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화
다음 날 아침, 눈을 뜬 바이올렛은 출장이 많이 피곤했는지 아직 잠들어있는 윈터를 보았다가 머리맡에 놓인 편지를 발견했다.
페런 도스에게서 온 편지였다.
고개를 갸우뚱하고 편지를 연 바이올렛의 입이 저절로 벌어졌다.
샤론이 아이를 가졌어. 혹시 인근에 아우스가 보이면 잡아 놔 줘.
페런이 쓴 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분노한 글씨체였다. 그러나 그렇게 본론을 쓰고 난 후에는 무례라고 생각했는지 인사를 덧붙였다.
잘 지내고 있는지 모르겠다, 바이올렛. 나는 언제나 네가 걱정이야. 네가 그리울 때가 있어. 조만간 배에서 내릴 거야. 바로 수도에 들러 나와 함께 식사를 해주길 고대하고 있을게.
바이올렛은 기분이 복잡해졌다.
어떤 감정을 보여야 하나, 바이올렛이 멍한 표정을 짓고 있는데 윈터가 뒤이어 눈을 떴다. 그는 바이올렛이 읽고 있던 편지를 발견하고 손을 내밀었다.
“무슨 내용인데 그런 표정이야?”
“어땠는데요?”
“복잡해.”
바이올렛이 편지를 내주지 않자 윈터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평소 같으면 그냥 포기했을 그가 고집을 부리자 결국 바이올렛이 편지를 놔주었다.
윈터가 그것을 읽어 보더니 혀를 차고 중얼거렸다.
“결국 그렇게 됐네.”
“샤론 이 녀석을 정말…….”
“조만간 결혼식 하겠군. 드레스 사 둬.”
“당신은 왜 이렇게 태연해요? 공녀가 결혼도 안 했는데 아이부터 생기다니! 객실을 같이 쓸 때부터 알아봐야 했어요!”
크게 충격 받은 바이올렛의 언성이 점점 더 높아졌다. 반면에 윈터는 태연하게 대꾸했다.
“요즘 그렇게 드문 일도 아니고. 어차피 둘 다 가문 좋겠다, 나이 비슷하겠다, 빨리 식 치르면 되지. 상황 보아 하니 사실 이미 법적인 형식은 치렀다는 빤한 거짓말도 좀 할 테고.”
“아무리 그래도 그렇죠. 아우스 경은 그런 사람으로 안 봤는데 어떻게 그럴 수가…….”
“그 녀석은 언제 공녀님이 자기를 덮쳐 줄까 기다리다가 목 빠지겠던 걸 뭐. 게다가.”
“……게다가요?”
“딱 봐도 공녀님이 속 터진다면서 먼저 건드렸을걸. 그 해군은 보나 마나 안 돼, 안 돼, 돼, 돼, 돼…….”
바이올렛의 두 손이 윈터의 입을 틀어막았다. 그는 한번 음담패설을 시작하고 누굴 놀리기 시작하면 끝이 없었다.
얼굴이 순식간에 새빨개진 바이올렛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말했다.
“어떻게 그런 말을 표정 하나 안 바뀌고 하죠?”
그러자 윈터가 손에 눌린 입술을 움직였다.
“내가 뭐 얼마나 험한 말을 했다고 그렇게 얼굴이 빨개져?”
공녀가 결혼도 전에 임신했다는 소식에 바이올렛은 실신할 지경인데, 윈터는 그저 별것 아닌 해프닝이라고 여기는 듯했다.
한숨을 쉬고 침착함을 되찾은 바이올렛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아우스 경은 정말 큰일이군요. 페런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 같은데. 페런이 글씨를 이렇게 경황없이 쓴 건 처음 봐요.”
“그 해군 놈이 더 이상 해군이 아니라 정말 다행이군.”
윈터가 이해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바이올렛의 손에서 편지를 뺏어 협탁에 멀리 던졌다.
“자, 이제 외간 남자 편지는 그만 읽어.”
“걱정이 돼서 그래요.”
“걱정한다고 생긴 아이가 사라지진 않잖아.”
“사라지길 바라지 않아요. 사실은 축하할 일이죠.”
바이올렛이 웃고는 다시 살짝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 표정에 속이 쓰려 자꾸만 장난을 치던 윈터가 넌지시 물었다.
“아이 소식 들으니 서운해?”
“아니에요.”
“아닌 척할 것 없어. 나도 솔직히 아이를 많이 원했어. 그걸 다 감추고 억누르면서 어떻게 살겠어. 살면서 모든 걸 다 가질 수는 없으니 받아들이려 애쓰는 것뿐이지.”
“…….”
모처럼 어른스러운 윈터의 말에 바이올렛이 잠시 생각하더니 곧 미소를 지었다.
