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화
“왕족 모욕은 중죄야.”
에쉬가 참다못해 말하자 윈터가 대꾸했다.
“그러니까, 자넨 왕족이 아니래도?”
그렇게 실컷 에쉬를 약 올리던 윈터는 뒤늦게 주변의 웅성거림을 느끼고 움찔했다. 습관적으로 먼저 시계를 살피고 다급하게 고개를 든 그가 중얼거렸다.
“젠장, 취소했어야 하는데.”
그가 서둘러 바이올렛에게 달려갔다. 그러나 이미 늦었는지 그녀는 벌써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 높지 않은 하늘에 무인 비행선이 느리게 지나가고 있었다.
<바이올렛 부인의 첫 번째 공식 행사(※로렌스 가문 회의)를 카닉 비행 산업에서 축하드립니다.>
바이올렛은 비행선을 부끄러워하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다행히 여기 어느 누구도 그것을 부끄러움으로 여기는 이는 없었고, 다들 놀라움과 감격을 느끼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녀가 느끼는 감정이 바뀌는 것은 아니었다.
윈터가 한 소리 듣겠다 싶어 아내의 표정을 살폈다. 바이올렛이 의외로 담담한 것이 더 무서워 마른침을 꿀꺽 삼키는데 그녀가 입을 열었다.
“참 수치스럽군요.”
바이올렛의 말에 윈터가 곧 뻔뻔한 표정으로 말했다.
“회사 홍보용이야. 당신 위해서 띄운 거 아니거든?”
“아.”
“앞이 중요한 게 아니라 뒤가 중요한 거야. ‘카닉 비행 사업에서’부터가 본론이지.”
“그렇군요.”
여전히 가라앉아 있는 바이올렛의 눈빛과 목소리에 윈터가 인상을 쓰더니 투덜거렸다.
“내 비행선 내가 띄우고 싶은 날 띄우겠다는데 뭐.”
“그렇군요. 그럼 내 이름은 지워 주겠어요?”
“…….”
윈터가 다시 입을 다물었다. 고개를 들어 한 번 더 비행선을 본 바이올렛은 이내 황당함에 작게나마 웃음소리를 냈다. 저 최신 기술과 거대 자본 덕에 회의에 대한 긴장감이 잠시 잊히기는 했다.
윈터도 그 미소를 보았으나 여기선 입 다물고 있는 게 맞으리라 생각해 눈치껏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바이올렛이 휙 윈터를 흘기며 말했다.
“빨리 치우고 나가요.”
“그럴 생각이었어.”
“회의는 10시 정도면 끝날 거예요.”
“그래, 10시. 기념 파티 할 때 올게. 오늘은 좀 실수한 거야. 원래 이런 실수는 강한 충성심에서 비롯되더군.”
윈터가 능청을 떨다가 바이올렛의 쌀쌀한 시선에 헛기침을 하고 서둘러 돌아 나섰다.
비행선에 놀라워하던 로렌스가 사람들이 모두 안으로 들어가고, 저택을 나선 윈터가 앞에 여전히 모여서 큰 소리로 환호하는 사람들을 보며 하옐에게 말했다.
“밥이라도 좀 사 줘. 오느라 고생했잖아.”
“아뇨. 이글린한테 들었는데요, 작은 마님께서 차비도 못 주게 하셨다는데요. 정치적인 활동에 돈을 지급하면 안 된다면서.”
“인간이 급진적이면서 동시에 고지식할 수가 있나? 같이 살고 있는데 아직도 믿기지가 않네.”
윈터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앞에 모여든 라크라운드 시민들은 오늘 의석이 생기는지 확인할 때까지 돌아가지 않을 생각인 듯했다.
기자들 역시 마찬가지로 그 앞에 아예 자리를 펴고 앉아서 도시락까지 먹어 가며 대기 중이었다.
윈터가 중얼거렸다.
“이건 공주님이라 가능한가. 나라를 뒤흔드는 일을 하면서 겁도 안 내고.”
