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화
이제 안 그러는 줄 알았더니, 윈터는 여전히 제가 아는 것보다 많은 것들을 사들이고 있었다.
바이올렛이 한숨을 쉬고 걱정스레 어두운 가게에서도 마치 본래 제 빛을 가진 것처럼 은은하게 빛나는 진주들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이상하게도 이런 한심할 정도로 많은 선물들을 보면 마음이 저릿저릿해졌다.
그렇게 긴 시간 제 부모에게도 이렇게 많은 것을 가져다 바쳤겠지. 사랑을 갈구하며. 그의 마음속에서 부모를 잘라 내도 괜찮은 건가, 바이올렛은 걱정이 들었다. 아까 전에 아직도 버려질까 무섭다고 말하던 윈터의 표정이 다시 떠올랐다.
바이올렛의 씁쓸한 표정을 읽었는지, 진주 상점 주인이 위로하듯 말했다.
“그나저나 공주님과 다니더니 윈터 씨 표정이 아주 밝아졌네. 내가 눈이 이렇게 침침한데도 환해 보일 정도야.”
“나 오늘 기분 안 좋은데, 할멈.”
“뭐 언젠 좋았나. 맨날 성질이나 내지.”
“시끄러워.”
윈터가 툴툴거렸다. 그리고 바이올렛의 눈치를 보며 슬쩍 진주를 챙겨 담기 시작했다.
바이올렛은 그런 윈터를 가만히 보았다.
그는 생각보다 가을이 아주 잘 어울리는 남자였으나, 그 어울림이 바이올렛을 다소 슬프게 했다.
*
그로부터 사흘 뒤 가문 회의 아침, 모든 준비를 마친 바이올렛은 여유롭게 단장을 시작했다.
그녀는 회의 예정 시간보다 한 시간 빨리 준비를 마쳤다.
진주로 소매와 칼라를 장식한 군청색 드레스를 입었고, 양쪽 귀에 얇은 금박으로 된 커다란 귀걸이를 걸고 있었다.
잠시 드레스 룸에 혼자 남은 바이올렛이 거울을 바라보며 마음을 굳히는데 윈터가 문을 열고 들어섰다.
“준비 다 했어?”
윈터의 말에 바이올렛이 그를 돌아보았다가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아내의 모습에 윈터는 잠시 말문이 막혀 문 뒤에 멈춰 서 있었다.
그녀의 맑은 눈빛은 시리도록 푸르렀고, 빠짐없이 틀어 올린 머리칼은 금가루를 듬뿍 뿌려 놓은 것 같았다.
“괜찮아요?”
바이올렛이 묻자 윈터가 진지하게 대답했다.
“위엄 있고 눈부셔.”
그의 찬사에 바이올렛이 작게 웃었다.
“고마워요.”
윈터가 천천히 걸어가 바이올렛을 마주 보았다. 그녀는 여느 때처럼 아름다웠고, 중대사 앞에 선 사람다운 단호함과 기품이 흘렀다.
윈터가 압도감에서 벗어나려 가벼운 말을 던졌다.
“진주 잘 샀지? 칭찬해 빨리.”
“잘 샀어요. 그리고 그곳 주인은 당신을 아끼는 것 같더군요.”
“몰랐어? 원래 여자들이 안 그런 척하면서 날 아껴.”
그가 무슨 당연한 소리냐는 듯 능청을 떨었다. 그렇게 농담으로 바이올렛의 긴장을 풀어 준 윈터가 손을 내밀었다. 바이올렛이 그의 손에 장갑을 낀 손을 올렸다. 장갑 위에 큼지막한 사파이어 반지를 끼웠는데 그것이 아주 잘 어울렸다.
복도를 걸어 저택을 나서며 윈터가 말했다.
“빨리 처리하고 더 추워지기 전에 알리카에 다녀온 후 바로 결혼식 준비를 하자. 내년 봄까지 시간이 얼마 없어.”
“알리카는 정말 춥겠군요.”
“그러니 당신을 코트와 담요로 단단히 포장해서 데려갈 거야.”
포장이라는 말이 재미있었는지 바이올렛이 웃었다. 오늘은 심각한 회의가 있는데, 남편과 있으니 자꾸 웃음이 났다. 그가 로렌스가 성을 따르지 않은 덕에 회의에 참여하지 않아 다행이었다.
농담을 툭툭 던지던 윈터의 얼굴은 저택을 나서며 슬슬 어두워지기 시작하더니 곧 매우 표정이 나빠졌다.
