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화
잠시 후, 바이올렛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더니 윈터의 앞에 앉았다. 그러더니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갑자기 정말로 걱정이 되기 시작하네요. 어떡하죠?”
“다른 일 하면 된다니까.”
“당신한테나 쉽죠. 당신은 능력이 있으니까.”
바이올렛이 핀잔하더니 낯빛이 좋지 않은 윈터의 머리칼을 손으로 부드럽게 쓸어 넘겼다.
“같이 자요. 걱정돼서 잠이 안 와요.”
“…….”
“윈터. 왜 자꾸 이렇게 불안한 표정을 지어요?”
바이올렛이 묻자 윈터가 그녀 쪽으로 고개를 조금 가까이 하며 말했다.
“내가 주고 싶어하는 것들 좀 다 받아줘.”
“네?”
“내가 뭐 하나 살 때마다 언제 당신에게 주나 걱정하게 하지 말고. 그냥 당신 주고 싶은 거 다 주게 해줘.”
“……갑자기 왜요?”
“나는 스물아홉까지 그렇게 살았잖아. 다섯 살부터 일을 해야 밥을 얻어먹고 맞지 않았어. 스물아홉까지는 돈을 퍼부어야 부모가 날 보고 웃었어. 그게…… 남이 보기엔 한심할지 몰라도 나에겐 균형이었어.”
“…….”
“나에게 물질을 뺀 사랑은 불가능해. 예측이 안 되니 불안하고 괴로워. 그러니 당신도 그래 주면 좋겠어. 다른 어떤 것보다 돈이 좋아서, 그래서 날 사랑해 주는 거였으면 좋겠어.”
“…….”
“당신 눈엔 그게 불쌍해 보일지 몰라도, 나는 안전하다고 느낄 거야.”
바이올렛이 윈터의 어두운 눈빛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조용히 물었다.
“왜 그런 생각을 해요? 내가 당신이 불안해할 말이라도 했나요?”
“아이를 바라잖아.”
“바라는 건 괜찮다고, 당신이 그랬잖아요.”
“심지어 노력하잖아.”
그의 상처받은 목소리에 바이올렛이 멈칫했다.
“……어떻게 알았어요?”
“어떻게 몰라. 불을 끄지 않으면 잠자리도 안 하려던 사람이 내 앞에서 직접 옷을 벗는데.”
바이올렛은 이제야 그의 불안함이 어디서 왔는지를 알아차리고, ‘아차’싶은 표정을 지었다.
“그게 불안했군요.”
바이올렛이 그의 팔을 다독이자 윈터가 중얼거렸다.
“한심하게도.”
“한심하지 않아요. 불안한 게 왜 한심하죠? 나도 자주 불안해요.”
“여자는 불안할 상황이 많잖아. 난 아니야.”
“윈터.”
“응.”
바이올렛이 입술이 하얘지도록 힘주어 물었다가, 한숨을 쉬고 말했다.
“당신의 이복동생이 그랬어요. 우리 사이에 아이가 태어나는 게 가능할지도 모른다고. 아주, 아주 적은 확률이지만 가능할 수도 있다고.”
“……어?”
“당신에게 숨겨서 미안해요. 이렇게 불안해할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어요. 정말 미안해요. 난 그냥…… 당신을 불안하게 하고 싶지 않았어요. 내가 틀렸어요.”
“…….”
“이제 당신에게 비밀 같은 거 안 만들게요.”
바이올렛이 달래듯 말하는데 그 말뜻을 한 박자 늦게 이해한 윈터가 벌떡 일어서더니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아, 젠장. 숨을 못 쉬겠네. 그랬어? 확실하대?”
“아뇨, 확실하진 않아요. 그러니까 비밀로 한 거라고요.”
“가능성이 있는 게 확실하냐는 말이었어.”
“좀 더 정확히 알고 싶다면 당신 말대로 알리카에 가 보는 게 좋겠죠.”
윈터가 허공을 보며 숨을 크게 쉬더니 바이올렛을 끌어안았다. 그러고는 손을 덜덜 떨면서도 농담조로 물었다.
“당신 닮아야 되는데, 나 닮으면 어떡하지?”
“이렇게 기대할까 봐 말을 못 한 거예요.”
“은발이거나 회색 눈이면 어떡해.”
그가 제 성격답게 마구잡이로 앞서가 걱정하던 바이올렛이 곧 별 수 없다는 듯 웃었다.
“내가 사랑에 빠지겠죠.”
“…….”
바이올렛의 대꾸에 윈터가 말문이 막혀 있더니 곧 인상을 쓰며 물었다.