“대표님.”
“뭐.”
“자랑이 하고 싶으신 거면 그냥 솔직하게 하시죠? 그렇게 빙빙 돌려 말하지 말고.”
하옐의 지적에 윈터가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그러더니 파티 때 입을 턱시도를 챙기게 한 후 곧장 회사로 가기 위해 마차에 올랐다.
그때, 저 멀리서 달려온 이글린이 다급하게 문을 붙잡았다.
“대표님! 저도 회사로 복귀하겠습니다!”
그러자 윈터가 대답 없이 손을 내밀었다. 같이 타고 있던 하옐이 고개를 빼꼼 내밀고 물었다.
“이번엔 뭘 가져다 바치고 복귀할 거야, 이글린?”
가져온 서류를 건넨 이글린이 대꾸 없이 뒷짐을 진 채 어깨를 으쓱였다. 그것을 확인한 윈터가 하옐에게 서류를 넘기고 이글린에게 말했다.
“복귀해.”
“넵. 제가 먼저 달려가서 의자 덥혀 놓겠습니다.”
이글린이 꾸벅 고개 숙여 인사하더니 문을 닫고 신이 나서 달려갔다. 서류를 받아 든 하옐이 차근차근 넘겨 보더니 기가 차다는 듯 말했다.
“헤스턴가 마리얀 아가씨 진술과 칼슨 로우 진술이 만나는 곳에서 활동하는 마약 거래상들을 알아 왔네요. 도대체 어디서 알아 오는 거죠?”
“묻지 마. 알면 거기부터 불법이야.”
“그건 저도 알지만요……. 게다가 대표님이 프러포즈 때 쓰실 반지요. 필리체 가문에서 절대 안 파는 거라고 하지 않았나요?”
“그러니까 알면 불법이라고.”
하옐이 한숨을 쉬며 다시 서류를 덮었다.
*
평소라면 윈터가 성질을 냈겠지만, 오늘만큼은 플립이 사용인들에게 왕족 응대를 지시하고 있었으므로 그 응대가 매우 뛰어났다.
사용인들을 따라서 집 안을 통과해 정원이 있는 반대쪽 문으로 나가는 사이, 로렌스 가문 사람들은 내내 감탄을 금치 못했다.
집 안 곳곳 집사인 룰루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고, 손길이 닿은 곳마다 편안하기 그지없었다.
정원은 온갖 보석을 뿌려 놓은 것처럼 눈부시게 단풍이 물들어 있었다.
가을의 하얀 꽃들이 드넓은 정원 사방에 피어 있어 눈이라도 내린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여기저기 놓인 근사한 형태의 화로들 덕에 훈훈함이 감돌았다.
“이렇게 넓고 아름다운 정원은 처음이군요.”
“그런데도 이제야 초대하다니! 바이올렛, 너무한 거 아니니?”
가문 사람들의 성화에 바이올렛이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특별히 파티를 열거나 사람을 초대하는 것이 싫었던 것은 아니었다. 다만 남부에서 3년 동안 느낀 아픔이 마음 한구석에 남아 있기도 했고, 해야 할 일이 있는데도 파티를 열 정도로 파티를 좋아하는 건 아니기도 했다.
그녀는 오늘 이 회의에 참여한 어머니를 보았다. 왕실이 해체된 이후부터 아들에게 힘을 실어 주기 위해 친정이며 막대한 재산을 가진 대귀족, 필리체의 성을 쓰고 있기는 했으나, 바이올렛처럼 그녀 역시 이 자리에 참여할 자격이 충분했다.
회의는 식사 후 진행될 예정이었는데, 주방장의 비밀 소스를 곁들인 화이트 아스파라거스를 시작으로 이 계절에만 먹을 수 있는 북서부 송로 요리며 마지막에 나온 약한 불로 구운 참치 요리까지 감탄이 사라질 줄 몰랐다.
