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화
말문이 막혀 멈칫하는 에쉬를 뒤로 하고 전달을 마친 바이올렛이 공손히 인사했다.
“방해해서 죄송했습니다. 가 볼게요.”
그녀가 말을 마치고 천천히 걸어 나와 복도에 나섰을 때였다. 에쉬와 제프 로렌스가 뒤따라 나왔다.
“바이올렛!”
바이올렛이 돌아보자 제프가 에쉬의 수족처럼 그가 할 말을 대신했다.
“이게 무슨 짓이야. 어떻게 우리 가문에 이런 망신을 줘! 게다가 우리 아버지가 가진 의석까지 뺏겠다고?”
제프는 여자의 몸에 손을 대는 짓은 하지 않았으나, 위협 정도는 해도 된다고 보는 에쉬와 동류의 사람이었다.
바이올렛의 뒤에 서 있는 건 기껏해야 어리고 체구도 작은 하녀 하나였다. 아까부터 기가 죽어 있던 그 하녀가 어디론가 쪼르르 사라지기까지 하자 더 기가 살아난 제프가 말을 이었다.
“네 행동들은 로렌스 가문을 도와주는 게 아니야.”
“제프, 혹시 에쉬와 많이 연계가 되어 있니?”
바이올렛이 침착하게 묻는 말에 제프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그야, 에쉬와 매주 폴로를 하러 다니니까.”
“이게 못 하는 말이 없네. 에쉬, 네 말이 맞아. 바이올렛이 이상해졌어.”
그의 말에 에쉬가 태연히 대답했다.
“내가 말했잖아. 그 천한 이방인과 살다 보니 주술이라도 걸린 거라고.”
“안 되겠군. 어차피 가문 회의를 열 거라면, 바이올렛을 로렌스가에서 완전히 제외하는 걸 건의해야 하지 않겠어?”
제프가 이야기하자 바이올렛이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조용히 말을 이었다.
“그 폴로 모임을 알아보니 큰일이 많이 오가더구나, 제프.”
“뭐, 뭐?”
“실수 한 적 없어?”
윈터가 종종 쓰는 화법을 배운 바이올렛이 넘겨짚어 말하자 제프가 창백해져 입을 다물었다. 그러자 에쉬가 표정을 찡그리며 말했다.
“그까짓 소작료 내역 좀 알았다고 기고만장하지 마, 바이올렛. 어차피 왕실 재산이었어. 소작료 좀 받아 냈다고 너 말고 누가 뭐라고 할 것 같아?”
“다수의 사람들이. 왕실을 해체하고 진심으로 사과했음을 믿고 용서해준 선량한 사람들이 화를 낼 거야. 아버지의 실패를 해결하려는 아들의 책임감을 믿던 사람들. 사람이 물건처럼 이용하고 나면 끝나는 줄 알아?”
바이올렛의 말에 제프의 표정이 굳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심하게 구겨진 것은 에쉬의 얼굴이었다. 그가 노기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서 네가 어리석은 거야. 라크라운드는 몇 명의 귀족들의 손으로 돌아가. 인원이 많다고 뭐 대단한 일을 할 수 있을 것 같아?”
“아, 에쉬.”
바이올렛이 무언가 기억하고는 천천히 에쉬에게 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겁이 나는구나?”
“뭐?”
“적어도 우리가 같이 자랐으니 겁이 난 얼굴 정도는 알아봐.”
“너…….”
“네 말이 맞아. 소작료 정도 알아낸 건 아직 아무것도 아니지.”
이용하기 좋은 패로 여기던 그녀가 정말로 자신의 목을 조르리란 걸 깨달은 에쉬의 등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차라리 여기서 그녀를 처리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마저 들던 순간이었다.
복도 끝에서부터 정장 차림의 우락부락한 사내 열 명이 다가왔다. 에쉬가 기가 차서 말했다.
“호위를 많이도 끌고 다니는군.”
그 말에 바이올렛이 뒤를 돌아보았다가 화내던 것도 잊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빨리요! 우리 작은 마님 혼자 계시잖아요!”
거구들 사이에 파묻혀 있던 젠이 후다닥 앞으로 나서서 사내들을 인솔했다.
이게 무슨 일인가 생각하는 바이올렛의 눈에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이전에 윈터와 함께 갔던 스포츠 경기장에서, 그녀가 돈을 걸었던 적이 있는 선수 샌토르 탄이었다.
젠이 얼른 바이올렛에게 소개했다.
“작은 마님, 이분들은 카닉 호텔 경호를 담당하는 직원분들이세요.”
“경호? 그 사람들이 왜 여기에 있니?”
“대표님이요, 작은 마님이 오늘 다수에게 싸움을 걸러 가니 우리 쪽도 다수가 가자고 하시더라고요.”
“……세상에.”
“미리 말씀드리면 못 오게 할 거라면서 도착하면 말씀드리라고 하셨어요.”
