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화
에쉬는 표정이 있는 대로 일그러졌으나, 이것은 명백한 제 실수였다.
가문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선왕의 적녀인 바이올렛에게 와인을 뿌린 것은 로렌스가 전체에 대한 모욕이었다.
에쉬가 제 편을 한 번 훑어본 후, 굳은 표정으로 휙 돌아서 버렸다.
그가 사라지기 무섭게 사방에서 신음 소리가 들리고, 안젤라가 급하게 벤자민의 포켓에서 손수건을 뽑아 달려왔다.
“바이올렛!”
“아, 고마워. 안젤라.”
바이올렛이 눈으로 떨어지는 와인에 눈을 뜨지 못하고 소리가 나는 쪽을 보았다. 안젤라가 손수건으로 얼굴을 닦아 주는 사이 아론이 소리쳤다.
“집사! 안주인을 모셔주게!”
그의 말을 듣자마자 룰루가 달려왔다. 그녀는 바이올렛의 머리칼과 옷을 적신 와인에 기겁을 해서 하인 하나에게 목욕물 준비를 전하라 부탁한 후 바이올렛을 살폈다.
“어, 어서 씻으셔야겠어요. 아이고, 이걸 어쩜 좋아요…….”
“괜찮네. 고작 와인인걸?”
“고작 와인은요! 이거 큰일 났네. 젠이 알면 울 텐데요. 아! 대표님 아시면 집이 발칵 뒤집어질 건데!”
“아…… 남편에겐 비밀로 해야겠네.”
이야기하며 바이올렛이 룰루를 따라서 욕실로 향했다.
룰루가 바로 사람을 보낸 덕에 끓인 물을 가져다 욕조 물 온도를 맞추던 젠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 이게 뭐예요, 작은 마님?”
“별것 아니야.”
“뭐가 별거 아니에요! 세상에, 도대체 누가 우리 귀한 작은 마님한테!”
젠이 정말로 울기 직전이라 룰루가 손으로는 바쁘게 바이올렛의 머리칼을 고정한 핀을 뽑고 눈으로는 젠을 달래느라 정신이 없었다.
“방금 내가 보니까 에쉬 도련님은 벌써 쫓겨나셨더라고.”
“진짜 못됐어요. 못돼도 너무 못됐어요! 어떻게 우리 작은 마님이랑 남매일 수가 있어요. 기분 나빠요! 양심이 있으면 알아서 얼굴도 안 닮게 조심했어야죠!”
젠이 울먹울먹거리며 말하자 바이올렛이 당황해서 그녀를 토닥였다.
“그래, 그래. 정말 못됐구나. 내가 나중에 크게 화낼게.”
“정말이죠? 꼭이에요…….”
“그러엄. 꼭 화낼 거야. 엄청 크게.”
바이올렛이 장담한 덕에 겨우 젠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룰루가 안쓰러워하더니 핀을 내려놓고 말했다.
“전 그럼 가서 상황 보고 올게요.”
“응. 고맙네, 룰루.”
룰루가 떠나고, 바이올렛이 욕조에 들어가자 젠이 여전히 눈물이 그렁그렁해서 그녀의 금발을 감기기 시작했다.
“그래도 유일하게 좋은 점은 있어요.”
“그러니?”
바이올렛이 안심해 묻자 젠이 말했다.
“저 드레스는 근사하긴 한데, 무도회 드레스는 다른 걸 입으셨으면 했거든요. 그 진한 다홍색이요.”
“아, 그거 참 예쁘던데. 그래도 너무 화사하지 않을까?”
“하나도요. 다들 화려하게 입으셨던데요, 뭐. 그리고 밤에 파티 시작되면 가문분들의 손님들도 몇 분씩 더 오시잖아요. 소문 속 저택의 첫 정원 파티니 다들 대단하게 차려입고 올걸요?”
“많이 기대할까? 작은 파티인데 걱정이구나.”
바이올렛이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제가 주도하는 일들을 여러 번 곱씹는 사람이었으므로, 담담한 척 있었을 뿐 손발이 긴장으로 차갑게 얼어 있었다. 모여든 사람들도, 회의를 이끄는 것도 제가 옳은 일을 하고 있는 것인지 반복해서 고민했다.
