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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127화 (127/176)

127화

“사랑해요.”

그래서 한 번 더 말했더니 윈터가 떨리는 숨을 내쉬며 말했다.

“아침부터 심장 마비로 죽겠어.”

“하지 말아요?”

“과장한 거야. 고작 그걸로 죽을 만큼 인간은 나약하지 않으니까 계속 해 줘.”

윈터가 좀 정신을 차리고 바이올렛을 끌어당겼다. 그의 상처가 낫지 않았으므로 바이올렛이 떨어지려 하자 윈터가 그녀를 가볍게 들어 제 무릎에 앉혔다. 바이올렛이 말했다.

“그만할게요, 이제.”

“계속 해 줘.”

윈터가 바이올렛의 품에 얼굴을 묻고 중얼거렸다.

“계속, 계속 말해 줘.”

연신 애정을 확인받으려는 그의 애원에 바이올렛은 조심스레 윈터의 머리칼을 쓰다듬어 보고는, 몇 번이고 사랑한다는 말을 속삭였다.

부부가 한 침대에 붙어서 잠이 드니, 총격 사건 이후 두 사람 사이에 생긴 벽이 살짝 허물어졌다.

그러나 여전히 윈터의 눈앞에는 두 가지 문제가 남아 있었다. 할린을 불러서 확인해야 할 심장. 그리고.

‘……사랑해 주니까.’

그는 여전히 사랑을 돈으로 되갚아야 한다는 인식에서 벗어나지 못했으므로, 바이올렛이 주는 전혀 실감할 수 없는 사랑의 대가를 치러야 했다. 그녀의 사랑을 붙잡아 놓을 것을 구해 와야 했다.

물론 윈터 역시 바이올렛이 주는 사랑은 지금까지 제가 알던 사랑과 다르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스물아홉까지 살면서 가지고 있던 생각들이 한순간에 바뀌는 것은 아니니까.

아는 것이라도 행하려 애쓸 뿐이었다.

다행히 이번만큼은 그녀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사주겠다는 정도의 성장은 있었다.

*

부부는 둘 다 북부에서 한 달을 보내며 많은 일정들이 밀려 있었다.

먼저 준비를 마친 윈터가 준비 중인 바이올렛의 드레스 룸 의자에 걸터앉아 말했다.

“그래서, 오늘 어딜 간다고?”

“가문 회의 전에 어른들 뵈러요. 오늘 오찬이 있다고 하니 오늘 가야 해요.”

“몇 시에 데리러 가?”

“다섯 시 정도에 와요.”

바이올렛이 말하는 사이 젠은 그녀의 귀에 귀걸이를 하나씩 대 보며 드레스에 맞추고 있었다. 연한 청록색의 드레스를 입은 바이올렛을 보며, 윈터는 아내에게는 가을도 여지없이 잘 어울린다는 생각을 했다.

“그 루비로 해.”

윈터의 참견에 젠이 안타까워하며 말했다.

“아, 저도 루비가 마음에 드는데 이 금으로 된 나비 귀걸이가 또…….”

“루비가 더 화려하잖아. 싸우러 가는데 더 화려한 걸 써야지.”

“하긴, 그렇죠. 아, 왜 작은 마님은 한 분이신 거예요. 작은 마님이 두 분이시면 한 번에 두 개 다 하고 나가시는 건데…….”

젠의 서글픈 목소리에 바이올렛은 당황하며 ‘미안해.’ 하고 사과하고, 윈터는 심각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천재적인 발상이군.”

“응? 윈터, 뭐라고 했어요?”

“아냐. 계속해.”

윈터가 건성으로 손을 흔들고 몸은 뒤로 기댔다.

밖에서 바이올렛이 준비하는 걸 기다릴 땐 도대체 뭐가 이렇게 오래 걸리나, 싶어 짜증이 났는데 옆에서 보니 젠의 마음이 완벽히 이해가 갔다. 이것도 해 보고 저것도 해 보고, 아내를 실컷 만지작거릴 수 있는데 오래 걸릴 수밖에. 만약 제가 하녀였다면 바이올렛을 온종일 밖에 못 나가게 하고 저 혼자만 꾸미고 가꿨을 것이다.

귀걸이를 결정해 드디어 손을 뗀 젠이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왜 고민했을까요. 역시 루비가 맞았어요.”

“고마워, 젠. 오늘도 아주 마음에 드는구나.”

그녀가 다정히 인사하는 모습에 윈터가 혀를 찼다. 온종일 만지고 인사까지 받을 수 있다니, 순간 남편보다 하녀가 나아보일 지경이었다.

바이올렛이 사뿐사뿐 걸어와 윈터에게 물었다.

“에스코트하려고 기다린 건가요?”

“응.”

윈터가 그녀의 손을 잡아 제 팔을 감게 하고, 젠이 가져다 놓은 구두를 다른 손으로 집어 들었다. 그리고 바이올렛의 슬리퍼를 턱짓하며 놀리듯 말했다.

