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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147화 (147/176)

147화

저를 이끄는 아이를 따라 걸어 바이올렛이 도착한 곳은 꽃으로 뒤덮인 작은 언덕이었다. 바이올렛이 멀리 바다가 보이는 언덕에 서서 놀란 표정을 지었다.

“세상에, 아름다워라…….”

보라색은 물론 노란색, 빨간색, 주황색, 흰색으로 언덕이 뒤덮여 있었다. 연분홍 장미처럼 화려한 꽃부터 작고 이름 모를 풀꽃, 심지어는 호박 덩굴에 호박꽃도 피어 있었다.

언덕 위에는 작은 예배당이 있었는데, 그 외관이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우나가 예배당을 향해 난 작은 길로 바이올렛의 손을 잡아끌며 말했다.

“불의 신은 앞뒤가 다르대요. 한 면은 엄격하고 한 면은 관용적이래요. 그래서 카닉 사람들은 불의 신을 뱀과 꽃으로 그려요. 어느 한쪽이 사악하다기보다는 두 가지 면이 있다는 의미죠. 불은 뱀처럼 보이기도 하고, 꽃처럼 보이기도 하니까요.”

바이올렛은 불의 신이 이 아이의 입을 빌려 말한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아차렸다. 그녀는 천국의 한 장면 같은 꽃 언덕을 감상하는 동시에 우나의 말에 귀 기울였다.

“아, 그래서 그런 문양을 새기는구나. 남편 왼쪽 어깨에도 그런 문신이 있어.”

“불의 신의 엄격한 면은 자기를 모시지 않는 다른 사람과 연을 맺는 걸 싫어해서요, 혼혈들도 반기지 않아요.”

“저런.”

“반대로 관용적인 면은 그것에 반대해서요, 언제나 기회를 주려고 한 대요.”

우나가 숨이 찬지 멈춰 서서 바이올렛을 올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원래 불의 신은 알리카 사람들에게 타인의 아픔을 나눠 질 수 있는 힘을 줬거든요. 그런데 엄격한 면만 이용하는 몇몇 샤먼들 때문에 점점 알리카의 문이 닫히면서 일족의 수가 줄어들고, 사용하지 않는 힘도 사라지고 있어요.”

“음…….”

“불의 신은 공주님이 알리카에 필요한 사람이라고 생각한 것 같아요. 그리고 공주님 역시 스스럼없이 타인의 신을 존중하셨죠.”

“왜 나였을까.”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그중 한 이유는 길에 쓰러져 있는, 부모도, 같은 일족 사람들도 안아 주지 않았던 이방인 소년 대신에 아파 주겠다고 기도하는 그 마음이었겠죠.”

“기쁜 소식이구나.”

바이올렛의 다정한 말에 우나가 헤헤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렇죠? 그래서 불의 신을 믿는 사람들에게 주는 이해의 기회를 여러 번, 정말 여러 번 선물하신 거예요.”

“그건 정말 특별한 선물이었어. 감사할 일이구나.”

“그리고 공주님은 불이 신이 바란 것처럼 알리카의 밖에서 많은 카닉 일족 사람들의 생명을 구하셨어요. 칼리본의 광부들과 그 가족들, 그리고 알리카로 오던 길에서 만난 아이들도. 앞으로도 많은 사람을 구할 거고요.”

아이의 말을 가만히 듣던 바이올렛이 다정히 미소 지었다.

“불의 신께선 내 남편을 참 사랑하는 모양이구나. 나에게까지 그런 기회를 준 걸 보니.”

“네. 공주님의 신이 공주님을 사랑하는 것처럼요.”

“그것도 또한 기쁜 소식이구나.”

앞장서 가던 우나가 예배당을 가리켰다.

“이제 한 번 더 구해 주러 가세요. 부군께서는 저곳에서 긴 시간을 보내며 불의 신께서 주신 생명의 대가를 치르고 있으니까요.”

