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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146화 (146/176)
  • 146화

    같은 시간, 바이올렛은 어느 겨울, 남부의 한 식당 뒤에 서 있었다.

    그녀는 제 앞의 아이가 윈터 블루밍이라는 것을 금방 알아차렸다. 아마 일곱 살 정도 되지 않았나, 싶었다. 벌써부터 잘생긴 이목구비가 완연히 드러나 있었으나, 여전히 아이는 아이였다.

    ‘귀여워.’

    바이올렛이 그리 생각하며 가만히 보고 있으려니, 소년이 신경 쓰여 하며 장작을 주기적으로 화덕에 넣고 그녀를 힐끔힐끔 보았다.

    그즈음 소년은 차차 어머니가 저를 찾으러 오리라는 희망을 버려 가고 있었다. 장작을 계속 넣던 소년이 물었다.

    “뭘 그렇게 봐요?”

    “응? 아, 미안. 무례했구나.”

    바이올렛이 다정히 말하자 소년이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건 아니에요. 그냥 뭘 보나 해서.”

    “불을 보고 있었단다.”

    바이올렛은 불의 신전에 들어온 이후, 제가 환상 같은 것을 보고 있는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장작을 끊임없이 넣던 소년이 말했다.

    “저리 가요.”

    “어머. 방해를 했구나.”

    바이올렛이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돌아섰다. 그때, 소년이 걱정이 되는지 바이올렛을 돌아보며 말했다.

    “저 본 건 비밀로 해 주시면 안 돼요?”

    “왜 그러니?”

    “식당에서 이방인이 일하면 싫어하는 사람들도 있잖아요. 더럽다고.”

    “…….”

    바이올렛이 잠시 생각하다가 조용히 대답했다.

    “아주 나쁜 사람들이구나.”

    “몰라요.”

    “방해해서 미안해. 절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을게.”

    바이올렛이 그렇게 말하고는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멀어지려는데, 어디선가 걸어온 덩치 큰 사내가 곧바로 소년의 멱살을 잡아 들어 올렸다.

    “이 쥐새끼가! 그새 또 음식을 훔쳐 먹어!”

    그러자 매달린 소년이 소리쳤다.

    “바, 밥을 안 주니까 그렇죠! 배가 고픈데!”

    “네놈이 더럽게 많이 처먹으니까 그런 거 아니야! 네놈 식욕을 감당하다간 식당이 망할 판이야, 이 도둑놈의 새끼.”

    또래보다 체격이 큰 데다 자라는 속도를 감당하려니 소년은 거의 하루 종일 허기를 느꼈다. 그런데 온종일 일해도 돈은커녕 배를 채울 만큼의 음식도 주지 않으니 식당에 들어가 식재료를 훔칠 수밖에 없었다.

    식당 주인은 한참 더 욕설을 했고, 바이올렛은 윈터가 쓰는 말투 중 많은 부분이 저 식당 주인 사내를 닮았음을 금방 깨달았다.

    식당 주인은 윈터를 집어 던졌다가, 소년이 일어서자마자 뺨을 때려 다시 쓰러뜨리고는 발로 거침없이 걷어차기 시작했다. 바이올렛이 정신없이 달려갔다.

    “그만두게! 이게 무슨 짓인가!”

    그러자 식당 주인이 멈칫하고 바이올렛을 돌아보았다. 그녀의 아름다운 이목구비에 순간 말문이 막혀 하던 식당 주인이 곧 헛기침을 하고 말했다.

    “이 쥐새…… 아니, 꼬마가 자꾸 음식을 훔쳐 먹지 않습니까.”

    “그렇다고 이렇게 아이를 때리는 법이 어디 있나?”

    “아니, 아가씨. 이렇게 놔두면 저 더러운 이방인 꼬마가 계속 주방에 들락거릴 것 아닙니까. 아가씨도 그런 식당에서 식사하기 싫으시잖아요.”

    “나는 아이를 때리는 자가 운영하는 식당에서 식사할 생각이 없네.”

    “아, 거참…….”

    사내가 불쾌감을 드러내자 바이올렛이 곧 분노를 억눌렀다. 제가 여기서 화를 내 봤자 그 화가 고스란히 아이에게 돌아갈 것이 뻔했다. 결국 그녀가 자존심을 꺾고 부드럽게 말했다.

    “얼마나 훔쳤는지 모르겠지만, 오늘은 내가 보고 있으니 그만둬 주게. 부탁이네.”

    “……아름다운 아가씨가 이렇게까지 말씀하시니 그렇게 하지요. 저 망할 것이 운이 좋았습니다.”

    식당 주인이 투덜거리고는 윈터를 노려보며 여기서 일한다 말하지 말라고 눈치를 주고 떠났다.

    바이올렛이 서둘러 걸어가 윈터를 일으키며 물었다.

    “괜찮아? 많이 다쳤어?”

    그녀가 묻자 소년이 인상을 쓰고 대꾸했다.

