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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135화 (135/176)
  • 135화

    레클 강 하구 섬에서 하녀들과 즐겁게 이야기하며 쇼핑을 하던 바이올렛에게 이글린이 다가왔다. 그녀가 괴로운 얼굴로 말했다.

    “설마 대표님만큼 일을 시킬 줄은 몰랐어요. 전국을 돌아다니게 하시다뇨.”

    “자네가 고생이 많네.”

    “회사에서도 이런 일은 다 제 부하 직원들이 한단 말입니다. 이래 보여도 부대표인데요, 제가.”

    이글린이 미안한 표정으로 받아주는 바이올렛의 반응에 신나서 생색을 이어갔다.

    “다 제가 봉사하는 마음으로 하는 겁니다.”

    “자넨 참 라크라운드 전역에 모르는 사람이 없는 것 같아. 정말 대단하네.”

    바이올렛의 순수한 감탄에 이글린이 울컥해서 말했다.

    “제발 그것 좀 대표님께 말씀해 주시면 안 됩니까?”

    그러자 윈터 주변 사람들의 이 반응에 익숙해진 바이올렛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지. 이미 알고 있겠지만.”

    “모르시는 것 같은데요.”

    “남편은 생각보다 주변 사람에 대해 잘 알아. 그러니 자네가 그렇게 천방지축으로 구는데도 다시 회사로 받아 주는 걸 테지. 자네가 워낙 뛰어나니까.”

    바이올렛의 농담 섞인 칭찬에 이글린의 입술이 씰룩거렸다. 그러더니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아, 그리고 이건 정말 구하기 어려운 정보였는데요. 에쉬 로렌스가 우선 스스로에게 작위를 수여할지도 모릅니다.”

    “작위를?”

    “예. 가능한 겁니까?”

    “아무래도…… 왕실의 후계자였으니. 원래는 그게 일반적이겠지. 원래 라크라운드의 왕은 왕위 말고도 두 개의 작위를 더 가지게 되어 있으니까. 하지만 이제 와서…….”

    “적이 두려운 거죠. 원래 겁먹은 짐승이 덩치를 부풀리잖습니까.”

    이글린이 말하고 유쾌하게 웃었다. 그러더니 넌지시 물었다.

    “막으실 겁니까?”

    “글쎄, 법적으로 충분히 가능할 일이라. 막을 수 있는 일은 아닐 것 같네.”

    “그럼 뺏으실 거죠?”

    이글린의 말에 바이올렛이 멈칫했다. 그러자 이글린이 인상을 썼다.

    “왜 주춤하세요? 당연히 뺏으셔야죠.”

    “그건…….”

    “혹시 두려우신 거예요?”

    “그게 아니라.”

    바이올렛이 잠시 생각하다가 이글린을 보았다.

    “나는 로렌스 가문을 사랑하고, 그 역사에 자부심을 느끼네. 로렌스 가문을 제외한 이름은 나에게 가치가…… 없는 느낌이라. 오히려 불필요한 호칭처럼 느껴지네.”

    “……와, 진짜 살면서 이렇게 보수적인 가치를 지닌 사람 처음 봅니다. 도대체 대표님과 어떻게 같이 사시는 겁니까? 그 분은 가치를 돈에만 두는 분인데. 사랑도 다 돈으로 표현하시잖아요.”

    “그래도 요즘은 좀 나아졌네. 아무거나 사들이지도 않고. 다행히 크루즈도 포기했고.”

    그녀의 모르는 소리에 이글린은 하고 싶은 말이 말았으나 그냥 그만 두고 모른 척 웃어 넘겼다.

    *

    티 하우스에서 나온 윈터는 묘한 표정을 지었다.

    언젠가 바이올렛에게 제가 매일 뭘 하는지 일일이 보고하란 뜻이냐고 물었던 적이 있었다.

    자신은 정말 바보였다. 누군가에게 관심이 가고, 그들이 어디에 있는지 궁금한 것이 사랑이라는 것을 스물아홉이 되어서야 알았으니까.

    그는 그동안 제 부모를 열심히 시선으로 좇았다. 그게 사랑이었다. 그는 열두 살부터 한 순간도 빼놓지 않고 혼자서만 부모를 짝사랑해 왔던 것이다.

    그토록 지독히 짝사랑을 하던 제 부모를 잘라 내고 나면 아쉬운 기분이 들 거라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그것은 순식간에 잊혔다. 그래서 알았다. 이미 이 세상을 통틀어 봐야 저에게 중요한 것은 그 공주님 하나라, 그 외의 것은 어떻게 되든지 알 바 아니게 되어 버렸다는 것. 부모마저 끊어내 아내밖에 남지 않게 된 것이 아니라, 아내가 소중해 부모까지도 끊어낼 수 있었다는 것.

