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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132화 (132/176)
  • 132화

    윈터가 바이올렛의 손을 잡아 일으켰다.

    “슬슬 일어나.”

    “그럴게요. 혹시 윈터, 헤스턴가의 마리얀 양에게 연락이 있나요?”

    “마약 유통 건에 대한 진전은 아직. 은밀히 처리하느라 시간이 더 걸리는 모양이더군.”

    “아, 그랬군요……. 가문 회의 전까지 연락이 왔으면 했는데 아쉽네요.”

    가문 회의가 며칠 뒤 이곳 정원에서 열릴 예정이었으므로 저택은 첫 번째로 열리는 대형 행사에 무척이나 들떠 있었다.

    윈터가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으며 말했다.

    “그 망할 자식은 마약과 상관없이도 충분히 쓰레기야.”

    “그런가요?”

    “응. 그보다 그날 나도 참여하면 안 되나?”

    “마음은 고맙지만 로렌스 가문 회의에 블루밍 가문을 이을 사람이 있으면 안 될 것 같아요.”

    “하긴.”

    그녀의 말대로, 로렌스 가문의 회의였다. 윈터는 제가 아내 성을 따르지 않은 걸 후회했다.

    머리로는 납득해 물러났지만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그는 아내가 확고한 결심을 가지면서도 제가 내리는 결정을 두려워하여 여러 번 곱씹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바이올렛이 할 말이 있는지 윈터의 품에서 벗어나 두 손을 모으고 반듯하게 서서 턱을 조금 들었다.

    “그날 에쉬는 왕의 의전을 받으며 나타날 거예요. 왕실 의전 담당자들이 전부 불려 나왔다는 소문이 있더군요.”

    “당신이 더 세게 해. 안 그래도 하옐이 그날 쓸 비용 적당히 계산해서 넣어 뒀어.”

    “그랬나요?”

    “응. 한 번에 다 써. 그리고 내 회사에서 원하는 거 있으면 가져다 쓰고.”

    “회사는 개인 자산이 아니에요.”

    “그렇게 말할 줄 알았지. 이글린 회사 그만뒀어. 그 녀석 가져다 써. 무직자잖아.”

    윈터는 아내를 예상하는 것이 어렵다고 생각했었으나, 이제 와 보니 그녀만큼 알기 쉬운 사람도 드물었다. 그녀는 정도를 걷는 사람이었으니 그 방향만 이해하면 거기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던 것이다.

    바이올렛이 뭐라 대답하기 전에 윈터가 손을 흔들었다.

    “출근할 테니 나오지 마. 추워.”

    “매일 그렇게 옷만 입으면 되는 상태를 하고 침대에 다시 눕네요, 당신은.”

    “그래야 아침 인사를 하지.”

    윈터가 당연한 얘기라는 듯 말하고 그녀의 침실을 떠났다. 같이 있을 때는 하도 달라붙어서 밀어내지만, 윈터가 떠나고 나면 바이올렛은 금방 외로운 기분이 들었다.

    빨리 밤이 되어서 같이 있고 싶었다. 이러다 그가 출장이라도 가면 어쩌나 걱정이었다.

    “……사랑하면 어린애가 된다더니.”

    그녀는 제 외로움을 유치하게 여기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

    바이올렛은 윈터가 돈을 맡겨 놓은 레클 강 하구 섬, 카닉 본사 인근의 은행에 들렀다.

    은행에 있던 파티 비용을 확인한 바이올렛이 한숨을 쉬었다. 제 예상보다 웃돌게 넣어 뒀으리라 짐작해 넉넉히 잡았는데도 그 열 배가 되었다. 짐작하건데 헤스턴 가문에서 계승식을 치를 때 쓴 돈보다도 많을 듯했다.

    바이올렛이 젠과 은행을 나오니 마차 앞에 이글린이 서있었다. 그녀가 서류 하나를 흔들며 달려왔다.

    “바이올렛, 필요하실 에쉬 도련님의 의전 목록 빼돌렸습니다. 이번에 가문 회의 때 사용할 의전 목록이요.”

    “아, 고맙네. 그런데 내가 부탁한 적이 없었던 듯한데.”

    “사실 부탁까진 안 하셨지만, 어차피 필요하시잖아요. 그리고 저 또 사표 냈으니까 저 좀 고용해 주세요.”

    “이야기는 들었네. 자네도 참 진득하지 못하게.”

    “부군께서 일을 너무 시키시잖아요. 어차피 가문 회의까지 저 쓰실 일 많으실걸요?”

    이글린이 능청을 떨었다. 바이올렛도 거기에는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남매인 그녀조차도 이 목록을 구할 방법을 찾지 못했었기 때문이었다.

    젠이 궁금해해서 넘겨주니 그녀가 목록을 읽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작은 마님, 에쉬 도련님 한 분 이동하시는 데 말이 열여섯 필이 필요해요?”

    “응. 왕세자는 여덟 필, 그 외의 직계 자손은 네 필.”

    에쉬 로렌스가 스스로를 왕으로 대우하려 한다는 사실을 안 젠이 저도 모르게 한심해하더니, 권력욕이라고는 조금도 없어 보이는 제 작은 마님을 슬쩍 보았다.

