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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151화 (151/176)
  • 151화

    윈터의 말대로 집 앞에 아이들이 와 있었다. 아이들은 두 어른이 오기 전에 눈 뭉치를 잔뜩 만들어 눈싸움 준비를 했다. 그러나 고사리 손으로 대충 뭉친 덕에 던져도 그들에게 닿기도 전에 부스러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아이들은 던진 것 자체에 신이 나서는 까르륵 웃으며 도망치기 바빴다. 그사이 바이올렛이 발목까지 빠지도록 내린 눈을 높이 쌓았고, 윈터는 그 위로 아이들을 휙휙 잡아 던졌다.

    눈싸움보다 그가 던져 주는 게 더 재미있는지 아이들이 얼른 그 줄에 섰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이들을 연일 돌봐주고 있는 경호원들까지 이 놀이에 합세했다.

    그사이 경호원 중 하나인 시즈가 바이올렛에게 다가왔다.

    “작은 마님, 잠깐 하옐 비서님께 다녀왔는데요. 비서님께서 이 신문을 전달해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무슨 신문인가?”

    바이올렛이 웃는 얼굴로 신문을 받아 들었다.

    오늘 아침 발간된 하누스 수도 신문에는 최근 라크라운드에서 있었던 사건이 기사로 적혀 있었다.

    기사에는 로렌스 가문이 세 개의 의석을 내놓으며 입후보 자격으로 귀족을 제외하길 부탁했고, 총 열 명의 후보자가 입후보했으며, 그중 세 명이 카닉 혈통이라고 적혀 있었다. 그녀가 기쁜 표정을 짓자, 은발에 회색눈을 가진 시즈가 꾸벅 고개 숙여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뭐가 감사한가?”

    “사람들에게 기회 주신 거 알고 있습니다. 제가 선수일 때요, 다른 팀메이트들한테는 안 그러는데 꼭 저희 이방인들이 잘하면 ‘검투사’라는 말을 붙여서 기사를 쓰는 겁니다.”

    라크라운드에서 노예 제도가 폐지되기 전까지, 검투사는 오로지 노예에게만 부여되는 직업이었다. 그것도 대부분은 전쟁 포로들이었다. 물론 그것은 적어도 수백 년 전 이야기지만 그 단어를 꼭 카닉 혈통의 선수에게만 붙였다면 비하의 의미가 없다고는 할 수 없었다.

    바이올렛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시즈가 다시 고개 숙여 인사하고 말을 이었다.

    “카닉 일족은 작은 마님께 빚을 졌습니다. 큰 빚이요.”

    그러자 바이올렛이 대답했다.

    “나 또한 자네의 신께 목숨을 빚졌으니, 빚을 갚은 셈이 될까.”

    “예에?”

    경호원이 영문 모를 표정을 짓자, 바이올렛이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윈터 쪽을 보고 대답했다.

    “그런 게 있네.”

    아이들이 지치도록 놀아준 후, 윈터는 바이올렛에게 줄 핫 초콜릿을 만들었다. 그가 가져온 재료가 워낙 많아 아이들이며 함께 온 사용인 모두에게 나누어 줄 정도가 되었다. 핫 초콜릿을 맛본 이들 모두 눈이 동그래져서 태어나 이렇게 맛있는 건 처음이라며 재잘재잘거렸다.

    아이들이 인사를 마치고 모두 돌아간 후, 바이올렛이 윈터에게 물었다.

    “아이들은…… 다시 알리카 밖의 그 집으로 돌려보내야 할까요?”

    “그거 말인데.”

    윈터가 뒷목을 문지르더니 말을 이었다.

    “다들 특별히 갈 곳도 없잖아. 게다가 아픈 꼬맹이는 아무래도 신이 차기 샤먼으로 찍어둔 것 같아. 이제 와서 혼혈들의 편을 들어줄 생각이 든 모양이지. 그러니 내 이부동생들에게 맡겨 볼까 하고.”

    “네에?”

    “그 꼬마들이 혹시 라크라운드에 오고 싶어 한다면 적어도 라크라운드 말은 할 줄 알아야 하잖아. 그리고 아예 여기서 지낼 거라면 알리카 사람들이 어지간히 괴롭힐 텐데, 그걸 막아 줄 사람도 필요하고. 그 쌍둥이들 둘 다 비실거리긴 해도 굉장히 많이 배웠고, 머리도 나쁘지 않더군. 둘에게 맡기고 가면 돼.”

    “좋은 생각이네요.”

    “집은 여기서 사는 걸로 하고. 내가 고용해 주지. 저 꼬맹이들도, 그 망할 쌍둥이도.”

    윈터의 말에 바이올렛이 감동한 표정을 지었다. 그것도 잠시, 윈터가 말을 이었다.

