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화
곧바로 정원에서 파티가 시작되고, 테이블에는 다양한 과일과 술이 담긴 크리스털 디캔터가 놓였다. 바이올렛은 파티에 참여할 손님들을 맞이하기 위해 문으로 향했다.
베일에 쌓여있던 정원에서 열리는 첫 파티였으므로, 참석자들은 초대를 받았다는 사실만으로도 자부심에 차있었다. 바이올렛은 다정한 인사로 그들을 맞이했다.
손님맞이까지 끝나고서야 바이올렛에게도 여유가 생겼다. 밤이 되어 저택을 둘러싸던 사람들도, 기자들도 돌아갔으나 바이올렛은 잠시 문 앞에 서 있었다.
윈터가 따듯하게 덥힌 와인을 그녀에게 쥐여 주며 물었다.
“왜 여기 있어?”
“아, 따듯하다.”
바이올렛이 두 손으로 따듯한 컵을 감싸 들며 말했다.
“앞으로 어떻게 되려는지 좀 무서워요.”
“무서워?”
“급한 불은 껐다고 생각해요. 과거로 돌아가는 건 이상한 일이니까. 그렇지만 너무 이른 건 아닐까. 내가 너무 결과만 생각한 건 아닌가. 내가 맞게 하고 있는 건가…….”
바이올렛의 혼잣말에 윈터가 픽 웃었다.
“당신이 틀렸으면 이제 와서 어쩌게?”
“그러게 말이에요. 난 어쩌려고 자꾸, 저질러 놓고 걱정하는지 모르겠어요. 한심하게.”
“한심하다고? 내가 살면서 본 한심함과 가장 거리가 먼 사람이 당신…… 아, 솔직히 아직도 브로콜리 밀어 놓을 땐 좀 한심해. 초록색으로 된 것 좀 먹어. 애야?”
갑자기 식습관 잔소리로 빠지자 바이올렛이 멈칫했다.
“먹고 있어요. 정말로.”
“당근은?”
“브로콜리를 먹기로 한 거잖아요. 당근은 먹고 싶을 때만 먹겠어요.”
바이올렛은 당근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아 단호하게 거절했다. 그녀의 아이 같은 면이 귀여워 웃던 윈터는 이내, 어딘지 멋쩍은 목소리로 물었다.
“내가 영향이 있나?”
“네?”
“의석을 귀족이 아닌 사람들에게 준 거. 내가…… 이방인인 게 영향이 있나? 당신이 광산에 갔을 때처럼.”
그는 왠지 자화자찬하는 기분이 들어 뒷목이 화끈거렸으나, 바이올렛은 그렇게 들리지 않았는지 정말로 진지하게 고민을 했다.
“음.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아니, 생각해 보니 확실히 그렇군요.”
“그거 미안해지는군.”
“난 당신 덕에 많은 사람을 만났어요. 그 과정에서 정치에 참여하는 게 귀족뿐이어선 안 된다고 생각하게 된 것뿐이에요. 당신이 미안해할 부분이 어디에 있죠?”
바이올렛은 정말로 의아한지, 밤에도 낮의 바다처럼 반짝거리는 두 눈으로 윈터를 바라보았다. 윈터는 또 다시 어디선가 아득하게 종소리가 들려오는 것을 느끼며 바이올렛의 몸을 정원 방향으로 돌렸다.
“그래, 그건 당신 말이 다 맞는 걸로 하고. 자, 파티를 열어 놓고 여기 있으면 안 되지. 이제부터 회사에서 가져온 초콜릿을 깰 거야. 가자.”
“초콜릿이요?”
“우리 공주님은 장점이 많지만 파티를 재미있게 열어 줄 사람 같진 않거든.”
“나를 별로 못 믿는군요? 말도 없이 비행선을 띄우질 않나…….”
그녀의 말에 윈터가 기가 차다는 듯 말했다.
“별로라니? 전혀 못 믿지.”
이야기하는 사이 두 사람이 정원으로 들어섰다.
윈터가 그녀의 드레스를 턱짓하며 물었다.
“드레스 왜 갈아입었어?”
“젠이 입어 보라고 해서요.”
파티에서 윈터를 욱하게 하고 싶지 않아 바이올렛이 둘러댄 말에 그가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젠이 원했다는 게 완벽히 논리적이었던 탓이었다.
때마침 카닉사 직원 셋이 달걀 모양의 초콜릿이 산더미처럼 실린 수레를 가지고 나타났다.
“초콜릿 안에 선물이 있으니 한 분씩 가져가세요!”
“진주가 들어 있는 초콜릿도 있어요!”
진주가 들어 있다는 소식에 사람들이 즐거워하며 초콜릿을 하나씩 집어 갔다.
바이올렛은 마시는 시늉만 하던 와인을 내려놓고, 초콜릿을 하나 집었다. 그리고 옆에서 윈터가 하듯이 한 부분을 깨물어 보니 그 안에 돌돌 만 종이가 있었다. 그 종이를 열어 보니 수도 호텔 숙박권이었다.