    “그렇다면 우리 작은 마님은 스무 필 정도는!”

    “이제 왕실이 없으니 그런 격식은 따질 필요 없을 것 같구나.”

    “네! 격식을 따질 필요가 없으니까 스무 필도 할 수 있는 거 아닌가요? 그렇죠, 이글린?”

    젠의 공격적인 질문에 이글린이 멈칫하더니 입을 열었다.

    “안 그래도 대표님이요, 이 목록 먼저 보시더니 크루즈를 사고 싶어 하셨거든요.”

    그 말에 바이올렛이 동그래진 눈으로 물었다.

    “정원 파티에 크루즈가 왜 필요할까?”

    “뭐, 다 큰 뜻이 있으셨겠죠. 아무튼 하옐이 작은 마님 질색하신다고 설득해서 아쉽게도 무산됐습니다.”

    바이올렛은 도대체 크루즈가 왜 필요한지 여전히 짐작이 가지 않았으나, 무산이 되었다니 그저 안심할 뿐이었다.

    “남편은 비행선 사업을 통째로 샀으면서 크루즈까지 더 사려하는구나.”

    “그러게 말입니다. 그러고 보니 비행선 연구가 요즘 활기를 띄고 있다더군요.”

    윈터가 침대에서 해 주는 이야기를 들어 보니 그가 빗속으로 비행선을 끌고 나가던 날이 기점이 되어 오히려 연구가 엄청나게 빠르게 진행된다는 모양이었다. 아무도 빗속에 비행선을 끌고 나갈 생각을 하지 않았기에 몰랐던 부분들을 알게 되었다는 아이러니한 이야기였다.

    은행에서 나온 일행은 섬에 있는 화려한 상점들에서 가문 회의 때 장식할 만한 식기나 테이블보를 구할 예정이었다. 그동안 파티를 연 적이 없으니 집에 파티에 쓸 용품이 거의 없었다.

    특히 바이올렛이 관심이 있는 것은 요즘 유행하는 전구 장식들이었다. 하루하루 빠르게 전기가 보급되며 상류층을 위한 전구 장식들이 상점에 들어서고 있었다. 빛은 부를 상징했고, 최근 들어서는 파티의 가장 중요한 장식품 중 하나로 자리 잡았다.

    상점거리로 향하느라 본사를 지나던 바이올렛이 문뜩 생각나 이글린에게 말했다.

    “이글린, 그러고 보면 남편은 이동할 때 항상 하옐과 둘만 다니는 것 같던데.”

    “아, 대표님이요. 대표님은 자기만 타는 마차 늘 대기시켜 놓고, 직원들이 하던 일 멈추고 달려와서 인사하고 이러는 거 정말 싫어하세요. 돈 낭비라고.”

    “아.”

    “그렇다고 의전이 아예 없는 건 아니고요. 회사 모든 일이 눈에 들어오게 서류가 작성되어 있지 않으면 그날은…….”

    “그날은?”

    “……누구 하나 모가지 날아가야 끝나는 날이죠, 뭐.”

    이글린이 생각하니 오싹한지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옆에서 젠도 공감하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이글린, 그때 그거 기억나죠? 솔례트 호텔 내부 벽지 보고서가 안 올라와서 전 직원 불려 왔던 거…….”

    “그, 그때 젠도 있었어요? 진짜 끔찍했지.”

    “제가 그날 그만뒀어요. 작은 마님 떠나시고 그래도 돈 보고 다니려 했는데 그건 너무 끔찍해서…….”

    “악마도 도망칠걸요…….”

    두 사람은 그날을 기억하는 것만으로도 동시에 사색이 되었다. 바이올렛은 괜히 같이 긴장이 되어 두 손을 가슴에 두고 눈을 깜빡거렸다.

    그리고 걸음을 옮기다가 허리에 통증이 있어 손으로 살짝 허리를 눌렀다. 그러자 젠이 예민하게 반응하며 말했다.

    “이번엔 좀 늦어지더니 이제 생리통 시작되셨나 봐요. 약 드릴까요?”

    “아…… 응. 이따가 차 한 잔 할 때 주겠니?”

    “그럴게요!”

    젠이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그녀의 말대로 이번에 주기가 좀 늦어져 저도 모르게 신경 쓰고 있었던 바이올렛이 씁쓸함을 감추고 미소를 지었다.

    *

    티 파티에서 빠져나온 제임스는 막 집사와 양조장을 둘러보고 돌아오는 중이었다.

    블루밍가의 상황은 랜던 부인의 말보다도 심각했다. 어디를 찾아봐도 일하는 사람이 없어 텅텅 비어있었던 것이다. 신경을 곤두세운 그의 귀에 지나가는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까지 들렸다.

    “바이올렛 공주님 이름으로 구입된 건물에 학교가 다섯 개나 세워진대요.”

    “하, 학교요? 정말? 그런데 아무래도 학비가…….”

    “공주님이 어떤 분인지 모르세요? 귀족 자녀가 아니라면 학비 면제랍디다.”