젠의 해맑은 목소리에 바이올렛이 헛웃음을 지었다. 젠은 무슨 일이 있어도 제 편이었지만 제 신변에 있어서는 절대적으로 윈터의 의견을 따랐다.
샌토르가 먼저 바이올렛을 알아보고 달려와 한쪽 무릎을 굽혔다.
“작은 마님,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오늘부터 작은 마님을 모시게 될 샌토르 탄입니다.”
“카이슬 선수로 알고 있었네만.”
“작년에 큰 부상을 당해 은퇴하게 되었습니다. 대표님께서 받아 주신 덕에 카닉사 경호원으로 일하고 있었는데, 오늘부터는 작은 마님을 모시라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오늘부터는’이라니? 오늘만이 아니라?”
“예, 저는 오늘부터 계속 작은 마님을 경호하게 되었습니다.”
샌토르의 말에 바이올렛이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아마 총격 사건 때 바이올렛이 위험에 처했던 것이 윈터에게 큰 충격이었던 모양이었다. 그렇다고 열 명을 따라오게 한 건 너무하지 않나.
바이올렛이 생각하며 이야기하던 두 사람을 돌아보니 표정이 구겨져 있었다.
“이만 가 볼게.”
바이올렛이 인사한 후 다시 돌아보자 호위들이 갈라지며 그녀가 지나갈 길을 터 주었다. 바이올렛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 사이로 지나가자 호위들이 뒤를 따르며 힐끔 에쉬를 돌아보았다.
에쉬는 짜증이 울컥 나서 돌아서며 제프에게 말했다.
“이만 돌아가지.”
“어, 어? 그래.”
제프가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에쉬가 다시 식사 자리로 돌아가는데 디저트를 내오러 레스토랑 직원들이 와 있었다.
에쉬는 순간, 그들이 기사가 나기 전보다 미묘하게 냉랭한 표정을 짓고 있음을 느꼈다.
*
얼떨결에 겁을 주게 된 바이올렛이 빙그레 웃었다. 제프도 그렇지만 특히 에쉬는 언제 윈터에게 보복당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윈터도 온갖 곳에 촘촘히 권력으로 연결되어 있는 에쉬에게 함부로 하지 못하지만, 그래도 에쉬는 윈터에게 두려움을 느꼈다. 평소 윈터의 과보호는 좀 못마땅했지만 오늘은 그의 위세를 보여 주는 듯하여 나쁘지 않았다.
바이올렛이 다시 늘어난 일행을 돌아보았다.
“그럼 늦었지만 점심 식사를 하러 갈까?”
“좋아요! 제가 안내할까요?”
“응, 부탁해.”
젠이 신이 나서 제가 좋아하는 식당으로 모두를 안내했다.
바이올렛은 일행들과 북적거리며 그곳을 나섰다. 호위들은 다들 덩치도 크고 험상궂었지만 윈터와 살고 있는 바이올렛에게는 오히려 친근감이 느껴지는 사람들이었다.
*
평소 직원들 선물을 사는 건 하옐이 담당하고 있었다. 그런데 오늘은 하옐을 포함해서 선물을 해야 하기 때문에 그를 불러낼 수 없었다.
누굴 부려 먹나 고심하던 윈터가 사무실 벽에 의자를 두고 앉아 있는 소년을 발견했다. 칼리본에서 뽑아 온 카닉 일족의 소년이었다. 며칠 전 겨우 합법적으로 일할 수 있는 나이인 열다섯 생일이 지났고, 대표가 몸져누운 이후 너무나 바쁜 통에 누구 하나 일을 시켜 주지 않아 울 것 같은 얼굴로 앉아만 있는 중이었다.
윈터가 문 안으로 고개를 내밀고 소년에게 손가락질을 했다.
“거기 인턴, 좀 나와.”
“예, 예?”
소년이 화들짝 놀라 몸을 일으켰다. 아무도 일을 안 시키는 와중에 대표님이 불러내니 몸 둘 바를 모를 지경이었다.
정신없이 윈터를 따라 나와 보니 그가 빠르게 걸어가며 말했다.
“이름이 뭐지?”
“폴리입니다!”
“그래, 꼬마. 넌 오늘부터 내 비서 대리다.”
“비, 비서 대리요?”
폴리가 얼떨떨해하며 따라 걸었다.
그는 곧바로 집무실로 폴리를 데려갔다. 집무실 안에는 유리 벽으로 나눠 놓은 작은 공간이 있고, 그 안 테이블 위에는 은행에서 일일이 나눠 담고, 직원 이름까지 하나하나 적어 준 상여금 봉투들이 있었다.
“자, 거기 인사말 좀 써. 비슷하지만 다르게.”
그러자 폴리가 어마어마한 직원 수에 질려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 저어. 도장을 파서 몇 개 돌려 가며 찍으면 어떨까요?”
“꼬마가 제법 머리를 쓰려고 드는군. 벌써부터.”
윈터가 한쪽 입꼬리를 올려 웃더니 테이블을 주먹으로 쾅 때렸다.