    사랑을 하면 모든 것이 나아질 줄 알았는데. 오히려 더 죽을 것만 같을 때가 있었다. 다른 건 다 돈을 주고 사도 아내의 마음은 못 산다는 게 지독히 괴로웠다.

    그가 아내를 찾아 다급하게 걸음을 옮기다 보니 바이올렛이 있는 보석 가게가 보였다.

    그녀는 함께 가문 회의에 쓸 드레스의 보석을 사러 나온 하녀들과 이야기하며 즐겁게 웃고 있었다. 이내 가게 밖에 윈터가 있는 걸 눈치챈 바이올렛이 걸어 나왔다.

    “아, 회사 근처라 우연히 만날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기는 했는데, 정말 만났네요. 산책이라도 나왔어요?”

    그러자 윈터가 말없이 그녀를 두 팔로 꽉 끌어안았다.

    “윈터?”

    “잠깐만 봐줘. 기운이 안 나서 그래.”

    그러자 바이올렛이 말없이 그의 등을 손으로 토닥거렸다.

    “무슨 일 있었어요?”

    “없었어. 그냥.”

    “가을 타나?”

    바이올렛이 놀리듯 하는 말에 윈터가 잠시 멈춰 섰다. 그녀의 입술이 가을을 말하고 나서야 가을의 물감으로 듬뿍 칠한 섬이 보였다. 그가 이내 장난기가 섞여 좀 삐뚤어진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마도? 아, 그리고 남부신문에는 에쉬 로렌스 이야기가 크게 실렸더군.”

    윈터가 가져온 남부 신문을 펼쳐 보였다.

    에쉬가 농사짓는 시늉만 하고 뒤로는 막대한 돈을 챙겼다는 것은 실제 농가로 가득한 남부를 분노하게 했다.

    신문을 차근차근 읽은 바이올렛이 미소를 지었다.

    “신문은 고마워요. 자, 그럼 이제 당신 표정이 왜 이렇게 안 좋은지 말해 줄래요?”

    “음.”

    윈터는 다시 말을 돌리고 싶었으나, 저를 차분히 바라보는 바이올렛의 눈동자에 못 이겨 솔직하게 말했다.

    “아직도 드문드문, 당신이 날 떠날까 봐 무섭다면 좀 미친놈 같나?”

    “……네에?”

    바이올렛의 의아한 표정에 윈터가 납득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미친놈 같은가 보군.”

    “이렇게 아침마다 사랑한다고 말하는데도요?”

    “지금까지 내 가족마다 날 버렸잖아.”

    “그건…….”

    바이올렛이 말문이 막혀 더 말이 없으니, 윈터가 저도 모르게 이를 악물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진짜로 가을 타나 봐.”

    “윈터, 나는…….”

    “날 떠날 이유가 없다고 말하지 마. 나는 지금까지 버려질 거라고 예상하고 버려진 적이 없어. 늘, 어느 날.”

    “…….”

    “정신을 차려 보면 버려져 있어. 뒤늦게 깨달아.”

    윈터는 바이올렛은커녕 어느 누구에게도 보여 주지 않는 쓸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녀가 윈터의 손을 감싸 쥐었다.

    “바빠요? 같이 보석 구경할까요?”

    “하녀들이 실망할 텐데.”

    “같이 다니면 되죠.”

    “하녀들이 싫어할 텐데.”

    윈터의 말에 바이올렛이 돌아보니 확실히 어느 누구도 윈터와 눈을 마주치고 싶어 하지 않았다. 바이올렛이 없을 때의 그를 봐 왔던 그들이었다. 평소의 윈터와 비교하면 아내와 있을 때의 그는 애교 많은 아기 강아지 수준이었다.

    바이올렛이 다시 윈터를 보며 말했다.

    “요즘 거의 매일 이렇게 물건을 사러 나왔으니까요. 오늘은 당신과 있을까 봐요. 아, 대신 보이는 것마다 사면 안 돼요.”

    “내가 언제 보이는 것마다 샀어? 모함이 심하군.”

    “최근엔 다행히 덜해졌어요. 그럼 금방 말하고 올게요.”

    바이올렛이 안으로 들어가 먼저 마차를 타고 돌아가라고 말해 준 후 다시 돌아왔다. 같이 쇼핑을 하자는 말에 금방 기분이 좋아진 윈터가 냉큼 바이올렛이 나오자마자 손을 잡아 제 얇은 코트 주머니에 넣었다.

    그가 유쾌해진 목소리로 물었다.

    “남편이 아내의 파티에 참견하는 거 꼴불견이란 건 아는데, 제대로 챙기고 있는 거야?”

    “아주 호사스럽게 준비하고 있어요. 이래 보여도 왕실에서 자랐는걸요. 격식을 차리기 시작하면 얼마든지 차릴 수 있어요.”

