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화
윈터가 그런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뒤로 기대며 말했다.
“당신이 싫어할 말, 안 할게.”
“……하지 마요.”
“여섯 살, 열두 살, 심장 어쩌고저쩌고 하는 거. 그때 일 말 안 한다고.”
“…….”
그의 말에 바이올렛의 어깨가 흠칫 떨렸다.
윈터가 그런 그녀를 흘깃 보더니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나 그만 피해. 가뜩이나 죽었다 살아났는데 피가 마르는 기분이야.”
“피한 적 없어요.”
“한 달 내내 내 쪽은 보지도 않는데 뭘 피한 적이 없어. 지금도 안 보잖아.”
윈터가 핀잔하더니 바이올렛의 손에서 책을 뺏어 들었다. 그제야 바이올렛이 당황하며 윈터 쪽을 보았다.
그러자 윈터가 미간을 좁힌 채로 숨이 닿을 만큼 바이올렛에게 얼굴을 들이밀었다.
“내가 구해 줬잖아. 고맙다고는 못할망정 도망을 다녀?”
“정말 신사답지 못한 말이군요.”
“왜, 신사는 생색도 못 내?”
“내지 않죠.”
“어쩐지 신사 따위 되기 싫더라니.”
윈터가 투덜거렸다. 그러더니 바이올렛의 손을 당겨 손바닥을 제 손으로 간질이며 말했다.
“불안하니까 웃어.”
“명령하지 말아요.”
“웃어 줘, 공주님.”
“…….”
“다신 총 앞에 안 뛰어들 거고, 당신이 싫어하는 것에 대해 질문하지 않을 테니 제발 웃어. 계속 울 것 같은 표정 하지 마. 총상보다 그게 더 아파.”
웃으라며 손가락을 간질이는 윈터를 보는데 다시 울음이 날 것 같았다.
바이올렛은 평생 울 걸 지금 다 우는 모양이라 생각하며 윈터가 잡았던 간지러운 손을 빼냈다.
그리고 이번엔 제 시선을 피하는 윈터를 바라보며 말했다.
“사랑해요.”
“…….”
그 말에 윈터가 바이올렛을 보았다.
“다른 어떤 것을 내 앞에 가져다 놓아도, 나는 당신을 선택할 거예요. 나에게 중요한 건 당신이에요. 당신의 생명이 내 생명보다 더 중요해요.”
“…….”
“그래서 사랑한다고 말한 거예요. 사랑해서, 사랑한다고 말한 거예요. 내 대신 총에 맞은 거, 하나도 안 고마워요. 정말 아주 조금도 고맙지 않고 화만 나요.”
그녀의 말에 윈터가 저도 모르게 실소했다.
그러더니 심호흡을 하고, 바이올렛의 입술에 부드럽게 입술을 눌렀다가, 입술을 떼지 않고 말했다.
“나 진짜 죽은 거 아니지?”
“아니에요. 왜 그런 불안한 소리를 해요?”
“아니, 너무 천국이라. 당신이 날 사랑한다잖아. 이게 천국이 아니면 어디가 천국이야.”
윈터가 그리 말하고 어깨를 들썩이며 웃더니 한 번 더 입술을 눌렀다가 떼고 몸을 일으켰다. 그가 행복해 보여 살짝 화가 풀린 바이올렛이 새침한 얼굴을 했다가, 아주 희미하게 웃었다.
그 미소를 놓치지 않고 윈터가 놀리듯 말했다.
“웃었네.”
“안 웃었어요.”
“웃었거든?”
그가 짓궂게 말하더니 바이올렛의 손을 잡아 일으키며 말했다.
“집에 가자.”
“……집에 가요.”
작게 따라한 그녀의 대답에 윈터가 이번엔 정말로 유쾌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
모든 짐을 마차에 싣고 그들이 출발하기 전, 야니스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병원까지 그들을 배웅 나왔다.
바이올렛은 아직 준비가 끝나지 않아 먼저 마차 앞에 홀로 서 있던 윈터를 발견한 야니스가 인사하고 물었다.
“정말 괜찮으신 겁니까? 많이 다치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멀쩡해. 보면 알잖아.”
“그러니까 어떻게 멀쩡한 겁니까?”
야니스가 이해가 안 가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윈터가 인상을 쓰고 대꾸했다.
“뒈지기라도 했어야 한다는 표정인데.”
“그 정도는 아니지만…….”
야니스가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듯한 표정을 짓자, 윈터가 채근했다.
“뭐.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빨리 해. 답답하게 굴지 말고.”
“경께서 떠나시고, 경의 비서가 바로 달려와 부탁하기에 총격이 있던 곳을 정리했습니다. 거기 흐른 피가 도무지…….”
“도무지 뭐.”
