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3화
아이 이야기가 나오자, 윈터는 여느 때처럼 말수가 부쩍 줄어들었다.
항구에 도착할 때까지 침묵하던 그는 라크라운드로 돌아갈 크루즈에 타기 전, 하려던 말을 빠르게 전했다.
“하구 섬을 공동명의로 돌릴 서류를 준비 중이니까 돌아가서 서명만 해. 나머지 두 섬도 조율 중이니 조만간 사들일 거야.”
그러자 바이올렛이 동그랗게 커진 눈으로 윈터를 보았다.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죠? 지금 하구 섬이 예전 같은 황무지도 아니잖아요.”
“명의만 공동으로 두는 거야. 어차피 내 거인 건 마찬가진데 뭐.”
“그래도 그건 너무…….”
바이올렛이 거절하려하자 윈터가 오히려 정색하고 밀어 붙였다.
“필요한 일이잖아. 아니면 레클 강 어쩌고 하는 작위가 당신에게 별로 의미가 없는 건가?”
“그럴리가요. 그 칭호는 엄청난 명예예요.”
“그 명예를 에쉬 따위에게 뺏길 수는 없잖아.”
그의 말에도 잠시 망설이던 바이올렛이 입을 열었다.
“당신 말이 맞아요. 에쉬에게는 과분한 명예죠. 하지만 나에게도 과분해요.”
그녀의 말에 윈터가 확연히 찌푸려진 얼굴로 말했다.
“세상에 당신에게 과분한 건 없어. 혹시 이방인들의 생명을 구한 건 명예로운 행동으로 치지 않는 건가?”
그의 말에 바이올렛이 멈칫하자, 윈터가 말을 이었다.
“거봐. 게다가 당신은 결혼으로 라크라운드를 지켰어. 그건 영웅의 행동이지. 영웅에게는 보상이 있어야 해.”
“…….”
“당신이 한 이야기야.”
윈터의 능청스러운 목소리에 잠시 생각하던 바이올렛이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그녀가 차차 받아들이는 느낌이 들자 윈터가 슬쩍 웃으며 그녀의 손을 잡아끌었다.
“가자.”
“가요. 그리고 앞으로 또 그런 커다란 계획이 생기면 나와 상의해줘요. 뭔가를 사거나, 또 비행선 띄울 때도.”
“말하면 아무것도 못 사게 할 거잖아.”
“못 사게 하면 사지 말아야 하지 않을까요?”
“고집불통이군.”
“내가 고집불통이라는 건가요?”
바이올렛이 미간을 좁히자 윈터가 짓궂은 웃음을 지어보였다.
크루즈에 타면서도 바이올렛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녀는 나머지 두 섬을 가진 사람을 알고 있었고, 그 사람이 저에게 섬을 넘겨줄 가능성은 매우 낮다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고민이 많아진 것은 사실이었다. 그가 던져준 고민거리 덕분에 바이올렛은 잠시나마 임신에 대한 생각을 하지 않았다.
*
키론에서의 행복한 마무리를 끝으로, 두 사람은 라크라운드로 돌아왔다.
윈터는 수도에 돌아오자마자 알리카의 관광업 건을 정리해 회사에 던져 주며 모두를 고통으로 몰아넣었고, 바이올렛은 조만간 의회에 출석하기 위한 준비를 시작했다.
알리카에 다녀온 이후 그녀는 눈에 띄게 건강을 되찾았다. 입덧을 하거나 심지어 그냥 비위가 상하는 일도 없었다.
평소보다도 잠이 많아지긴 했지만 그건 여독이 남았기 때문일 거라 생각했다.
그럼에도 계속 월경이 없었다. 바이올렛은 아이 생각에서 벗어나기 위해 낯선 일거리를 만들었다.
윈터의 생일은 1월 중에 있었다. 바이올렛은 이번에야말로 윈터의 생일에 음식을 만들어 주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충분히 책으로 공부를 한 후 주방에 선 바이올렛이 심호흡했다. 재료를 미리 다 꺼내 두고 찬찬히 레시피를 읽고 있는데 주방 입구에서 쾅쾅 소리가 들리더니 정신없이 달려온 윈터가 들어섰다. 출근하다 되돌아온 그의 넥타이가 틀어져 있었다.
겨울이라 초콜릿이 잘 잘리지 않아 고생하던 바이올렛이 식칼을 든 상태로 윈터를 돌아보자 그가 두 손을 방어적으로 들었다.
“잠깐만, 잠깐만. 뭐가 하고 싶어?”
“초콜릿 수플레를 만들 거예요.”
“왜 갑자기 그런 생각을 하신 겁니까, 공주님?”
