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화
목욕을 마치고, 두 사람은 주방장 투린이 진하게 끓인 수프를 맛보았다. 두 사람이 돌아올 거란 연락을 받자마자 진하게 끓여 낸 수프는 감자와 크림, 큼지막한 고깃덩이를 가득 담아 한 끼 식사로 손색이 없었다.
수프가 하도 맛있어 두 사람은 갓 구운 포슬포슬한 하얀 빵과 함께 접시를 깨끗이 비워가며 식사를 하고 다시 침실로 돌아왔다.
바이올렛이 화를 풀어 달라 말했으므로 윈터는 바로 그녀의 침실로 갈 준비를 했다.
그는 누가 보면 어디 외출이라도 하는 사람처럼 몇 번이나 거울을 보며 제 외모를 살폈다. 잠옷도 비슷비슷한 것 중에 최대한 마음에 드는 것을 고르고, 머리도 이리 넘겼다가 저리 넘겼다가를 반복했다.
그사이 하옐이 들어서자 윈터가 윽박지르듯 물었다.
“할린 이 자식은 왜 안 와? 부른 지가 언젠데.”
“한 번 여기까지 오느라 무리가 갔는지 몸이 다시 안 좋아지셨답니다.”
“꾀병을 부리는군.”
“괜찮으시면 대표님과 작은 마님께서 알리카로 한번 오시는 게 어떠신지 묻던데요?”
“못 들어간다며.”
“카닉사의 대표님은 다르죠.”
“그게 더 열 받잖아. 부모와 떨어진 다섯 살짜리는 안 되는데 재벌은 된다? 뭐 그런 속물 쓰레기들이 다 있어?”
윈터가 비꼬는 동시에 마음에 드는 스타일을 드디어 정해 머리를 정리했다. 그리고 다음으로 잠옷 위에 걸칠 가운을 찾는데 하옐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나저나 회사엔 뭐라고 전합니까?”
“뭘 전해.”
“대표님 총 맞고 누워 계실 때 직원들이 얼마나 많이 찾아왔는데요. 공치사는 하셔야죠.”
“누워 있는 새끼한테 잘 보이면 뭐가 떨어져? 깨어 있을 때 알짱거려야지. 전할 거면 앞으로 비효율적인 짓 하지 말라고나 전해.”
지금까지 윈터가 한 말을 다 전했다면 그의 병실에 직원들이 찾아왔을 리가 없었다. 이번에도 알아서 인사말을 정해야겠다고 생각한 하옐이 꾸벅 고개 숙여 인사했다.
“그럼 전 퇴근합니다.”
“어.”
건성으로 대답한 윈터는 하옐이 떠난 후에도 신중하고 또 신중하게 가운을 고른 후, 열심히 고르지 않은 척 대충 걸친 후 바이올렛의 방으로 향했다.
문을 두드리자 지난 한 달 무척 수척해진 바이올렛이 문을 열었다.
“왔어요?”
윈터는 그리 밝지 않은 조명 아래에서 보이는 바이올렛의 조막만 한 얼굴을 걱정스레 내려다보았다.
“한 달을 병원에서 지냈는데도 안색이 안 좋네.”
“그런가요?”
“고생했어. 내가 누워 있는 바람에.”
바이올렛이 흐릿하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더니 윈터를 보며 말했다.
“주변에서 많이 도와줘서 다행이었어요. 사람들에게 고맙다는 인사는 했나요?”
“아까 하옐도 그 얘기더니. 이런 뒤처리도 다 내가 주는 월급에 포함된 거야.”
“……적어도 하옐에게는 고맙다고 했죠?”
“그 녀석은 특히 많이 받아 가.”
“안 했단 말이군요.”
바이올렛이 한숨을 쉬었다.
모든 사람이 그의 그런 행동을 천성이라 생각해 넘어갔지만 바이올렛은 그럴 생각이 없었다.
그녀가 엄격한 얼굴과 다정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윈터, 하옐은 당신이 병석에 누워 있는 내내 북부에 있었어요. 그게 다 그의 일이었다고 생각 안 해요. 게다가 이글린과 안잘리는 칼슨이 귀족 살해에 준하는 벌을 받아야 한다면서 당신 없는 회사 운영에 법정 싸움까지 병행하고 있어요. 야니스 경은 별장에서 소문이 와전되지 않게 뒤처리를 해 줬고요.”
“그야…….”
“그것까지도 돈 때문일 거라고 말하지 말아요. 당신에 대한 호의가 없다면 그렇게 안 해요. 당신을 존중하지 않으면 그렇게 안 한다고요. 나와 마찬가지 마음으로.”
“…….”
“당신은 사랑을 하는 법도 배워야 하지만, 받는 법도 배우는 게 좋겠어요.”
바이올렛의 애정 서린 잔소리가 도무지 싫지 않았으나, 윈터는 공연히 인상 쓰는 시늉을 했다. 그러다 아내가 제 팔을 붙잡아 침실로 당길 땐 고집이라곤 하나도 없는 사람처럼 순순히 끌려갔다.
