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3화
바이올렛이 떠나기 전까지 윈터 블루밍에게 시간은 돈과 같은 말이었다. 그녀가 떠난 후에야 시간과 돈이 완벽히 교환될 수 없음을 알았다. 아무리 시간을 들여도 돈밖에 해결할 수 없는 일이 있듯이, 아내와의 관계는 돈을 아무리 들여도 시간을 들이지 않으면 해결할 수 없는 문제였던 것이다.
윈터가 열어 준 상자를 가만히 바라보던 바이올렛이 고개를 저었다.
“정말로 가지고 싶은 건 아니었어요. 농담이에요. 난 당신이 호텔을 아끼는 모습에 호감을 느낀 것뿐이에요.”
“……그래?”
“거절하는 모습이 매력적이었어요. 미안해요, 괜한 장난이었어요.”
“혹시 너무 쉽게 마음 바꿔서 매력이 사라졌나?”
“당신도 날 참 좋아하는구나, 하는 생각만 들던데요.”
그녀의 대답은 마음에 들었으나, 물질에 대한 욕망이 한없이 큰 윈터가 재차 물었다.
“정말 받고 싶은 건 아니고?”
“전혀요. 당신이 말한 것처럼 난 당신이 가진 모든 것들 중에 당신의 시간을 받는 게 가장 좋아요.”
“…….”
“나에게 선물을 해 주고 싶다면 같이 있어 줘요. 그게 제일 좋은 선물이에요.”
아내가 그렇게 말하고 미소를 짓자, 윈터는 순식간에 심장이 확 부풀어 버리기라도 한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잠깐만.”
윈터가 잠깐 1층으로 내려갔다 다시 2층으로 돌아와서는 말했다.
“오늘 장사는 끝내기로 했다는군. 내가 한 달 장사할 만큼은 사 줬으니.”
“네에?”
“이제 사람 안 오니까 키스하자.”
“고작 키스하려고 그렇게…….”
“키스하려고 고작 그만큼 돈을 들인 거지.”
윈터가 눈꼬리를 휘어 웃으며 바이올렛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바이올렛은 한숨을 쉬었지만 그가 꿀이 떨어질 듯한 눈으로 저를 바라보자 곧 눈을 감아 주었다.
*
마도구 쇼핑을 마치고 어마어마한 양의 신문을 카닉사 크루즈로 배달시켜 놓은 뒤 일행은 다시 알리카로 향했다.
신문 한 부를 챙겨 아내의 기사를 외울 정도로 읽던 윈터가 말했다.
“에쉬가 작위를 가지고 싶어 한다고 이글린에게 들었는데.”
“아, 그랬죠.”
“그걸 왜 아직도 못 받은 거야? 자기 거라며.”
“작위 중 하나는 로렌스 왕가에서 뻗어져 나간 도스 공국의 후계자 중 하나가 되는 게 가능하다는 거예요. 하지만 성문법상 그렇다고 해도 페런이 버젓이 있는데, 거기 가서 후계자 경쟁을 하겠다는 건 전쟁 선포나 다름없죠.”
“다른 건?”
“또 하나는…….”
바이올렛이 윈터의 반응을 짐작하고 살짝 민망한 표정을 지었다.
“당신이 귀족들은 쉬운 걸 어렵게 한다고 할 수도 있지만요.”
“응.”
“라크라운드 수도를 지나는 레클 강에는 카닉 본사가 있는 하구 섬을 비롯해서 두 개 섬이 더 있죠.”
“그것도 섬인가? 그냥 돌 몇 개 붙은 거잖아.”
“그래도 두 가구 정도씩 사니까요. 그렇게 세 개 섬을 합쳐서 법적으로 ‘모든 섬’이라고 적어요.”
“……계속해 봐. 벌써 짜증나긴 하지만 당신 목소리니까 참고 듣는다, 내가.”
윈터가 인상을 쓰자 바이올렛이 빠르게 말을 이었다.
“정확히 레클 강과 그 강의 모든 섬의 주인으로서의 칭호예요. 왕만이 가질 수 있죠. 강을 왕이 아닌 귀족이 가질 수는 없으니까요.”
“그런데 그까짓 걸 못 받는 이유가 그러니까…….”
“당신이 예전엔 모두가 쓸모없다고 생각하던 하구 섬의 상당 부분을 사들였죠? 그래서 ‘모든 섬’ 부분이 틀리게 된 거예요.”
“상당 부분이라니. 내 거라니까.”
“그러니까 내 거라는 게…….”
“하구 섬 전체가 내 거라고. 나한테 왜 이렇게 관심이 없어, 당신은?”
윈터는 섭섭한 표정이었지만 바이올렛으로서는 상식적으로 바다 먼 곳에 있는 섬도 아니고, 수도에 속해 있는 섬을 통째로 소유하고 있다는 게 납득이 안 가는 것이었다.
