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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152화 (152/176)

152화

바이올렛이 잠시 자리에 멈춰 섰다.

고작 나흘 정도 늦어지는 것뿐이었다.

이 정도 늦어지는 것은 종종 있는 일이었다. 그녀는 고작 며칠 늦는 걸로 매번 의사를 찾아 실망하고 싶지 않았다. 안 그래도 임신이 가능하리라는 할린의 말을 들은 이후부터 매달 긴장하며 기다린 탓에 주기가 다소 불규칙해진 상태였다.

가능할지 모르겠지만 라크라운드에 도착할 때까지는 최대한 잊고 있을 생각이었다.

그녀가 자꾸 멈춰 서자 샤론이 걱정스레 물었다.

“바이올렛, 무슨 생각 해?”

“응? 아, 미안.”

바이올렛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젓고 샤론을 따라 그녀가 묵고 있는 객실로 향했다.

샤론은 객실에 들어서자마자 한가운데 놓인 제 드레스를 가리켜 보였다.

“어때?”

“세상에, 예뻐라…….”

“엔나 할머니가 입었던 걸 수선한 거야.”

“네가 어릴 때부터 입고 싶어 하던 드레스 말이구나?”

“응. 거기서 소매를 잘라 내고 줄로 어깨끈을 장식했어.”

“정말 예뻐.”

바이올렛이 반짝반짝거리는 웨딩드레스를 감동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샤론이 하녀들의 도움을 받아 그 자리에서 드레스로 갈아입으며 말했다.

“할머니가 엄청 화내더라고. 그래도 할 수 없이 드레스를 물려주셨어. 내가 어릴 때부터 얼마나 그 드레스를 탐냈는지 알잖아.”

“그럼. 알지.”

“그래도 네가 먼저 결혼해서 물려 달라고 했으면 너에게 물려줬을걸. 진짜 손녀보다 널 더 예뻐하시잖아.”

“그럴리가. 널 얼마나 사랑하시는데.”

바이올렛이 달래듯 말하고는 잠시 생각하다 말을 이었다.

“나도 어머니 드레스를 물려받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어.”

“그래?”

“응. 내가 결혼할 땐 급하게 기성복을 수선해서 입었지만.”

바이올렛이 뒤늦게 아주 조금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어머니의 드레스는 라크라운드의 두 번째 여왕이었던 올리비아 로렌스의 드레스를 모티브로 해서 만들었거든.”

“아, 넌 올리비아 로렌스를 정말로 존경하지. 자주 초상화에 인사하러 갔었잖아. 핑크 다이아몬드 반지를 낀 초상화.”

바이올렛이 고개를 끄덕이자 샤론이 말을 이었다.

“그 반지는 필리체가 후계자인 셰인 필리체가 물려받았지?”

“응. 워낙 중요한 물건이라 나도 실제로 본 적은 없어. 필리체가 보석 금고에서 꺼낸 적이 없거든.”

“그렇구나.”

이야기하는 사이 샤론이 웨딩드레스를 다 입고 티아라와 면사포를 썼다. 샤론은 짧은 면사포를 사용했는데 그녀의 발랄한 분위기와 아주 잘 어울렸다.

바이올렛이 연신 감탄하며 말했다.

“너무 예뻐서 이제 화가 풀린다.”

“진짜? 그렇게 예뻐?”

“응, 그렇게 예뻐.”

“다행히 엠파이어 드레스라서 혹시 배가 좀 나와도 가려질 거야. 이미 소문은 다 났지만.”

샤론이 말하고 과장되게 한숨을 쉬자 바이올렛이 즐겁게 웃었다.

샤론이 다시 옷을 갈아입은 후, 두 사람은 앉을 수 있게 쿠션을 붙여 둔 창틀에 앉아 테이블을 가까이 당겨 놓고 티타임을 즐기기 시작했다.

샤론이 임산부에게 좋다는 차를 가져왔으므로, 바이올렛도 같은 것을 마셨다. 샤론이 물었다.

“차 맛없지?”

“아냐. 향이 좋아. 우유를 좀…… 아, 아니구나.”

“왜. 넌 먹어도 돼.”

“괜찮아. 네 상태가 최우선이지.”

바이올렛이 알리카에 다녀온 사이 바람이 부쩍 선선해져 있었다. 적당히 기분 좋은 바람을 즐기며 샤론이 말했다.

“하도 급하게 결혼 준비를 하고 있어서, 아직도 실감이 안 나.”

“이만하면 차곡차곡 진행이 되어 가고 있는걸?”

“다 네 덕이지.”

“나?”

“응. 네 덕에 윈터 경이 아우스 숨겨 주고, 이렇게 일정이 급한데도 호텔을 내주잖아. 내가 혹시나 너한테 험담할까 봐.”

“그런가.”

바이올렛이 부끄러워하며 웃는 모습에 샤론이 덩달아 행복해진 표정으로 말했다.

