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화
윈터가 떠난 후, 바이올렛은 미리 와 있던 경호원을 따라서 아이들이 있는 병원으로 향했다.
걸음을 옮기는 내내 그녀는 점점 더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 비행선에서 추락하고 총상까지 당했던 몸이 어찌 이렇게 말짱할 수 있단 말인가.
게다가 알리카까지 오는 길이 엉망이었던 탓에 그녀의 엉덩이며 뒷허벅지, 팔까지 골고루 멍이 들어 살이 욱신거렸었다. 그런데 이 남자는 어디 하나 아픈 곳이 없었다. 심지어 추위도 그렇게 힘들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 튼튼함이 연구대상 수준이라는 의사의 말은 과언이 아니었다. 게다가 남편의 시선에서 저를 보면 그가 왜 저를 툭하면 훌쩍훌쩍 들어 올렸는지도 이해가 갔다. 그의 걸음 속도로 걸으려니 제 걸음이 너무 느리게 느껴져, 차라리 달랑 안아 들고 걷는 게 낫겠다 싶었던 것이다.
그녀가 억울해하고 있을 때, 한 걸음 앞에서 걷던 경호원, 시즈가 돌아보며 말했다.
“대표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알리카 사람들이 혼혈 아이들을 엄청 힐끔거리더라고요. 시비 거는 사람까진 없었지만 정말 짜증나더군요. 하마터면 정말로 두들겨 팰 뻔했습니다.”
바이올렛이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곤 물었다.
“아이들 건강은 어떤가?”
“다들 영양실조가 있답니다. 그리고 그 우나라는 제일 안 좋던 꼬마요, 그 꼬마는 병원 가던 도중에 기절을 했어요.”
“뭐, 뭐?”
“아, 지금은 괜찮습니다! 바로 일어났어요. 그런데 아이들이 다들…… 조금씩 감기에 걸렸어요. 의사 말로는 아무래도 우나에게 옮은 것 같다더군요.”
“어, 얼마나 안 좋은가? 조금씩이라는 게 어느 정도였어?”
“걱정하실 정도는 아닙니다. 전혀. 게다가 알리카는 약학이 매우 뛰어나 여기서 치료받으면 다들 금방 회복될 거랍니다.”
“그래도 빨리 안내해 주겠나? 마음이 놓이질 않네.”
얼굴이 창백해진 그녀의 부탁에 시즈는 대표님이 왜 저렇게 부드러우신가, 의아해하는 동시에 괜히 덩달아 불안해져 걸음을 빠르게 옮겼다.
두 사람은 이내 병원에 들어섰다. 알리카에서 가장 큰 이 병원에는 대형 병실이 있어, 아이들을 한곳에 다 수용할 수 있었다. 바이올렛이 들어서자 침대에 앉아 있던 아이들이 동그란 눈으로 달려왔다.
“무서운 아저씨!”
바이올렛이 눈으로 빠르게 아이들의 숫자를 세고는 전부 다 있는 걸 알고 안심하자마자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와 매달렸다.
“또 우리 들어서 던져 주세요!”
“슝 날아가는 거 재밌어요!”
아이들이 신나서 조르는 말에 바이올렛이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침대가 있어도 아이를 던지는 건 그녀에게 너무 어려운 일이었다.
난감해하던 그녀가 다정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직 다들 몸이 안 좋잖아. 나으면 해 줄게.”
그녀의 말에 아이들이 시무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들의 실망한 얼굴에 바이올렛이 심적 부담감을 느끼며 우나에게 다가가 물었다.
“몸은 괜찮니?”
“괜찮아요!”
“혹시 신전에 왔던 거 기억나?”
우나가 고개를 열심히 끄덕거렸다. 그러자 다른 아이들도 침대에 기어 올라와 엎드려선 턱을 괴고 말했다.
“우리도 기억나요.”
“나도 기억나! 우나가 우리가 조금씩만 아픈 대신에 공주님이 행복해질 거라고 했어요.”