“내 아내에겐 그것보단 초콜릿이 가치가 있겠군.”
윈터는 못마땅해 했지만 바이올렛은 기쁜 표정이었다.
“하지만 선물 중에는 좋은 선물이죠?”
“값어치로 따지면 높은 편이지.”
윈터가 대꾸하는데 여기저기서 즐거운 탄성이 들렸다.
“수도 호텔 식사권이네요!”
“내 것도 식사…… 어머, 이건 숙박권이군요?”
식사권이나 숙박권, 또는 호텔에서 어메니티로 계약하고 있는 명가의 향수 교환권도 있었다.
다들 무엇이 나오든 행복해 웃음이 사라지질 않았다. 그때, 오늘 겨우 두 번째 파티라 단단히 얼어 있던 소녀가 저도 모르게 소리쳤다.
“여, 여기 진주 반지가!”
그러자 모든 사람들이 소녀에게 몰려들었다.
“어머, 예뻐라…….”
“보증서도 같이 들어 있네요!”
갑자기 주목을 받게 된 소녀가 부끄러워하며 진주 반지를 끼워 보았다. 여성 평균 사이즈로 만든 반지는 소녀의 약지에 딱 맞았다.
모두가 기뻐하는 모습에 바이올렛이 인정하고 미소를 지었다.
“고마워요. 아까 폭죽 준비해준 것도요. 놀랐어요.”
“비행선도 사실 고맙지?”
“그건 아니에요.”
“이해가 안 가네. 당신은 비행선을 좋아하잖아.”
윈터가 태연한 얼굴로 말했다.
바이올렛은 즐거운 얼굴로 사람들 사이를 다니며 윈터를 소개해 주었다. 바이올렛의 사촌 안젤라가 반가워하는 얼굴로 윈터에게 인사했다.
“윈터 경, 소문대로 키가 아주 크시네요.”
“별게 다 소문이 나는군요.”
“둘이 참…… 어울리네요.”
안젤라는 그렇게 말하고 살짝 바이올렛의 눈치를 살폈다.
그녀는 의석을 내주는 일에 있어서 무조건적으로 바이올렛을 지지한 사람 중 하나지만, 그녀의 머릿속에는 여전히 라크라운드의 공주를 이방인과 어울린다고 말해도 무례가 아닌가, 하는 걱정이 있었던 것이다.
윈터는 그걸 알았지만 어울린다 말하는 것조차 명문귀족들에겐 어려울 일이라는 것 또한 알았다. 바이올렛은 안젤라의 손을 살짝 쥐고 물었다.
“정말? 잘 어울려?”
“응? 응, 잘 어울리지.”
“그런 말을 별로 못 들어 봐서 그런가, 기쁘네. 고마워, 앤지.”
바이올렛이 애칭을 부르며 기뻐하자 안젤라가 안도해 미소를 지었다. 바이올렛이 벤자민을 가리키며 말했다.
“두 사람도 아주 잘 어울려요. 하지만 회의 중에 그런 행동은 자중해주셨으면 해요. 두 분 다.”
“예, 예? 보, 보셨습니까? 그러니까, 앤지! 내가 보인다고 했잖아요!”
벤자민이 얼굴이 확 붉어져 말하자 안젤라가 ‘어머’ 하고 부끄러워했다.
손님들에게 인사를 마치고, 그리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 바이올렛과 윈터는 저택으로 돌아왔다. 바이올렛이 긴 회의에 지쳐있는 걸 안 윈터가 반강제로 데리고 들어온 탓이었다.
바이올렛의 방이 정원과 연결되어 있어 정원 파티 중에는 다소 시끄러웠으므로 그들은 가장 안쪽, 이 저택에 온 이후 거의 사용하지 않은 부부 침실로 들어갔다.
느긋하게 잠자리에 들 준비를 한 뒤, 두 사람이 지쳐서 침대에 풀썩 누웠다.
윈터가 바이올렛의 머리칼을 만지작거리며 물었다.
“당신 그 사촌 부부와 점심이라도 같이 할까? 친해 보이던데.”
“웬일이에요? 마음에 들어요?”
“그럭저럭.”
윈터는 미혼 남자를 제외한 바이올렛의 주변 사람들에게 굉장히 후한 편이었다. 자기도 같이 친해지려고 드는 것이 보였다. 바이올렛은 그의 그런 면이 귀엽다고 생각했다.
그가 말을 이었다.
“그나저나 술을 아예 안마시더군. 따듯한 와인조차도.”
“당분간은 술을 안 마시려고요.”
바이올렛의 차분한 대답에 윈터가 잠시 생각하다 물었다.
“왜?”
“그냥…… 별로 마시고 싶지 않아요.”
그녀의 확고함에 윈터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윈터는 저도 모르게 머릿속으로 바이올렛이 저에게 특별히 유혹을 하던 날들을 떠올리고 있었다.