그래서인지 운 좋게 이렇게 욕조에 누워 있게 된 것이 나쁘지만도 않게 느껴졌다. 게다가 에쉬까지 쫓겨났으니 와인 정도는 맞아줄 수 있었다.
와인을 닦아 내고 머리칼을 잘 말린 후 젠이 바라던 다홍색 드레스를 차려입었다. 여러 겹으로 이루어진 화려한 드레스에 늘어뜨린 머리칼은 한 갈래로 땋아 한쪽 어깨로 내리고 여러 개의 보석을 사이사이 끼워 넣어 장식했다.
훌쩍거리다 말고 치장에 집중했던 젠이 한참이 지나서야 바이올렛에게서 손을 뗐다. 젠이 헤헤 웃으며 말했다.
“급하게 한 것치곤 아주 마음에 들어요.”
“정말이네. 젠은 정말 솜씨가 좋구나. 고마워.”
바이올렛이 거울을 보며 즐거운 얼굴로 말하고는 다시 정원으로 나가려 발코니에 섰다. 그녀를 에스코트하기 위해 기다리던 아론이 계단을 다섯 개 정도만 올라와 말했다.
“바이올렛 누님, 회의가 끝났습니다.”
“그랬니? 중간에 일어나 미안하구나.”
“사과는 누님께서 받으셔야지요. 전 사는 동안…… 에쉬 형님의 좋은 면만 보려고 애쓰고 살았던 것 같아요.”
그의 말에 바이올렛이 저도 모르게 웃었다. 로렌스가에서 태어난 이상 왕위 계승자를 신뢰하는 것은 의무에 가까웠으리라는 것을 그녀 자신이 가장 잘 알았다.
“이제 열일곱인데, 사는 동안이라는 말을 하니 재미있구나.”
“그러는 누님은 몇 살이나 더 되셨다고요?”
아론이 받아치고는 에스코트를 하기 위해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바이올렛이 미소를 지으며 계단을 내려가 그의 손에 제 손을 얹었다.
바이올렛이 계단을 내려가니 엘라가 서늘하게까지 느껴지는 냉정한 얼굴로 말했다.
“네 뜻대로 된 것 같구나, 바이올렛.”
“제 대신 회의를 진행해 주셨나요?”
“남편의 뜻이니까.”
“제 뜻이기도 하고요.”
바이올렛이 나지막이 덧붙였다.
아론이 인사하고 먼저 떠난 후, 말문이 막혀 있던 엘라가 다시 입을 열었다.
“계승식 이후로, 생각을 많이 해 봤는데.”
“무슨 생각이요?”
“도대체 어떻게 에쉬가 너에게 폭력을 휘두를 수 있는지. 로렌스가에는 그런 사내가 없지 않니.”
그녀의 말에 바이올렛이 말없이 미소 지었다. 엘라가 말을 이었다.
“생각하다 보니, 그 생각만 하고 있더구나. 그 애가 왜 그랬을까.”
“…….”
“네 기분이 어땠을까. 그건 한참 뒤에나 궁금해지는 걸 보고 내가 너희를 그렇게 키웠구나, 싶더구나.”
“……그러셨군요.”
“이제는 알았으니 네 걱정부터 할게. 이제는 좀 더 자주 만나서 이야기도 나누고 하지 않으련? 같이 여행이라도 가 보면 좋겠구나.”
엘라의 말에 바이올렛이 어머니를 보았다. 그리고 언젠가, 윈터에게 몇 번이고 했던 말을 어머니에게도 전했다.
“늦은 것 같아요, 어머니. 세상에는 타이밍이라는 것이 있잖아요.”
“늦다니. 너에 비해선 적지만 나도 아직 살날이 많이 남았단다.”
“그건 맞는 말씀이지만. 늦었다는 건 같아요. 남편의 혈통이 아니었다면…… 어머니는 아마 제가 고작 남부 생활도 못 견뎌 포기했다고 생각하셨을 거예요. 슬퍼하셨겠지만…… 그래도.”