식사가 끝난 후 테이블은 순식간에 온갖 종류의 디저트로 가득 찼고, 사용인들이 완전히 물러난 후에야 회의가 시작되었다.
이미 이야기는 어느 정도 진행된 후였으나 반대가 되는 양쪽의 의견 차이는 좁혀지지 않았다.
바이올렛의 사촌인 제프가 말했다.
“다 좋습니다. 좋은데요, 애초에 우리 가문에 피해가 되는 일을 왜 해야 하는 겁니까?”
그러자 맞은편에 있던 바이올렛의 작은할머니, 메리가 말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왕실을 해체한 것만으로도 로렌스 가문은 할 일을 다 했어.”
그러자 그녀의 오빠 되는 안토니가 말했다.
“그것과는 별개지, 메리. 그건 에쉬의 선택이었고, 이건 시대의 흐름이니까.”
“시대가 변해도 지켜야 하는 게 있지.”
메리의 말에 바이올렛의 사촌인 안젤라의 남편, 왕족인 아내를 따라 로렌스가의 성을 쓰는 벤자민이 아내의 귀에 소곤거렸다.
감히 로렌스 가문 큰 어른의 말에 바로 반박하지 못한 벤자민의 말을 안젤라가 제 의견을 섞어 말했다.
“하지만 말이에요. 만약에 시대가 변해도 지켜야 할 가치가 있다면, 그건 로렌스가의 정의이지, 권위가 아닌 것 같아요. 이 말 맞지, 벤?”
그녀의 말에 벤자민이 고개를 끄덕끄덕거리자 안젤라가 정리 잘 했다는 듯 몰래 엉덩이를 톡톡 쳤다.
벤자민은 화들짝 놀라며 남들 보는 데서 왜 그러냐는 듯이 소곤거렸다. 예전이었다면 당황했을 그들의 행동에 바이올렛은 살짝 부러움이 들었다.
‘남편도 로렌스가 사람이 되었다면 여기에 있어 줬을걸.’
그녀가 생각하며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그러자 침묵하던 에쉬가 입을 열었다.
“안젤라. 지금 로렌스가에 지킬 권위가 남아 있다고 생각해? 우리에겐 이제 아무것도 없어. 이대로 가다간 윈터 블루밍같이 돈밖에 모르는 사업가들만이 득세하는 세상이 올 거다. 그걸 막는 건 명문가의 일이야.”
제 남편이 공격당하자 바이올렛이 잔을 내려놓고 말했다.
“에쉬, 남을 비하하지 않고는 말을 할 수 없어?”
“뭐?”
에쉬가 되묻자 그들의 고모인 해리엇이 대신 대답했다.
“그래, 에쉬. 그리고 윈터 경께 경의 칭호를 내린 건 선왕 폐하셨다. 존중했으면 좋겠구나.”
“왜 고모님까지 바이올렛의 편을 드시는 겁니까? 아무리 세상이 변했다고 해도 라크라운드가 그런 속물들로 득실거린다면 로렌스가는 후에 그 꼴을 손 놓고 보고 있었던 원흉으로 남을 겁니다.”
그의 말에 바이올렛이 살짝 미간을 좁혔다.
에쉬는 연신 윈터의 이야기로 자신을 공격하고 있었다. 그녀는 그것을 비열하다고 여겼다.
게다가 제가 공격받는 일이 결국 이 회의 결과와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었다. 이것은 저와 에쉬의 가문 내 위세 문제이기도 했다.
에쉬의 말을 끝으로 다시 말다툼이 시작되었다. 다투는 와중에도 에쉬는 바이올렛을 볼 때마다 울분이 치밀었다.
물론 그녀가 발의하고 회의를 주최했다지만 지금처럼 바이올렛이 가주인 양 그녀에게 눈빛으로 발언권을 구하며 진행될 필요는 없었다.
아무도 신경 쓰지 않으리라 여겼던 그 소작료가 기사화되던 날부터 묘하게 제 입지가 좁아진 것이 느껴졌다.