꽉 막혔던 그녀가 유혹을 시도할 때마다 윈터의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컸으므로 당연히 전부 기억할 수 있었다.
“윈터?”
그는 날짜를 계산해 보느라 바이올렛이 저를 불렀음에도 대답하지 않았다. 몇 달 되지도 않으니 계산할 것도 없었다.
아내는 아이를 가질 생각으로 일정한 주기마다 시도를 하고 있었다.
“윈터, 표정이 왜 그래요?”
바이올렛이 팔을 감싸고 나서야 윈터가 막막한 얼굴로 그녀를 보았다.
그녀가 희망을 갖는 것까지 뭐라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윈터는 바이올렛이 돌아오리라는 불투명한 희망을 가지고 1년을 버텼었다. 그리고 그것이 영원히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되는 순간 바로 모든 것을 포기했었다.
지금, 아내의 희망을 보고 나니 그의 머릿속이 새카매졌다. 그는 두려움으로 쿵쾅거리기 시작하는 마음을 필사적으로 붙잡고 바이올렛의 손을 잡아 제 쪽으로 당겼다.
바짝 달라붙어 오는 그의 뜨거운 몸에 바이올렛이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의 몸이 침대에 눕혀지고, 윈터가 침대에 한쪽 무릎을 걸쳤다.
“왜 그래요, 윈터.”
아이가 그렇게 필요해? 내가 영원히 아이를 주지 못하면 어떻게 할 거지?
희망이 사라지면, 그게 불가능하다면. 당신은 날 포기하게 될까.
윈터가 저도 모르게 바이올렛의 양 손목을 움켜쥐고는 그녀의 머리 위에 잡아 눌렀다. 그의 커다란 한 손에 손목 두 개가 다 쥐여 잡혔다. 바이올렛은 그가 저를 위협하는 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으므로, 그저 평소와 다른 행동을 하는 게 이상한지 손목을 비틀었다.
“윈터, 취했어요?”
“…….”
“이거 놓고 대답 좀 해요.”
살짝 그녀의 언성이 높아지자 윈터가 놀라서 손을 놓고 몸을 일으켰다. 그러더니 무척 당황한 얼굴로 제 목을 슥슥 문지르고 뒷걸음질 쳤다.
“미안.”
“뭐가 미안하다는 거예요?”
“어…… 몸이 안 좋아. 당신한테 옮길 것 같으니 내 방으로 가지.”
“몸이 안 좋으면 더더욱 같이 있어요.”
“혼자 있고 싶어.”
윈터가 말을 마치고는 도망치듯 그녀의 방을 나왔다.
그리고 혹시 바이올렛이 따라올까 멈추지 못하고 제 침실로 달려 들어갔다.
역시 이건 사랑이 아닐 것이다. 그녀를 믿지 못해 툭하면 떠나는 상상을 하고, 그럴 때마다 온몸이 차갑게 식어서 지금부터 미리 가둬 놔야 하는 건 아닐까 불안해했다.
문에 기대 주저앉은 윈터가 두 손을 꽉 힘주어 쥐며 중얼거렸다.
“아내는 날 떠나지 않아. 겨우 아이 때문에 떠나지는 않을 거야.”
그는 그렇게 중얼거렸으나 라크라운드에서 아이가 생기지 않는 것은 매우 큰 이혼 사유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심지어는 오히려 서로가 맞지 않는 것 아니냐며 주변 사람들까지 이혼을 종용하는 게 이곳의 분위기였다.
그는 사막에 쓰러진 것처럼 식도 전체가 타들어 가는 기분을 느꼈다. 그는 지극히 현실적인 사람이었고,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것을 성장하는 동안 온 몸으로 배워왔다. 그러나 지금, 그는 진심으로 기적을 바랐다.
윈터는 발작하듯 급격히 거칠어지는 숨을 진정하기 어려웠다. 그가 몇 번이고 크게 숨을 내쉬어도 답답하게 느껴져 괴로워할 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윈터.”
문 뒤에서 바이올렛의 목소리가 들렸다. 윈터가 문에 머리를 기대고 대답하지 않으니 바이올렛이 말을 이었다.
“갑자기…… 걱정이 돼요.”
“걱정? 무슨 걱정?”
윈터가 가까스로 목소리를 가다듬고 되묻자 바이올렛이 잠시 생각하다 입을 열었다.
“전구를 보니까요. 이제 촛대 만드는 사람들은 뭘 해야 하나.”
그녀의 실없는 소리에 괴로워하던 윈터의 눈꼬리가 조금 휘어졌다.
“그걸 왜 당신이 걱정해. 자기 앞가림은 자기가 해야지. 돈 버는 게 뭐가 어렵다고.”
“해결이 아니라, 걱정만 하려고요. 같이 걱정해줄래요?”
그녀다운 핑계에 윈터가 저도 모르게 웃었으나 숨은 더더욱 곤란해졌다.
당신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