“그리고요, 그게 원래 우리들의 일이래요. 아픔을 조금씩 나눠 지는 사람들. 그게 ‘카닉’의 뜻이라고 했어요.”
“근데 우리가 감기 걸리면 아기가 태어나요? 우리도 봐도 돼요?”
아이들이 동시에 여기저기서 질문을 쏟아 내고 재잘거렸다.
다들 아무래도 바이올렛보다는 같은 카닉 혼혈인 윈터가 편한지 금방 속에 있는 이야기까지 한참을 늘어놓았다.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은 통에 나중에는 바이올렛이 순서를 정해 이야기하도록 해 주어야 할 정도였다.
바이올렛은 의자를 가지고 와 앉아서 아이들의 이야기를 성실하게 듣고 제가 아는 선에서 대답도 들려주었다. 물론 감사의 인사도 잊지 않았다.
식당에서 외롭게 일하던 어린 소년의 옆에 있어 줄 수는 없었지만, 이 아이들의 곁에는 있어 줄 수 있었다.
바이올렛은 아이들이 제 침대로 돌아가 잘 눕는 것까지 확인하고, 의사와 상의해 먹을 수 있는 음식을 충분히 제공한 후에 곧바로 할린 쌍둥이가 사는 집으로 향했다.
윈터가 어쩌고 있는지 걱정스러워하며 도착해 보니 집 앞에 부부가 타고 온 마차가 있었다. 바로 집 안으로 들어가려던 바이올렛이 마차에서 불빛이 새어나오는 것을 발견하고 일단 마차 문을 열었다.
예상대로 마차 안에 뿌루퉁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제 얼굴이 보였다. 바이올렛이 실소하며 말했다.
“내 얼굴로 그런 표정 하지 말아요.”
“당신 얼굴로 뭘 하든 내 맘이야. 억울하면 몸이 바뀌지 말았어야지.”
바이올렛이 일단 마차에 올라타자 그 순간, 다행히 두 사람의 몸이 다시 바뀌었다. 그와 동시에 바이올렛은 꼬아진 다리를 풀고, 반대로 윈터는 다시 다리를 꼬았다.
“아, 젠장. 죽는 줄 알았네. 왜 이렇게 멍이 많이 들었어?”
“마차에서 여기저기 부딪혀서요. 누가 봐도 멀쩡한 당신이 더 놀라울걸요.”
“이따가 약 발라 줄게.”
“당신이 발라 줄 만한 부위가 아니에요.”
“그러니까 더더욱 내가 발라 준다고.”
윈터의 말이 의아했는지 바이올렛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러더니 곧 본론으로 돌아와 물었다.
“여기 계속 혼자 있었던 거예요?”
“그래도 할린의 그 다 죽어 가는 쌍둥이가 잠깐 와서 이야기를 했어. 걸어 다니는 반시체더군.”
“들어가고 싶지 않으면 들어가지 않아도 돼요. 내가 대신 들어가서 인사만 하고 올까요?”
그녀가 곁에 온 뒤에야 윈터가 결심했는지 심호흡하고 바이올렛의 손을 감싸 쥐었다.
“당신이랑 같이 가면 갈 수 있을 것 같군.”
곧 두 사람이 마차에서 내렸다. 성큼성큼 집 앞으로 걸어간 윈터가 문을 두들겼다. 그러자 곧바로 달려온 그의 생모, 리네가 문을 열었다.
울었는지 눈가가 빨갛게 부어 있는 리네가 더듬더듬 말했다.
“와, 왔니?”
윈터가 대답 없이 서 있을 때, 리네의 뒤에 있던 그녀의 남편이 재킷을 입으며 퉁명스럽게 걸어 나왔다.
“난 나가서 잘 테니까, 천천히 먹고 가요.”
그러더니 두 사람과 눈도 안 마주치고 그곳을 나갔다. 윈터가 말없이 문 앞에 서 있기만 하자, 바이올렛이 대신 말했다.
“계셔도 되는데.”