윈터가 인상을 쓰고 다그쳤다. 그러자 야니스가 신중한 얼굴로 말했다.
“차별하는 말이라 못 합니다.”
“해. 차별로 받아들이지 않을 테니까.”
“……주술이라도 쓰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할 것 같은 양의 피였습니다.”
윈터가 골치 아픈 표정을 지었다. 그러더니 뒷목을 문지르며 대꾸했다.
“비밀로 해.”
“이미 그러기로 했습니다.”
윈터는 멀쩡하게 살아난 저를 보면서 귀신이라도 본 듯이 놀라던 의사와 간호사들을 떠올렸다.
만약 제가 살아남은 것이 주술과 같은 일이라면, 그가 아는 한 그것을 가능케 할 사람은 단 한 명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그는 사실 확인을 위해 할린을 다시 불러오라며 카닉사 직원을 보낸 참이었다. 평생 쓰레기 같은 핏줄이라며 욕하던 제 혈통이 몇 번이고 저와 바이올렛을 구했음에 슬슬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만약 바이올렛이 말한 것처럼 제 심장의 약함을 아내가 가지고 가기라도 한 것이라면, 고작 여섯 살짜리 꼬마 아가씨에게 제 짐을 넘겨준 거라면 어떻게 마음 편하게 살아갈 수 있을까.
야니스가 생각에 잠긴 윈터에게 말을 이었다.
“일단은 부하들 대신 제가 흙으로 덮어 경께서 쓰러지신 흔적을 지웠습니다만, 치우면서도 많은 걱정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멀쩡하시니 의문을 가졌던 겁니다.”
“…….”
“뭔가 짚이는 게 있으신 겁니까?”
야니스가 묻자 윈터가 굳은 얼굴로 혀를 찼다. 그러더니 야니스를 힐끔 보며 말했다.
“도련님네 망할 가문과는 계속 얽힐 일이 생기는군. 꼴 보기 싫은데도.”
그러자 순간 욱한 야니스가 말했다.
“아니, 방금 제 말 뭐로 들으셨습니까? 흔적 지워 드렸다니까요. 가는 호의가 있으면 오는 호의가 있어야지, 꼴 보기 싫단 말부터 나오십니까? 경의 그 성격을 받아 주시는 부인이 대단하십니다.”
“내 부인은 대단하고, 받은 호의 대가로 돌아가는 호의도 있을 테니 그만 징징거려.”
“제가 언제…… 호의 바라고 한 거 아닙니다.”
“그럼 입막음 대가로 하지.”
윈터가 어깨를 으쓱이더니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계승식에서 내준 자리도 훌륭했고. 에쉬 그 자식 썩어 가는 표정을 보고 나니 체증이 다 내려가더군.”
“그건 다행입니다.”
윈터가 모처럼 악수를 청하자 야니스가 거리낌 없이 그것을 받아들이며 말했다.
“친구가 될 수 있을 것 같군요.”
“난 애새끼랑 친구 안 해. 꺼져.”
“제가 예상한 반응과 똑같네요.”
야니스가 혀를 차며 대꾸했다.
그때 바이올렛이 사용인들과 이야기하며 마차로 다가왔다. 그녀가 배웅 나온 야니스에게 인사를 하고 말했다.
“여기까지 나와 주셔서 고마워요, 야니스 경.”
“당연한 일입니다. 손님들께 안전을 보장했어야 하는데 헤스턴가의 불찰입니다.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야니스는 바이올렛에게 사과했으나 그것은 윈터를 향한 것이기도 했다. 윈터가 귀찮다는 듯 말했다.
“알았으니까 꺼져.”
그의 말에 바이올렛이 가볍게 한숨 쉰 후 야니스에게 말했다.
“남편 대신 사과하지요.”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저도 적응해서.”
야니스가 정중히 대답하고는 미소를 지은 후 그곳을 떠났다.
생각보다 너무 오래 북부에 머물렀던 부부는 드디어 수도로 돌아가는 마차에 탔다.
마차에 앉자마자 윈터가 바이올렛을 끌어당겨 바짝 달라붙으며 말했다.
“에쉬 그 망할 쓰레기가 소작료를 칼슨에게서 받아 낸 증거 찾았다며?”
“그렇다더군요.”
“신문사에 넘겼어?”
“아직이에요. 기사가 나왔으면 하는 타이밍이 있어서요.”
“언제인데?”
“음…… 글쎄요.”
바이올렛이 놀리듯이 말을 해 주지 않으니 성질 급한 윈터가 답답한 표정을 지었다.
“날 괴롭히는 법을 점점 더 잘 알게 되는군, 공주님께선.”
“하지만…….”
“하지만?”