“당신 말이 맞아요. 굳이 아닌 척할 필요 없죠. 샤론 이 녀석 정말 크게 혼나야겠지만 그래도…… 부러워요. 아이도 너무나 궁금하고. 벌써부터 임신 선물을 뭘 줘야 하나, 고민이 되네요.”
“임신 선물은 그걸로 하지. 은신처. 아기 아빠는 살려야지.”
“아, 그럴까요?”
“내 호텔 어디든 들어가서 연락하라고 공녀님에게 얘기해 둬.”
“정말 좋은 생각이에요.”
바이올렛이 미소를 지었다. 윈터가 잠시 생각하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생각해보니 우리 회사 크루즈가 도스 공국에 자주 들르잖아. 이미 그걸 타고 라크라운드로 왔을지도 모르겠군.”
“그러네요? 페런이 아우스 경의 위치를 모르는 걸 보니. 밀항을 한 게군요.”
“우리보다 그 공녀님이 먼저 우리 쪽으로 연락을 할지도 모르겠군.”
윈터가 실소했다.
바이올렛은 윈터의 태연함 덕에 그럭저럭 혼전 임신을 받아들이고, 살짝 기대감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누구를 닮을까요, 아기는? 샤론을 닮으면 발랄하고 사랑스러울 거고, 아우스 경을 닮으면 침착하고 듬직하겠죠?”
“너무 장점만 보는군. 툭하면 가출하거나 한 마디도 안 하는 자식이 태어날걸.”
“그건 너무 단점만 보는 거네요.”
말을 마친 바이올렛이 즐겁게 웃었다. 그러나 웃음이 끝나고 나면 다시 쓸쓸함이 그녀를 둘러쌌다.
희망은 참 달콤하면서도 고달픈 것이었다. 요 몇 달 잠자리가 잦았다고 해서 결혼 후 여러 해가 지나도록 생기지 않은 아이가 갑자기 생길 리는 없었다. 그런데도 할린의 말을 들은 후부터는 월경이 하루만 늦어져도 기대감이 순간순간 고개를 들었다.
바이올렛은 이와 같은 감정을 결혼 후 3년 동안도 충분히 겪어 왔었다. 그때 그녀는 남편과의 사이에서 아이가 생기기 어렵다는 것을 몰랐으므로, 드물지만 부부 관계를 하고 나면 초조하게 임신 소식을 기다리곤 했었다.
그렇게 생각해보니 지금은 그때보다 모든 것이 나아졌다. 바이올렛은 그냥 이 초조함까지도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고자 했다. 아직 그들에게는 시간이 얼마든지 있었으니까.
바이올렛이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자신의 마음이 조금씩 상처로부터 단단해지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기운을 차린 그녀가 다정한 얼굴로 편지지부터 꺼내 들었다. 크게 놀랐을 샤론에게 편지를 보내줄 생각이었다.
*
회사에 있던 윈터는 캐서린이 도착했다는 소식에 잠시 밖으로 나섰다.
바이올렛에게서 답이 없어 그를 찾아온 모양이었다. 신탁이 묶여 버렸으니 그녀로서는 달리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없었으리라. 가주로서의 권위를 잃은 제임스는 가문 사람들에게 이리저리 불려 다니고 있었고, 디에브는 윈터가 끊임없이 던져 주는 모래성들에 아무 것도 모르고 덤벼들어 전 재산을 탕진한 후였다.
다른 많은 것들도 용서할 수 없지만, 제 아내에게 직접적으로 폭력을 가한 것은 더더욱 용서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윈터의 마음속에는 여전히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애증 같은 것이 남아 있었다. 저와 생모를 버렸다가 돈만 보고 저를 받아들인 제임스나, 아내에게 집적거려 그녀를 슬프게 한 디에브에게는 들지 않는 감정이었다.
레클 강 하구 섬 티 하우스에서 윈터는 캐서린과 마주했다. 원래도 마른 편이던 캐서린은 스트레스가 심각했는지 이전보다도 많이 야위어 있었다.
차와 근사한 티 푸드를 앞에 두고, 캐서린이 입을 열었다.
“바이올렛을 만나게 해 주렴. 사과하고 싶어.”
“안 됩니다. 절대로.”
“나는 이제 그 애와 잘 지내고 싶어.”
윈터가 기가 차다는 듯이 말했다.
“안 된단 말 못 들었습니까? 무슨 고집이 그렇게 셉니까? 안 된다면 그런 줄 알고 물러나셔야죠. 같이 사는 공주님은 그러시던데. 예의 바른 사람이라.”
“윈터!”
“있잖습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 돼요.”
윈터가 테이블에 턱 소리가 나게 팔을 내려놓자 캐서린이 멈칫했다.