“그렇게 말하는 거 어디서 배웠어? 타고난 바람둥이야, 아주.”
“바람둥이요? 내가요?”
“그렇잖아. 어떻게 말 한마디로 내 기분을 이렇게 들었다 놨다 해? 사춘기 꼬마도 이 정도는 아니겠어.”
윈터가 순식간에 만취한 것처럼 벌게진 얼굴을 두 손으로 벅벅 문지르더니 바이올렛의 허리를 두 손으로 붙잡아 벽 쪽으로 그녀의 등을 돌려 기대게 했다. 그러자 바이올렛이 동그래진 눈으로 말했다.
“설마 지금 아이 만들자고 할 건 아니죠?”
“왜 아니야.”
“지금은 아니에요. 가임기는 이틀은 더 있어야…….”
“이틀 가지고 뭐라고 하지 마, 꽉 막힌 공주님.”
금방 기분이 되돌아온 윈터 덕에 바이올렛이 당황해하자 윈터가 협상하듯 말했다.
“아기 만드는 거 아니야. 그냥 하고 싶어서 하는 거야. 그럼 됐어?”
“되긴 뭐가…… 술 마셨잖아요.”
“안 마셨는데.”
“아까 부부침실에서 취한 것처럼 굴었잖아요.”
“아, 그거. 내가 또 그러면 두들겨 패.”
윈터가 그리 말하고는 그녀의 턱을 손으로 감싸 입을 맞췄다. 그렇게 당황해하던 바이올렛이 입맞춤만은 좋은지 곧 살짝 입술을 열었다. 그녀가 키 차이를 극복하기 위해 발꿈치를 들어 가며 제 목을 끌어안자 잠시 키스를 멈춘 윈터가 입술을 댄 채로 키득거렸다.
“바이올렛. 내 몸은 아무 곳이나 만져도 돼.”
“네?”
“맨날 그렇게 보수적인 부분만 끌어안지 않아도 된다고.”
윈터가 그녀의 손을 잡아 풀어 제 등허리에 올렸다.
“어디든 만져. 당신 거니까.”
“……어디든?”
그녀가 의외로 작게 되묻자 윈터가 슬쩍 웃었다.
“어디가 만지고 싶은데?”
그러자 바이올렛이 잠시 고민하더니 윈터를 그대로 밀었다. 그녀가 원하는 대로 뒷걸음을 해 침대에 쓰러져 눕혀진 윈터가 제 배 위에 앉는 바이올렛을 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바이올렛은 특유의 왕족스러운 손놀림으로 윈터의 입술을 부드럽게 누르더니 그 손을 천천히 내려 목덜미를 쓰다듬었다.
그녀의 손길에 윈터가 인상을 쓰며 이를 악물었다. 바이올렛의 손이 목과 어깨에서 한참을 머물더니 천천히 잠옷 위로 미끄러져 질 좋은 바위처럼 단단하며 매끈한 가슴팍을 쓰다듬었다. 그러더니 곧 부끄러운 듯 손을 떼고 말했다.
“나도 이래요?”
“뭐가?”
“이렇게 심하게…… 반응해요?”
그녀가 묻자 윈터가 그제야 긴장을 풀고 웃었다.
“아니.”
“다행이군요.”
“아직은.”
“……아직은?”
“나중엔 모르지. 우리 공주님이 아직 덜 커서.”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릴 하는 거죠? 난 성인이 된 지 5년이나 지났어요.”
“그것 참 어른스럽군.”
윈터가 놀리더니 방어적으로 꼭 모으고 있는 바이올렛의 손을 턱짓했다.
“다 만졌어?”
“다 만졌어요.”
“이제 내 차례인가?”
윈터가 묻자 바이올렛이 입술을 살짝 물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
새벽 늦게 잠들었던 윈터는 몇 시간 지나지 않아 미간을 좁히며 눈을 떴다. 그가 바이올렛의 이마에 손을 올렸다가 급히 그녀를 흔들어 깨웠다.
“바이올렛.”
그녀가 움찔하더니 눈을 뜨고 윈터를 보았다.
“무슨 일이에요?”
“또 열이 나잖아.”
“열이요? 그리고 ‘또’라니요?”
바이올렛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윈터가 벌떡 몸을 일으켜 소리쳤다.
“의사 불러!”
그러자 밖에서 비명이 들려왔다. 곧이어 문이 열리더니 하녀들이 몰려 들어왔다. 다들 기겁을 해서 바이올렛의 상태를 살피자 그녀가 당황한 표정으로 말했다.
“남편이 아픈 걸 수도 있잖나.”
