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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131화 (131/176)
  • 131화

    한마디 더 할까, 하던 바이올렛이 멈칫했다. 윈터의 총격 사건 날부터 종종 심한 어지러움이 느껴질 때가 있었다. 처음엔 혹시 임신 때문에 생긴 열일까, 살짝 기대한 적도 있었으나 월경이 시작되어 아님을 알았다.

    아마 남편을 구한 대가이리라. 바이올렛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렇다고 생각하니 이 아픔이 견딜 만하게 느껴졌다.

    그녀는 윈터가 눈치 채기 전에 그의 품에 얼굴을 감추며 말했다.

    “다음 주부터는 따로 자요.”

    “……이 상황에서 갑자기 왜 그런 말이 나와? 방금 내가 뭐 잘못했어?”

    “아뇨. 그런 건 아니에요.”

    “알리카에 가자고 해서 그래?”

    “그곳은 가보고 싶으니 더 추워지기 전에 다녀와요, 우리.”

    “그럼 왜?”

    바이올렛이 대답 대신 입꼬리를 살짝 끌어 올렸다가 잠을 청했다.

    그녀가 잠든 후에도 윈터는 충격 받은 얼굴로 제가 뭘 잘못 말한 건지 한참을 고민해야 했다.

    *

    수도에서 기차로 일곱 시간 떨어진 남부에서는 이제 막 여름이 끝나고 다시 파티의 계절이 시작되고 있었다.

    블루밍 가문 저택에서 토요일마다 열리는 티 파티의 횟수는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이미 블루밍 공작 부부와 아들의 관계가 파탄 났다는 것이 워호슨들 사이에 퍼져 나갔다. 여기서 티 파티 횟수를 줄이는 것은 그들이 장남인 윈터 블루밍에게 경제적으로 지나치게 매여 있음을 기정사실화 하는 셈이었다.

    그들이 티 파티 횟수를 줄이지 않은 덕에 워호슨들은 여전히 블루밍 가문에 탄탄한 기둥이 남아 있다고 믿었다.

    윈터 블루밍이 쓰러진 직후만 해도 그 믿음이 견고했었고, 그가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태로 병원에 입원해 있다는 소문이 남부를 휩쓴 이후에는 오히려 그들 부부에게 막대한 유산이 떨어질지도 모른다는 기대감마저 생겼다.

    윈터가 회복되었다는 사실이 전해졌으나, 지금은 남부가 가장 풍족해지는 수확의 계절이었다. 분위기는 여전히 흥겨웠다.

    캐서린은 가을 동안의 티 파티를 위해 여전히 넉넉한 양의 보석이며 드레스를 사들이고 있었다. 하녀들이 그녀의 단장을 도운 뒤 캐서린이 밖으로 나서자 제임스가 급한 걸음으로 나타나 낮게 말했다.

    “디에브가 또 사업을 벌였다더군. 또 당신이 돈 빌려준 거요?”

    “네. 아들이 한다는데 당연하죠.”

    “캐서린! 디에브가 사업에 재능이 없는 걸 알지 않소! 그 애가 자꾸 사업에 뛰어드는 건 윈터에게 질투해서라는 걸 알면서!”

    “질투라니요? 우리 아들이 왜 그런 사생아를 질투할 거라고 생각해요, 제임스?”

    캐서린이 정색하자 제임스가 앓는 소리를 냈다.

    “지금까지 당신이 디에브에게 돈을 빌려주고 나면 그 재산을 채워 준 게 윈터요. 그러니까 이제 그 녀석에게 돈을 빌려주면 안 된단 말이오! 게다가 씀씀이도 이제…….”

    “씀씀이가 왜요?”

    캐서린이 기가 차서 말을 이었다.

    “내가 이번 달에 사들인 것들에 대해 말하려면, 당신이 산 말들부터 얘기하죠?”

    “그건 다 사회생활에 필요한 거잖소.”

    “티 파티는 내 사회생활이에요!”

    부부는 지금껏 돈 문제로 싸울 일이 없었으나, 최근 들어서는 누구 하나 입만 열면 다툼이 시작되었다.

    아직도 두 사람은 저희의 재산에 대해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만큼 막대한 재산을 양가 부모에게 물려받았고, 아무리 그 재산을 날려도 오히려 불어날 만큼 윈터가 채워 주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곧 다툼을 묻어두고 자애로운 얼굴로 티 파티 장소에 도착했다. 손님들이 먼저 와 있는 곳에 부부가 자리했다.

    “어머. 가을에 잘 어울리는 드레스로군요, 블루밍 부인.”

    “제임스 전하께서는 이번에도 가장 훌륭한 말을 사셨다면서요? 이따가 보여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저도 구경하고 싶어요!”

    여느 때처럼 늘 티 파티에 참여하는 귀족들이 호스트 부부에게 관심을 보이고 칭찬했다.