바이올렛은 올곧았으나 모든 것을 차근차근 풀어 가려 했다. 그러므로 답답한 구석이 있어도 예상하지 못할 확률이 낮았고, 결코 도덕적인 범위를 벗어나지 않았다.
반면 윈터는 알 수가 없었다. 기분이 좋으면 끝도 없이 퍼 주다가 기분이 나쁘면 줬던 것 이상으로 뺏어 버리는 것이 그였다.
캐서린이 차로 목을 축이고 물었다.
“뭐가 말이니?”
“절 아들이라고 생각하신 적은 있습니까? 제가 쓰러져 있는데 그 앞에서 아내 뺨을 때리는 걸 보니 아닌 것 같던데.”
“그 애가 널 만나지 못하게 했어.”
“그러니까 평소에 잘 보이셨어야죠.”
윈터가 짜증스레 대꾸한 후 벌써부터 지루하고 시간이 아까운지 창밖을 보았다.
캐서린은 묘하게도 그 순간에서야 윈터의 마음이 완전히 떠났음을 알았다. 그는 늘 건방지기 짝이 없었지만 항상 힐끔거리며 제 부모를 살폈다.
열두 살에는 훨씬 더 심해서, 가까스로 얻은 부모를 혹시나 잃을까 봐 무서워서 침실에 있다가도 종종 나와 제 부모 있는 곳을 기웃거리곤 했다. 제 회색 눈을 싫어해 똑바로 보지도 못하고는.
성인이 된 이후에도 그는 관심 없는 척하면서도 부모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들었고, 필요한 것이 스치듯이라도 나오면 기가 막히게 알아듣고 곧장 제 사용인들에게 구해 두라 일렀다.
아마도 저희를 향한 그 집착의 눈빛이 그들을 믿게 만들었으리라. 어디로 튈지 모르는 저 망나니 같은 사내가 제 그 천한 회색 눈으로 늘 저희를 보고 있다는 걸 알았으니까.
원래도 따듯하고 다정다감한 아들이 아니었으나, 지금은 그가 가지고 있던 애정이 완전히 식어 버린 것이 느껴졌다.
“윈터, 남부로 돌아오렴.”
캐서린이 처음으로 간절히 말했다. 끊어져 가는 밧줄을 붙잡는 듯한 그녀의 목소리에 윈터가 크게 웃었다.
“아, 이것 참.”
그가 우스워 못 견디겠다는 얼굴로 의자에 몸을 기대더니 열두 살부터 스물아홉이 되기까지 제 어머니였던 캐서린 블루밍을 똑바로 마주 보았다.
“어머니, 제가 지금까지 크게 착각을 했어요.”
“……뭘?”
“전 여태 내가 사랑을 받으려면 세상의 온갖 좋은 것들을 다 상대에게 안겨 줘야만 한다고 믿었어요.”
“그렇지 않단다. 부모의 사랑은…….”
“내 부모의 사랑은 늘 돈으로 사야 하는 것이었으니까.”
윈터가 웃는 낯으로 말을 이었다.
“다들 날 보지 않고 내 돈을 보고 있었던 걸 몰랐어요. 내가 돈을 가져다준들, 그건 날 사랑하는 게 아니라 내 돈을 사랑하는 거였다는 걸. 그러니 사랑을 받고 싶었으면 줬다가 뺏기도 하고, 거래도 하고 그랬어야 했었나 봅니다. 돈 말고 내 쪽을 보게.”
“위, 윈터…….”
“돈을 가져다 드릴 때는 날 안 찾아오시더니, 돈을 뺏고 나니까 찾아오시잖아요. 증명됐네요.”
“…….”
“그러고도 난 이 정도면 충분히 사랑 받고 있는 줄 알았어요. 아내가 아니었다면 계속, 그게 내가 아는 사랑의 역치였겠죠.”
캐서린이 하얘진 얼굴로 저를 바라보자, 윈터가 코웃음 치며 느긋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그나저나 디에브는 그거 사업 수습 못 하면 난리 날 텐데요. 계신 저택이 넘어갈걸요? 어쩌다 제가 접고 있는 사업에 발을 들여서.”
“뭐, 뭐?”
“남부에서 일어나는 사업은 다 제 손바닥 위 아니겠습니까. 저는 블루밍 가문의 장남이니.”
윈터가 어깨를 으쓱이더니 자리에서 일어섰다.
“신탁 풀고 싶으시면 그 새끼더러 내 앞에 와 무릎 꿇고 빌라고 하세요. 그건 어머니가 대신 해 주실 수 없는 일이니까요.”
“…….”
“여긴 제 가게니 편안히 드시고 가세요, 어머니.”
윈터가 미소를 지으며 말하고는 티 하우스를 나섰다.
당신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