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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129화 (129/176)

129화

바이올렛의 식사가 길어지고 있었다. 경호원들이 윈터와 가끔 어울려 술친구를 해, 그에 대해 전혀 모르던 이야기를 들려주었기 때문이었다.

샌토르가 말을 이었다.

“경기가 끝나면 대표님께서 술을 사셨거든요. 돈 되는 자리면 드물게 본인도 오셨습니다. 선수들도 어지간히 마시는데, 대표님은 더더욱 많이 드세요.”

“그건 알고 있네.”

“그래서 남부에 좀 가시라고 저희가 말씀드릴 때마다 버럭 화내시면서 날린 돈을 벌어야 할 것 아니냐고 하시더니 딱 한 번…….”

“한 번?”

“많이 취하셔서는 작은 마님께서 자길 버러지로도 안 볼 거라면서.”

그 말에 바이올렛이 입을 다무는데 샌토르가 말을 이었다.

“작은 마님은 마치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것 같다는 말씀을 하시더군요.”

“아, 아아…….”

“그 뒤부터는 폭주하셔서 얼굴도 천사고 성격도 천사고 목소리도 천사고 어쩌고저쩌고, 자기 같은 천한 놈은 가까이도 가면 안 된다고 하시던데! 도대체 왜 집에 안 가시는지 이해가 안 가더라고요! 너무 취해서 다음 날 기억도 못 하시고!”

샌토르가 생각해 보니 이해가 안 되는지 격앙되어 토해 내는 말에 당황해하던 바이올렛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 남자는 정말 바보구나, 하고 생각하는 바이올렛의 시선에 식당 밖 벤치에 기댄 윈터 블루밍이 보였다. 회사에서 나와 바로 온 모양이었다. 윤기 없는 밤색 정장이 근사하게 어울렸다.

의자는 키에 비해 낮은 탓에 등받이에 기대서서 긴 팔다리를 자랑하며 고개를 젖히고 낙엽을 구경하는 눈부신 남자를 보니 바이올렛의 얼굴이 더더욱 붉어졌다. 심장이 쿵쿵거리다 못해 밖으로 뛰쳐나올 것 같았다.

바이올렛은 일행에게 천천히 식사를 마치라고 말한 후 몸을 일으켰다.

“단풍 구경해요?”

바이올렛이 묻자 윈터가 그녀를 돌아보았다.

“응.”

“의외네요. 단풍 구경 같은 거 안 좋아할 것 같았는데.”

“안 좋아해. 당신이 좋아해서 보는 거지.”

윈터가 몸을 바로 하며 하는 말에 바이올렛이 저도 모르게 살짝 미소를 지었다.

“그랬군요.”

“무슨 점심을 5시까지 먹고 있어?”

“당신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어요.”

바이올렛의 목소리에서 옅은 즐거움이 묻어나, 윈터가 픽 웃었다.

“내 욕 하니 좋았어?”

“욕한 거 아니에요.”

“그럼 됐어. 옷이나 사러 가지. 이건 불편해 보이니까.”

윈터가 격식 있는 바이올렛의 드레스를 턱짓하자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

그들이 찾아간 곳은 시내 의상실이었다.

디자이너인 주인을 포함하여 직원만 열 명이 넘는 수도 사교계에서 제법 잘나가는 곳이었다. 귀족보다는 부르주아를 상대하는 곳이라 바이올렛이 아는 사교계 의상들과는 사뭇 분위기가 달랐다.

바이올렛이 완전히 새로운 감각으로 만든 드레스를 신기해하며 살폈다. 그사이 의상실 주인이 호들갑을 떨며 나타났다.

“세상에! 바이올렛 공주님 아니세요?”

“부인이라고 불러 주시겠소?”

“아휴, 죄송해요. 너무 반가워서! 부인께서는 사교계에 염증을 느끼셔서 얼굴을 비치지 않으신다고 들었거든요.”

“……그런 소문이 있소?”

바이올렛이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자 윈터가 핀잔했다.

“당연히 그런 소문이 돌지. 그 좋은 정원이 있는 집에서 파티는 안 열고 책만 읽고 계시니.”

“여유가 없었어요.”

“무슨 여유가 없어, 그냥 당신이 파티를 안 좋아하는 거지. 파티 좋아하는 사람이었으면 수도 온 이후에 열 번은 했을걸.”

윈터가 그리 말하는 사이 의상실 주인이 어깨끈이 얇은 끈으로 이루어진 시스라인 드레스를 가져왔다.

태어나서 한 번도 입어 본 적 없는 세련된 드레스에 바이올렛이 머뭇거리다가 궁금했는지 일단 옷을 갈아입기로 했다.

잠시 후 홀터 네크라인으로 된 하얀색 드레스를 입은 바이올렛이 걸어 나왔다. 그 위에 깃털 숄을 덮은 바이올렛이 거울을 보며 웃었다.

“너무 안 어울리지 않아요?”