    언제나 이런 분위기 속에서 살아온 블루밍 공작 부부는 금방 돈 문제 따위는 잊고 티 파티를 즐기기 시작했다.

    그때, 조상의 권세는 미약하나 남부에서 가장 넓은 땅을 가진 랜던가의 안주인이 조금 늦게 도착했다.

    그녀는 다소 경황이 없어 보였고, 자리에 도착하자마자 평소 그녀답지 않게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리고 잔을 내려놓은 랜던 부인이 먼저 제임스에게 다가갔다.

    “보고 들으셨지요? 남부 농민들 이야기.”

    “농민들 이야기? 무슨 소립니까?”

    제임스가 전혀 모르는 이야기라는 듯 되묻자 랜던 부인이 기가 찬 것을 감추지 못하고 대답했다.

    “일꾼들이 단체로 파업을 한답니다. 아니, 파업이 아니라 워호슨 다섯 개 가문에선 일을 하지 않겠답니다.”

    “그게 무슨 소립니까?”

    제임스가 이해조차 하지 못하니, 랜던 부인의 표정에서는 이제 서늘함마저 느껴졌다.

    “아, 정말 사실이군요. 가문 경제를 전부 큰아드님께 맡겨 놨다더니.”

    “랜던 부인. 그게 무슨 무례한 소립니까!”

    “그 다섯 개 가문에서 일하던 일꾼들 일부는 벌써 롱 리우드와 카프타운으로 이동했답니다!”

    “거긴 왜…….”

    “왜겠어요? 그 두 지역 땅 대부분이 윈터 경의 소유니까요! 카닉사에서 이주를 위한 비용을 전부 냈다고 소문이 자자하더군요. 심지어 농가의 아이들을 위한 학비 면제 학교를 다섯 개나 짓고 있다더군요.”

    제임스는 여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으나, 손님들 중 많은 고용인을 가진 귀족 몇몇이 관심을 가지고 다가왔다.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랜던 부인?”

    “일꾼들이 남부 다섯 가문의 일을 안 하겠다고 했다니까요. 블루밍 가문 양조장도 텅 비었을 겁니다.”

    “그럼 소작농들에게 시키셔야죠.”

    “아, 답답해라. 지금 같은 수확 철에는 소작농들도 다른 일꾼을 고용해야할 정도인데 무슨 수로요!”

    끝없는 평야를 가진 남부는 지금이 포도며 곡물 수확이 절정인 계절이었다.

    남부의 농사꾼들이 가장 피땀 흘리는 시기가 지금이었다. 얼마나 일이 많은지 갓난아이를 업고 일하는 여자들까지 있을 정도였다.

    요즘처럼 손이 부족할 때가 일꾼들에게도 가장 돈을 벌어놓기 좋은 시기였다.

    그럼에도 파업이 가능한 것은 그럴 만한 돈이 카닉사로부터 나왔기 때문이었다.

    노동력이 이동하게 된다면 드넓은 농지를 가진 남부에는 큰 타격이었다. 그러나 농지에 관심이 많은 랜던 부인만큼 사태의 심각함을 아는 귀족은 아무도 없었다.

    제가 땅을 가졌으니 소작료는 당연히 받는 것이라, 그들 모두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일꾼들을 언제든 저희 마음대로 휘두르는 존재라 여겼으므로, 그들이 본인들의 생각과 계획을 가지고 이동해 부릴 사람이 없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아무도 제 말을 알아주지 않으니 랜던 부인은 속이 탔다.

    “애초에 왜 일을 이렇게 만드셨습니까? 캐서린 부인, 부인께서 윈터 경께서 누워 계실 때 바이올렛 부인의 뺨을 때리셨다는 게 사실입니까?”

    그녀가 따지듯 말하자 캐서린이 눈이 동그래져서 대답했다.

    “훈육이었습니다. 게다가 바이올렛 그 애도 나를 때렸고요.”

    “남편이 누워 있는 사람의 뺨을 때리시고도 원한이 깊지 않을 줄 아셨습니까? 집안 경제를 다 윈터 경께 맡겨 놓고 무슨 생각으로 등을 돌리신 겁니까? 아니, 적으로 만들 거면 혼자 만드셨어야지, 왜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피해를 주시는 거예요!”

    랜던 부인이 저에게 피해를 주고도 아무 것도 모르고 있는 캐서린에게 언성을 높였다. 그 말에 슬슬 이상함을 느꼈는지 몇몇이 헛기침을 하며 티 파티를 빠져나가 집으로 돌아가 확인하려는 기색을 보였다.

    블루밍 공작 부부는 여전히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고, 랜던 부인의 말에 충격 받은 표정의 캐서린은 다른 부인들의 부축을 받았다.

    제임스가 서둘러 걸음을 옮기더니 집사를 불렀다.