“구두 신고 있으면 또 내가 안아서 옮길까 봐 슬리퍼를 신고 있는 건가?”

“맞아요.”

“귀엽기는.”

두 사람이 복도를 걸어 마차에 도착했다. 시내로 갈 마차에 바이올렛이 올라타자 윈터가 그녀의 발을 손으로 감싸 들고 구두를 하나씩 신겼다.

그 모습을 약간 당연하게 여기던 바이올렛이 뒤늦게 흠칫 놀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녀뿐만 아니라 다른 사용인들도 이제 익숙한지 시선을 피하는 기색조차 없었다.

바이올렛이 몸을 숙이더니 윈터에게 소곤거렸다.

“……당신이 자꾸 이렇게 구두를 신겨 주니까 다들 당연하게 알잖아요.”

“그게 뭐?”

“당신 때문에 나까지 익숙해졌어요. 집 밖에서도 이러면 어떡해요?”

“난 원래 천한 놈이라 하인이 천직인가 보다, 하겠지.”

“윈터.”

“농담이야. 내가 외간 남자도 아니고, 남편이 구두 좀 신겨 준다고 이상하게 보는 놈이면 그쪽이 잘못된 거야. 귀족이든 뭐든 관계없어.”

윈터가 그렇게 말하고는 마차에 걸친 경주마 같은 제 허벅지에 바이올렛의 발을 올리고 리본까지 반듯하게 묶어 준 후 다시 내려놔 주기까지 했다. 그리고 손을 흔든 후 제가 탈 마차로 향했다.

잠시 후 젠이 마차에 올라타 출발하자, 뺨에 홍조가 남은 바이올렛이 물었다.

“아무래도 보기 안 좋지?”

“뭐가요, 작은 마님?”

“저렇게 구두 신겨 주는 거.”

“에이, 옷도 다려 주시는데요, 뭐.”

“……그런 것 같더라니. 오늘도 남편이 다렸지?”

“네. 앞으로 특별한 일 있을 땐 쭉 대표님이 다리실 거라던데요?”

바이올렛이 폭 한숨을 쉬었다. 고마운 마음이 드는 한편 부끄럽기도 했다. 그렇다고 싫은 것도 아니니 단호히 제재하지도 못하고…….

그 사이 바이올렛이 탄 마차는 수도 동쪽, 해변에 있는 유서 깊은 레스토랑에 도착했다.

세 달에 한 번 로렌스가에서 일정이 맞는 사람들은 여기서 식사를 했다. 그 자리에서 나라의 중대사가 거론되고, 진행되었다. 바이올렛이 오늘에 맞춰 수도에 돌아온 건 이 자리에 참여하기 위함이었다.

목적지에 도착해 내린 바이올렛은 젠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로렌스가 사람들이 식사 중인 3층에 도착했다.

바이올렛이 문 안으로 들어서자 조용히 식사하던 사람들이 그녀를 돌아보았다. 젠은 그 압박감에 겁먹어 서둘러 인사하고 떠났다.

늘 이 식사에 참여하는 에쉬는 상석에 앉아 식사를 하다가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가장 먼저 바이올렛의 고모, 해리엇이 다가왔다.

“바이올렛, 오랜만이구나?”

“안녕하세요, 고모님.”

“그래…… 네가 왜 왔는지는 엘라 필리체 부인께 대충 들어 알고 있다. 내 자리를 포함한 로렌스 가문의 의석 세 개를 없애려 한다면서.”

해리엇의 목소리는 세상에 아무것도 두려울 것 없다는 듯이 명확했고, 고고했다. 바이올렛은 윈터라면 숨 막혀 미쳐 버릴 이 분위기에 반대로 안정감을 느끼며 대답했다.

“네. 그게 도의에 맞다고 생각해요.”

“그렇구나.”

해리엇의 부드러운 목소리를 뚫고,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렸다. 바이올렛의 사촌인 아리엘라였다.

“고모님! 받아 주지 마세요. 예전이나 지금이나 저 애는 고지식하고 지나친 원칙주의자예요. 애초에 그게 도의에 맞다고요? 그걸 왜 저 애가 결정하죠? 제가 뭐라고!”

아리엘라의 말에 바이올렛이 그녀를 보며 입을 열었다.

“왜 내가 결정하면 안 되지?”

“그건 에쉬가 할 결정이니까.”

아리엘라가 말하곤 에쉬를 보았다. 에쉬는 당연한 소리라는 듯 대응도 하지 않고 식사를 이어 갔다.

바이올렛은 그 두 사람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리엘라는 바이올렛이 결혼한 후에도 태연히 윈터를 좋아한다고 마음을 드러냈었다. 예전엔 거기에 화낼 기운이 없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바이올렛이 입을 열었다.

“그건 정말로 무례하구나, 아리엘라. 나 또한 선왕 폐하의 딸이야. 왕실이 사라졌다고 해도 나에게는 강한 발언권이 있고, 네가 감히 나에게 대들어서는 안 되지.”

그녀의 강경한 말에, 천방지축으로 굴던 아리엘라의 말문이 막혔다.