바이올렛이 윈터를 침대에 눕게 하더니 이불을 꼼꼼하게 덮어 주었다. 그 진지한 모습이 귀여워 속이 간질거리던 윈터가 꾹 다물었던 입을 열었다.
“직원들에게 인사는 내가 알아서 할게. 선물 목록 회사에 있어.”
“그래요?”
“선물로 환심 사는 건 내 버릇이고 특기야. 당신에게만 실패하지, 대부분 성공했다고.”
“왜 나에겐 실패했다고 생각해요?”
“당신은 내가 그렇게 선물을 했는데 좋아하질 않았잖아.”
“선물을 산처럼 주니까 그렇죠.”
“그게 뭐가 문제지?”
“너무 많이 줬단 말이에요.”
바이올렛이 제 말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표정의 윈터에게 그 물량공세의 압박감을 어떻게 설명하나 고민하는데, 윈터가 그녀의 턱을 당겨 이마에 입을 맞추고 말했다.
“알았으니까 자. 그런 얼굴로 잔소리해 봤자 하나도 귀에 안 들어오니까.”
“그런 얼굴이요?”
“안 그래도 예쁜데 잠옷도 슬리퍼도 그렇게 귀여운 걸 꺼내 입고 나더러 무서워하기라도 하라는 건가?”
“무서워하라는 게 아니라 염두를…….”
“할게. 시키는 거 다 할 테니까 그만 자자, 공주님. 아, 졸리다.”
윈터가 말을 마치고는 꼭 아이 재울 때처럼 하품하는 시늉을 해 보였다. 그게 자길 놀리는 거란 걸 눈치챈 바이올렛이 인상을 쓰고 그를 밀쳤다.
“쫓아낼 거예요.”
“쫓아내면 문 앞에서 잘 거야. 대자로 뻗어서. 아침에 당신 하녀들이 퍽도 모른 척해 주겠군.”
“……악당 두목 같으니라고.”
“왜 두목이 붙는지는 모르겠지만 대단히 모욕적이군.”
윈터가 능청을 떨고 침대 밖으로 빠져나가더니 결국은 바이올렛을 끌어다 눕힌 후 방의 전구를 껐다.
침실에는 순식간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누우면 바로 잠이 올 줄 알았는데, 총격 사건 이후 다소 거리가 생긴 상태에서 한 침대에 누우니 오히려 불편함이 들었다.
윈터가 먼저 침을 꿀꺽 삼키자 바이올렛이 입을 열었다.
“당분간 바쁘겠네요.”
“남부 사업의 계약 건들이 많아서, 슬슬 바쁘긴 할 거야. 그래도 집에 꼬박꼬박 들어올게.”
“꼭 그럴 필요 없어요.”
“왜. 집에 꼬박꼬박 들어오라고 해. 집착 좀 해, 나한테.”
윈터가 진담을 농담처럼 말했다.
두 사람 다 불편함을 모른 척하며 다시 잠을 청하려 했으나 영 잠이 오질 않았다. 결국 못 견디고 바이올렛이 상체를 일으키며 말했다.
“미안해요. 불편해서 못 자겠어요.”
그러자 윈터도 몸을 일으키고 불을 켰다.
“할 말 못 할 말이 따로 있지, 남편이 불편해?”
“미안해요, 다시 말할게요. 어색해요. 아직 앙금이 다 풀리지 않은 것 같아요.”
“이봐, 공주님. 의미가 명확하다고 덜 무례한 거 아니거든. 그러게 나한테 왜 이렇게 화를 냈어?”
아닌 척해도 윈터 역시 여전히 불편함이 덜 풀린 건 마찬가지인 듯했다.
바이올렛이 잠시 생각하더니 물었다.
“내일 저녁에 화해의 의미로 데이트 할래요?”
“남부 구경…….”
무심코 말하던 윈터가 입을 다물었다.
제가 쓰러지는 순간, 바이올렛에게 남부 구경을 시켜 주지 못했다는 생각에 죽을 수도 없었다. 그래서 데이트를 말하는 순간 남부 구경이 떠올랐던 것이었다.
바이올렛이 무슨 의미냐는 듯 고개를 기울이자 윈터가 말을 이었다.
“아무것도 아냐. 그보다 연극은 어때? 노천극장으로.”
“아, 좋아요.”
바이올렛이 기쁜 표정을 지었다. 그러더니 윈터에게 말했다.
“그럼 미안하지만 방으로 돌아갈래요?”
“싫어.”
“어색해서 잠이 안 오는걸요. 당신도 그렇잖아요.”
“그래도 싫어.”
윈터가 거절하더니 바이올렛을 꽉 안았다.
“추워서 혼자 못 자겠어.”
그의 말에 바이올렛이 중얼거렸다.
“좀 쌀쌀해지긴 했네요.”
