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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133화 (133/176)
  • 133화

    일주일간 꿀 같은 휴가를 보낸 하옐은 다시없이 표정이 밝아져 있었다. 하옐이 의욕 넘치는 목소리로 롱 리우드에 막 도착한 윈터에게 상황을 보고했다.

    “작은 마님 앞으로 구입하신 건물 다섯 개 중에서 두 개는 원래 있던 건물을 증축하는 거라 다음 달 중순이면 바로 학생을 받을 수 있고요, 나머지 세 개도 내년 가을부터 학생을 받을 수 있을 겁니다. 입학 신청서가 벌써 천 장이 넘었어요.”

    “원래 언제부터 시작해? 학교라는 게.”

    “라크라운드에서는 10월 입학이 일반적이죠? 다음 달 중순이면 좀 늦지만 다들 그것도 감지덕지일 겁니다.”

    “학교를 다녀 봤어야 알지.”

    귀족가문 아이들은 늦어도 대여섯 살이면 이미 가정교사가 달라붙어 이것저것을 가르쳤고, 일곱 살이면 학교에 들어갔다. 윈터는 너무 늦은데다, 또래보다도 월등히 덩치가 큰 그가 대여섯 살 아래 아이들과 공부하는 것은 시각적으로도, 그의 성격적으로도 어려웠다.

    그렇다면 그의 부모가 가정교사를 붙여줬어야 했으나, 블루밍 공작 부부는 그 정도로 윈터에게 애정이 있지 않았다.

    “그러니 의미 있는 거 아닙니까. 학교 한 번 가 본 적 없는 남자가 학교를 세우다니.”

    “닥쳐, 이건 내 아내가 세우는 거야.”

    “그럼요. 대외적으로는요. 이미 남부 전체에 작은 마님 칭송이 자자해요.”

    쉬고 돌아온 하옐은 마음이 넓어져서 윈터가 웬만큼 멋대로 굴어도 해맑게 받아들이는 중이었다.

    첫 번째로 완공될 학교는 라크라운드 중남부, 카프타운 역에서 5km 떨어진 마을 회관을 증축한 것이었다. 인근에 학교가 지어진다는 소식에 카프타운 지역 전체가 들뜨고 있었다.

    하옐이 학교를 둘러싼 울타리에 착 달라붙어서 기대감 가득한 얼굴로 공사장을 바라보고 있는 아이들에게 말을 걸었다.

    “너희 이 학교 들어가니?”

    그러자 여자아이 하나가 눈을 반짝이며 대답했다.

    “네! 엄마가 원래는 멀어서 절대 혼자 가면 안 된다고 했는데, 다음 달부터 학교 다니게 해 준대요!”

    아이의 행복한 표정에 하옐이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윈터가 힐끔 아이를 보더니 혀를 차며 말했다.

    “꼬마.”

    “네?”

    “모르는 아저씨가 말 걸면 무시해. 알겠어? 그게 세상이야.”

    “네? 네, 네에…….”

    아이가 움찔하더니 제 친구들에게로 돌아갔다. 그렇게 겁을 줘 놓고, 윈터가 하옐에게 말했다.

    “교복도 그냥 줘. 첫 학교니까.”

    “예에, 예. 내친김에 학용품도 나눠 주시죠?”

    “그런 건 좀 재량껏 해.”

    윈터의 불퉁한 말에 하옐이 씨익 웃었다.

    북부 별장 회의에서 윈터가 복수의 일환으로 학교를 지어 남부 인력을 이동시키겠다고 했을 때, 직원들은 이 계획이 그 돈독 오른 대표 머릿속에서 나왔다는 것을 믿지 못했다.

    반면 하옐은 윈터가 이런 이타적인 방법을 사용하기까지 바이올렛의 올곧음이 크게 작용했음을 알았다. 게다가 윈터는 원래 아이들을 꽤나 아끼기도 했다. 아이들에게도 어른들에게 하는 것처럼 공격적인 투로 말하긴 하지만 아이들을 상대로 이득을 보려 들지는 않았다.

    “그거 아시죠, 대표님?”

    “뭐.”

    “작은 마님은 대표님께 과분합니다.”

    “쉬니까 체력이 남아돌아? 당연한 얘기를 왜 해? 이래서 휴가를 주지 말아야 돼.”

    윈터가 이해가 안 된다는 듯 질색했다.

    그리고 교복 이야기에 생각났는지, 그가 물었다.

    “바이올렛은 무슨 학교를 나왔지?”

    “아무래도 수도에 있는 왕립 학교를 나오셨겠죠?”

    “아, 그 왕관이 로고인 학교.”

    “로고라니요. 문장입니다, 대표님. 그것도 7대 전 왕을 상징하는 문장이요.”

    하옐이 빈정거리다가 알아서 손으로 입을 막는 시늉을 했다. 잠시 후 윈터가 말을 이었다.

    “귀여웠겠지.”

    “작은 마님이야 당연히 귀여우셨겠죠.”