그렇게 말한 우나는 어느 순간 어딘가로 사라져 버렸다.

바이올렛은 예배당을 보았다. 완벽히 라크라운드 형식도, 그렇다고 카닉 일족의 형식도 아닌 두 가지의 문화가 섞인 듯한 예배당이었다.

“참 아름다운 장소네.”

바이올렛이 혼잣말하며 예배당으로 마저 걸음을 옮겼다.

*

하옐은 윈터의 집무실 앞에서 들어갈까, 말까 한참을 망설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안잘리가 다가와 물었다.

“매년 저렇게 틀어박혀 계실 거면서 기일은 왜 그렇게 떠들썩하게 챙기는 거지?”

그러자 하옐이 한숨을 쉬었다.

“그것도 한 달씩 말이에요. 한두 해 저러다 마실 줄 알았는데 계속 그러실 줄은 몰랐어요.”

“대표님의 재혼 이야기가 온 나라 관심사인데 누굴 만나지도 않으시고. 그렇다고 또 부인을 찾아가는가 하면 여기에 처박혀서 일만 하시잖아.”

“그러게요. 돈을 그렇게 쏟아붓는 걸 보면 작은 마님을 마음에서 지우신 것도 아닐 텐데. 매일 저렇게 술과 신경 안정제를 드시고 일만 하다간 어느 날 돌연사 하실걸요. 여태 살아 있는 게 더 놀라워요.”

윈터는 남부 끝에 있는 라크라운드에서 가장 아름답기로 손꼽히는 장소였던 바닷가 언덕을 사들이고 그 위에 예배당을 지었다. 그 예배당 벽을 온갖 보석과 실크로 장식하고, 봉안함은 황금과 에메랄드, 루비와 진주를 아낌없이 사용해 만들었다. 블루밍가에서도, 얼마 전 왕실로 복권된 로렌스가에서도 그녀의 봉안함을 그곳에 두는 건 예법에 어긋난 일이라 말했으나 윈터의 고집을 꺾을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장례식이 시작된 후에야 아내가 꽃을 좋아했다는 걸 알게 된 윈터는 예배당이 있는 해안까지 화물선으로 꽃을 실어다가 언덕 전체에 쏟아붓고, 시들면 바다에 흘려보내고, 다시 쏟아붓는 무의미한 행동을 한 달 내내 반복했다. 다시 왕위에 오른 에쉬 로렌스가 죽어도 장례식을 한 달 동안 지속하진 않을 것이라 사람들이 수군거렸으나 신경 쓰지 않았다.

그 장례식이 끝난 후에도 윈터는 7년째 언덕에 시든 꽃이 없게 하라는 말도 안 되는 주문을 했으나, 정작 저는 처음 예배당을 짓던 날 외에는 한 번도 그곳에 가지 않았다.

잠시 후 마음을 굳게 먹은 하옐이 집무실 문을 벌컥 열고 들어갔다. 안에는 담배 연기가 자욱했고, 윈터는 여느 해와 마찬가지로 바이올렛의 기일 근처의 많은 날을 술과 약으로 지탱하며 일을 하고 있었다.

보다 못한 하옐이 버럭 소리쳤다.

“대표님!”

“뭐.”

“쉬세요.”

“꺼져.”

윈터가 인상을 쓰고 다시 서류로 시선을 옮겼다. 그러나 하옐이 물러서지 않고 말했다.

“작은 마님 뵈러 한 번을 안 가셨잖아요. 심지어 장례식에도 정말 얼굴만 비치시고.”

“일이 많았잖아.”

“제가 일정 조정해 놓을 테니까 일주일만 쉬세요. 예? 남들 보기에도 이상하다고요. 다들 대표님이 너무한다고 수군거린단 말이에요.”

“돈을 그만큼 들였으면 된 거 아냐.”

“그래도 말입니다! 봉안함을 로렌스가도 아니고 블루밍가도 아닌 남부 끝에 있는 예배당에 두시고는 한 번도 찾아가지 않으셨잖아요. 시간을 들이시라고요. 회사 이미지 생각해서요.”

