이 급여를 배로 올려 주지 않으면 그만두겠다 따지고 들면 못 견뎌 원하는 만큼 올려 주고 말 것이 분명했다.
엘라가 스푼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자네도 이제 블루밍가의 후계자로 내정된 것 아닌가. 예법을 따르는 게 좋겠네. 특히 장모에게 편지를 쓸 때 직원을 시켜 적게 하는 법이 어디에 있나. 당연히 본인이 적어야지.”
“제가 수도에 없어서 그랬습니다.”
“그래도 자네가 썼어야지. 바이올렛 그 애는 예법에 아주 밝은 아이네. 어려서부터 뭐 하나 실수하는 법이 없는 아이였어. 어른들보다 훨씬 그 태도가 올발랐던 아이인데 자네에게 아무 불만이 없었던 겐가?”
윈터는 이래 보여도 지금은 어마어마하게 나아진 거라는 말대답을 결코 할 수 없었다.
엘라와 비교하면 아내는 제 행동을 거의 지적하지 않는 편에 속한다는 것을 윈터는 처음으로 깨달았다. 지금껏 저의 태도를 나무랄 사람이 없었다 뿐이지, 만약 블루밍 공작 부부가 그를 진심으로 아들 대하듯 했었다면 제 모든 행동이 문젯거리였을 것이다.
엘라가 미간을 좁히고 말을 이었다.
“앞으로 나에게 편지를 할 때는 본인이 직접 쓰게. 특히…….”
엘라가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이해가 안 된다는 듯 숨까지 고른 후 말을 이었다.
“편지를 밀봉하는데 어떻게 회사의 인장을 찍어 보낼 수가 있는 겐가.”
“그게 뭐가 문제입니까?”
윈터가 못 참고 대들자 엘라가 기가 차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바이올렛이 종종 짓는 것과 똑같은 표정에 윈터의 입이 바로 꽉 다물렸다. 엘라가 말했다.
“당연히 문제지. 생각해 보게. 난 자네 편지를 받을 때 나의 집사에게서 ‘카닉사에서 온 편지가 있습니다.’라는 말을 가장 먼저 들었다네. 그럼 내가 무슨 생각을 했겠나?”
“카닉사에서 왔다고 생각하셨겠지요.”
“물론 내가 그 회사에 아는 사람이라고는 자네와 안잘리 그 아이 정도네만. 혹시 아나. 정말로 카닉사에서 보낸 홍보물일지. 내가 그대로 그 편지를 버릴 수도 있었단 소리네. 그렇게 중요한 편지를!”
“예, 제가 정말 쓰레기입니다.”
“지금 나한테 대드는 겐가?”
“…….”
윈터는 이제부터 아내에게 더욱 잘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녀는 저를 손바닥 위에 두고 마음껏 휘두를 수 있으면서도 이렇게 저를 맹비난한 적이 없었다. 물론 그녀가 맹비난해 준 적이 없기 때문에 지금 이렇게 장모님에게 깨지고 있는 것일 테지만.
그렇게 바이올렛이 했어야 할 잔소리까지 실컷 퍼붓고 난 엘라가 단호한 얼굴로 말했다.
“자. 이제 그 편지의 내용에 대해 이야기해보게.”
“정말 본론을 말해도 괜찮으신 겁니까?”
“비꼬지 말게.”
“레클 강에 관한 작위를 좌우하실 수 있으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걸 달라는 건가?”
“협상을 하시지요.”
“내가 가진 두 섬을 주면 내 아들에게는 아무것도 남지 않네. 정말 아무것도.”
“저도 둘 중에 덜 예쁜 자식이어 봐서 그 맘은 압니다만.”
협상이 시작되는 순간부터 사위였던 윈터는 사업가로 태도가 바뀌었다. 그것은 예법을 중시하는 엘라의 눈에 더욱 선명하게 들어오는 변화였다.
태연히 엘라와 바이올렛의 상처를 건드린 윈터가 말을 이었다.
“하지만 예법을 중시하시지요. 예법을 중시하신다는 건 라크라운드의 뿌리 또한 중시하시는 것 아니겠습니까?”
“물론이네.”