“당신 생일이 얼마 안 남았잖아요. 지금부터 연습해서 만들어주려고요.”
“황송하군.”
“갑자기 왜 그렇게 공손하죠?”
“칼 들었잖아.”
윈터가 말하며 걸어왔다. 바이올렛이 비장하기까지 한 얼굴로 달걀을 먼저 꺼냈다. 그러자 윈터가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
“설마 달걀을 칼로 깨려는 건 아니지?”
“달걀 정도는 깰 줄 알아요.”
바이올렛이 그리 말하더니 칼을 내려놓고 꼼꼼해 보이는 손짓으로 서툴게 달걀을 깼다. 그러고는 선반 위를 살폈다. 윈터가 물었다.
“뭐 하려고?”
“흰자와 노른자를 분리하라고 되어 있어요. 도구가 있나 해서요.”
그녀의 말에 윈터가 달걀을 들어 한 손으로 가볍게 두들겨 깨더니 양쪽 껍질에 번갈아 옮겨 흰자와 노른자를 분리했다.
“또 뭐.”
“흰자는 거품이 생길 때까지 저으래요. 이제 안 도와줘도 돼요.”
“그거야말로 내가 해야 할 걸.”
“출근해요. 몰래 하는 중이었는데.”
“당신이 주방에 있는 걸 어떻게 믿고 출근을 해?”
“1년 동안 키론에서 혼자 살았잖아요. 간단한 요리 정도는 할 수 있어요.”
“그래, 이제 드디어 빵 정도 구울 수 있게 됐겠지.”
“아뇨, 빵은 못 구워요.”
“구운 빵을 재가열할 수 있게 됐지?”
윈터가 다시 묻자 바이올렛이 그제야 고개를 끄덕끄덕거렸다. 그러더니 간신히 자른 초콜릿을 돌아보고 말했다.
“버터와 중력분을 먼저 익히라는 군요.”
“불은 내가 켜지.”
윈터가 다급하게 불 쪽으로 가 켜 주자 바이올렛이 다시 레시피를 확인하며 혼잣말을 했다.
“소스팬이 어느 걸까.”
그러자 윈터가 걸려 있던 소스팬을 꺼내 불 위에 올려준 후 진지하게 물었다.
“꼭 요리를 해야겠어?”
“연습중이잖아요. 왜 들이닥쳐서 연습 중인 사람한테 잔소리하는 거죠?”
“있잖아, 바이올렛. 우리 집에 돈 많아.”
“알아요.”
“알면 가정 교사를 불러.”
“안 돼요. 투린 주방장 성격에 다른 요리 선생을 부르면 얼마나 섭섭해하겠어요?”
“그럼 주방장한테 배우든지.”
“저도 그래 보려고 했는데 투린은 내가 하는 게 답답해서 보고 있지를 못하더군요.”
바이올렛이 다시 칼을 들려 하자 윈터가 그녀의 손에서 칼을 뺏으며 말했다.
“초콜릿 수플레에는 더 이상 칼 쓸 일 없으니까 이건 치우자.”
“정말요? 요리를 하는 데에는 당연히 칼이 필요한 줄 알았어요.”
“우리 회사 앞에 초콜릿 수플레 잘 하는 레스토랑 있어. 거기 주방장에게 말해 두지. 왜 내 돈 주고 고용한 놈들 눈치를 봐야 하는지 모르겠지만 원하면 투린에게 비밀로 하라고 해 줄 테니 염려 말고. 그리고 앞으로는 혼자 주방 들어오지 마. 제발.”
“당신은 내가 여기 있는 거 어떻게 알고 온 거예요? 당신 출장 간 사이에 연습하려고 했는데.”
바이올렛이 묻자 윈터가 그녀를 끌고 주방을 나가 앞에 안절부절못하며 모여 있던 사용인들을 턱짓했다.
“저 중 하나가 달려와서 일렀지.”
“내가 그렇게 못 미더웠던 모양이군요.”
“못하는 건 포기하고 사람 고용해. 그게 효율적이고, 돈을 버는 방법이야.”
그가 바이올렛의 등을 떠밀면서 고개를 돌려 사용인들에게 빨리 주방을 폐쇄하라고 손짓했다. 결국 재출근을 하게 된 윈터를 한 번 더 배웅 나온 바이올렛이 급히 달려오느라 삐뚤어진 넥타이를 바로 매 주며 물었다.
“북부에 가는 일정은 헤스턴가에서 요청한 것만 해결하면 끝나는 거죠?”
“응. 사업적인 부분. 금방 해결하고 올게.”
바이올렛이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리카 여행 내내 같이 있다가 사흘이나 떨어져 있으려니 섭섭하네요.”