    윈터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게는 여전히 바이올렛의 아이를 바라는 마음이 있었다. 제 아이가 아니어도 정말 조금도 상관없었다.

    아내를 닮은 아이들을 생각하면 숨이 멎을 것 같았다. 아이들이 아무리 사고를 쳐도 혼내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아내를 닮았다면, 자신은 분명 그 꼬맹이들이 거인이라도 되는 듯 꼼짝하지 못할 테니까.

    하지만 이건 상상에서 끝내야만 하는 일이었다. 아내는 저를 사랑했으니까. 아무리 아이를 원한다고 해도 도리가 없었다. 그것은 행복한 일이었다. 다만 조금의 쓸쓸함을 동반했을 뿐인.

    잠시 말이 없던 윈터가 입을 열었다.

    “바이올렛이 왕립학교 교복 입은 사진이나 그림은 없나.”

    “그 무렵 사진은 거의 얼굴 분간이 안 될 겁니다. 그래도 그림은 왕립 미술관에 있겠죠.”

    “사 와.”

    “……예?”

    “사 오라고.”

    “그, 그거……. 가서 보셔야죠. 안 팔걸요?”

    “그래서?”

    윈터가 어쩌란 거냐는 듯이 보자 하옐이 어깨를 으쓱였다.

    “사 오겠습니다.”

    하옐이 체념하고 대답했다. 윈터의 고집을 꺾는 것보단 라크라운드의 법도를 꺾는 것이 쉬울 게 분명했다.

    *

    윈터가 기차를 타고 수도에 돌아왔을 때는 이미 많이 늦은 시간이었다.

    자주 나갔다 오는 것보다 출장이 나을 것 같아 롱 리우드와 카프타운 일대를 확인하고 돌아오니 일주일이 지나 있었다.

    평소라면 이대로 회사에 들어가 일을 끝냈을 테지만, 지금은 아내 얼굴을 보는 것이 먼저였다.

    학교가 생겼다며 신나 하는 아이들을 보고 나니 기쁜 한편 속이 구멍 뚫린 것처럼 허했다. 그는 늘 교복을 싫어했다. 저를 가장 수치스럽게 만드는 것이 교복이었다. 교복 입은 아이들을 부러워하던, 어리던 그 고아 꼬맹이로 돌아간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윈터는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제 방에도 들르지 않고 곧장 바이올렛의 방으로 향했다. 12시가 넘었으니 아내가 자고 있을 테지만, 그래도 그녀가 보고 싶었다.

    서러울 때마다 아내를 찾는 것은 사내로서 자존심이 뭉개지는 일이었다. 그러나 아내가 저를 그렇게 길들였고, 저 또한 그러기를 욕망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닌가.

    그 와중에 아내가 입학하던 모습은 보고 싶으니 저도 참 별수 없는 인간이었다.

    윈터는 노크에도 답이 없는 바이올렛의 방 문을 조심스럽게 열고 들어갔다. 그러고는 침대에 가까이 가니 아내의 보드라운 숨소리가 들렸다. 그것만으로도 온몸의 긴장이 풀렸다.

    수도는 벌써부터 해가 지면 쌀쌀했다. 장작을 넣어둔 벽난로를 보니 장작을 못 산다는 농담에 저를 흘기던 아내의 표정이 떠올라 웃음이 나왔다.

    윈터는 아내가 깨지 않도록 침대 아래에 무릎을 꿇고, 침대에 올린 팔에 턱을 괴어 바이올렛을 바라보았다.

    “……다녀왔어, 공주님.”

    그가 가만히 인사하는데, 눈꺼풀이 살짝 떨리더니 바이올렛이 눈을 떴다. 그리고 눈을 깜빡이며 그를 바라보더니 스르륵 몸을 일으켰다.

    깨웠구나 싶어 사과하려는데, 바이올렛이 윈터의 목을 끌어안았다. 밖에서 들어와 서늘한 윈터와 바이올렛의 따끈따끈한 체온이 뒤섞였다.

    “밖에 춥죠?”

    “추워.”

    “얼른 씻고 와요. 기다리고 있을게요.”

    “더 자.”

    “출장 이야기가 듣고 싶어요.”

    잠이 덜 깬 얼굴로 답지 않게 조르는 바이올렛 덕에 윈터가 다시 웃음을 터트렸다. 그는 바이올렛을 다시 눕혀 두고 욕실로 향했다.

    *

    목욕을 마치고 잠옷을 입고 나와 보니 바이올렛이 잠을 꽤 많이 쫓아낸 참이었다. 그가 돌아오며 편지 한 장을 가지고 왔다.

    윈터가 침대에 털썩 앉으며 말했다.

    “어머니가 당신에게 보냈다던데. 룰루가 주더군.”

    “그래요? 무슨 일일까.”

    바이올렛이 의아해하며 편지를 뜯었다.

    캐서린의 편지에는 조만간 만나서 사과를 하고 싶다는 내용이 줄줄이 적혀 있었다. 그것을 함께 읽던 윈터가 키득거리고 웃었다.

    “뭐라는 거야. 편지 다시 줘. 버리고 올 테니까.”

