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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124화 (124/176)
  • 124화

    얼음에 그대로 갇힌 것처럼 꼼짝을 못 하던 바이올렛의 몸이 서서히 떨려 오기 시작했다. 그녀가 윈터를 노려보며 말했다.

    “당신은 정말, 정말 나쁜 사람이에요. 세상에 다시없는 악당이에요. 이기적이고, 자기밖에 모르고…….”

    “같은 말이야.”

    “그리고…… 그리고…….”

    “그게 당신이 할 줄 아는 나쁜 말의 전부지?”

    윈터가 짓궂게 말하고는 눈꼬리를 휘어 웃었다.

    바이올렛이 더 많은 욕을 하고 싶은데 알고 있는 욕이 부족하다는 걸 옆에서 눈치챈 젠은 작은 마님께 욕을 알려 드려야 하나, 말아야 하나 머뭇거리고 있었다. 그러나 알려 준들 제 작은 마님이 그런 말을 입에 담을 리 없으니 그냥 그만두었다.

    걸어서는 안 될 사람이 걸었으니, 윈터의 호흡이 거칠었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바이올렛이 젠에게 부탁했다.

    “의사를 불러 주겠니?”

    “그럴게요, 작은 마님.”

    이내 젠이 의사와 함께 달려오자 바이올렛이 불청객들을 돌아보았다.

    “그럼 다들 나가 주세요. 남편이 이야기할 상태가 아니니까.”

    바이올렛의 말에, 잠시 입이 붙었던 워호슨들이 캐서린을 감싸며 다시 소리를 냈다.

    “부인, 이게 무슨 무례입니까. 캐서린 부인께서는 윈터 경의 어머니 되십니다.”

    “맞습니다. 고작 훈육을 못 견뎌서 캐서린 부인에게 폭력을 행사하시고는 무슨 낯으로 윈터 경을 보시겠다는 겁니까?”

    문 밖에서 들리는 소리에 겨우 침대에 누운 윈터의 표정이 구겨졌다. 그는 지금껏 워호슨들이 제 아내를 물어뜯는 것을 실제로 본 적이 없는 것과 다름없었다.

    제가 정신이 돌아왔는데도 저렇게 바이올렛을 괴롭히려 드는 걸 보니, 지금 제 상태가 반송장으로 보이는구나 싶은 자괴감이 들었다.

    성격 같아서는 다 두들겨 패 내쫓고 싶은데 아직은 혼자 힘으로 몸을 일으키지도 못했다.

    가만히 이야기를 듣던 바이올렛이 물끄러미 워호슨들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하나하나 제 눈에 담듯이 눈을 마주치자 몰아붙이던 언성이 조금씩 잦아들었다.

    바이올렛이 입을 열었다.

    “훈육이라고 하셨지요.”

    “그래, 훈육이었단다.”

    캐서린의 말에 바이올렛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하지만 알고 계시다시피 저는 로렌스 가문의 적녀로 태어나는 순간부터 결혼을 하던 열여덟 살 때까지 단 한 순간도 제외하지 않고 왕녀로 살아왔습니다. 그 말은 즉, 제 훈육을 담당한 것이 로렌스 가문의 일원이었고, 제 부모님이셨다는 것입니다.”

    그녀의 말에 순간 침묵이 흘렀다.

    그녀가 거론한 부모라는 것은 선왕 부부를 뜻했다. 바이올렛이 말을 이었다.

    “그러니 성인이 된 저의 훈육이 더 필요하다 여기셨던 것은…… 제 부모님과 왕실의 예법이 부족했다는 의미입니까?”

    “…….”

    “워호슨의 예법이 왕실의 예법보다 뛰어났다니, 몰랐던 사실이군요. 다만 로렌스 가문은 훈육에 결코 매를 들지 않습니다. 매를 드는 것은 블루밍가의 방식이지요.”

    바이올렛이 캐서린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제가 훈육을 못 견딘 게 아닙니다. 배운 걸 행한 것뿐이지. 제가 이전에 배운 예법에는 그런 행동이 없으니까요.”

    “바이올렛!”

    “그럼 들어가 보겠습니다.”

    바이올렛이 말을 마치고는 제 사용인들의 보호를 받으며 병실 안으로 들어섰다. 순간 말문이 막혔던 워호슨들이 뒤늦게 들으라는 듯이 제 뒷말을 했으나 거기 신경 쓸 정신이 없었다.