“네가 정말 행복해 보여.”

“고마워. 요즘 참 행복하네.”

“아, 결혼식 앞두고 마음이 불안했었는데. 너랑 이야기하니까 좀 안정된다.”

“하나도 불안해 보이지 않는데?”

“무슨 소리야. 엄청 불안해. 그날 혹시 오빠가 아우스를 죽이기라도 하면…….”

“내가 꼭 붙잡고 말릴게.”

“붙잡는 건 안 돼. 윈터 경께서 싫어하실걸.”

“설마, 남편이 어린애도 아니고.”

바이올렛이 말도 안 되는 소리 말란 듯 대답하고는 관심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떤 아이려나.”

“난 느낌이 딱 아우스 닮은 남자애 같아.”

“그럼 아주 침착한 아이겠구나.”

“너무 침착해서 내 속이 터지겠지. 저 석상처럼 입 무거운 남자가 둘이라니.”

“아우스 경 참 좋은 사람 같던걸? 처음부터 얘기해 줘.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바이올렛이 그동안 궁금해하던 것을 묻자 샤론이 한숨을 쉬었다.

“말도 마. 그 멍청이가 내 뒤만 졸졸 따라다니고 걱정하면서 좋아한다고 말을 안 하잖아.”

“용기 내기가 쉽지 않지.”

“그래도 적당히 때 되면 해야지. 키론 호텔에서 마지막 날까지 나랑 여기 머물러 놓고 말이야. 그래서 마지막 날 이러다 안 되겠다 싶어서.”

“네가 먼저 고백한 거니?”

“같은 침대에서 자자고 했어.”

“……뭐?”

바이올렛은 충격에 그대로 말문이 막혔다. 샤론이 태연히 말을 이었다.

“처음엔 그 말도 없는 남자가 안 된다고 몇 번을 말하는 거야. 그래서 나 그냥 내 방 갈까, 했더니 그건 안 된대. 그때부터 침대에 같이 누웠는데 아우스에게서 은근히 좋은 냄새가 나잖아.”

“그…… 래서?”

“일단 잠옷을 벗으라고 명령했지. 처음엔 안 된다고 하더니 중간부턴 자기가 막 덤벼들…….”

“충분히 들었어. 더 자세히 설명하지 않아도 돼. 그보다 키론 호텔에서 묵은 마지막 날이면…… 내가 키론에서 떠난 즈음이잖아.”

“음? 응.”

“그럼 그때부터 벌써!”

“으음. 얘기가 그렇게 되는구나.”

내내 뻔뻔하던 샤론이 그건 좀 민망한지 손으로 입을 가리고 호호 어색하게 웃었다. 남편이 이미 한 차례 휩쓸고 지나간 이야기였지만 본인 입으로 들으니 더 충격이 커 바이올렛이 손으로 이마를 감쌌다. 그런 바이올렛다운 반응이 재미있어, 샤론은 신나서 이야기를 이어갔다.

*

저녁 시간에 맞춰 두 남자가 돌아왔다. 아우스는 윈터와의 쇼핑에 매우 진이 빠져 있었으나, 윈터가 라크라운드 왕녀였던 바이올렛의 남편이므로 상명하복의 개념으로 받아들이는 듯했다.

네 사람은 함께 성대한 저녁 식사를 하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네 사람이 잘 맞았던 덕에 무척이나 즐거워 헤어져 각자 객실로 돌아가는 걸 모두가 아쉬워할 정도였다.

침실로 돌아오자마자 바이올렛은 곧바로 긴 잠에 빠졌다. 그러다 이른 새벽, 윈터가 그녀를 깨웠다.

“바이올렛.”

그녀가 바로 일어나지 않자 윈터가 슬쩍 웃으며 손으로 머리칼을 쓸어 올리고는 이마에 입을 맞추고 말했다.

“공주님, 일어나.”

그가 거듭 부르자 결국 바이올렛이 졸음이 무겁게 누르고 있던 눈을 가까스로 떴다.

“벌써 아침이에요?”

“새벽이야. 깨워 달라고 했잖아.”

“내가요?”

잠결에 바이올렛이 고개를 갸우뚱하자 윈터가 작게 소리 내어 웃었다.

“크루즈 타기 전에 꽃 시장 보고 가자며.”

그 말에 순간 잠이 확 달아난 바이올렛이 상체를 일으켰다.

“아, 그랬죠?”

그러자 윈터가 짐짓 실망한 얼굴로 말했다.

“남편 얼굴 볼 땐 안 깨던 잠이 꽃 생각엔 깨는 모양이지?”

“당신은 내일도 볼 수 있잖아요.”

“아, 그러니까 난 언제 봐도 상관없다?”

“비꼬지 말아요. 그런 뜻 아닌 거 알면서.”

“전혀 모르겠어. 길고 자세하게 풀어서 설명해 줘 봐.”

