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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144화 (144/176)
  • 144화

    부부는 환자를 확인하기 위해 의사와 함께 아이들의 집에 들어섰다. 집 안에는 난방을 위한 작은 화로 하나만이 놓여 있었다. 불을 피울 마법석은 이 지역을 찾아 헤매 충분히 구할 수 있는 모양이었지만 화로를 더 살 돈은 없는 듯했다.

    아이는 열 명이었는데, 대부분 순록의 가죽으로 된 옷을 입고 있었으며, 체구가 작아 짐을 버리면 그럭저럭 전부 짐마차에 태울 수 있어 보였다.

    윈터는 지체 없이 짐을 버리거나 다른 마차로 옮기게 했다. 그의 지나친 소비가 오늘은 도움이 되어, 달달 떨고 있던 아이들을 전부 따듯하게 둘러 줄 수 있었다. 그러자 금방 되살아난 아이들이 신이 나서 재잘거리고 떠들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대부분 회색 눈과 은발 중 하나의 특징만 가지고 있었으며, 두 명은 아예 두 가지 특징이 전부 없었다.

    아이들은 사람이 그리운지 머뭇거리면서도 곧 부부에게 매달려 왔다. 처음엔 윈터가 무서워 가까이도 안 가려 했으나, 그가 혼혈인 저희에게 유하다는 걸 금방 눈치채고 옹기종기 모여들었다.

    “무서운 아저씨, 목말 태워 주세요!”

    그러자 윈터가 눈썹을 꿈틀거리며 말했다.

    “애새끼들은 왜 키 큰 사람만 보면 목말을 태워 달라는 거야.”

    윈터의 짜증에도 아이들이 달라붙었고, 그가 아이를 훌쩍 들어 짐마차에 던지자 재미있다며 까르륵까르륵 웃었다.

    그사이 환자인 ‘우나’라는 여섯 살의 가장 어린 아이는 바이올렛의 부축을 받으며 부부의 마차에 탔다. 아이는 열이 오른 와중에도 마차 안을 신기해하며 둘러보고 있었다.

    윈터는 제 아내에게 감기를 옮기지 말라고 꼬마에게 소리치고 싶었으나 일말의 양심 덕에 가까스로 참았다.

    마차에 함께 탄 의사가 아이를 진찰한 후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당장 제대로 된 병원에 가야 할 것 같습니다. 몸이 허약해서 이대로는 위험합니다. 애초에…… 영양이 부족해 이대로는 악화될 뿐일 겁니다. 게다가 다른 아이들에게도 옮겼겠지요.”

    그 말에 윈터가 혀를 찬 뒤 바이올렛에게 말했다.

    “당신이 발견하지 못했으면 죽었겠군.”

    “윈터.”

    “안 좋았겠군.”

    윈터가 천연덕스럽게 말을 바꿨다.

    진찰이 끝난 후 의사가 돌아가자 곧 마차가 출발했다. 짐마차와 마찬가지로 부부의 마차에 탄 우나의 앞에도 비상식량으로 가져온 육포와 초콜릿이 든 그릇이 놓였다.

    우나는 두 가지 다 처음 보는지 머뭇거렸다. 아이를 키워 본 적 없는 부부가 진지한 얼굴로 고민했다.

    “아픈 아이에게 육포는 안 좋지 않을까요?”

    “젠장, 의사에게 물어볼걸. 초콜릿은 되나?”

    “모르겠네요…….”

    부부가 저를 놓고 고민하자 우나가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며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 모습을 본 바이올렛이 초콜릿을 집어 껍질을 벗긴 후 아이에게 내밀었다.

    “우선 이거 먹어 볼래? 열량을 채워야 한다고 하니.”

    그러자 우나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초콜릿을 한 입 깨물었다. 우물우물거리는 아이의 얼굴에 절로 황금 같은 미소가 돌자 부부가 안도했다. 윈터가 다음 초콜릿의 껍질을 벗겨 주며 물었다.

    “알리카에 네 부모가 있나?”

    “네. 그런데 저는 아빠가 다른 엄마랑 낳은 아이예요.”

    “나랑 똑같군.”

    “정말요?”

    “응. 나도 사생아야.”

    윈터의 말에 아이가 눈이 동그래져서 말을 이었다.

    “아저씨도 부모님이랑 떨어져서 살았어요?”

    “어릴 때는.”

    “그런데 어떻게 부자가 됐어요?”

    “공주님이랑 결혼했잖아.”

    “와.”

    아이가 초롱초롱한 눈으로 바이올렛을 보자 그녀가 단호하게 말했다.

    “윈터, 그렇게 말하면 이 아이도 왕자와 결혼해야 부자가 된다고 생각할 거 아니에요.”

    “제일 쉬운 방법이긴 하지.”

    “하지만 당신은 능력으로 부를 쌓았잖아요. 보고 배우게 해 줘요.”