    “왜 이래 보여도야? 난 당신만큼 왕실에서 자란 것 같은 사람을 세상에서 본 적이 없는데.”

    “그래요? 왜일까요.”

    바이올렛은 늘 의문인지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러더니 막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혹시 진주 상점 아는 곳이 있나요? 이제 준비를 다 했는데, 젠이 진주가 더 있었으면 좋겠다고 해서요. 그런데 어느 가게를 가도 젠의 마음에 드는 진주가 없다더군요.”

    “당연하지, 연말이 가까워 오잖아. 최고의 파티 시즌이야. 이미 귀부인들이 싹 쓸어 갔을 거라고. 상태 좋은 진주는 부르는 게 값인 시기지. 거기 가면 그럭저럭 괜찮은 게 있을 거야.”

    “그래서 진주 구하기가 어려웠군요.”

    바이올렛은 이해가 간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윈터는 여지없이, 결혼 후 3년 내내 바이올렛이 진주 가격변동을 알 일이 없을 정도로 소박하게 살았다는 것이 떠올라 속이 쓰렸다. 부모와 연을 진작 끊어야 했다고, 그는 다시금 생각했다.

    두 사람이 진주 상점에 들어서자 꾸벅꾸벅 졸고 있던 노파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어서 와요!”

    바이올렛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윈터가 소개해 준 가게치고는 허름해서 의아해했는데 안에 들어가 보니 어느 가게에서도 찾을 수 없었던 진주들이 가득 진열되어 있었다.

    바이올렛이 의아해하는데 주인이 두꺼워 보이는 돋보기안경을 가져다 쓰고 박수를 쳤다.

    “윈터 씨가 왔네. 이쪽이 아내분이시고?”

    “진주나 꺼내 와. 쓸데없는 인사 말고.”

    “하여튼 성질은…….”

    둘이 오래 아는 사이인 모양이었다. 주인이 살짝 떨림이 있는 손으로 벽에 걸려 있는 진주 한 줄을 가져왔다.

    “이건 어떠셔요, 공주님? 동쪽 섬에서 가져온 좋은 진주지요.”

    여기 주인 정도 나이가 든 사람들 중에는 왕실이 사라졌다는 것조차 모르는 사람이 많았으므로, 바이올렛은 굳이 정정하지 않고 노파의 키에 맞게 몸을 낮추어 진주를 살폈다.

    “잘 모르는 내 눈에도 정말로 훌륭한 진주 같소.”

    “아주 최상품이지요.”

    그녀는 세 종류 정도의 진주를 추천해 줬는데 처음으로 보여 준 진주가 너무도 훌륭해 더 이상 고를 의미가 없을 정도였다. 바이올렛이 윈터를 의심의 눈초리로 보았다.

    “혹시 여기도 당신 가게예요?”

    그러자 주인이 대신 대답했다.

    “무슨. 여긴 우리 조모님 대부터 하던 가업이랍니다. 돈독 오른 저런 작자가 와도 안 팔지.”

    “아.”

    바이올렛이 조금 웃더니 조용히 말을 덧붙였다.

    “그래도 그리 나쁜 사람은 아니라오.”

    “아니긴요! 툭하면 여기 와서 자기랑 일하자고 졸라서 얼마나 지긋지긋했는지. 고집도 보통 고집이 아니에요.”

    “남편이 그랬소?”

    “아무렴요. 내가 진주를 그렇게 잘 본다나, 하면서요.”

    주인이 자랑하듯 말하고, 윈터는 괜히 데려왔나, 싶은지 앓는 소리를 냈다. 그때 주인이 말을 이었다.

    “물론 여기 진주 절반은 부군께서 사신 거지만요. 보는 눈이 어찌나 좋은지 흠 있는 건 죄다 빼고 좋은 것만 쏙쏙 골라서…….”

    “이봐!”

    당황한 윈터가 버럭 소리치자 뒤늦게 주인이 중얼거렸다.

    “아, 혹시 이거 비밀이라고 했던가? 이제 써 놓질 않으면 기억이 안 나네.”

    그러곤 늘 줄에 엮어 목에 걸고 다니던 수첩을 들어 확인했다.

    “아이고, 윈터 씨가 절대 아내 모르게 하라고 신신당부했었네. 이것 봐요, 공주님. 내가 이렇게 별까지 쳐 놓곤 잊어버린다니까.”

    오늘 아내 앞으로 산 건물에 학교가 들어섰음을 고백하려 했으나, 아무래도 타이밍을 놓친 듯했다. 윈터가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한숨을 쉬더니 저를 흘기는 바이올렛에게 말했다.

    “……나 가을 탄다고 말했나?”

    당신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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