지금 하구 섬은 라크라운드 최고의 번화가로 불렸다. 어지간히 유명한 상점이 아니면 그 세를 감당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래서 바이올렛은 윈터가 몇 번이나 하구 섬이 제 거라고 말해도 너무 비현실적이라 흘려듣던 터였다.
바이올렛이 당혹스러워하며 물었다.
“그러니까…… 하구 섬 전체요?”
“응. 모래 하나까지 다 내 거야.”
“아…….”
바이올렛이 한숨을 쉬었다.
“더더욱 에쉬가 그 작위를 못 받는 게 당연하군요. 에쉬는 우선 그 문장을 수정해야 할 거예요.”
“그러니까 모든 섬이라고 적혀 있는데, 모든 섬이 아니다, 이거지? 이야, 진짜.”
윈터가 적당한 단어를 못 찾아 표정만 구기자 바이올렛이 그가 무슨 말을 하려 하는지 맞혀 보려고 말을 던졌다.
“귀족들은 쓸데없는 것에 집착한다고 생각했죠?”
“정확해. 이제 나에 대해 잘 알게 됐군.”
윈터가 대꾸하고 슬쩍 웃었다. 그리고 그는 곧 제가 바로 해야 할 일을 알았다.
나머지 두 섬을 사들이는 것이었다. 하구 섬까지 셋 다 부부 공동 재산으로 처리하면 될 것이었다.
*
마차는 곧바로 알리카가 있는 대륙의 북쪽 끝으로 향했다. 북쪽으로 가는 길은 많았지만 하누스 수도에서부터 난 길만이 유일하게 안전한 길이었다.
젠과 하옐은 들어갈 수 없을 테니, 인근 마을에서 대기하게 두고 남은 일행들이 알리카로 향했다.
북으로 갈수록 라크라운드에서는 느껴 본 적 없는 추위가 달려들었으나 마차 안은 따듯하다 못해 더울 지경이었다.
알리카가 가까워질수록 윈터는 부쩍 말수가 줄어들었다.
바이올렛이 다정히 물었다.
“무슨 생각 해요?”
“…….”
윈터가 잠시 말이 없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입을 열었다.
“친모를 다시 만난 이후에는 그 사람이 불쌍하단 생각을 한 적이 없었어.”
“그런데요?”
“우린 끼니를 때울 돈도 없었어. 이 먼 길을 사설 마차를 타고 오를 돈은 더더욱 없었겠지.”
“…….”
“이 길을 혼자 걸어 올라갔을 걸 생각하니 마음이 좀 그렇군.”
바이올렛은 중얼거리는 윈터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그랬군요.”
윈터가 제게 기댄 바이올렛의 이마에 입을 맞추고 말했다.
“불쌍하다고 자꾸 잘해 주면 버릇 나빠진다니까.”
바이올렛이 미소를 짓고는 그의 팔을 토닥거리고 다시 창으로 고개를 돌렸다.
윈터의 말대로 혼자 걸어 올라오기에는 너무도 혹독한 길이었다.
그때, 눈길을 가만히 바라보던 바이올렛이 말했다.
“잠깐만요. 저기 불빛이 보이는데요.”
그 말에 윈터가 문 쪽으로 고개를 들이밀어 보더니 말했다.
“그렇군.”
“사람이…… 아이들이 있어요.”
“어어, 그렇군.”
“이렇게 추운 곳에요. 내려 봐야겠어요.”
“……꼭 그래야 돼?”
윈터는 인상을 썼으나 일단 마차를 멈추게 했다.
이어 바이올렛이 마차에서 내리려 하자 윈터는 그녀가 입은 겨울용 두꺼운 드레스 위에 커다란 코트를 덮어 주고도 모자라 그 위에 담요를 한 번 더 둘렀다.
“젠장, 저 망할 놈들은 왜 눈에 띄어서.”
윈터가 여전히 안 내키는 얼굴로 먼저 마차에서 내렸다. 그는 남부 사람이었지만 극북의 혈통을 가진 사람이라 그런지 바이올렛보다 월등히 추위를 덜 탔다. 윈터가 바이올렛의 손을 그녀의 코트 소매 안으로 끼워 넣었다.
“내가 잡아 줄 테니까 손 빼지 마.”
“소매에 손을 넣다니, 이런 건 처음 해 봐요.”
“당신 옷엔 주머니가 없잖아.”
“주머니에 손을 넣고 걷는 건 예의에 어긋나니까요.”
“그래, 그래. 난 무례하고 당신은 공주님이지.”
윈터가 빈정거리고는 바이올렛의 한 걸음 앞에서 눈 위를 걸었다. 그가 먼저 밟고 무릎으로 꽉 발자국을 눌러 눈을 다지면 바이올렛이 그 뒤를 조심조심 걸었다. 윈터가 보폭을 줄였는데도 불구하고 바이올렛은 버거워했으나 비틀비틀거리며 곧잘 그를 따라왔다.
그들이 아이들에게 가까워졌을 때, 그중 가장 큰 아이가 눈을 꼭 감고 두 손으로 칼을 쥐고는 말했다.