바이올렛이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조용히 식사를 이어 가는 로렌스가를 돌아보며 말했다.

“저를 지지해 주실 분이 계신가요?”

그녀의 질문에 결국 에쉬가 식기를 내려놓았다.

“여기가 어디라고 와서 헛소리를 해, 바이올렛. 내가 낯부끄러워서 있을 수가 없잖아.”

그러자 에쉬의 옆에서 식사하던 바이올렛의 또 다른 사촌, 제프가 두둔했다.

“맞는 말이야. 이게 무슨 민폐야? 애초에 바이올렛 넌 로렌스가 사람이 아니라 블루밍가 사람이야. 이 자리에도 끼면 안 돼.”

그러자 해리엇이 대신 대답했다.

“제프, 그럼 나도 로렌스가 사람이 아니겠구나.”

그 말에 제프가 움찔하더니 대답했다.

“고, 고모님과는 다르죠! 바이올렛은 블루밍가의 성을 받았잖아요. 돈도 받고.”

그러나 제프의 말은 오히려 그의 주장에 악영향을 주었다. 그 돈을 받고 미천한 이방인 사생아와 결혼한 것은 바이올렛의 희생임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해리엇이 불쾌감을 드러내며 말했다.

“그거야 바이올렛이 결혼할 때 순간 왕실이 사라져서 그런 거지. 나는 솔직하게 말해서 어차피 이런 상황이 된 거 바이올렛을 지지한단다. 의석을 가지고 있으니 여러 정책에 연관되고 로비하려는 자가 많아 불편하기까지 하구나.”

그 말에 저 멀리서 듣고 있던 또 다른 의석의 소유자, 바이올렛의 작은할아버지인 안토니가 맞장구쳤다.

“말 한번 잘 해 주었구나, 해리엇. 나도 그랬다. 영 편치가 않구나.”

바이올렛은 그들의 이야기를 차근차근 듣고, 그들의 얼굴을 살펴보고 있었다.

배우인 아리엘라를 제외하고는 절대 목소리를 높이거나 흥분하는 사람이 없었다. 바이올렛의 우려와 달리, 찬성과 반대도 반반 정도의 비율이었다. 그녀는 의외로 로렌스가 사람들이 적녀인 자신을 지지하고 있음을 처음으로 알았다.

식사가 길어지고 거의 모든 사람들이 한마디씩은 제 의견을 말했을 때였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바이올렛이 열어 주니 젠이 큰 상자 하나를 낑낑거리며 안고 들어왔다.

“작은 마님! 딱 때맞춰 호외가 나왔어요!”

“고마워, 젠. 오늘따라 일을 많이 시켜 미안하구나. 나도 식사를 못 했으니 점심은 근사한 곳에서 먹자.”

“우와! 아, 제가 맛있는 곳 안내할게요!”

젠이 신나 하며 상자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신문을 가장 먼저 가져간 것은 에쉬를 지지하던 가장 어린 사촌, 아론 로렌스였다. 그가 기사를 확인하고 조용히 미간을 좁혔다. 그리고 바이올렛을 돌아보며 물었다.

“이게 사실입니까? 에쉬 형님께서 칼슨 경과 공모해 바이올렛 누님의 재산 일부를 빼돌렸다는 게.”

그 말에 뒤늦게 에쉬가 신문 쪽을 보았다.

“그래, 사실이란다.”

바이올렛의 말에 아론이 굳은 표정으로 신문을 탁 내려놓았다. 곧이어 침착한양 다가온 에쉬의 낯빛이 신문을 확인하는 순간 달라졌다.

칼슨이 윈터가 넘겨준 롱 리우드 땅에서 난 소작료를 받아 에쉬에게 넘긴 증서가 신문 전면에 새겨져 있었다.

표정이 순식간에 뒤틀린 그가 바이올렛을 노려보았다.

“이게 무슨 장난이지?”

그러자 바이올렛이 그를 마주보며 대답했다.

“장난이 아니고 사실이지. 증거도 있고.”

“그 소작료를 받았을 때, 그 땅은 왕실 소유였어.”

“하지만 오빠는 농사를 짓는 시늉을 하고 있었지. 매달 그렇게 큰돈을 받았다는 건 아무도 몰랐지. 나조차도.”

두 사람이 대화하는 틈에 젠이 천생 왕족들의 무서운 압박감에 오들오들 떨면서도 사람들 앞에 한 부씩 호외를 전달했다.

바이올렛은 에쉬의 편이었던 사람들을 시선으로 하나씩 살폈다. 그들에게는 햇살이 그녀의 값비싼 귀걸이를 타고 흩어져 바닥에 일렁이는 것조차 공격적으로 느껴졌다.

그녀는 여느 때처럼 단정한 태도로 자신을 죽일 듯 주먹을 쥔 에쉬에게 한 걸음 다가가 속삭였다.

“나는 사업가와 결혼을 했어. 그래서인가, 이제 손해 보는 장사는 그만 하고 싶어, 에쉬.”

당신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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