    “랜던 부인 말이 무슨 말인지 알아 오게.”

    “예, 주인어른.”

    집사가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

    바이올렛과 한 침대에서 잠드는 것이 반복되자, 윈터의 생활 패턴에는 큰 변화가 생겼다.

    본래 그는 늘 누구보다 늦게 자고, 누구보다 일찍 일어나는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매일 정시에 잠들고 보통은 정시에, 가끔은 정시보다 조금 늦게 눈뜨는 바이올렛의 수면 시간은 그에게 길어도 너무 길었다.

    이른 새벽 언제나처럼 눈을 뜬 윈터는 한참 그녀의 얼굴을 보다가 조용히 침실을 나왔다.

    새근거리는 숨과 보드라운 몸이 제 품에 안겨 있노라면 세상을 다 가진 기분임과 동시에 온몸이 열로 후끈거려 견디기 힘들었다.

    그는 침실을 나오자마자 곧바로 하옐에게 연일 신경전을 벌이는 중인 남부의 보고서를 받았다.

    보고서를 다 확인하고 지시까지 하고나면 아내가 좋아하는 심미적으로 훌륭한 몸을 만들기 위해 강도 높은 운동을 하고 목욕을 한 후 다시 잠옷을 입고 침대로 돌아왔다.

    그 정도는 해야 슬슬 바이올렛이 눈을 뜰 시간에 가까워졌다.

    그렇게 알찬 시간을 보내고 침대에 드러누워서 아내의 뺨을 만져 볼까 말까 고민하다 보면 그녀가 잠에서 깨어났다.

    눈이 마주치자 윈터가 말했다.

    “당신이 그런 허약한 몸으로도 피부만큼은 좋은 이유는 잠을 많이 자서야.”

    이게 무슨 소린가, 바이올렛이 미간을 좁히자 윈터가 입꼬리를 늘리며 말했다.

    “사랑해.”

    “나도 사랑하지만 자꾸 그렇게 많이 잔다고 놀릴 거예요? 당신이 너무 적게 자는 거예요.”

    왜 자꾸 놀리냐는 듯 저를 흘겨 되레 불이 붙게 하는 바이올렛의 눈빛을 못 견딘 윈터가 그녀에게 입을 맞췄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체념하는 바이올렛이 귀여워 어깨를 들썩이고 웃어 버리다가 그녀의 목덜미에 입을 맞추면 그제야 바이올렛이 윈터를 밀어냈다.

    “이제 정말 따로 자야겠어요.”

    “이제 추워지니 더더욱 같이 자야지.”

    “장작 살 돈 정도는 있잖아요. 게다가 툭하면 밤마다…….”

    “밤마다 뭐.”

    바이올렛이 목소리를 가다듬고 침착하게 말했다.

    “그렇게 매번 몸으로 사람을 홀리는 건 나쁜 습관이에요.”

    “당신이 자꾸 넘어오니까 버릇이 되는 거야.”

    윈터가 뻔뻔한 얼굴로 대답했다. 바이올렛은 가임기고 뭐고 전혀 상관없는 윈터 덕에 많이 힘들었는지 다소 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어제는 일부러 와인으로 셔츠를 적신 거죠?”

    “응. 당신 보기 좋게 벗으려고.”

    그의 태연한 대답에 바이올렛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

    “고작 날 유혹하려고 셔츠를 더럽히는 건가요?”

    “장작은 못 사도 새 셔츠살 돈은 있거든.”

    “농담하지 말아요. 이제는 그런 수작에 넘어가지 않을 거예요. 당신에게는 정절이 필요해요, 윈터.”

    바이올렛의 단호한 말에 윈터가 코웃음 쳤다.

    “당신과만 뒹구는데 무슨 정절 타령이야.”

    바이올렛이 저를 사랑한다는 걸 알게 된 이후, 윈터는 되레 더 뻔뻔해진 구석이 있었다. 특히 아내에게 맞춰 어떻게 도련님 노릇을 해 볼까 골머리 썩던 것을 그냥 포기해 버린 것이 컸다.

    그는 이제 꽤나 예법을 알았다. 그러니 바이올렛 입장에서 더 황당해지는 것이었다.

    “옷도, 말도 좀 단정해질 순 없나요?”

    “나도 당신이 좀 더 무례해지길 바라는데 불가능하잖아. 서로 안 되는 건 포기하자.”

    윈터는 안 되는 듯이 대답했으나, 바이올렛에게 배운 덕에 격식 있는 자리에서만큼은 어느 정도 예법을 따랐다.

    그 상황에서 벗어나자마자 평소의 그로 돌아오는 윈터가 바이올렛은 싫지 않았다.

    지금은 그저 밤마다 지나치게 달라붙는 남편이 얄미워 트집을 잡는 것이었고, 윈터 역시 그걸 알고 능청을 떨며 받아 주는 것이었다.

    당신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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