앞에는 이 큰 행사를 취재하려 라크라운드는 물론 이웃 대륙들에서까지 몰려온 기자들과 윈터가 만일을 대비해 오게 한 카닉사 직원들로 인산인해였으나 그뿐이었다. 말 스무 필까진 몰라도 열 마리 정도는 끌고 나왔을 줄 알았더니 평소 타는 마차 그대로에 평소 마차를 끄는 말 두 마리가 전부였다. 대문에도 왕성 앞처럼 문장을 줄줄이 걸어 놓을 줄 알았는데 별것이 없었다.
윈터가 인상을 쓰며 바이올렛을 보니 그녀가 밝은 얼굴로 말했다.
“나름 열심히 준비했는데 괜찮을지 모르겠네요.”
도대체 뭘 준비한 걸까. 역시 아내에게 맡겨 놓으면 안 되는 것 아닌가, 생각하며 나가 보니 그가 생각하던, 손님을 맞을 백 명쯤 되는 악단조차 없었다.
그가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지대가 높은 저택보다 낮은 왕성 방향으로부터 에쉬를 비롯한 로렌스 가문의 마차들이 천천히 다가오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어마어마한 말이 끄는 마차가 있고 그 양옆을 말을 탄 수많은 호위들이 둘러싸고 있었다. 오히려 군악대까지 끌고 온 것은 에쉬였다. 이미 그 목록을 확인했던 윈터가 인상을 쓰며 말했다.
“저것 봐. 저 자식은 저렇게 등장하는데! 당신은 왜 이렇게 투자한 게 없어?”
“나도 충분히 투자를…….”
“당신은 원래 눈부시니 거기에 특별히 돈을 더 들였다고 우기려 들지 마.”
윈터의 추궁에 바이올렛이 난처한 눈빛으로 침착하게 말했다.
“화내지 말고 들어 봐요, 윈터. 나도 처음에는 에쉬처럼 의전으로 힘을 보이는 게 맞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아무것도 없잖아! 이래서 내가 당신에게 맡겨 놓으면 안 됐어. 내 아내는 사치 부리는 데 재능이 하나도 없어! 크루즈를 샀어야 했다고!”
“도대체 크루즈가 왜 필요한지 모르겠지만…… 도중에 마음이 바뀌었어요. 당신도 인사치레를 싫어하잖아요. 남이 하는 것도, 본인에게 하는 것도.”
“쓸모없는 인사치레는 다 돈 낭비야. 근데 그건 나고, 당신은 공주님이잖아.”
“여러 번 말하지만 난 공주가 아니에요. 그리고 방향을 바꿔서, 나는 더 많은 사람에게 이 가문회의에 대하여 알리는 일에 돈을 쓰기로 했어요.”
바이올렛이 조곤조곤 말하고 기차역 방향을 바라보았다. 일찌감치 도착한 에쉬의 마차 양옆으로 군악대가 준비하고 있을 때였다.
기차역이 있는 방향에서 인기척이 들린다 싶더니 수백, 어쩌면 수천일지 모를 사람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제야 윈터가 흠칫 놀라며 바이올렛에 물었다.
“……혹시 무력을 써서 다 쓸어버리려고? 나쁘진 않지만 당신 선택이라는 게 좀 놀랍군.”
그의 진담을 농담으로 안 바이올렛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다행히 윈터는 금방 상황을 이해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 의석을 바라는 자들이군.”
‘농민 연합’, ‘대장장이 연합’, 그리고 ‘카닉 일족’의 이름이 적힌 깃발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기차역 방향에서 오는 이들은 다시없을지 모르는, 귀족이 아닌 자에게도 의석이 생길 수 있는 이 기회를 지지하기 위해 토실토실한 말을 골라 사서, 만약 의석이 생긴다면 그들을 대표해 줄 후보들을 태워 이글린의 인솔을 따라 저택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바이올렛이 입을 열었다.
“이게 우리 가문의 일만은 아니라는 걸 우리도 알아야 하고, 저 사람들도 알아야 하니까요. 이게 로렌스 가문이 왕가로서 할 수 있는 마지막 일일지도 몰라요. 광산이 무너졌는데 누구에게도 알릴 방법이 없는 상황이 다시는 오면 안 되잖아요.”
윈터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바이올렛이 말을 이었다.
“이렇게까지 많이 와 줄 줄은 몰랐어요. 아, 손님 맞아야겠네요.”
바이올렛이 곧 심호흡을 하고 미소를 지으며 로렌스 가문 사람들을 돌아보았다. 그들은 예상하지 못한 인파에 압박감을 느끼고 있었고, 바이올렛이 하나하나 인사를 건네도 그 긴장을 풀지 못했다.
이 소란 덕에 드라마틱한 등장에 실패한 에쉬가 인상을 쓰며 마차에서 내렸다.