“그게 무슨 불길한 소리니?”
늦었다고는 말했으나, 바이올렛은 잠시 어린 아이 같은 얼굴이 되어 투정하듯 말했다.
“그때는 정말로 힘들었어요.”
엘라가 한숨을 쉬었다.
“그래. 세상에 힘들지 않은 삶이 어디 있겠니?”
그녀의 말에 바이올렛이 웃었다. 그러고는 고개를 조금 숙이고 자신의 테이블로 돌아갔다.
멈춰 선 엘라는 잠시 생각하다가 지난번에 벽장 이야기를 해 준 적 있던 플립을 발견해 그의 팔을 붙잡았다.
“자네.”
“예.”
플립이 곧장 고개를 숙이자 엘라가 물었다.
“설마 바이올렛이…… 뭐, 나쁜 마음이라도 먹은 적이 있는 겐가?”
“무슨 말씀이신지…….”
“하도 힘들었다 하기에. 물론 벽장 일이 수치스럽고 괴로웠겠지만 그 애는 단단한 아이니까.”
그녀의 말에 뜸을 들인 플립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무슨 대답이 그렇게 간결한가. 질문은 길었는데.”
“작은 마님께서 계시던 별장에서 탄알이 없어진 적이 있습니다. 그날 스스로를 해하셨다고 작은 마님께 들었습니다.”
그 말에 엘라가 저도 모르게 웃었다. 상황을 완전히 부정하려는 심리에서 나온 웃음이었다.
“자네 무슨 꿈이라도 꾼 것 아닌가? 저리 멀쩡히 돌아다니는 아이에게 어떻게 그런 소릴.”
“카닉 일족의 혈통 중에 배우자와 몸이 바뀌는 경우가 있는 모양입니다. 그날따라 어쩐지 작은 마님 행동이 다르다고 느꼈는데, 아마 몸이 바뀌셨던 것 같습니다.”
“…….”
“벽장에 갇히셨던 그날이었습니다.”
엘라의 얼굴이 하얘졌다가, 곧 고상한 얼굴로 돌아와 말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말게. 죽으려 했는데 죽지 않고 몸이 바뀌기라도 했다는 겐가? 아무리 내가 이방인을 잘 모른다고 아무 말이나 믿을까?”
그러자 플립이 고개를 푹 숙였다.
“죄송합니다.”
다른 변명도, 보충설명도 없었다. 엘라가 비틀거리자 플립이 곧바로 부축하며 물었다.
“대표님께서 마련해 두신 방이 있습니다. 잠시 쉬시겠습니까?”
“그래…… 쉬었다 먼저 가야겠네. 바이올렛에게 먼저 떠난다고 말해 주게.”
“예.”
플립이 정중히 대답하고 근처에 있던 하녀를 손짓해 불렀다.
“부인을 침실로 모셔 주겠어?”
“응. 그럴게, 플립.”
하녀가 대답하고 엘라를 부축했다. 얼굴이 하얗게 질린 엘라는 제가 침실로 가고 있는 것도 모를 정도로 넋이 나가 있었다.
그녀는 혹여나 제 아내가 어머니를 모셔 오는 날이 있을까 하여 윈터가 비워 둔 화려한 침실 침대에 누웠다.
그녀는 믿을 수 없는 플립의 말을 여러 번 곱씹었다. 그리고 넋이 나가 거칠게 호흡을 떨며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딸을 사랑했다.
단 한 순간도 그러지 않았던 적이 없었다.
다만 더 중요하게 여겼던 것이 왕위 계승자인 에쉬였을 뿐이었다.
큰아들이 어려서 세상을 떠나 주지 못했던 사랑까지 전부 다 그 애에게 주었다. 그리운 큰아들을 떠올리면 둘째 아들을 잃지 말아야겠다는 욕심이 생겼다.
딸은 늘 제가 알아서 무엇이든 잘하는 아이로 알았다. 그렇게 알고 에쉬를 바라보고 있는 사이, 바이올렛은 절벽에 서서 손을 흔들고 있었다.