“나가는 게 더 편한가 봐요.”
리네가 애써 웃으며 말했다. 그사이에도 윈터는 여전히 말이 없었고, 움직이지도 않았다. 바이올렛이 리네에게 아까 병원에 다녀오며 길에서 산 장식품을 내밀었다.
“알리카에서는 창문 앞에 장식을 놓는 전통이 있다고 들어서요. 초대해 주신 보답으로 사 왔는데, 마음에 드실지 모르겠군요.”
“어머나, 예뻐라. 고마워요, 부인. 잘 쓸게요.”
리네가 힘껏 호들갑을 떨었다. 그렇게 두 사람이 이야기하는 사이에도 꼼짝을 않는 윈터가 신경 쓰인 바이올렛이 그의 손을 감싸 쥐며 물었다.
“이제 갈래요?”
“…….”
“윈터.”
“7년만 더 돌보시지.”
그가 처음으로 입을 열자, 두 여자가 윈터를 보았다. 윈터가 잠시 침묵 후 말을 이었다.
“열두 살까지만 참았으면. 열두 살부터는 알아서 돈을 벌 수 있었는데.”
리네가 말이 없자, 윈터가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그렇게…… 인사도 없이 애새끼를 버리고 사라지니까, 내가 이따위로 큰 것 아닙니까. 인사 안 한다고 매번 아내한테 혼나는 놈으로.”
“…….”
“그거 굉장히 무례한 겁니다.”
윈터가 농담을 하고 싶었는지 그렇게 말하더니, 결국 분노를 누르지 못해 휙 돌아서서 마차로 향했다.
바이올렛이 그 모습을 돌아보고 있으려니 리네가 슬픔이 겹겹이 쌓인 얼굴로 다급하게 그녀를 붙잡았다.
“아, 안 들어오는 것 같아서…… 그래서 포장을 해 놨어요. 이거라도 가져가면 안 될까요?”
바이올렛이 다시 리네를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가져갈게요. 아무것도 안 가져가면 저 사람도 마음이 안 좋을 것 같으니까.”
“고마워요.”
“받기 싫은 선물 억지로 주는 거, 폭력이라더군요, 남편이.”
“…….”
“자기도 늘 억지로 선물을 안겨 주면서 말이에요.”
중간에 낀 처지라 말을 한참 고르던 바이올렛이 덧붙인 말에 리네가 울음과 웃음이 동시에 터져 고개를 끄덕거렸다.
바이올렛이 집 안으로 들어서자 리네가 눈물을 빠르게 닦아 내고 준비한 것들을 챙겨 주었다. 윈터가 들어오지 않아 쌍둥이를 통해 전해 주려 했는지 이미 모든 음식 하나하나가 정성껏 포장이 되어 있었다. 바이올렛은 바구니에 음식들을 담는 리네에게 조용히 물었다.
“전해 줄 말이 있나요?”
그러자 리네가 크게 심호흡하고 말했다.
“무슨 말을 하면 좋을지 모르겠네요. 내 주제에.”
“…….”
“그 애를 가진 게 열일곱이었는데, 나도 참 한심하지. 모시던 도련님이 책임지겠다는 걸 믿은 거예요. 애를 가진 걸 들키자마자 선대 블루밍 공작 부부가 어떻게든 유산을 시키려 들더군요. 일단 도망쳐서는 애가 애를 가졌다고 있는 대로 구박 들으면서 하녀 일을 구하러 다녔어요. 처음엔 그 애가 얼마나 미웠는지.”
“…….”
“그러다 그날은 날 따라다니던 남자가 윈터를 해코지하려 해서 살던 집에서 정신없이 나왔어요. 애는 계속 배가 고프다고 울지, 나는 내 몸 지킬 힘도 없는데 이 애는 어떻게 지키나……. 그게 무섭고 지쳐서…… 그래서 식당에 두고 왔어요. 자꾸 배가 고프다니까…….”