    “그래도 연락을 주셨으면 만나는 보는 게 예의…….”

    “예의?”

    윈터가 바이올렛의 손에서 편지를 받아 그 자리에서 찢으며 말했다.

    “예의는 예의를 차려서 손해를 안 볼 때만 차리면 돼. 죽겠으니까 찾아와서 해결해 달라는 걸 왜 만나 줘? 귀족들이 그렇게 예의에 목을 매니까 내가 돈을 번 거야. 뭐, 그렇게 치면 감사한 일이군.”

    그가 갈기갈기 찢어 버린 편지를 바이올렛이 난처하게 바라보았다. 윈터가 말을 이었다.

    “블루밍 가문 사람은 내 집에 한 걸음도 못 들어오게 했으니 이 집에 그 작자들 찾아올 일 없을 거야. 당신도 애써 만날 것 없어.”

    “…….”

    “내 부모의 일은 내가 해결해. 그것까지 무례하다고 말하지 마.”

    “그럼…… 그럴게요. 당신이 원하지 않는다면 나도 원하지 않아요.”

    바이올렛이 결심했다는 듯 대답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대답은 윈터를 행복하게 했으며, 동시에 그가 타고나길 가지고 있던 남들보다 몇 배로 큰 탐욕이 고개를 들었다.

    그는 손으로 바이올렛의 턱을 감싸 제 쪽으로 당겼다. 벽난로 불빛과 뒤섞여 여러 빛으로 보이는 바이올렛의 눈동자로부터 졸음이 달아나고 있었다.

    “윈터?”

    “당신이 이 집에 있을 때는 언제나 안전할 거야.”

    내 집에 위험한 자들이 들어올 수 없으니 당신도 그곳 밖으로 나가지 않아 줬으면 해.

    윈터는 속에서부터 그런 말들이 매일같이 끓어올랐다. 당신이 머무는 곳을 천국으로 만들어 줄 테니 그곳에서 벗어나지 말아 줘.

    당신의 눈빛이 이렇게 확고한데, 왜 나는 아직도 버림받을까 봐 두려움을 느낄까.

    윈터가 억지로 미소를 짓고는 그녀를 놓아준 뒤 말했다.

    “아, 학교.”

    “학교요?”

    “어디 다녔어? 당신. 기초 교육 말이야.”

    “왕립 학교를 다녔어요.”

    “당연히 그렇겠지.”

    “학교 정말 좋아요. 건물이 지어진 지 300년이 넘었는데도 아주 튼튼해요.”

    “그거 궁금하군. 구경 갈까?”

    윈터가 묻자 바이올렛이 멈칫하더니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안 되겠어요.”

    “뭐? 왜?”

    윈터가 황당해하자 바이올렛이 농담인지, 장난기가 녹은 푸른 눈으로 말했다.

    “혹시 당신이 마음에 든다고 사들이려 할까 봐요.”

    “허, 별 걱정을 다 하네. 아니, 애초에 내가 사면 안 될 이유라도 있어? 보아하니 자기 학교 매우 좋아하는 것 같은데 사랑하는 남편이 사들이면 좋잖아.”

    “안 좋아요. 학교는 학교로 있게 해 줘요. 온 사방이 다 당신 건물인 거 기분이 이상하단 말이에요.”

    “참 나.”

    윈터는 억울한 표정을 지었으나, 바이올렛이 건물 많이 사는 걸로 저를 놀리고 있음을 알고 있었으므로 입꼬리가 씰룩거리는 걸 감추지는 못했다. 조만간 본인 앞으로도 건물이 마구잡이로 늘어나고 있는 걸 눈치채면 좀 놀랄 테지만.

    결국 그는 유쾌하게 웃음을 터트렸고, 바이올렛 역시 함께 웃음을 지었다. 그렇게 이야기하다가 바이올렛은 먼저 잠이 들고, 윈터는 한참을 더 아내를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저도 모르게 가운 주머니에 쑤셔 박아 버렸던 편지 한 장을 더 꺼내 바이올렛의 머리맡에 놓았다.

    도스 공국의 페런 도스에게서 온 편지였다. 별것 아닌 내용이란 걸 뻔히 알면서, 미혼의 사내에게 편지가 왔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질투심에 순간 편지를 훔쳐 버린 제가 한심했다.

    그는 못 참고 팔을 뻗어 편지를 다시 집어 들었다. 예전이었다면 고민 없이 뜯어서 내용을 확인하고, 부하 직원에게 알아서 원상복귀 시키라 명령했겠지만…….

    윈터가 바이올렛을 보았다.

    “읽으면 나더러 무례한 악당이라고 할 거지?”

    윈터가 중얼거리고는 길게 한숨을 쉰 후 편지를 다시 그녀의 곁에 둔 후 아예 안 보려고 바이올렛에게 등을 돌리고 이불을 뒤집어썼다.

    갑자기 학교가 뭐가 중요한가, 싶었다.

    어차피 아내만큼 효과적으로 저를 길들이진 못할 텐데.

    당신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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