“…….”

“기차표는 사 뒀습니다.”

하옐이 가져온 기차표를 탁 그의 앞에 내려놓았다. 윈터는 그제야 펜을 놓고 기차표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이내 그것을 집어 들었다.

아내가 떠나고 7년 만에 윈터는 처음 라크라운드 남부 끝에 있는 예배당에 도착했다. 언덕 위에 선 그는 장례식 때를 제외하고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긴 예배당 안을 바라보았다. 사람을 여럿 고용해 깨끗하긴 했으나 그뿐이었다.

윈터는 예배당에 들어서자마자 봉안함 위에 가져온 상자를 두고 그 앞, 긴 의자에 풀썩 드러누웠다. 그리고 한참의 침묵 후 입을 열었다.

“7년 동안 부모님을 한 번도 만나지 않았어. 딱히 날 안 찾더라고. 뭐, 그렇더라. 그러니까 섭섭해할 건 없어. 뭐…… 섭섭할 일도 없겠지만.”

그렇게 중얼거린 윈터가 허공을 바라보다가 봉안함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 얘기에 기분이 나아질지는 모르겠는데, 7년 내내 일을 안 하면 자꾸 당신이 떠올라. 당신이 맨발로 얼음 위를 걸어가는 환각이 보여. 그럼 난 피가 얼어붙은 당신 발자국을 따라가지. 차라리 그 얼음이 깨져서, 당신과 같이 가라앉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혼잣말을 하던 윈터가 곧 몸을 일으켰다. 세상 모든 공기가 바닷물로 바뀌어 버린 기분이었다. 이렇게 숨 쉬는 게 힘들 바에야 차라리 죽고 싶은데 제가 여기서 버티고 사는 것 이상으로 스스로를 벌주는 일은 없을 것 같아 버티고 살았다. 잠시라도 멈춰 서면 온몸이 말라붙는 지옥에 떨어뜨려 뒀는데, 거기서 금방 빠져나와 버리면 아내도 실망할 테지.

윈터가 농담조로 말을 건넸다.

“내가 여기 와 있는 것도, 당신은 싫지? 내가 빨리 사라졌으면 좋겠지?”

그러고는 아내를 보러 오기 위해 모처럼 신경 쓴 얼굴로 조금 웃었다.

“싫으면 말을 해. 꺼지라고. 제발 말 좀 해.”

한번 생각하기 시작하면 멈출 수가 없었다. 아무리 오열해도 그녀가 돌아오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자꾸만 기대했다. 꼭 세상 어딘가에 있을 것만 같았다. 그냥 저만 만나 주지 않는 것뿐이지, 어디선가는 행복하게 살고 있을 것 같았다.

7년이 지났는데도 그는 아내의 죽음을 전혀 받아들이지 못했다.

윈터가 가빠 오는 숨을 몰아쉬다가 안주머니를 뒤져 약통을 꺼내 신경 안정제를 삼켰다. 그때 문 쪽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문을 돌아본 윈터의 몸이 그대로 굳었다. 꽃향기와 함께, 아내의 모습이 보였다.

꼼짝도 못 하는 그에게 바이올렛이 다가왔다.

“아, 당신이 여기 있었군요?”

그녀의 목소리에도 윈터는 대답을 하지 못했다. 바이올렛이 제 앞에 와서 서도록, 그저 그녀만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바이올렛이 입을 열었다.

“난 어린 당신을 만나고 왔어요. 당신은 뭘 하고 있었어요?”

“…….”

“윈터?”

그가 대답이 없어 바이올렛이 걱정스레 허리를 숙이는데, 윈터가 다급하게 일어나 그녀를 끌어안았다.

바이올렛이 놀라서 달달 떨리는 그의 등을 토닥거렸다.

“왜 그래요? 무슨 일 있었어요? 여긴 어디예요?”