“겨울엔 매일 같이 자야겠네.”
“그땐 벽난로를 틀 테니까요. 괜찮아요.”
“안됐지만 이제 재정난이라 장작 살 돈이 없어.”
윈터의 능청에 바이올렛이 저도 모르게 웃음을 지었다. 지난 한 달간 마음고생을 했던 것이 제 집의 제 방, 그것도 제 남편의 품에 안겨 있으니 상황을 살피느라 바짝 곤두세웠던 바이올렛의 긴장감이 조금씩 풀어졌다.
“걱정했어요…….”
윈터가 슬쩍 미소를 지었다.
“미안해.”
“미안하다는 말 그만해요.”
“그것도 미안.”
윈터의 대답에 바이올렛이 배시시 웃었다. 제 미소 덕에 윈터의 심장이 쿵쿵 뒤흔들리는 걸 모르고, 바이올렛이 잘 오지 않는 잠을 애써 끌어당겼다.
*
바이올렛보다 훨씬 잠이 적은 윈터는 그녀보다 늦게 잠들어 일찍 눈을 떴다.
그는 여전히 잠들어 있는 바이올렛을 보며 이래서 부부가 좋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그렇게 화내고 울던 바이올렛이 제 품에 있으니 아무것도 불안하지 않았다.
정말 저를 사랑하느냐고 수시로 확인받고 싶은 것을 백에서 하나로 줄이느라 성격에 안 맞게 인내하는 중이었다. 그조차도 바이올렛이 많다고 생각한다면 할 말이 없지만.
윈터는 바이올렛의 얼굴을 보고 또 보고 속눈썹 개수까지 셀 지경으로 관찰하다가 그녀가 눈을 뜨려는 순간 눈을 감았다.
자는 시늉도 잠시, 바이올렛이 품에서 살며시 떨어지려 하자 윈터가 곧바로 눈을 뜨고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왜?”
“그게 아침 인사인가요?”
“가지 마. 추워.”
“아침 인사를 하라는 뜻이었는데요.”
정말로 미치겠는 것은, 그녀가 사랑한다고 말하고 난 후부터 불안감이 더 커지기만 한다는 것이었다. 어느 순간 그녀의 마음이 변하지는 않을까. 돌아서지 않을까.
평생 이렇게 불안하게 사는 게 사랑인가, 윈터는 고민해야 했다. 제가 망가져서 제 사랑까지 망가진 건지, 아니면 남들도 이렇게 망가진 사랑을 하는 건지, 아니면 이 요망한 공주님이 남자를 불안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는 건지.
상체를 일으키고는 동그란 눈으로 윈터를 내려다보는 바이올렛을 보니 세 번째 가설에도 상당히 힘이 실렸다.
윈터가 따라서 몸을 일으켰다.
아내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듣기 전까진 혹여 그녀가 저를 떠나겠다고 하면 보내 주고 죽을 작정이었는데, 사랑한다는 말을 듣고 나서는 어떻게든 못 떠나게 붙잡아야겠다는 생각으로 바뀌었다.
그가 진지하게 말했다.
“건의할 것이 있어.”
“뭐죠?”
“매일 아침 눈을 뜨면 사랑한다고 아침 인사를 하자.”
그 말에 바이올렛이 다소 놀란 듯, 말간 눈동자로 빤히 윈터를 보았다.
“……웬일로 로맨틱한 소리를 하는군요?”
“내가 의외로 로맨티시스트거든.”
그 건의의 배경에서 흐르고 있는, 계약의 형식으로라도 매일 사랑을 확인하겠다는 윈터의 시커먼 집착을 읽지 못한 바이올렛의 뺨이 발그레하게 달아올랐다.
“좋아요. 건의를 받아들이죠.”
그렇게 대답한 바이올렛이 다정히 미소를 지으며 먼저 인사를 건넸다.
“잘 잤어요? 사랑해요.”
“…….”
그녀의 인사와 미소에 윈터가 멍하니 굳었다. 그러다 이내 이불을 다시 뒤집어써 버리자 바이올렛이 살짝 억울해하며 그를 흔들었다.
“나만 하는 거였나요?”
“…….”
“윈터.”
“……잠깐만 시간 좀 줘. 눈물 날 것 같아서 그래.”
“네에?”
윈터가 이불 속에서 진정하는 사이 바이올렛은 의아한 얼굴로 그를 보았다. 워낙 윈터 같지 않은 반응이라 당황하다가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하니 윈터가 손을 뻗어 바이올렛의 팔을 붙잡았다. 바이올렛이 살짝 이불을 끌어 내리고는 얼굴이 벌게진 윈터를 발견하고 멈칫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는 정말로 울 것 같은 얼굴이었다.
이상하게도 그 낯선 표정이 마음에 들어서, 바이올렛은 어디서 나온 못된 마음인지 되레 그를 울렸으면 하는 마음이 들었다.
당신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