    “저리 가라고 했잖아요.”

    “상처만 보고 갈게.”

    “불쌍하면 돈을 줘요. 동정하면 뭐 좀 우월한 기분이 들잖아요. 그런 기분 느끼게 해 줬으니까 돈을 주세요.”

    바이올렛이 급히 지갑을 찾았으나 가진 게 아무것도 없었다. 심지어 입고 있는 옷도 실용성만 생각해 가치가 없었다. 머리도 더듬어 봤으나 젠이 저 말고 다른 하녀가 그녀의 머리를 만지면 섭섭해 하는데다가 추위를 피하려고 길게 풀어 둬 아무것도 없었다.

    그녀가 그나마 하고 있는 목도리를 풀어 건넸다.

    “이거라도 쓰겠니?”

    “돈도 안 들고 다녀요?”

    “이 드레스에 주머니가 없어서.”

    “귀족 여자들도 짜증나겠네요. 제 이 거지 같은 옷에도 주머니가 있는데.”

    그녀의 옷에 주머니가 없어서 짜증 난다는 건, 늘 윈터가 불만스러워하는 바람에 알았다. 어려도 불만인 부분이 똑같구나, 싶어 웃고 난 바이올렛이 목도리를 소년의 목에 둘러 주었다.

    “넌 아주 똑똑해 보이는구나.”

    “왜 거짓말해요?”

    “정말이야. 힘도 세 보이고.”

    “그건 그래요.”

    “금방…… 나보다 더 많이 크겠지.”

    바이올렛이 애틋한 표정으로 말하며 두 손으로 소년의 얼굴에 난 상처를 깨끗하게 닦아 냈다. 그러자 소년이 있는 대로 짜증을 내며 말했다.

    “귀족 여자를 밀면 사형당해요?”

    “그 정도는 아니야.”

    “일해야 되는데 짜증나게.”

    “걱정해 주는데 왜 짜증을 내고 그러니?”

    바이올렛은 핀잔했으나 표정에는 다정함이 가득했다. 그래도 제가 불편한 모양이라 자리에서 일어서니 눈이 커진 소년이 서둘러 치맛자락을 잡았다.

    “왜요?”

    “응?”

    “아.”

    윈터가 얼른 손을 뗐다. 그러더니 목도리를 손으로 꽉 쥐고 다시 화덕 앞에 앉아 장작을 넣기 시작했다.

    그리고 조금씩 바이올렛의 시야가 흐릿해졌다. 그녀는 이 환상이 조금씩 사라져 가는 걸 알고 소년에게 말했다.

    “잘 지내. 다음부턴 걸리지 마, 도둑질.”

    그녀의 말에 소년이 다시 바이올렛을 돌아보았다. 소년은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듯 보다가 홱 고개를 돌려 다시 장작에 집중했다.

    “신경 꺼요.”

    그렇게 꼬박꼬박 대꾸해주는 소년의 환상이 사라지도록, 바이올렛은 윈터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린 그의 곁에 있어 주고 싶다는 생각 때문에 이런 환상을 보는 것이리라, 그녀는 막연히 생각할 뿐이었다.

    바이올렛의 시야가 완전히 암전되기 전에 윈터의 눈에서 먼저 그녀가 사라진 모양이었다. 윈터가 힐끔 다시 바이올렛 쪽을 보더니 곧 놀라서 그녀가 있는 곳으로 달려와 두리번거렸다.

    그 모습에 바이올렛이 다시 손을 뻗었으나 잡히지 않았다.

    소년이 화덕으로 돌아가 앉으며 투덜거렸다.

    “뭐야, 이제 진짜 불이 잘 붙었는데.”

    바이올렛은 뒤늦게 제가 불을 보고 있다고 해서, 소년이 그렇게 얻어맞고도 냉큼 앉아 장작을 넣고 있었음을 알았다. 외로웠으면서 곁에 있어 달라고 말하는 법은 몰랐던 탓이었다.

    그걸 알고 나니 눈물이 날 것 같았다.

    *

    바이올렛의 눈앞에서 환상이 사라졌을 때, 그녀의 앞에는 함께 알리카에 온 혼혈 아이, 우나가 서 있었다.

    “여긴 어떻게 들어왔니? 아…… 이 애도 환상인가?”

    그녀가 혼잣말을 하는데, 우나가 입을 열었다.

    “윈터 아저씨는 공주님이 아파서 알리카에 왔고, 공주님은 아기 때문에 여기 온 거죠?”

    우나의 말에 바이올렛이 미소를 지었다.

    “응. 각자 그게 가장 큰 이유인 모양이구나.”

    그러자 우나가 배시시 웃으며 바이올렛의 손을 꼭 잡았다.

    “공주님이 윈터 아저씨 대신 아파준 것처럼, 공주님의 아가님은 공주님 대신에 아파주고 싶어 해요.”

    “그게…… 무슨 말이니?”