거기에 이 일이 커져서 밖에 어마어마한 구경꾼과 언론이 모여들었으니 에쉬를 지지하고 그에게서 떨어지는 부속물들을 얻어 가던 사람들도 눈치를 살피게 되었다.
이제 겨우 열일곱이 된 사촌, 아론이 그녀에게 물었다.
“바이올렛 누님. 누님께서는 어째서 로렌스 가문에 손해가 가는 선택을 하게 되신 건지요.”
“아론, 나는 로렌스가를 사랑해.”
그녀의 담담한 대꾸에 로렌스가 사람들의 시선이 주목되었다.
바이올렛이 두 손을 내려놓고 애정이 가득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지금까지 로렌스가가 지켜 왔고, 앞으로도 지켜야 하는 것이라고는 하나밖에 없지. 라크라운드 사람들.”
“…….”
“그리고 나는 명예욕이 있는 건지, 로렌스 가문이 다시 라크라운드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가문이 되었으면 해. 그러니…… 내 생각은 그래. 왕실이었던 로렌스가와 의회를 분리하는 이 일이, 우리의 명예를 지켜 줄 것이라 믿어. 그래서란다.”
로렌스 가문의 문장에는 언제나 명예를 의미하는 고대어가 적혀 있었다. 그것은 세상이 변해도 변하지 않을 로렌스 가문의 가장 큰 가치였다.
에쉬가 그녀를 노려보며 말했다.
“네 행동의 어디가 명예를 지키는 행동이지?”
“에쉬, 내 남편인 윈터 경께서 낸 돈의 대가가 뭐였는지 기억해?”
“알지. 이방인 주제에 공작 작위를 가지고 싶어 했다는 걸 어떻게 잊겠어.”
“그래. 그거.”
바이올렛이 그를 주시하며 말을 이었다.
“그걸 안 줬다면, 돈을 돌려주든지 미안해하든지 했어야해.”
“감히 왕족인 너와 결혼하게 해 준 것만으로도 감지덕지지.”
그의 말에 바이올렛이 기가 차다는 듯 헛웃음지었다.
“그걸 공으로 친다면 네 공이 아니라, 내 공이지. 원래대로라면 아버지 돌아가신 후 바로 왕위를 이어받았을 네가 해결했어야 할 문제였어.”
바이올렛이 빤히 에쉬를 보며 말을 이었다.
“고마운 줄도 모르고 속물이니, 이방인이니 모욕만 하다니…… 짐승도 은인에 대한 고마움은 알 텐데. 지금이라도 너에게 고마워하는 법을 가르쳐야 할 것 같아. 그러니 당장 고맙다는 인사를 들어야겠군.”
안 그래도 윈터가 속을 뒤집어 놓았는데, 거기에 바이올렛이 불을 붙이자 에쉬가 분을 못 참고 들고 있던 붉은 와인을 바이올렛에게 끼얹었다.
분을 못 참고 한 제 행동에 에쉬가 더 놀라 잔을 내려놓았다.
반면 정작 와인을 맞은 바이올렛은 에쉬가 실수하길 바라고 모질게 말하던 차라, 이 정도면 양호했다고 여겼다.
왕족이 이런 행동을 하는 것은 제 스스로에게 몇 배로 되돌아온다는 것을 그녀뿐만 아니라 테이블에 앉은 모두가 알고 있었다.
그 생각을 증명하듯, 그 자리에서 제 자식들을 제외하면 가장 서열이 높은 엘라가 몸을 일으켜 에쉬에게 말했다.
“에쉬 로렌스.”
“네, 어머니.”
당연히 제 방어를 해주리라, 에쉬가 기대하고 있을 때 엘라가 냉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넌 이 자리에 있을 자격도, 투표할 자격도 없다. 당장 여길 떠나렴.”
그녀의 떨림이 섞인 명령에 순간 자리가 고요해졌다.
당신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