그리고 사용인들에게 로렌스가 사람들을 한두 명씩 인솔하도록 배정해 주기 위해 문 앞에 선 바이올렛에게 다가갔다.
“저게 무슨 수작인지 모르겠지만 역효과일걸. 지금 로렌스 가문이 가진 의석 내놓으라고 우리를 여기 부른 거 아닌가? 그런데 봐. 귀족들에겐 좋을 것 없는 일이라는 걸 보여 주고 있잖아, 지금.”
그러자 바이올렛이 신중한 표정으로 그를 보았다.
“에쉬, 나는 우리 가문을 아주 많이 존경해 왔어. 라크라운드가 위험할 때 가장 먼저 전장에 나선 게 로렌스 가문이야. 왕족이라고 몸을 사리지 않았지. 그게 왕족의 일이라고 믿었으니까.”
“그런데 이딴 짓이야?”
“그래서 아버지도, 웨인도 이런 국책을 선택한 거야. 로렌스 가문의 사람이니까. 넌 나의 가문에 어울리지 않아. 그리고 그걸 알고 있는 건 나뿐만이 아닐 거야.”
그녀의 말이 끝난 후, 로렌스가 사람들에게 정적이 흘렀다. 꽤 긴 침묵이 흐르고, 바이올렛의 사촌 중 하나인 안젤라가 그녀에게 다가섰다.
“초대해 줘서 고마워. 기대돼서 전날 잠을 한숨도 못 잤어.”
“바이올렛! 드디어 소문 속의 그 유명한 정원을 보게 되는군요. 내가 먼저 보고 온다고 친구들이 얼마나 부러워하던지.”
“어머, 나도 자랑하고 왔는데.”
몇몇의 로렌스가 사람들이 먼저 재잘거리며 사용인들의 안내에 따라 저택을 관통해 정원으로 향하며 즐거운 감탄을 내뱉었다.
그 모습에 에쉬가 저를 인솔하러 온 사용인을 신경질적으로 밀치더니 속이 뒤집혀서 데려온 호위들에게 말했다.
“왕족들의 회의에 감히 저런 천한 것들을 불러들여?”
그러자 멀찍이서 구경하던 윈터가 에쉬의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 뒤를 카닉사 직원 수십이 따라 걸어 에쉬의 호위들과 맞닥뜨렸다.
에쉬가 미간을 좁히고 윈터를 바라보는 것을 본 기자들이 몰려왔다. 윈터가 먼저 입을 열었다.
“에쉬 로렌스.”
“전하라고 해.”
“왕도 아닌데 내가 왜?”
윈터가 아내에게 배운 대로 비꼬더니 뒷짐을 지고 짓궂은 얼굴로 말을 이었다.
“그나저나 자네는 어릴 때 불성실한 학생이었나 봐.”
“……갑자기 무슨 소리지?”
“아니, 우리 공주님은 사람에게 천하단 소리를 하면 안 된다고 배웠다는데 자네는 방금도 하길래.”
에쉬는 무심코 한 말을 윈터가 쩌렁쩌렁 떠들어 대자 눈이 커졌다. 에쉬가 서둘러 말했다.
“네놈이 감히 그런 말 할 처지가 되나?”
“나야 그런 말을 입에 달고 살지. 하지만 자네는 그러지 말아야지. 내 아내처럼 사람을 귀하게 여기며 살아왔어야지. 왕족이셨으니 말이야.”
윈터가 비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래도 자넨 꽤 괜찮은 사람이야. 인정하지.”
“……뭐?”
“그렇잖아. 스스로의 수준이 안 되는 걸 알고 자기 손으로 왕위를 내놓았으니.”
“닥쳐, 윈터 블루밍!”
“물론 자네가 머리가 좋았다면 동생에게 자리를 넘겼겠지만.”
남을 놀리기 시작하면 정도를 모르는 윈터가 그렇게 말한 후 호탕하게 웃자 카닉사 직원들도 함께 키득거렸다. 그 모습을 잠깐 돌아본 바이올렛은 한숨을 쉬며, 다시금 저들에게는 악당 같은 구석이 있다는 생각을 했다. 악당 두목에게 물든 게 분명했지만, 본인들도 즐기는 것 같아 보일 때가 있었다.
에쉬가 모든 손님을 들이기 위해 저에게 다가오는 바이올렛을 힐끔 보더니 윈터에게 말했다.
“겁이 나서 사람들을 불러 모아 뒤로 숨는 자가 무슨 자신감으로 왕을 하지?”
그의 말에 윈터가 기가 차서 말했다.
“반대지. 담이 너무 커서 집안싸움을 나랏일로 만든 거야. 아직도 내 아내가 파악이 안 돼?”
당신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