    언뜻 이해하지 못한 바이올렛이 창백한 얼굴로 어찌할 바를 몰라 얼어 있는데, 우나가 말을 이었다.

    “원래 카닉 일족 사람들은 타인의 아픔을 가져가주는 힘을 가진 사람들이었대요. 이제는 오히려 아픔을 주는 사람들이 되었지만요.”

    “슬픈 일이구나.”

    “그래도 이번엔, 공주님이 구해준 사람들이 아가님의 아픔을 가져가 줄 거예요. 그러고 나면 아가님은 다시 공주님에게로 돌아올 거예요.”

    “자, 잠깐만. 너희도 아직 아이들이잖니.”

    “괜찮아요. 엄청 많은 사람들이 나눠가는 걸요. 아기는 아주 작고.”

    “아파도 내가 아파야지. 아이가 어른의 책임을 대신 져서는 안 돼.”

    “공주님과 윈터 아저씨도 어른들의 책임을 대신 지고 자란 걸요. 카닉 사람들을 구해주고, 그 사람들이 불의 신에게 공주님의 안녕을 기도하게 만든 것도 다 공주님의 선택이었어요. 이제 공주님도, 공주님을 찾아올 아가도 건강할 거예요.”

    우나가 배시시 웃는 것을 보던 바이올렛이 애써 따라 웃으며 말했다.

    “이것도 다 환상일까?”

    “그렇게 볼 수도 있죠. 아. 이제 윈터 아저씨를 데리러 가요.”

    “데리러 가?”

    “네. 지금은 지옥 같은 곳에 있거든요. 가는 길에 불의 신에 대해서 알려줄게요.”

    우나가 바이올렛의 손을 꼭 잡더니 어디론가 잡아끌었다.

    바이올렛은 혼란과 두려움을 가까스로 견디며 아이를 따라 걸었다.

    *

    윈터는 여전히 아내의 방에 서 있었다. 그는 잠깐 시계를 보았다가 의사, 릭먼에게 성질을 냈다.

    “왜 아직도 못 일어나.”

    “저…… 정말 돌아가셨습니다. 어떻게 해 볼 방법이…….”

    그 말에 윈터가 코웃음 쳤다.

    “웃기지 마. 며칠 전에 나한테 수도 가지 말라고 화내던 여자야. 그래, 뭐. 혈색이 좋은 편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갑자기 죽을 정도는 아니야.”

    “스스로 목숨을 끊으신 겁니다.”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윈터가 버럭 소리치더니 릭먼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의사면 의사 일을 해야 할 거 아냐! 내 아내 좀 깨우라는데 그까짓 것도 못 하는 게 무슨 의사야!”

    그는 분노를 못 참고 릭먼을 벽에 처박듯이 던져 버리고는 안주머니에서 접이식 칼을 꺼내 펼치고 목에 들이댔다.

    “빨리 깨워.”

    “이, 이러지 마십시오! 못 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뭐라도 해! 무슨 짓이든 해서 깨우라고! 사람이 이렇게 오래 자는 게 말이 안 되잖아! 그까짓 맨발로 좀 다녔다고…….”

    “하루 늦는다고 크게 변하는 것도 없잖아요. 이번 한 번만…….”

    윈터는 아내의 애원을 떠올리는 순간, 심각한 가슴 통증을 느껴 자리에 주저앉았다. 심장이 쪼개지는 것 같았다. 온몸 구석구석에 소금 같은 것이 다닥다닥 박히는 것처럼 아파 왔다.

    그는 그 상태로 주저앉아있었고, 그사이 주변이 빠르게 움직였다. 그가 다시 정신을 차린 건 아내를 화장터로 이동시킬 때였다.

    주변 다른 국가와 달리 라크라운드는 화장을 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래서 블루밍 가문 정도의 큰 가문에는 반드시 화장터가 있었다. 그들은 죽은 자를 가문 안에서 떠나보낸다는 것에 매우 자부심을 느꼈다.

    윈터는 여전히 아내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했으나, 주변인의 성화로 검은 정장을 차려입고 평소에는 귀찮아 끼지 않던 하얀 장갑을 꼈다.

    그리고 화장터에 서서 아내를 화장하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하옐이 조심스럽게 서류를 내밀었다.

    “대표님, 큰 마님께서 작은 마님 장례식…… 직접 준비하시겠다는데요.”

    “내가 해.”

    “그러는 게 낫겠죠?”

    “어. 내가 해야지. 내가 죽였는데.”

    “대표님…….”

    “젠장, 그 공주님이 맨발이었단 말이야.”

    그렇게 말하던 윈터가 또다시 웃음을 터트렸다. 화장터에서 웃음소리가 들리자 주변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윈터가 타오르는 불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그거 아나. 이방인들의 신은 불 속에 있다더군.”

    “예? 아, 이글린에게 들었어요.”

    “그래. 신. 그 신.”

    윈터가 중얼거렸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신이, 오늘은 저기 있었으면 좋겠어.”

    당신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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