    “저 녀석들 내 수하로 잘 키워서 이 쓰레기 같은 구역을 완전히 개방할 거야.”

    “악당 같은 계획이군요.”

    “당연한 거 아닌가? 제일 큰 녀석이 열세 살이야. 난 그때 한창 일하고 있었지. 돌아가면 저 온천수 조사하려고 챙겨 놨어. 조금만 좋은 성분이 발견되면 그걸로 대대적인 홍보를 시작하지.”

    “반대가 심할 텐데요.”

    바이올렛의 걱정에 윈터는 어처구니가 없어 웃었다. 그녀는 저더러 자길 너무 약하게 본다지만, 정작 세상에서 바이올렛만큼 윈터를 걱정하는 사람은 없었다. 윈터가 웃음기가 남은 얼굴로 말했다.

    “공주님, 난 이방인이야. 내가 좋은 땅을 찾아다니며 사들이고 건물 세울 땐 뭐 사람들이 호의적이었을 것 같아? 귀족 짓을 그렇게 싫어하던 내가 왜 안잘리를 고용했겠어. 내가 가면 안 판다고 해도 그 자식이 가면 팔아. 일이 훨씬 수월하지. 처음에 내 회사가 커지기 전엔 이방인 놈이 세운 회사라 열 받는다고 불을 지른 새끼도 있었어. 내가 차별받는 건 전혀 걱정할 게 아니야. 여기라고 새로울 거 없겠지.”

    “하지만 이곳은 완전히 폐쇄된 지역이잖아요.”

    “힘으로 밀고 들어오면 자기들이 뭘 어쩔 건데. 난 힘겨루기에서만큼은 져 본 적이 없어.”

    윈터가 배짱 좋게 말했다. 혹여 그가 상처받을까 걱정하던 바이올렛은 살짝 민망한 기분이 들었다.

    그가 상처받는 건 늘 저와 얽힌 일 때문이었다. 차별 때문에 받는 상처는 혀 한 번 차고 넘어가 버리고 배로 되갚아 주며 그 상처를 치유하는 게 일반적인 윈터 블루밍이었다.

    남편이 저에게만 유난히 약하다는 걸 바이올렛이 새삼 실감하고 있을 때, 시즈가 편지 두 장을 더 가져다주었다.

    한 장은 의회에서 온 것으로, 에쉬 로렌스가 건의한, 법전에 나와 있는 ‘모든 섬’이라는 말을 수정하기 위한 회의에 계승 서열 2위였던 그녀 역시 참석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바이올렛이 편지를 다시 접어 넣고, 두 번째 편지를 펼쳤다.

    도스 공국에서 온 편지였다. 열어 보니 샤론이 최대한 빨리 결혼식을 해야 하니 겨울에도 따듯한 키론 호텔을 지금이라도 빌릴 수 있겠냐는 내용이었다. ‘너라면 분명히 화를 내겠지. 하지만 얼마나 다급하면 이러겠어.’, ‘나 지금 울고 있어, 넌 내 편이 되어 줘.’, ‘나중에 갚을게, 바이올렛!’ 하는 우는 소리가 가득 적혀 있었다.

    윈터가 그 편지를 같이 읽으며 말했다.

    “까다로운 친구군.”

    “거절하죠. 자기가 벌인 일은 자기가 해결해야죠.”

    “당신이 그렇게 말할 줄 알고 첫 줄에 우리보고 같이 읽으라고 적은 게군.”

    “그러니까 애초에 왜 책임 못 질 일을!”

    “호텔은 내 호텔이니 내 마음대로 빌려줄 거야.”

    “당신은 왜 이렇게 내 친구들에게 무르죠?”

    “왜겠어?”

    윈터가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웃자 바이올렛이 편지를 만지작거리며 폭 한숨을 쉬었다.

    “고마워요.”

    “당신 친구에게는 사람을 보내 두지. 어차피 돌아가는 길에 키론 호텔에 들러야 하니 그때 거기서 만나서 화내.”

    “……그래야겠어요.”

    바이올렛이 입술을 꾹 물었다. 그러자 윈터가 달래듯이 그녀를 두 팔로 감아 안았다.

    “슬슬 출발할 준비해야지? 한참 가야 하니까.”

    “좋아요. 어서 가요. 그리고…… 음.”

    바이올렛이 말하기 민망한지 몇 번 헛기침을 하고 입을 열었다.

    “오늘은 화장을 거의 하지 않기로 했어요.”

    “그렇군.”

    “…….”

    “……무슨 소린지 못 알아들었어.”

    “혹시 마차에서 입을 맞추고 싶으면…….”

    “입을 맞춰도 된다고? 내가 망칠 화장이 없으니까?”

    바이올렛이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에 윈터가 입꼬리를 씰룩이며 말했다.