그녀의 말에 의상실 주인이 단호하게 말했다.

“전혀요. 공주님께서 이렇게 입고 나가시면 귀족들이 다 따라 하려 들걸요?”

그녀의 말대로, 다른 직원들이며 손님들까지도 홀린 듯이 바이올렛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사이 나갔던 윈터가 돌아왔다. 그는 바이올렛이 입은 드레스를 쓱 보더니 바로 드레스값을 지불한 후 밖에서 사 온 상자를 열었다. 그리고 안에서 에메랄드가 촘촘히 박힌 목걸이를 꺼내 보였다.

“급하게 산 거라 괜찮은지 모르겠네.”

윈터의 말에 의상실 주인이 경악하며 말했다.

“그, 그걸 급하게 사셨다고요? 너무 비싸서 아무도 못 사고 몇 년째 보석상에 진열되어 있던 건데!”

윈터는 귀찮은지 대답도 하지 않고 바이올렛에게 물었다.

“어때? 드레스에 대충 맞춰 산 건데.”

그의 말에 뒤에서 ‘대충…….’ 하는 혼이 빠져나간 듯한 직원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바이올렛은 잔소리를 하느니 빨리 빠져나가는 게 나을 것 같아 무작정 고개를 끄덕였다.

윈터가 바이올렛의 목에 목걸이를 걸어 주었다. 그의 고르는 눈이 뛰어나 드레스와 절묘하게 잘 어울렸다. 바이올렛이 거울을 보며 말했다.

“내가 고르는 것보다 훨씬 낫네요.”

“그걸 말이라고 해? 보석을 사도 내가 당신 몇백 배는 많이 사 봤을 텐데.”

말을 마친 윈터가 바이올렛을 이리저리 살폈다. 그 집요하리만큼 뜨거운 눈빛에 다른 사람 보기 부끄러워진 바이올렛이 의상실 사람들에게 서둘러 인사하고 윈터의 등을 떠밀었다.

밖으로 나와 보니 번화가를 지나는 사람들의 시선이 부부에게로 향했다. 윈터는 수도의 모든 골목을 제 손바닥 위처럼 잘 알고 있었다.

골목 구경을 하고 간단한 간식을 산 후, 소박한 노천극장에 들어섰다. 좌석이 따로 없어 가격이 동일한 표를 사서 들어간 두 사람은 계단에 대충 자리를 잡고 앉았다.

윈터가 마음에 드는 자리를 찾아 큰 천을 깔고는, 바이올렛의 표정에 어깨를 들썩이며 웃었다. 바이올렛의 눈이 호기심으로 반짝거리고 있었다.

“노천극장은 처음이에요. 말로만 들었지.”

“그렇게 신나?”

“네. 데려와 줘서 고마워요.”

바이올렛의 행복한 반응에 윈터 역시 만족한 표정이었다. 소풍을 나온 것처럼 과일과 초콜릿, 마실 것을 펼쳐 놓고 있으니 연극이 시작되었다.

윈터가 아내가 준 물을 바라보며 투덜거렸다.

“여기까지 와서 맹물을 마시게 하다니.”

“상처 아물 때까지 금주예요. 또 쓰러지기라도 하면 어떡해요.”

아내는 아무래도 자기가 남편을 지켜줘야 하는 걸로 착각하고 있는 듯했다. 물론 윈터가 죽을 고비를 넘기긴 했지만, 한 달을 쉬었더니 상처를 제외하면 오히려 여느 때보다 건강한 상태였다. 그걸 말해도 바이올렛은 믿질 않았다.

심지어 곧이어 시작된 연극마저 편치가 않았다.

연극은 외도하는 남자의 아내에 관한 이야기였다. 여자는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는 남자를 위해 매일 집을 깨끗이 청소했다.

세 달을 다른 여자와 살다가 모른 척 돌아온 남편의 선물을 행복한 얼굴로 바라보는 여자의 얼굴에 윈터가 바이올렛을 보며 말했다.

“내가 세 달 안 들어온 적도 있나?”

“…….”

바이올렛이 대답이 없어 윈터가 속이 타서 계속 물을 벌컥벌컥 들이켜고 있는데, 설상가상으로 여자가 병에 걸리기까지 했다.

병원비가 많이 들 거라는 이야기를 남편에게 하기 위해 일터를 찾은 여자는 그제야 남편이 외도 중이라는 것을 발견해 크게 충격을 받고, 남편이 다시 외도를 위해 긴 출장을 간다는 거짓말로 떠난 후 병원비를 스스로 마련하기 위해 제가 매일매일 닦던 집 안의 은식기들을 팔기 시작한다.

아픈 몸으로 장사를 하던 여자는 길에 쓰러지게 되는데, 그녀를 구해 준 한 신사의 도움을 받으며 2부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2부에서는 본격적으로 두 사람이 사랑에 빠지고, 전남편이 뒤늦게 후회해 찾아오며 이야기가 이어졌다.