    그녀의 말에 윈터가 인상을 썼다. 그사이 맞은편 의자에 앉아 있던 우나가 외로움에 바이올렛의 옆에 앉고 싶어 하자 윈터가 짜증을 내며 우나와 자리를 바꿔 주었다.

    우나가 담요를 끌고 와 바이올렛과 제 무릎을 덮고 꼭 달라붙었다.

    윈터가 성질을 가까스로 죽이며 말했다.

    “당신 감기 옮으면 화낼 거야.”

    “미안해요. 그건 장담할 수 없네요. 아까 의사가 전염성이 있다고 했으니까요.”

    그녀의 차분한 대답에 윈터는 속 터져 하면서도 다리를 뻗어 바이올렛의 다리 사이로 교차해 두고 그냥 잠을 청했다. 그 모습에 우나가 소곤거렸다.

    “왜 저런 무서운 아저씨랑 결혼했어요?”

    그러자 바이올렛이 웃으며 같이 소곤거렸다.

    “사랑해서 결혼했지.”

    그녀의 작은 목소리를 귀신같이 알아듣고 윈터의 입꼬리가 씰룩거렸다.

    그사이 마차가 알리카에 가까워졌다. 알리카는 곡저 평야로, 높은 곡벽과 곡벽 사이를 거대한 문으로 막아 두고 있었다.

    모처럼 열량을 채우고 따듯하게 잔 우나의 뺨에는 혈색이 돌아오고 있었다. 그러나 알리카가 가까워지자 불안했는지 바이올렛의 팔을 꼭 끌어안았다.

    “들어가면 혼나는데…….”

    그러자 윈터가 대꾸했다.

    “안 되면 이 마차에 있어. 그 낡아 빠진 집보다 따듯하고 먹을 것도 많으니까.”

    “정말요? 그래도 돼요?”

    “안 그럼 뭐, 너희끼리 그 집에 돌아가기라도 할 거냐?”

    윈터의 핀잔에도 아이는 마냥 기쁜지 웃음을 지었다.

    할린이 마차에서 내려 문으로 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문이 열렸다. 할린이 부부가 탄 마차에 탄 후 다시 출발하며 알리카로 들어섰다. 할린이 조심스럽게 윈터를 보았다.

    “어머니를 뵙고 가실 거죠? 나올 때 보니까 음식을 많이 준비하시려던데.”

    “내가 거길 왜 가.”

    “하지만 신전 가까운 곳에…….”

    “닥쳐. 안 본다고 하잖아.”

    윈터가 신경질적으로 대꾸했다.

    그사이 마차는 알리카의 수장이 있는 신전으로 향했다. 바이올렛이 창밖을 보며 할린에게 물었다.

    “알리카 사람들은 붉은색을 좋아하는 모양이오. 붉은 칠이 많은 걸 보니.”

    “아, 네! 알리카 사람들은 불의 신을 모시거든요. 불의 신은 뱀의 형상을 하고 계십니다.”

    알리카는 평화로웠다. 밖에서는 그렇게 요란하던 눈보라가 이 안에서는 그리 느껴지지 않았고, 햇빛도 잔잔하게 들어왔다.

    게다가 이곳은 자연적으로 불이 타오르는 곳이 곳곳에 있어 따듯하기까지 했다. 윈터가 중얼거렸다.

    “매장된 자원이 있고, 그 사실을 아는데도 이 꼴로 살고 있었다는 거군.”

    그러자 할린이 급히 대답했다.

    “알리카에서 불은 신의 것입니다. 개발하시면 안 돼요.”

    “아주 구석구석 한 군데도 마음에 들지 않는군. 이딴 곳에서 세뇌되지 않아 다행이야. 넌 불쌍하게 됐다.”

    “네, 네?”

    할린이 당황하거나 말거나, 윈터가 탐욕스러운 표정으로 땅을 살폈다. 그 사이, 그들이 탄 마차가 신전 앞에 섰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 문 앞으로 나왔다. 곧 바이올렛과 윈터의 일행도 마차에서 내려서 그들과 마주했다.

    무리의 가장 앞에는 뱀이 그려진 화려한 차림새의 노인이 있었고, 그 뒤로 건장한 신관 다섯이 따르고 있었다.

    “어서 오시오. 카닉 일족의 다섯 샤먼 중 하나인 파누스요.”

    붉은 옷을 입은 파누스가 불편한 표정으로 서 있으니 윈터가 인상을 쓰고는 먼저 악수를 청했다.

    “윈터 블루밍이오. 이쪽은 아내이며 라크라운드 왕녀인 바이올렛 블루밍이고.”

    “이곳은 우리 일족의 땅이오. 다른 왕족은 관계가 없소.”

    “그건 맘대로 하고, 그럼 이제 들어가지?”

    “이곳은 성스러운 땅이오. 카닉 일족이 아닌 자들을 신전에 들이려면 일족에 대한 봉헌이 필요하다고 원로들이 합의를 보았소.”

    “내 이럴 줄 알았지.”