    “우리가 뭐 챙길 게 있나. 사용인들이 알아서 챙겨줄 거야. 바로 마차로 가자.”

    “그건 그렇군요.”

    바이올렛이 새침하게 말하며 따라나섰다. 윈터는 그녀를 먼저 마차에 태우고 뒤이어 저도 올라타자마자 바이올렛의 허리를 끌어안고 입을 맞추기 시작했다.

    *

    그들은 다시 먼 길을 달려 키론 호텔로 향했다. 중간에 합류한 젠과 하옐이 그동안 있었던 일을 티격태격하며 전달하는 걸 듣느라 여정에 지겨울 틈이 없었다.

    며칠 뒤, 마차는 키론으로 돌아왔다. 두 사람이 내려 보니 샤론과 아우스가 호텔 앞까지 부부를 마중 나와 있었다.

    내내 페런을 피해 도망 다녔던 아우스의 얼굴은 부쩍 수척해져 있었고, 샤론은 반대로 표정이 밝았다.

    “화내지 마, 바이올렛! 나 지금 정말 힘들단 말이야…….”

    “화 안 내. 딱히 힘들어 보이진 않지만.”

    “……덧붙여서 웃어도 주면 안 돼? 무서운데.”

    샤론이 눈을 깜빡깜빡거리며 애교스러운 표정을 짓자 바이올렛이 기가 차서 한숨을 쉬었다.

    옆에서 아우스는 뭐라 말해야 할지 몰라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그때 윈터가 바이올렛을 토닥이며 달랬다.

    “너무 그러지 마. 타고나길 철이 없는 걸 어떡해. 몰랐던 것도 아니잖아?”

    그러자 샤론이 뿌루퉁해져서 물었다.

    “경, 저희 놀리시는 거죠?”

    “키론 호텔 일정이…….”

    “감사합니다. 마음껏 놀리세요. 특히 제 예비 남편은 참 놀리기 적당한 사람이랍니다.”

    샤론이 빠르게 아우스를 팔아먹자 윈터가 거절 없이 말했다.

    “샤론 양이야 그럴 수 있다고 쳐도, 그쪽이 그럴 줄은 몰랐군.”

    그러자 아우스가 멈칫하며 물었다.

    “……예?”

    “아무리 사모하는 분이 원하셔도 끝까지 순결을 지켰어야지. 성교육도 안 받았나?”

    윈터가 어깨를 으쓱이더니 울상이 된 아우스에게 어깨동무를 하고는 어깨를 꽉 움켜쥐며 말했다.

    “가지. 턱시도 맞춰 줄 테니까.”

    “제가 알아서 하고 싶습니다.”

    “공국에 들어가는 순간 그 후계자 놈에게 뒈질 텐데 무슨 수로?”

    “……하지만 부탁드립니다.”

    “아, 프러포즈는 했나?”

    “…….”

    “내가 없으면 결혼도 못 할 부부로군. 숨겨 줘, 옷 사 줘, 식장 빌려줘.”

    윈터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힘으로 아우스를 끌고 걸음을 옮겼고, 아우스는 정말로 따라가고 싶지 않았지만 상황이 절박해 울상이 되어 끌려갔다.

    여자들끼리의 시간을 보내게 해주기 위한 윈터의 일정에 휘말린 아우스를 애처롭게 보던 샤론이 금방 잊어버리고 바이올렛에게 팔짱을 꼈다.

    “꽃은 네가 감독해 줄 거지? 어릴 때 약속했잖아.”

    “스케치는 해 놨어.”

    “그럴 줄 알았어. 아, 원래 친구는 반대가 잘 맞나 봐. 넌 성실하고, 난 안 성실하고.”

    “참 자랑이다.”

    두 사람이 이야기하며 걸음을 옮겼다. 바이올렛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입덧은?”

    “별로 안 해. 치즈만 없으면 돼. 아예 모든 우유로 만든 것들이 싹 다 없었으면 좋겠지만, 그래도 괜찮아.”

    “괜찮은 거 맞아?”

    “그 외엔 다 잘 먹어. 우리 어머니도 별로 심하지 않으셨다고 하고, 외조모님도 거의 안 하셨대.”

    “다행이네. 우리 어머니는 입덧이 너무 심해서 물밖에 못 드실 때도 있었다던데.”

    “그럼 너도 심할…….”

    무심코 말하던 샤론이 멈칫했다가 곧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이었다.

    “드레스 보여줄게. 보고 차 마시자.”

    “응. 좋아.”

    바이올렛 역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러다가, 그동안 알리카에서 즐겁고 평온한 시간을 보내느라 잠시 떠올리지 않았던 사실을 알아차렸다.

    알리카에 있을 때 시작했어야 할 월경이 아직까지 미뤄졌다는 사실이었다.

    당신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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