    바이올렛이 들어가 보니 다행히 윈터는 완전히 정신을 잃은 게 아니어서, 마약성 진통제를 받은 후 차차 진정을 찾아 가고 있었다.

    윈터가 바이올렛을 보며 씨익 웃었다.

    “이제야 살 것 같군.”

    그러나 바이올렛의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도 드러나지 않았다. 그 덕에 윈터는 눈을 뜨자마자부터 심각한 불안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 분위기를 눈치챈 젠이 의사를 포함한 하인들의 등을 떠밀었다.

    “다들 나갑시다, 나가요.”

    그녀의 재촉 덕에 모두가 나간 후 병실에는 두 사람만이 남았다.

    두 사람 사이에 무거운 침묵이 벽을 세웠다. 윈터가 손을 내밀며 말했다.

    “이리 와. 내가 못 가니까.”

    “…….”

    “얼굴 좀 보자. 그 여자가 때렸다며.”

    윈터는 이제, 세상에 제 가족이라고는 바이올렛밖에 없다는 것을 받아들였다. 사실 그녀 하나만 있으면 세상 모든 것을 가진 것과 다름없었다.

    그러므로 그녀가 멀찍이 떨어져 제게 오려 하지 않는 것은 그를 무척 불안하게 했다.

    “욕을 하든 때리든 상관없으니까 가까이에 있어 줘.”

    윈터는 농담하듯 말하려 했으나, 애타는 목소리가 숨기지 못하고 새어 나왔다.

    바이올렛이 입을 열었다.

    “날 떠나려고 한 건 당신이잖아요. 내가 가까이 있을 필요가 있어요?”

    “내가 언제 그랬어?”

    “죽을 수도 있었어요. 당신이 죽을 수도 있었다고요.”

    “안 죽었잖아.”

    “죽었으면 어떡하려고!”

    바이올렛이 버럭 소리쳤다.

    “도대체 왜 그랬어요, 왜!”

    “약에 취한 놈을 어떻게 설득해. 관심을 끌려면 어쩔 수 없었어.”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어떻게 날 앞에 두고 그렇게…….”

    바이올렛의 목소리가 떨려 왔다.

    “게다가 무슨 사랑한다는 말을 그렇게 유언처럼 해요? 나더러 어떡하라고.”

    “유언은 무슨.”

    “아니면 뭔데요.”

    “혹시 내가 다시 말을 못…… 아, 유언이네.”

    윈터가 한 박자 늦게 깨닫고 입을 다물었다. 바이올렛이 두 주먹을 꼭 쥐고 그를 노려보았다.

    “당신이 다시 눈 못 떴으면요? 당신이 사랑한다는 말만 남겨 놓고 내 대신 죽었으면요? 그럼 난 어떻게 살아요?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자기 멋대로에 이기적이야!”

    바이올렛이 서럽게 화를 내자 윈터가 쩔쩔매다가 끙끙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가까스로 바이올렛을 끌어안아 의지하며 말했다.

    “내가 잘못했어. 진짜 잘못했어.”

    “가까이 오지 말아요.”

    바이올렛이 밀치려 하자 윈터가 더욱 꽉 그녀를 끌어안았다. 며칠을 혼수상태였던 윈터였으나 바이올렛이 밀어내는 힘이 너무도 약했다.

    제 이상으로 바이올렛이 고단했으리라 생각하니 윈터의 마음이 아팠다.

    “이해해 줘. 죽을 거라면 더더욱, 사랑한다는 말은 하고 죽어야지.”

    “지금 말대답하는 건가요?”

    “아냐, 말대답. 내가 잘못했어.”

    바이올렛이 이렇게까지 불같이 화내는 걸 처음 본 윈터가 곧장 꼬리를 말고 사과했다.

    진통제를 투여했다고 해도 일어나 있으려니 배에다 대고 망치질이라도 하는 기분이었으나, 그 아픔보다 바이올렛이 화를 내는 것이 더 두려웠다. 그녀의 얼굴에는 핏기가 조금도 없었다. 오로지 분노로 제 몸을 지탱하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다행히 바이올렛은 그가 아프다는 걸 인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감정을 추스르고 침대로 끌고 가 윈터를 눕혔다.

    윈터가 다시 멀어지려는 바이올렛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어디 가?”

    “산책하려고요.”

    “……지금? 나 두고?”

    바이올렛은 대답 없이 그의 손을 뿌리쳐 버렸다. 윈터는 황당한 얼굴이었으나 도무지 산책할 힘은 없고, 진통제가 온몸에 퍼져 졸음이 쏟아졌으므로 별수 없이 그녀를 놓아주었다. 사실 방금 전에 서 있던 것도 보통 사람이라면 몇 번을 까무러칠 고통을 이기고 한 행동이었다.