바이올렛이 그제야 예배당 안을 살피기 시작했다. 벽에 한 바퀴 빙 둘러진, 작은 보석들이 촘촘하게 박힌 실크 장식을 따라 시선을 옮기다 보니 윈터가 보고 있던 방향에 커다란 봉안함이 있었다. 봉안함 앞에는 바이올렛 블루밍이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바이올렛은 그제야 윈터가 겪고 있는 환상이 무엇인지에 대해 알았다.

“윈터, 나 안 죽었어요. 이건 다 환상 같은 거예요.”

“알아.”

“꿈 아니에요.”

“그건 내일 아침에 말해.”

그렇게 말하고 난 윈터가 천천히 바이올렛을 놓았다. 그러더니 앉으라는 듯 고개로 의자를 턱짓했다.

바이올렛이 얼떨결에 자리에 앉자 윈터가 봉안함 위에 있던 상자를 가져왔다. 상자 안에는 폭신해 보이는 털신이 들어 있었다.

“내가 마지막으로 본 당신이 맨발이었거든. 그래서 언젠가 당신을 만나면 신발을 신겨 주고 싶었어.”

바이올렛은 분명히 신발을 신고 왔는데, 지금은 이상하게도 맨발이었다. 윈터가 바이올렛의 발에 하나씩, 신경 써서 부드럽게 만든 신발을 신겼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바이올렛이 걱정스레 물었다.

“어떻게 지냈어요?”

“그 와중에 인사치레는.”

윈터가 실소하더니 한참이 지나서야 입을 열었다.

“행복하진 않았어.”

“그래요?”

“응. 비교적 불행했어.”

그가 농담하듯 말했다.

그의 말에 바이올렛이 머뭇거리다 대답했다.

“내가 죽어도 당신은 아무렇지 않을 줄 알았어요. 그때는 그런 마음이었는데…….”

“세상에 아내가 자기 손으로 목숨을 끊었는데 괜찮을 놈이 어디 있어.”

“그러게요. 난 그때 정말로…… 당신을 조금도 이해하지 못했어요.”

바이올렛이 달래듯 윈터의 헝클어진 머리칼을 정리해 주려 하자 그가 무심코 손길을 피했다. 바이올렛은 웃으며 손을 뗐다. 그제야 뒤늦게 윈터가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바이올렛은 지금의 윈터 블루밍이 제가 만난 일곱 살의 윈터 블루밍 그대로라는 것을 알았다. 여러 번 버려진 강아지처럼 손길은 두려워하지만, 멀어지는 것은 더더욱 두려워하는. 예전에는 그런 윈터가 영 저를 증오하는 줄로만 알아서, 상처받고 한동안 숨어 버리곤 했었다.

아마 제가 숨어 버리면 윈터는 당황하며 더 많은 돈을 벌어들이려 했으리라. 그런 악순환이었다.

바이올렛은 제가 이 남자를 건져 내게 하려, 우나가 저를 여기에 데려다주었음을 알았다. 카닉 일족의 신은 이 남자를 무척이나 사랑하는 것이 분명했다. 여기서 그를 건져 낼 수 있는 기회를 두 사람 모두에게 주었으니까.

그녀가 미소 짓자 그사이 농담할 기분이 된 윈터가 물었다.

“그렇게 밝은 표정 하는 거 처음 봐. 나 없는 게 그렇게 좋았나.”

“그런 거 아니에요.”

바이올렛이 웃더니 손을 내밀었다.

“가요, 우리.”

그러자 윈터가 7년 만에 처음, 진심으로 소리 내어 웃으며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저를 끌고 가는 바이올렛의 뒤를 따라 걸으며 말했다.

“죽은 사람이 부르는 거 따라가지 말라던데.”

“안 갈 거예요?”

“누가 안 간대.”

윈터가 대꾸한 뒤 두 사람은 곧 예배당을 나섰다. 그 순간 그들은 다시 암흑이 가득한 신전으로 돌아왔다.

당신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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