바이올렛은 초롱초롱한 눈으로 연극에 푹 빠져 있었고, 반대로 윈터는 안절부절못하느라 몇 번을 일어났다가 앉았다가를 반복하고 있었다.

여자의 병색이 짙어지며 점점 흐느끼는 사람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무대 장치를 바꾸는 사이, 바이올렛이 윈터를 보며 말했다.

“이렇게 몰입해서 연극을 본 건 처음이에요.”

그녀의 말에 윈터는 가슴이 철렁해 대답을 하지 못했다.

연극은 기적적으로 여자가 살아나 신사와 백년해로하는 것으로 끝났고, 그제야 사람들이 눈물을 닦고 정신없이 박수를 쳤다.

바이올렛 역시 열심히 박수를 치고 나서 후련한 표정을 지었다.

“정말 재미있네요. 한 번 더 보고 싶어요.”

윈터는 대답 없이 표정을 구기고 과일들을 먹어 치우고만 있었다.

연기자들이 인사를 하러 무대 아래로 내려와 돌아다녔다. 잠시 후 연기자들이 부부를 발견했다. 다들 그들처럼 신분 높은 이들이 저희 연극을 봤다는 사실에 눈이 휘둥그레져 있었다.

차마 가까이 오지 못하고 그들이 발만 동동 구르자 바이올렛이 윈터에게 물었다.

“왜 가까이 오지 않을까요?”

“공주님한테 어떻게 가까이 와. 당신이 손이라도 흔들어 줘. 좋아서 날뛸 테니까.”

그 말에 잠시 망설이던 바이올렛이 살짝 손을 흔들었다. 그러자 연기자들이 저들끼리 꺅 비명을 지르며 들떠서 꾸벅 인사하고 달려갔다.

그 모습이 귀여운지 바이올렛이 웃자 윈터가 말했다.

“그렇게 마음에 들면 제대로 된 극장에 걸어 주지.”

“당신이 유능한 건 알지만 수도 극장은 로우 가문이 거의 다 소유하고 있어서 쉽지 않을 거예요.”

“극장을 사면 되지, 무슨 걱정이야. 그리고 애초에 내가 가진 게 건물밖에 없는데 아무 곳에서나 하면 어때. 호텔 로비도 저 무대보단 훌륭할 텐데.”

윈터가 투덜투덜 말을 이었다.

“하지만 나는 연극 마음에 안 들었어. 우리 얘기 같잖아.”

“어느 부분이요?”

“당신 집에 두고 내가 나돌다가 버려진 게.”

그의 서글픈 목소리에 바이올렛이 잠시 윈터를 보더니 농담처럼 말했다.

“외도라도 했나요?”

“그건 진짜 무례하군.”

“그런 게 아니라면 전혀요. 당신은 누구보다 열심히 살았어요. 그걸 누가 부정할 수 있겠어요?”

그녀가 다정히 말하고는 미소를 지으며 놀리듯이 말을 이었다.

“당신이 그런 생각 안 하도록 더 많이 사랑해줘야겠네요.”

바이올렛의 말에 윈터가 잠시 생각하다가 그녀에게 얼굴을 가까이 하고 말했다.

“당신은 사랑을 받는 것에 익숙하게 생겼는데, 퍼 줄 사랑이 많기도 하군.”

“싫어요?”

“믿기지가 않아.”

윈터가 대꾸하더니 바이올렛의 손을 꽉 쥐었다.

꽃다발을 사 왔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하옐에게 휴가를 줘 버리는 바람에 저 혼자 꽃집에 들어가려니 그건 영 낯간지러워서 아내와 함께 들어갈 생각이었다.

꽃을 사러 가자고 말하려는데, 하늘에서 한두 방울씩 가을비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윈터가 인상을 쓰며 말했다.

“예고도 없었는데.”

“와, 가을이 오긴 하나 봐요. 차가워지네요, 빗방울이.”

“한가하게 그런 소리 하고 있을 때야? 당신 금방 감기 걸려.”

윈터가 곧장 제 겉옷을 벗어 바이올렛에게 건네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제 건물 중에 가장 가까운 건물을 발견한 윈터가 그 방향으로 바이올렛을 이끌었다.

그때 바이올렛이 멈춰서더니 겉옷을 그에게 돌려주었다.

“당신 입어요. 아직 상처가 아물지 않았잖아요.”

그러자 윈터가 휙 바이올렛을 돌아보더니, 겉옷을 잡아 우산처럼 그녀의 머리 위를 가리며 말했다.

“다친 것도 서러운데 신사 노릇도 못하게 하지 마, 공주님.”

“……신사 노릇 싫다면서.”

“원랜 질색이었는데, 당신에게 에스코트 받느니 내가 신사가 되는 게 낫겠더군.”

윈터가 놀리듯이 말하고는 난처해하는 아내의 이마에 쪽 소리가 나게 입을 맞추고 팔을 잡아끌었다.

당신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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