    “어머!”

    자녀를 둔 사람들 사이에서 학교가 세워졌다는 이야기는 너무나 중요한 화제로 보였다.

    저택으로 돌아온 제임스가 분노하며 집사에게 호통을 쳤다.

    “도대체 소작농 관리를 어떻게 한 겐가! 양조장에 사람이 없으면 거기 일까지 같이 책임지게 했어야지!”

    “예, 예?”

    “두들겨 패서라도 끌고 와서 일을 시켜야 할 거 아냐!”

    “그, 그게 무슨…….”

    “당장!”

    “예, 예! 주인어른!”

    집사가 정신없이 달려갔다. 제임스가 정원을 보니 오늘의 티 파티는 여느 때보다 조금 빨리 끝났고, 여느 때처럼 저녁 만찬으로 이어지지도 않은 상태였다. 다들 상황을 살피려 빠져나간 탓이었다.

    그가 저택에 들어섰을 때, 캐서린은 안절부절못하며 돌아다니고 있었고, 디에브는 소파에 앉아 괴로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또 다른 문제가 터졌음을 직감한 제임스가 디에브에게 물었다.

    “무슨 일로 온 게냐, 디에브.”

    그러자 얼굴이 하얗게 질린 디에브가 말했다.

    “어머니의 신탁 자금이 묶여 버렸습니다, 아버지.”

    “……뭐? 그게 무슨 소리야?”

    “그동안 윈터가 카프타운의 땅에서 나오는 소작료를 전부 어머니의 신탁으로 넣고 있었지 않습니까. 언제든 꺼내 쓰실 수 있게. 그런데 그 신탁을 그냥 동결해 버렸답니다.”

    “그, 그게…… 신탁은 어차피 당신 돈인데 어떻게 동결이 가능하단 거요?”

    제임스가 묻자 캐서린이 절망한 표정으로 말했다.

    “디에브의 사업에 수익성이 없다고 판단했답니다. 남부 은행장과 상의해 3년 동안 동결이 되도록 해 놨다더군요. 디에브에게 빌려주려는 걸 보니 내가 돈을 운용할 능력이 없다는 이유로요.”

    캐서린이 믿는 구석은 그녀가 가진 두 개의 신탁이었다. 하나는 제 부모로부터 받은 것이었고, 또 다른 하나는 윈터로부터 받은 것이었다.

    지금까지 그녀는 이 돈을 당연하게 여겨 왔었다. 그런데 그중 하나가 끊겨 버리니 머릿속이 새하얘지던 참이었다.

    디에브가 욱해서 말했다.

    “그러니까 어머니, 왜 바이올렛을 때리신 겁니까? 그 연약한 사람을.”

    “디에브, 너 지금 누구 편을 드는 거니!”

    “저 이 돈 정말로 필요합니다. 이 돈이 없으면 제가 지금까지 사업에 투자했던 것들까지 전부 무효가 된단 말입니다!”

    어머니에게서 더 이상 돈이 나올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디에브가 이제는 간절한 얼굴로 제임스를 보았다.

    이미 블루밍 가문 회의로부터 어마어마한 원성을 들어 왔던 제임스는 믿고 있던 아내의 신탁 자금까지 동결되자 한 가지 결론밖에 낼 수 없게 되었다.

    “캐서린, 바이올렛에게 사과하고 신탁만이라도 풀어달라고 부탁해 봐요.”

    “뭐라고요?”

    “그것밖에 방법이 없지 않소.”

    “맙소사.”

    캐서린이 충격받은 얼굴을 하자 그의 아들까지 말을 보탰다.

    “어머니, 제발요. 이 신탁만이라도 풀어 달라고 말씀해 주세요.”

    캐서린은 억장이 무너지는 기분이었으나 이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반드시 윈터의 도움이 필요했다.

    윈터에게라면 그래도 사과를 할 마음이 들지만, 이전에는 아무 고민 없이 유지되던 제 평화를 박살 내 버린 바이올렛에게 사과할 마음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윈터가 돈을 허공에 날려 버리게 만든 것도 바이올렛 로렌스였고, 그가 아들 노릇조차 하지 않게 만든 것도 바이올렛 로렌스였다.

    캐서린은 그녀가 죽이고 싶을 만큼 미웠다. 그녀가 사라지면 윈터가 제게로 돌아올까, 생각할 정도였다.

    심지어 남편은 제 친아들인 윈터를 내심 아끼는 눈치였고, 디에브는 예전부터 바이올렛에게 흑심이 있었다. 제 마음을 알아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녀가 분노하며 제임스를 노려보았다.

    “당신의 그 천한 사생아를 받아 준 대가가 이거군요.”

    “캐서린…… 부탁이오.”

    그녀를 더 화나게 해 봤자 사과하러 가게 만드는 일에 도움이 안 될 것을 알고, 제임스가 한층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달랬다. 캐서린은 서러움으로 떨리는 숨을 내쉬고 휙 돌아 제 방으로 들어섰다. 제임스가 다정한 목소리로 밖에서 설득했지만 대꾸하지 않았다.

    이제와 그녀는 윈터가 그리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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