그러자 바이올렛의 체온을 재려고 체온계를 물려 준 젠이 말했다.
“대표님 목소리가 누가 들어도 작은 마님께서 아프신 목소리였어요.”
그러자 옆에서 다른 하녀들이 맞장구쳤다.
“맞아요. 대표님은 작은 마님 일이 아니면 놀라시는 일이 없으니까요.”
바이올렛은 어린아이라도 된 기분이 들었다. 큰오빠가 세상을 떠난 날부터 내내 어른이어야 했던 그녀로서는 낯설고 당황스러운 일이었다.
잠시 후, 의사가 들어와 바이올렛을 진찰하더니 난처한 표정으로 말했다.
“평소처럼 좀 허약하신 상태입니다만, 특별히 문제가 있어 보이진 않습니다.”
“다른 의사 오라고 해.”
윈터가 억지를 부리자 바이올렛이 고개를 저었다.
“괜찮다는 걸요.”
“안 괜찮아.”
윈터는 결국 의사를 쫓아낸 후 다른 의사를 데려왔고, 마찬가지로 특별한 문제가 없다는 것을 반복한 후에야 그는 받아들였다.
의사가 해열제를 주고 떠난 후, 바이올렛이 답답한지 몸을 일으켰다.
“난 환자가 아니라니까. 건강해요.”
“말이 안 되잖아. 어떻게 봐도 비실거리는데.”
“알리카에 가자면서요. 빨리 준비하고 가요, 우리.”
바이올렛이 가뿐한 척 몸을 일으켰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윈터가 한숨을 쉬더니 그녀를 붙잡아 힘으로 눕혔다. 바이올렛이 인상을 쓰자 윈터가 입을 열었다.
“당신 아픈 거 알아. 내가 총에 맞는 날부터 그랬지?”
“…….”
바이올렛이 멈칫했다. 그러자 윈터가 말을 이었다.
“거기에 대해서 물어보지 않기로 약속했잖아. 그래서 물어보지 않았던 거야. 당신이 내가 보는 앞에서 얼굴이 새하얘지는데 입 다물고 있었던 거라고. 약속 때문에.”
“…….”
“지금은 당신이 고집부리니까 할 수 없어. 누워 있어. 내가 마저 준비할게. 예정보다 더 빨리 알리카에 가야겠어.”
“……걱정했어요?”
바이올렛이 미안함과 약간의 무안함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묻자 윈터가 헛웃음 지었다.
“그걸 말이라고.”
“몰랐네요. 견딜 만하다고 생각했어요.”
“얼마나 아파야 견딜 만하지 않은 거라고 생각해?”
“글쎄요. 활동에 지장이 없다면 아픈 건 아니죠.”
“망가졌네, 우리 공주님.”
“망가지다니요?”
바이올렛이 흘기자 윈터가 쓰게 웃었다.
“아픈 걸 잘 못 받아들이잖아. 망가진 거지. 젠장, 그 망할 것들이 얼마나 사람을 몰아갔으면 아직도 이래?”
“그런 게 아니라…….”
“아프다고 칭얼거려 봐.”
윈터가 얼굴을 가까이 하고 말하자 바이올렛이 멈칫했다. 그리고 이내 입을 꾹 다물자 윈터가 그녀의 턱을 부드럽게 잡아들며 말했다.
“그것도 연습해야지.”
“못 해요.”
“난 못 하는 거 맨날 시키잖아.”
윈터의 말이 어느 정도 맞아서 바이올렛은 한숨을 폭 쉬고 별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우물거리더니 살짝 입을 열었다.
“아파요.”
“어디가 아파?”
“열이 나나?”
그녀의 미심쩍은 목소리에 윈터가 결국 실소했다.
“왜 의문문이지?”
“연습 중에는 누구나 서툴러요. 서투른 걸 보고 비웃는 건 의욕을 꺾는단 말이에요.”
“이제 안 웃을게, 다시 해.”
“두통이 조금 있어요.”
“조금은 빼지?”
“두통이 살짝 있어요?”
원래 부드럽게 말하기가 익숙한 바이올렛이 왜 ‘조금’을 빼라고 했는지 헷갈려 단어만 바꾸고 고개를 갸우뚱하자 안 웃으려 했던 윈터는 불시에 웃음이 터졌다. 그가 제 품에 얼굴을 묻고 등을 크게 들썩이며 웃자 바이올렛이 정색하고는 그의 어깨를 밀어냈다.
“안 웃는다며…….”
그녀의 원망에도 윈터는 한참 동안 웃음을 참느라 애를 먹었다.
당신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