“중간에 집에 올까?”
“그냥 한 번에 다 처리한 후에 돌아와서 같이 있어줘요.”
바이올렛의 목소리가 윈터에게 무척 달게 들려서, 출발하는 걸음이 더욱 무겁게 느껴졌다.
“그런 말 하니 더 못 가겠는데.”
“얼른 가요. 그러지 말고.”
“빨리 돌아와서 우리 공주님 의회 출석 준비 도와줘야지. 난 당신이 에쉬 로렌스와 이야기하는 걸 구경하는 게 좋더군.”
“구경이요? 왜죠?”
“비교돼서 당신이 평소보다 더 위엄 있어 보이거든.”
“위엄 있는 여자를 좋아하는군요.”
“난 내가 무릎 꿇고 싶은 여자가 이상형이야. 말 안 했나?”
윈터가 능청스레 말하며 허리를 끌어안자 바이올렛이 그의 코트 깃을 쥐며 말했다.
“이러다 또 배웅에 한 시간 걸리겠군요.”
“우리 공주님이 나 없을 때 또 주방 들어갈까 봐. 걱정돼서 발이 안 떨어져.”
“안 들어갈게요.”
“나 없을 때 우리 부모님 혹시 찾아와도 들여보내지 마. 물론 경비원들이 당신에게 알려 주지도 않겠지만 만에 하나란 게 있으니까.”
“절대 안 들여보내요. 게다가 어차피 의회에서 만날 테니 찾아오시지 않을 거예요.”
“하긴. 블루밍가는 아직도 의석이 있지.”
윈터가 투덜거리고는 이 소중한 배웅에 그딴 걸 생각할 겨를이 없다는 듯 다시 미소 지으며 아내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바이올렛이 웃으며 윈터를 밀어냈다.
“이제 출근해요, 정말로.”
그러자 윈터가 아쉬운 얼굴로 뒷걸음으로 걸어 마차로 향했다.
“똑바로 걷고요. 넘어져요.”
“안 넘어질게.”
말을 마친 윈터가 손을 흔든 후 마차에 올라탔다.
그가 떠난 후 포치에 선 바이올렛은 마차가 멀어지는 걸 아쉽게 바라보았다. 뒤에 서 있던 젠이 얼른 담요를 덮어 주며 말했다.
“하루에 배웅은 한 번만 하시면 안 돼요? 감기 걸린다고요.”
“포치는 불을 피워서 따듯한걸?”
“바람이 차갑단 말이에요.”
“그건 그러네. 그럼 우리도 들어가자.”
바이올렛이 손짓하자 젠이 얼른 따라붙어 말을 이었다.
“하옐 씨가 대표님 북부에 도착하신 이후에 전신 보내기로 했거든요. 의사는 그 직후에 부르기로 했어요. 대표님이 도중에 들이닥칠 일 없게요.”
“두 사람 다 참 철저하구나.”
“대표님 성격 아시잖아요. 불같이 흥분했다가 불같이 꺼지면 주변에서 감당하기 힘드니까요. 두 분이 얼마나 정반대인지 작은 마님은 정말 모르실 거예요.”
“그래도 남편이지 않니. 그 정도로 모르지는 않아.”
“아뇨. 대표님 성격은 작은 마님이 제일 모르실 걸요. 세상에서 제일이요. 대표님이 작은 마님 앞에서 얼마나 순한 양인지 상상도 못 하실 거라고요. 작은 마님은 반대로 너무 지나치게 참을성이 강하세요.”
“지나칠 정도니?”
“네! 가끔 엄살도 부리시고, 불편한 것도 말하셨으면 좋겠어요.”
젠이 수선스럽게 말했다.
그녀는 혹시 임신이 아닐 경우 바이올렛이 실망하기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필사적으로 들뜬 마음을 감추며 끊임없이 아무 말이나 내뱉는 중이었다. 그런 젠의 마음을 안 바이올렛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젠, 이번에도 임신이 아니더라도 나에겐 아직 기회가 많아. 조금은 실망하겠지만 상처받지 않을 테니 일부러 그런 표정 할 것 없어.”
“……정말이시죠?”
“그럼. 정말이지.”
바이올렛의 다정한 말에 젠이 도저히 못 참겠는지 입을 열었다.
“드디어 작은 작은 마님이 생길 기회예요!”
“아들일 수도 있잖니.”
“도련님도 좋아요. 작은 마님은요?”
“음, 딸이어도 아들이어도 행복할 것 같아.”
“저도 상관없지만 웬만하면 작은 마님을 쏙 빼닮았으면 좋겠어요.”
두 사람이 이야기하며 드레스 룸으로 향했다.
당신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