제 어머니가 한 번이라도 돌아봐 주었다면 그 애가 계속 그곳에 있었을까.
엘라는 바이올렛이 남부에서 저를 만나러 왔던 날을 떠올렸다.
그럴 리가 없었다. 그렇게 몰려있는데도 어미인 제가 몰랐을 리가 없다. 정말, 몰랐을 리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고립된 것이 힘들다고 말하던 바이올렛의 표정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날, 아들 걱정에 바이올렛을 염려하지 않았던 것이다.
“늦었구나.”
엘라가 두 손으로 제 얼굴을 감싸며 울음을 터트렸다.
딸아이가 사무치게 가여웠다.
*
바이올렛이 테이블에 도착했을 때, 그곳은 회의가 끝났다는 소식에 몰려 들어온 기자들로 둘러싸여 있었다. 플립에게 어머니가 쉬다가 먼저 떠나리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인 후, 테이블 앞에 섰다.
“회의가 끝나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래, 끝났단다.”
메리가 못마땅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바이올렛이 미소를 지었다.
“어려운 자리에 초대드려 죄송하고, 감사합니다. 결정이 나는 대로 바로 파티를 시작할 겁니다. 들으셨다시피 전 아직 파티를 주최하는 데 미숙해 부족한 점이 있으실 겁니다. 고민 없이 저에게 말해 주시면 제가…… 아니, 제 남편이 어떻게든 구해 볼 겁니다. 못 구하는 게 없는 사람이니.”
그녀의 가벼운 농담에 다행히 사람들이 유쾌하게 웃었다.
바이올렛이 가만히 모으고 있던 두 손 중 오른손을 들며 말했다.
“그럼 로렌스가의 의석을 선출직으로 내놓는 것에 찬성하시는 분들은 손을 들어 주시기 바랍니다.”
그녀의 말이 끝나자 하나씩 손을 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지막 제프까지, 로렌스가 사람 전원이 손을 들었다.
바이올렛은 그 모습을 잠시 바라보았고, 그사이 급하게 기사를 적은 기자 몇이 전속력으로 달려 나가며 가벼운 소란이 일었다.
“로렌스가는 의석 세 개를 포기하는 것으로 결론이 났군요. 그럼 나머지 결정은 의회에 맡기고, 이제부터…… 편안히 파티를 즐겨 주시면 됩니다. 늦은 시간까지 회의에 참석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바이올렛이 말을 마치자 곧 기다렸다는 듯이 어두운 밤의 정원, 나무에 감아 두었던 전구에 전부 불이 켜졌다.
“어머나!”
생각보다 너무도 밝은 빛에 남아 있던 기자들이며 로렌스가 사람들 모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 불빛에 놀라움이 다 끝나기도 전에, 하늘로 폭죽이 수놓였다. 누가 보아도 확연히 파티가 시작되었다는 신호탄이었다.
곧 테이블 위가 근사한 파티 음식들로 채워지고, 사용인들이 샴페인 잔을 서빙 했다.
바이올렛은 제가 준비한 적 없는 불꽃놀이를 놀란 눈으로 돌아보고 있었다. 그때, 그녀의 허리가 가볍게 팔로 감싸였다.
“밖에 사람들이 좋아서 난리가 났더군. 몰랐는데 되게 기대했나 봐. 의석.”
윈터의 목소리가 들리는 순간 바이올렛은 몸에 힘이 풀리는 것을 느꼈다.
윈터가 떨림마저 느껴지는 바이올렛을 부축하며 핀잔했다.
“하여튼 우리 공주님은 이게 문제야. 체력 좀 남겨 놓고 다녀.”
“당신은 정말 인사부터 하기를 싫어하는 사람이네요.”
“당신처럼 성실하게 잔소리하는 사람도 없지. 보통은 포기할 텐데.”
“이런 간단한 인사도 인사치레라고 생각하나요?”
“나 같은 놈은 당신밖에 못 고칠 거라는 뜻이었는데?”
윈터가 놀리듯이 말했다.
당신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