“에쉬 로렌스가 왕이 될 자였다는 것은 압니다. 하지만 객관적으로 봐 주십시오. 두 사람을 자식이 아니라 완전히 별개의 인재들이라고. 만약 두 사람 중 하나에게 중대사를 맡긴다면 누구에게 맡기시겠습니까? 잘 아시겠지만, 제 아내는 좋은 사람입니다.”
윈터의 말에 엘라가 멈칫했다. 그사이 그가 말을 이었다.
“처음부터 이 나라를 위험에서 구하려 저 같은 이방인 서자의 청혼을 받아들인 건 다름 아닌 바이올렛입니다. 저는 목적이 작위였지요. 아내의 목적은 라크라운드의 경제 위기를 해결하는 것이었어요. 그 과정에서 에쉬의 행동도 있었던 건 압니다. 하지만 그 순간 가장 고결한 선택을 했던 건 누구였습니까? 자기 이익이 아닌, 국가의 존속을 목적으로 희생했던 건 제 아내 한 사람뿐입니다.”
“자네는 자네와의 결혼을 희생이라고 말해도 괜찮은 겐가.”
“결혼 초에는 저도 인정하기 싫었죠. 지금은 아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있고, 그녀가 절 사랑하는 것도 알고 있으니 상관없습니다. 부인께서는 이 나라의 왕비셨습니다. 비록 지금은 아니라고 해도, 누구보다 라크라운드를 위하셔야 하는 사람입니다. 그런 선택을 하셔야 하는 분이죠. 제 아내는 언제나 본인이 공주님이 아니라고 제 말을 고쳐 주지만, 여전히, 언제나, 누구보다 공주님다운 선택을 합니다.”
엘라는 더 이상 대답이 없었다. 윈터가 말을 이었다.
“섬에 대한 대가는 충분히 지불하죠. 하지만…… 이것이 대가로 결정되는 일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습니다. 결국은 부인의 판단에 달린 일이죠.”
그 말을 끝으로, 윈터 역시 침묵하며 다시 식사를 이어 갔다.
*
바이올렛은 손발이 차가울 정도로 긴장해 있었기 때문에 무엇이든 집중할 것이 필요했다. 그래서 요리를 하려 했던 것인데, 윈터가 그렇게 걱정하니 의회에 갈 때 입을 드레스를 준비하는 쪽으로 관심을 돌렸다.
단정한 검푸른 드레스와 검은색 코트를 몸 선에 맞게 수선하고, 코트에 달 단추를 골랐다. 바이올렛은 단추 장인이 만들어 온 세 종류의 은단추를 살펴 고르고, 어차피 당일이 되면 바꾸게 될 것이 뻔한 브로치도 한참을 살폈다. 그중 다섯 종류의 보석을 사용한 나뭇잎 형태의 큼지막한 브로치를 골랐다.
금방 연락이 올 거라는 예상과 달리 하옐의 전신이 늦어졌다. 결국 긴장감을 견디지 못한 젠이 물었다.
“비서님이 연락을 안 주시는데요. 그냥 의사 부를까요? 지금쯤이면 북부로 가셨을 것 같아요.”
“하긴. 그렇구나.”
바이올렛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마음속은 임신 사실을 확인하고 싶은 마음과 확인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반반씩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두렵다고 계속 미루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잠시 후 하옐이 고르고 골라 산부인과에서 최고로 손꼽히는 명의로 뽑아 준 의사 두 명이 먼저 임신 여부를 확인했다.
그리고 마지막에서야 주치의가 들어서서 섭섭한 얼굴로 말했다.
“작은 마님, 절 못 믿으시는 겁니까? 의사를 둘이나 더 부르시다니.”
“미안하네. 그간 겪은 일이 있다 보니.”
“그거야…… 맞네요. 그런 쓰레기 같은 의사들을 만나셨으니 우려스러우실 만하죠.”
“그래도 자네가 마지막이지 않나. 자네 의견이 아니면 다 소용없으니.”
바이올렛이 달래는 말에 주치의가 그제야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진료를 마친 후 기쁜 얼굴로 말했다.
“의사 세 명의 의견이 동일하니 이보다 확실하기도 힘듭니다.”
“정말…… 정말인가.”
“예, 아기님이 오셨습니다. 축하드립니다, 작은 마님.”
당신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