“난 봄이 안 와서 꽃이 안 펴도 당신만 있으면 살 수 있어요. 그걸 왜 비교하죠?”

그녀의 핀잔에 윈터가 기분 좋게 웃었다.

“음, 들으니 만족스럽군. 나도 사랑하고, 당신은 역시 타고난 바람둥이야.”

그러고는 그다지 춥지도 않은데 바이올렛의 코트까지 챙겨 집을 나섰다.

키론의 예핌추크가에서 꽃 일을 했던 바이올렛은 꽃 시장에 드문드문 아는 상인들이 있었다. 모처럼 그녀가 나타나자 상인들이 반갑게 인사했다.

“바이올렛! 이게 얼마 만이에요!”

“이리 좀 와 봐요. 새로 나온 화병이 있으니까.”

키론처럼 꽃 시장에도 빠르게 소문이 돌았다. 바이올렛이 라크라운드의 왕족이었다는 것을 다들 알았을 텐데도 그녀를 대하는 것에 차이가 없었다.

바이올렛에 대해 더 많은 사실을 알았다고 한들 그녀에 대한 평가가 바뀔 것이 없었고, 그녀 역시 상대가 저를 뭐라고 생각하든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에 변화가 없을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윈터는 바이올렛의 많은 면을 사랑했지만, 특히나 그런 면을 정신 못 차리게 사랑했다.

바이올렛이 실컷 꽃 시장을 즐길 수 있게끔 윈터는 한 걸음 떨어진 곳에서 그녀를 따라 걸었다. 꽃 시장을 한 바퀴 구경하며 선물 받은 꽃들만으로 꽃다발 하나가 만들어졌다.

윈터가 꽃다발을 끌어안고 행복해하는 바이올렛을 바라보며 말했다.

“당신 친구 부부가 결혼하는 걸 보니 더더욱 한 번 더 결혼식을 해야 할 필요가 느껴지더군.”

“그랬나요?”

“응. 그땐 웨딩드레스도 결혼식도 다 약식으로 처리해 버렸으니까. 수도에 돌아가면 웨딩드레스부터 구해야겠어.”

“엠파이어 드레스도 좋을 것 같아요.”

바이올렛이 무심코 대답하더니 곧 난처한 얼굴로 말했다.

“아, 엠파이어 드레스가 뭐냐 하면…….”

“내가 거듭 말하지만 보석이든 드레스든 내가 더 많이 샀고 내가 더 잘 알아.”

“내가 참 별난 남자와 사는군요.”

바이올렛이 웃으며 말하고 꽃 시장을 천천히 나섰다. 그즈음에야 해가 뜨기 시작해 세상이 차차 밝아졌다. 바이올렛이 자리에 멈춰 서서 행복한 얼굴로 해가 떠오르는 것을 바라보았다.

윈터는 매일 보는 일출 따위에 관심이 없어, 연신 주머니속의 반지상자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엔나에게 바이올렛이 올리비아 로렌스의 초상화를 좋아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 초상화 속 반지를 프러포즈용으로 준비했으나 타이밍 잡기가 쉽지 않았다.

반지도 중요한 물건이지만, 앞으로 명의를 공동으로 돌릴 하구 섬은 나라가 휘청거릴 재산이라 바이올렛의 많은 참여가 필요했다.

키론은 이제 가을 날씨이니 혹시 가을 탄다고 하면 대충 넘어갈 수 있지 않을까, 윈터가 심각하게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결혼식은 언제쯤이 좋나.”

“음, 천천히 계획하는 게 좋겠어요.”

“왜 천천히 해?”

“혹시 도중에 아이가 생길 수도 있으니까요.”

그녀의 대답에 윈터가 급격히 어두워진 얼굴로 대답했다.

“몇 년째 안 생긴 아이가 그렇게 금방 생기진 않을 거야. 너무 기대하지 마.”

“당신이야 말로요.”

바이올렛은 담담하게 대답했지만, 사실은 가슴이 울렁거리는 것을 간신히 숨기고 있었다.

어서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집에 도착한 후에 주치의, 그리고 두 번째 의사에게도 확인을 받아야 했고, 그래도 불안할 것이 분명하니 세 번째 의사에게도 임신 여부를 물어야 할 것이었다. 윈터만큼은 아니지만 바이올렛 역시 어느 정도는 의사에 대한 불신이 있었다.

그렇게 세 명의 의사 모두 그녀가 임신을 했음에 동의한다면, 남편의 얼굴을 마주 보고 그 사실을 알려 줄 생각이었다.

이전에 임신 소식을 알리려 준비했던 정찬은 윈터의 폭언으로 끝나고 말았다. 바이올렛은 이번엔 윈터가 그런 반응을 보일 이유가 없음을 알고 있었고, 걱정거리로도 여기지 않았다.

그는 기뻐할 것이다. 분명히. 걱정이 있다면 펑펑 울어버릴지 모르는 그를 어떻게 달래나, 하는 것 정도였다.

당신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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