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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123화 (123/176)

123화

하옐이 살짝 흥이 나서 떠난 이후, 바이올렛은 담담한 태도로 경관들에게 진술을 마쳤다. 그리고 나서야 쉴 마음이 들어 윈터가 있는 병실에 들어섰다.

하옐은 가장 좋은 병실에 돈을 지불하고도 성에 안차했고, 작은 마님을 간이침대 따위에서 자게 할 수 없다는 젠의 고집으로 아예 새 침대까지 사다가 병실에 두었다. 그 침대는 떠날 때 이 병원에 기부할 예정이라, 의료진들도 말리지 않았다.

금방 일어날 것만 같던 윈터는 사흘이 지나도록 눈을 뜨지 못해 바이올렛을 바짝바짝 말라 가게 했다.

하옐이 잠시 병실에 들어와 바이올렛에게 보고했다.

“작은 마님, 칼슨 경께서 말씀하신 서류를 찾았습니다.”

“고맙네.”

하옐이 어깨를 으쓱이더니 일부러 경쾌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아직 작은 마님께서 이 일까지 신경 쓰실 여력이 없으실 것 같습니다. 대표님께서 일어나실 때까진 카닉사에서 서류를 보관하고 있는 게 어떨까요?”

“그래도 될까?”

“물론이죠.”

윈터가 쓰러진 이후, 원래도 주변인들을 소중히 여기던 바이올렛은 더욱 절실히 그들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없으면 버티지 못했을 하옐, 젠과 플립 뿐만 아니라 지난 사흘, 병원에는 쉼 없이 윈터의 부하 직원들이 드나들고 있었다. 그들이 가져온 과일바구니로 병실이 가득 찼고, 알 수 없는 후원금들까지 연일 들어와 병원이 실시간으로 호화로워지는데 이르렀다.

그녀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남편도 자기가 얼마나 사랑받고 있는지 알아야 할 텐데.”

“사랑까진 아니지만, 아무튼 저희 고생한 건 작은 마님께서 전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하옐은 바이올렛을 위로하고 싶은 마음에 연신 잔망을 떨다가 병실을 나갔다.

사위가 조용해지자 바이올렛은 순간 윈터가 영영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 불안감에 빠져 윈터의 침대에 걸터앉아 그의 손에 깍지를 끼워 잡았다. 그녀가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이걸 좀 봐요, 윈터. 이렇게 차이가 나요. 그러니…… 당신은 강해야 해요. 그게 이치에 맞아요.”

그렇게 말한 바이올렛은 몸을 숙여 윈터의 얼굴을 다정한 눈길로 내려다보았다.

바이올렛은 제가 말을 걸 때마다 윈터의 지는 해 같던 맥박이 강하게 뛰는 것을 느꼈다. 모든 사람이 착각이라 말할 테지만, 바이올렛은 그것을 알았으며 믿었다.

“일어나요. 외로우니까.”

그녀가 여간해선 부리지 않던 투정을 부렸다.

“맨날 나더러 잠이 많다더니, 자긴 온종일 자네요.”

그녀가 중얼거리고는 윈터의 이마에 살며시 입을 맞췄다.

“이제 그만 좀 자요, 윈터 블루밍.”

바이올렛이 그리 말하고는 침대로 돌아갔다. 그 뒤 얼마간 윈터가 있는 방향으로 고개를 두고 있던 바이올렛은 깜빡 잠이 들었다.

*

처음에는 하옐 덕에 대부분 입막음이 되었으나, 윈터가 병원에 있는 시간이 길어지자 사람들은 하나둘 의문을 가지기 시작했다.

계승식이 끝난 북부 별장에서는 며칠째 파티가 이어지고 있었다. 그곳에서 즐기고 있는 3분의 1 정도가 남부 귀족 워호슨들이었고, 그들의 우두머리가 블루밍 공작 부부였다.

헤스턴가의 계승식 축하 파티처럼 라크라운드 전역의 귀족들이 모이는 파티는 한편으로 세력 다툼을 하는 장소가 되기도 했다.

로렌스 가문, 에쉬 로렌스를 중심으로 한 수도 귀족들은 왕실을 중심으로 하고 있으니 차치하고, 남부 귀족 워호슨과 북부 귀족 보네스는 서로 라이벌 의식이 있었다.

어느 쪽이 좀 더 영향력이 강한가, 하는 질문에 있어 두 집단의 대답이 갈렸다. 비옥한 영지를 중심으로 재산을 불린 워호슨과 전쟁이 잦았던 북부의 변경을 지키며 힘을 불린 보네스는 서로가 서로를 우습게 여기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겉으로는 결코 그런 내색을 하지 않는 것이 라크라운드의 귀족들이었다. 마주치면 하하호호 웃으며 뭐 하나 트집 잡을 것 없을까, 고민하는 것이 파티의 유희였다.

그렇게 세력 다툼을 하던 차에 제임스가 병원에 보내 놓은 하인 하나가 블루밍 공작 부부에게 달려왔다.

“작은 주인님께서 아직도 깨지 못하고 계신답니다.”

“아직도?”

제임스는 윈터가 제 핏줄이라는 인식이 있어 그나마 조금 침통함이 있었다. 반면에 캐서린은 반가운 마음을 가까스로 숨겨야 할 판이었다.

윈터를 후계자로 세워 이익을 도모하려는 블루밍가 사람들도, 그가 몸져누워 버리면 그런 주장을 할 이유가 없어졌다.