리네가 바구니를 가득 채우고도 부족한지 나가면 금방 살 수 있을 식재료들까지 가득가득 바구니에 넣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바이올렛이 입을 열었다.
“상황이.”
“…….”
“상황이 그럴 때가 있죠.”
바이올렛은 상황이 그랬다고 저에게 말하던 윈터를 떠올렸다. 그녀가 바구니를 받아 들며 말을 이었다.
“잘 먹을게요.”
“고마워요. 정말로 고마워요.”
그녀의 인사에 바이올렛이 미소를 짓고는 인사를 하고 그곳을 나왔다.
*
바이올렛이 돌아와 마차에 타자 윈터가 짜증스레 물었다.
“내 친모가 당신 잡아? 돈 달래? 그럼 나한테 말하라고 해. 당신 귀찮게 하지 말고.”
“아뇨. 그냥 음식들 포장해 주셨어요. 가서 먹어요, 우리.”
“뭐, 그래. 안 그래도 배가 고프군.”
윈터는 여전히 제 어머니의 의도를 의심하는 표정이었다. 그 의심을 풀어주려 바이올렛이 들고 온 바구니에서 둥근 그릇을 꺼내 무릎에 두고, 예쁜 천을 고정하려고 정성껏 묶은 끈을 풀었다.
그릇 안에는 숯불로 구운 고기가 들어 있었다.
윈터가 물었다.
“지금 먹게? 당신 그런 사람 아니잖아.”
“지금 먹으려고 포크도 준비했어요.”
“너무 과감한 거 아닌가?”
윈터가 농담반 진담반으로 말하고 바라보는 사이, 바이올렛이 고기 한 점을 포크로 집어 입에 넣더니 손으로 입을 가리고는 우물거리며 말했다.
“맛있네요.”
그 말에 윈터가 저도 손으로 고기를 집어 입에 넣고는 인상을 쓰고 말했다.
“질겨.”
“꼭꼭 씹어요.”
바이올렛의 진지한 해결책에 윈터가 어깨를 들썩이며 웃었다.
바이올렛은 음식이 입에 맞는지 열심히 우물거리고 나서 말을 이었다.
“빵도 받았어요.”
“혹시 그 까만 빵이야? 위에 격자로 칼집 크게 낸 거?”
“아, 맞아요.”
“그거 열두 살 이후로 먹어 본 적 없는데. 남부 농가에서 굽는 건데 겉은 딱딱하고 속은 질겨.”
“그래요?”
“어릴 땐 그거 먹다가 이가 빠졌어. 내 유치의 반은 그 빵 때문에 빠졌을걸.”
윈터가 들뜬 표정으로 하는 말을 바이올렛은 즐거운 얼굴로 들어 주고 있었다. 그는 추억의 음식들 밑바닥에 남아 있던, 어린 시절의 약간의 즐거운 기억을 발견해냈고 바이올렛은 그 위에 하나씩 리네에게 들은 이야기를 덧붙였다.
리네를 좋아하던 남자 이야기를 들었을 때 윈터가 고개를 끄덕였다.
“기억이 나. 내 뒷덜미를 잡아 어디로 끌고 가려고 들어서 어머니가 울면서 매달렸었지.”
“그랬군요.”
“그랬었네.”
윈터가 뒤로 기대자 바이올렛이 말을 이었다.
“윈터.”
“응.”
“당시 그분의 상황이 그랬던 거 알아요. 내가 감히 그 아픔을 평가할 수도 없겠죠. 하지만 당신이 그분을 용서하지 못한다고 해서 내가 당신을 보는 시선이 달라지는 일은 절대로 없을 거예요. 이건 알아줬으면 해요.”
“무정한 악당으로 볼 거잖아.”
“아뇨. 절대로요. 난 당신 편인걸요.”
바이올렛이 의지마저 느껴지는 눈으로 말하자 윈터가 언제 제 부모들에게 상처 받았냐는 듯이, 소년처럼 거리낄 것 없이 웃었다.
“매우 든든하군.”
당신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