윈터가 미간을 좁히고 되묻자 바이올렛이 잠시 머뭇거리더니, 모처럼, 윈터가 죽지도 못할 만큼 그리워하던 눈부신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내가 아무리 괴롭혀도 당신은 날 좋아할 거잖아요?”
“…….”
제가 하던 말 그대로 돌려받은 윈터가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더니 허, 하고 기가 막힌다는 듯 탄성하더니 곧 어깨를 들썩이며 웃기 시작하고, 이내 마차가 들썩거리도록 시원한 웃음을 터트렸다.
*
한 달 만에 부부가 수도에 도착하자 쓸쓸하게 저택을 지키던 집사인 룰루와 주방장인 투린이 정신없이 달려 나왔다.
“아이고, 작은 마님! 사고 겪으셨다면서요, 괜찮으신 겁니까?”
“왜 이렇게 마르신 겁니까! 당장 음식을 준비할 테니 어서 식사하실 준비를 하십시오!”
그러자 옆에서 젠이 기다렸다는 듯이 고자질했다.
“한 달 내내 거의 드신 게 없어요. 우리 작은 마님 손목 좀 보세요. 마음 아파 죽겠어요.”
다친 사람은 따로 있는데 다들 부쩍 야윈 바이올렛 걱정에 여념이 없었다. 바이올렛이 진짜 환자 보기 무안해서 사용인들의 등을 떠밀었다.
“먼 길을 왔으니 목욕부터 하고 식사를 할게. 준비 좀 해 주게.”
“아, 제가 목욕물 준비할게요!”
젠의 말에 옆에서 투린이 신이 나서 말했다.
“전 바로 식사 준비하겠습니다! 한 달 동안 제 음식이 아닌 수준 낮은 음식을 드셔야 했을 테니, 속을 달래드리려고 영양이 듬뿍 들어간 수프를 끓이는 중입니다!”
두 사람이 신이 나서 달려가고, 룰루도 바로 부부의 잠옷이며 잠자리 상태를 확인하러 가려는데 바이올렛이 붙잡았다.
“그리고 룰루, 조만간 로렌스 가문 회의를 열게 될 것 같네. 장소는 우리 가문의 정원으로 하려는데 같이 상의를 해 주게.”
“아휴, 언제든 말씀만 하세요.”
“자네가 있어 든든하네.”
바이올렛이 미소를 짓자 룰루가 가장 아끼는 손주를 보듯 그녀를 살피고 제 일을 하러 떠났다.
윈터가 바이올렛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다들 우리 귀하신 작은 마님 안 계셔서 슬펐나 보군.”
“당신도 어서 씻고 나와서 식사해요. 수프 이야기를 들으니 무척 허기가 지네요.”
“바쁜데 같이 씻지?”
“지금 농담이 나와요? 나 아직 화 안 풀렸고, 당신은 아직 욕조에 들어갈 수도 없잖아요.”
윈터를 흘기며 말하던 바이올렛은 반 박자 늦게, 임신의 어려움을 떠올렸다.
특별히 기대를 하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이번 월경이 시작했을 땐 어쩐지 섭섭한 기분이 들었었다. 그리고 윈터에게 말하지 않아 이 섭섭함을 혼자 견디게 되어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었다.
저를 닮은 아이도 좋고, 윈터를 닮은 아이도 좋았다. 이왕이면 반반을 닮은 아이가 가장 좋을 것 같았다.
바이올렛은 저와 윈터에게 더 많은 가족이 필요하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잠시 생각하던 바이올렛이 윈터를 보며 입을 열었다.
“그리고 불공평해요.”
“뭐가?”
“당신이 화나면 잠자리를 하고, 내가 화나면 당신이 무릎을 꿇기로 했잖아요.”
“그랬지.”
“난 당신이 무릎을 꿇어도 조금도 기쁘지 않아요.”
“의외군. 기뻐 보였는데.”
“왜 그렇게 생각한 거죠?”
“표정이 그랬어. 아무튼 다른 방식으로 사과하라는 건가?”
“웬일로 한 번에 알아들어 주는군요.”
“어떻게 해 줄까?”
“침실을 같이 써요.”
“……뭐?”
“레이크하우스에서 잠깐 당신과 침실을 같이 써 보니…… 가끔은 당신 품에서 눈을 뜨는 것도 나쁘지 않겠더군요. 그러니 내가 화나면 옆에 와서 재워 주고, 깨워 줘요. 그럼 화를 풀도록 하죠.”
“잠깐만. 내가 아니라 당신이 화가 나면 그렇게 하자고?”
바이올렛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휙 돌아서 저택으로 들어섰다. 잠시 멍한 표정을 짓던 윈터가 손으로 제 뺨을 툭툭 치고는 인상을 썼다.
“……나 안 죽은 거 맞아? 듣고 싶은 말만 들리는데?”
당신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