    윈터가 한숨 쉬며 휴식을 취하는 모습을 본 바이올렛이 돌아섰다. 그리고 누구에게 들킬세라 급한 걸음으로 병원을 빠져나왔다.

    그녀는 곧 병원 한편에 마련된 수수한 석등 옆 벤치에 웅크려 앉아 다시금 울음을 터트렸다.

    “아, 감사합니다…….”

    바이올렛이 신께 인사하고 무릎에 얼굴을 묻은 뒤 한참을 울었다. 그를 돌려준 누군가에게는 인사를 해야 했고, 방금 전까지 화를 내던 윈터의 앞에서 그럴 수는 없었다.

    그가 깨어났다는 사실에 바이올렛은 한참을 자신의 신과 카닉 일족의 신에게 감사했다.

    *

    윈터는 그 이후 거의 약에 취해 며칠을 더 보냈다. 잠깐잠깐 깰 때도 있었지만 진통제가 워낙 강했기 때문에 완벽히 깬 상태라고는 볼 수 없었다.

    그러나 확실히 그의 회복력은 비인간적인 정도라서, 앞으로도 일주일은 더 누워 있어야 하리라 예상했던 의사의 말과 달리 사흘 만에 정신을 차렸고, 일주일이 지나자 회복기에 들어섰다.

    그래도 제 남편이 성질이 급해 쓸데없이 돌아다니다가 상처가 덧날 거라는 바이올렛의 의견으로 거의 한 달 가까이를 병원에서 보냈다. 바이올렛 역시 몸 상태가 매우 악화되어 있었기 때문에, 병원 신세를 지며 차근차근 몸을 회복해야 하는 건 마찬가지였다.

    그 긴 시간 동안 여름이 훌쩍 지나가 버렸고, 바이올렛은 윈터에게 난 화를 쉽게 풀어 주지 않았다.

    그 덕에 윈터는 바이올렛에게 묻고 싶은 질문을 할 기회가 없었다. 그가 심장이라는 단어를 꺼내는 순간 바이올렛이 또 한바탕 불같이 화를 냈기 때문에, 윈터는 눈치로 바이올렛 역시 그 질문의 답을 피하고 싶어 저를 피하고 있음을 알았다.

    윈터는 제가 총에 맞는 순간 죽음을 예감했다. 그래서 바이올렛에게 사력을 다해 사랑한다는 말을 남기려 들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살아났고, 윈터는 그 순간 그에게 전했던 바이올렛의 말 중에 제가 알아들은 것은 토씨 하나 안 틀리고 전부 기억했다.

    “내가 여섯 살, 당신이 열두 살이던 해. 그 차가운 길에 쓰러져 있었던 것이 당신이었다면, 내가 당신의 심장의 약함을 가져간 거라면, 그래서 우리가 서약으로 맺어진 거라면 이번에도 당신의 아픔을 나에게 줘요. 대신에 당신이 가져가서 살 수 있는 건, 내 피든 생명이든 무엇이든 가져가요. 분명히 가능할 거예요. 당신 일족의 신이 당신을 돌보고 있을 테니, 분명…….”

    그것에 대해 묻고 싶었다. 물어야만 했다.

    그러나 윈터는 두려움에 사로잡혔고, 바이올렛에게 말을 꺼내는 순간 자신이 지옥으로 굴러떨어질 것만 같아 거기에 대한 질문을 할 수 없었다.

    바이올렛 역시 그 질문을 원하지 않는 듯하니, 윈터는 입을 다무는 쪽으로 마음을 굳혔다.

    이제 그가 해야 할 것은, 바이올렛에게 더 이상 그에 대한 질문을 하지 않으리라는 확신을 주는 것이었다. 계속 그녀가 저를 피하는 통에 미쳐 버리기 직전이었다.

    퇴원이 결정된 날 아침, 윈터는 젠을 통해 바이올렛이 주로 머문다는 병원 안 벤치로 향했다.

    언제나 마음에 드는 꽃이나 나무를 찾아내곤 하는 바이올렛은 윈터의 예상대로 근사한 단풍나무 아래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

    윈터가 책에 시선을 둔 그녀의 옆에 앉았다.

    “벌써 단풍이 드는군.”

    “북쪽이니까요.”

    바이올렛이 책에 시선을 고정하고 무심히 대답했다.

    당신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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