“그런데 네놈 노동력은 아직 도장값도 안 되거든. 그러니 꼼수 부릴 생각 말고 적어. 성의 있게.”
“죄, 죄송합니다!”
폴리가 울먹거리며 편지 봉투를 꺼내 인사말을 적기 시작했다. 윈터가 그 옆에서 제 키만큼 쌓여 있는 서류작업을 하는 사이 문이 열리고 하옐이 들어섰다.
“대표님, 점심 식사는 뭐로…… 저 꼬마는 뭡니까?”
하옐이 인상을 쓰고 묻자 윈터가 태연히 대꾸했다.
“비서 대리.”
“지, 진짜요? 드디어!”
“오늘만이야.”
“아…… 어쩐지 그럴 리 없다 했습니다.”
하옐이 입술을 삐죽이더니 힐끔 유리 벽 너머를 보았다.
“웬일로 저런 걸 다 하십니까? 눈 떴을 때 어쩌고 하시더니.”
“아내에게 혼났어.”
“제가 이래서 작은 마님을 따르는 겁니다.”
하옐이 감동한 얼굴로 말하는데 윈터가 손가락을 까딱였다.
“네놈 건 따로 있어.”
“……진짜요?”
그가 미심쩍어하며 윈터를 따라갔다. 그러자 윈터가 날려 쓴 글씨가 있는 편지들을 내밀었다.
“자.”
“뭡니까?”
“지금까지 너희 부모가 나한테 보낸 협박 편지.”
“……예?”
하옐이 인상을 쓰자 윈터가 그에게 편지를 밀어 주며 말했다.
“네놈이 돈을 안 주니까 나한테 달라잖아.”
“그, 그래서 주신 겁니까?”
“1년에 한두 번 네놈 주급 정도야. 주고 치우는 게 낫지.”
“그걸 왜 줘요! 준다고 고마워할 인간들 아니란 걸 아시잖…….”
욱해서 소리치던 하옐이 윈터가 손가락으로 툭툭 건드리는 부분을 보았다.
이번 달 12일까지 돈이 들어오지 않으면 집에 불을 지를 테니 그런 줄 아시오!
기한을 넘겼더군? 오늘 마차에 총알이 박히면 나인 줄 아시오.
“우스워 보여야 선을 넘지. 선을 넘어야 감옥에 처넣고.”
그 편지에 눈이 휘둥그레진 하옐이 말했다.
“미친놈들 아닙니까? 대표님이 회색 눈을 가졌다고 만만하게 봤나 봐요. 실명으로 협박을 하다니. 남들처럼 익명으로 했어야지! 귀족에게 살해 협박을 하면 최소 10년 형 아닙니까?”
윈터가 어깨를 으쓱이더니 말을 이었다.
“20년으로 만들어. 돈 나간 거 아깝지 않게.”
하옐이 서류를 모아 들더니, 지금껏 그의 주변 어느 누구도 본 적 없는 환한 미소를 지었다.
“대표님 죽을 고비 넘기시더니 담이 작아지셨네요. 20년은요. 영원히 못 나오게 할 겁니다.”
“알아서 하고, 일주일간 쉬어. 난 데이트하러 갈 테니까.”
“네, 대표님!”
하옐이 신이 나서 달려 나가다가 너무 설레 미치겠는지 되돌아와서 말했다.
“저 태어나서 이렇게 좋은 선물은 처음 받아 봅니다! 평생 충성하겠습니다!”
“필요 없으니까 꺼져.”
데이트 준비를 해야 하는 윈터가 내보내려 했으나, 하옐이 입꼬리가 귀에 걸려 말을 이었다.
“대표님 누워 계실 때 작은 마님 얼마나 강인하셨는지 모릅니다. 보셨어야 하는데.”
“우리 공주님이 왜?”
바이올렛 이야기를 하니 윈터는 다시 쫓아내지 않고 물었다. 그러자 하옐이 신이 나서 재잘거렸다.
“아, 상상도 못 하실걸요. 작은 마님께서 칼슨 로우를 찌르려 하셨다고요.”
“……그럴 리가.”
“진짭니다! 화가 엄청 나셨거든요.”
“그러다 내 아내가 다치면 어떡하려고? 네 놈들은 뭐한 거야, 애초에 그 망할 놈이 있는 병실을 못 들어가게 했어야지!”
“그렇게 화내실까봐 제가 이제 말하는 겁니다! 그리고…….”
“그리고 뭐!”
“간호사 하나가 몰래 봤는데. 대표님 깨시던 날, 작은 마님께서 벤치에 앉아 혼자 한참을 우시더래요. 감사하다고 기도하면서.”
하옐이 삐죽거리며 말하자 윈터가 멈칫하곤 괜히 시큰거리는 코를 문질렀다.
“……산책한다더니.”
아무래도 그 공주님은 가지고 있는 사랑이 너무 많은 모양이라고, 윈터는 생각했다.
부모의 사랑도 받지 못한 제가 허우적거리도록 사랑을 쏟아 줄 만큼.
당신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