“가, 가진 걸 내놓으면 목숨만은 살려 주지!”
열셋 정도는 되어 보이는 소년이었다. 키는 바이올렛보다 컸지만 얼굴은 확연히 어린아이였다.
윈터가 혀를 차더니 곧바로 리볼버를 꺼내 소년을 겨눴다. 그러자 기겁한 소년이 칼을 떨어뜨리고 두 손을 들었다. 그러더니 제 발이 저려 바이올렛을 돌아보며 변명하듯 말했다.
“어려도 강도는 강도잖아.”
바이올렛이 말없이 윈터를 지나쳐 칼을 집어 들고는 남편에게 건네주었다. 겁먹은 소년이 울먹이며 말했다.
“아, 아픈 아이가 있어요!”
“아픈 아이?”
“이제 더는 돈을 구할 수가 없어서…….”
소년이 머뭇거리다가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차림새가 귀족이라 어떻게든 돈을 받아 낼 생각이었는데, 저에게 총을 겨누고 있는 사람이 회색 눈이었다. 소년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카닉 일족이시군요?”
“그렇긴 한데, 우리 둘 중에 널 죽일 가능성이 높은 건 나지. 그것도 매우 높은 확률로.”
“죄, 죄송해요! 같은 일족이신 줄 모르고…….”
“같은 일족이 아니면 강도 짓 해도 돼? 이 망할 쥐…… 같은 꼬마가.”
윈터가 저를 돌아보는 바이올렛 덕에 욕설을 가까스로 삼켰다. 소년이 머뭇거리다가 확신을 가지고 물었다.
“윈터 씨죠?”
“이 쓰레기 같은 일족 중에 귀족은 나 하나인 모양이군.”
“아,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소년이 고개를 꾸벅 숙였다. 소년이 경계를 풀고 나서야 바이올렛이 물었다.
“여기서 왜 이러고 있니?”
“저희는 혼혈들인데요. 알리카에 들어갈 수가 없어서 저 집에 모여 살고 있어요. 데리고 들어갈 순 없으니 가끔 부모들이 와서 돌봐 주기도 하지만 대부분 혼외 자식이기도 하고, 샤먼들이 신께서 저희를 불편하게 여기신다고 말씀하시기도 하셔서…….”
바이올렛은 그런 말을 신이 전했을 것 같지는 않다고 생각했으나, 타인의 신을 모욕하지 않으려 애써 말을 삼켰다.
반면에 윈터는 참지 않고 욕설을 퍼부었다.
“강도 짓도 제대로 못 하는 놈들이 자기들끼리 사는 게 말이 돼? 저기 바로 부모가 있는데.”
그의 말에 바이올렛이 고개를 끄덕이는데, 무리 중 여자아이 하나가 바이올렛의 다리를 꼭 안고 얼굴을 묻었다. 그러더니 고개를 들고 물었다.
“공주님이에요?”
“지금은 아니란다.”
그녀의 성실한 대답에 아이가 실망하자 윈터가 혀를 차더니 소곤거렸다.
“공주님, 법적인 거 말고 동화적으로 묻는 거야. 당신이 방금 이 꼬마의 동심을 깨뜨렸어.”
“네? 아!”
바이올렛이 뒤늦게 놀라더니 서둘러 허리를 숙여 아이의 귀에 소곤거렸다.
“공주인 건 맞지만 비밀로 해 줘야 해. 몰래 나왔거든.”
“우와!”
아이가 금방 다시 표정이 밝아져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윈터의 표정은 더더욱 나빠졌다. 그는 아이들을 통해 버려졌던 자신을 투영하고 있었다. 그가 알리카 방향을 노려보더니 말했다.
“환자를 마차에 태워. 알리카로 가지. 너희도 가려면 타.”
그러자 처음 칼을 들었던 소년, 누아가 말했다.
“그건 안 돼요! 신께서 저희를 보시면 화를 내실 겁니다. 순수한 카닉의 혈통이 아니라면 알리카에 들어가서는 안 돼요.”
누아의 말에 바이올렛이 입을 열었다.
“신의 말은 인간의 입에서 달라지기도 한단다. 하지만 만약 너의 신이 정말로 그렇게 말하셨다면.”
바이올렛이 조심스러운 얼굴과 표정으로 누아를 보며 말을 이었다.
“미안하지만 나는 그걸 부정할 수밖에 없겠구나.”
“공주님의 신이 아니라고 해서 함부로…….”
“나의 신이 그렇게 말하셨더라도 마찬가지야. 그건 나의 신념과 다르니 따르지 않을 거란다. 미안하지만 함께 알리카로 가주지 않겠니?”
그녀는 언제나 저의 신에게 하듯이, 카닉 일족의 신에게 예의를 갖추었었다. 그러던 바이올렛의 단호하며 다정한 권유가 윈터에게는 이상하게도, 다섯 살에 홀로 남았던 저를 향한 것처럼 느껴졌다.
당신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