    애초에 돈 생각해서 혼혈인 저를 들여보냈으니 이 말이 안 나오면 그게 더 이상했다. 반면 할린은 몰랐는지 울상이 되어 파누스에게 말했다.

    “파누스 님, 들어오게 해도 된다고 하셨잖아요.”

    “그래. 그러나 신께서 노하실 것임은 변함이 없지.”

    파누스가 눈을 가늘게 뜨며 윈터에게 말을 이었다.

    “알리카의 번영을 위해 재산의 절반을 바치면 혼혈이라 하여도 신전 출입을 허하기로 샤먼들이 결정하였소.”

    그 말에 윈터가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가 삐딱하게 몸도, 고개도 기울이며 파누스에게 물었다.

    “내 재산의 절반이 어느 정도 되는 줄은 아나?”

    “상당한 부를 누적했다고 들었소.”

    “그러니까. 그 상당한 부의 절반이 얼마냐고.”

    그의 말에 파누스가 인상을 썼다.

    “그게 중요하오?”

    “당연히 중요하지. 절반? 내 재산 절반이면 이까짓 얼어붙은 땅, 수백 개는 살 수 있어.”

    “뭐, 뭐라고? 말도 안 되는 소리 마시오!”

    “정말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해? 개소리도 적당히 해야지, 이딴 거지 같은 땅에 들어가는데 돈을 뭐?”

    성질을 내던 윈터가 점점 더 욱하는지 곧바로 파누스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그때, 바이올렛이 살며시 그의 팔을 붙잡아 말리고는 가볍게 미소 지으며 파누스에게 악수를 청했다.

    “그대 말이 맞소. 알리카에 왔으니 알리카의 법을 따라야지. 하지만 우리에게 그 법을 적용해서는 안 될 것 같소.”

    “무슨 소리요?”

    “남편이 여기서 유명하니 나에 대해서도 알고 있으리라 보오. 왕실이 사라졌다고는 해도 알리카의 인접국이며 라크라운드와 수교한 하누스에서는 그리 여기지 않소. 나는 라크라운드의 왕녀이며, 선왕께서 돌아가시고 나의 오라버니에게 후계자가 없으니 왕위 계승 서열로 두 번째가 되오.”

    “저, 저기…….”

    “나와 남편이 이곳에 오는 걸 허락한 건 그대들이오. 왕녀인 나를 모욕하려는 것은 라크라운드를 모욕하는 것이고, 만약 그렇다면 하누스 왕가에 이 수치에 관하여 이야기해야겠소. 그렇다면 인접 도시인 여기에도 그리 좋은 영향은 없을 것이오.”

    “…….”

    “어느 정도의 선물은 할 수는 있겠으나 왕가의 사람을 초대해 그리 당당히 돈을 요구한다는 것은 라크라운드를 우습게 보는 것이고, 또한 우리와 수교한 하누스 역시 우습게 보는 것이 아니겠소?”

    인접국을 이용해 위협하는 그녀의 말에 파누스가 침을 꿀꺽 삼켰다.

    윈터는 바이올렛이 결단코 사사로운 일로 외교를 망쳐 놓을 사람이 아님을 알았지만 파누스는 몰랐다.

    로렌스 왕가는 사라졌다고 들었으나 왕족 혈통인 그녀가 작정하고 외교에 으름장을 놓는다면 하누스 입장에서는 상당히 불만스러워질 것이고, 이런 규모가 작은 도시는 위험해질 것이 뻔했다.

    파누스가 분노를 억누르며 입을 열었다.

    “……들어오시지요. 하지만 그 아이들은 본디 두 분의 일행이 아니었을 테니 당장 알리카 밖으로 내보내십시오.”

    파누스의 말에 우나가 놀라서 바이올렛을 꼭 끌어안았다. 그러자 바이올렛이 다정히 우나의 머리칼을 쓰다듬고 파누스에게 말했다.

    “그럼 이 아이들은.”

    그렇게 운을 띄운 바이올렛이 지갑을 열어 지폐 두 장을 꺼냈다.

    “여기 있소.”

    “이, 이게 뭡니까?”

    바이올렛이 상냥한 목소리로 말했다.

    “귀공의 말대로 저 아이들은 내 멋대로 데리고 온 것이니 당신네들의 법을 따라야 하지 않겠소. 저 혼혈 아이들을 들여보내려면 재산 절반이 필요하겠지. 이 정도면 넉넉할 거요.”

    “…….”

    “자, 이제 들어가도 되겠소?”

    바이올렛의 담담한 말에 파누스의 얼굴이 거무죽죽해졌으나 제가 한 말에 걸려 넘어져 별수 없이 문을 열어 주었다. 윈터는 끅끅거리며 웃음을 참다가 샤먼의 어깨를 툭툭 치고는 문을 넘어 들어가자마자 배를 잡고 웃었다.

    “한심한 자식.”

    그가 말하는 것을 분명 들었을 텐데도 바이올렛은 지적하지 않았다. 드러내진 않았으나 그녀도 매우 분노한 상태였던 탓이었다.

    당신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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