그제야 비로소 제 아들인 디에브가 가문을 이어 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순간 제 표정에 그 희열이 드러난 것을 깨달은 캐서린이 그것을 수습하기 위해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았다.

“난 윈터에게 가 봐야겠어요, 제임스. 다시 얼굴을 못 볼지도 모르잖아요.”

그러자 하인이 당혹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하지만 작은 마님께서…… 오셔도 병실에 못 들어가게 할 거라고 제게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에 캐서린이 충격받은 얼굴로 멀리 있는 사람까지 들으라는 듯 말했다.

“어떻게 부모가 아들 얼굴 한 번 못 보게 할 수가 있을까, 그 애는?”

그러자 근처에 있던 워호슨 사내 하나가 말했다.

“뻔한 일 아닙니까? 이런 말씀 죄송하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말씀드려야겠습니다. 다 유산 문제지요.”

그 말에 옆에 있던 여자가 조심스레 맞장구쳤다.

“제 생각도 그래요. 그게 아니라면 부모가 자식 얼굴을 못 보게 할 이유가 뭐가 있겠어요?”

“염치도 없어라, 자기 남편을 1년이나 멋대로 떠나 놓고.”

팔이 안으로 굽어, 워호슨들이 블루밍 공작 부부의 입맛에 맞게 결론을 정해 놓고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블루밍 공작 부부는 이 상황이 매우 마음에 들었다. 캐서린이 제 친구들에게 말했다.

“설마하니 찾아간 어미를 못 들어가게 하겠어요. 지금 당장 아들을 보고 오겠어요.”

“부인께서 이게 무슨 마음고생이신지…….”

안쓰러운 걱정이 터져 나왔다. 캐서린은 솔직한 마음으로 윈터가 그대로 눈을 뜨지 못하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병원으로 갈 준비를 했다.

원래 그녀는 그 정도까지 윈터에게 매정하지 않았었다. 제가 윈터에게 매정해진 것은 후계자 자리를 노리도록 조종한 바이올렛 때문이라, 캐서린은 책임 소재를 명확히 하고 있었다.

*

겨우 잠들었던 바이올렛은 아득히 들리는 소란에 퍼뜩 눈을 뜨고 상체를 일으켰다.

그 소란이 남편에게서 난 것이면 좋으련만 그는 여전히 누워 있고, 소음은 병실 밖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당장 저리 비키게. 천한 것이 어찌 감히 내 앞을 막는 겐가.”

캐서린의 목소리였다.

하옐이 아무리 입막음을 했어도 기사를 통해서든 경관을 통해서든 윈터의 부모 귀에 윈터가 쓰러졌다는 소식이 들어가는 것은 일어날 일이었다.

바이올렛은 조금도 나가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지만 사용인들이 곤욕을 치르게 할 수도 없었다.

별수 없이 그녀가 문을 두드리자 그제야 온몸으로 막고 있던 플립이 문을 열었다. 바이올렛이 밖으로 나가 다시 문을 닫게 한 후 캐서린을 마주 보았다.

“아직 남편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오시지요.”

“바이올렛, 내 아들 얼굴을 봐야겠구나.”

캐서린이 언제나처럼 우아한 목소리로 말했다.

바이올렛은 캐서린과 함께 온, 그녀의 티 파티 자리에서 자주 보던 워호슨들을 발견하고 기가 찬 표정을 지었다. 블루밍 공작 부부가 윈터가 만든 금자탑 위에 살고 있었다 한들, 그들이 매주 티 파티를 열어 가며 호의를 베푼 것이 무의미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다 블루밍 공작 부부의 권위에 해가 될 사내가 쓰러지니 좋은 일이라도 난 듯이 몰려온 게였다.

한 입이라도 더 물어뜯으려는, 귀족의 가면을 덮은 이리 떼로 둘러싸여 자랐을 남편을 생각하니 가슴이 문드러졌다.

바이올렛이 꿈쩍을 않으니 캐서린이 말을 이었다.

“뭐 하고 있는 거니?”

“남편의 상태가 안 좋아서 병실에 여럿을 들일 수 없습니다.”

“나 하나는 들어가도 괜찮잖니. 아들 얼굴이 보고 싶구나.”

“깨어나면 그때 병문안을 허락해 드리겠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모질기만 하니…….”

캐서린이 애처로운 얼굴로 말했다. 그러자 바이올렛은 눈 하나 깜짝 않고 말을 이었다.

“이렇게 몰려오실 일이 아닙니다. 다들 돌아가 주세요.”

“아픈 아이를 두고 어딜 간단 말이니? 당분간 여기 머물러야겠구나.”

캐서린의 말에 바이올렛은 모든 감정과 함께 두려움마저 사라진 얼굴로 그녀를 마주 보았다.

“아내인 제가 나가 달라고 말하면 나가 주시는 게 예의 아닙니까?”

그녀의 말에 워호슨들이 충격받은 표정을 지었다. 바이올렛은 지나치게 침착해 어떻게 봐도 상처받은 얼굴의 캐서린 쪽으로 동정심이 들었다.

바이올렛이 담담히 말을 이었다.

“부인은 안 됩니다. 아드님을 가문에서 쫓아내겠다고 말하시던 부인께서 후계자 자리 주기 싫어서 남편을 해할까 봐 무섭…….”

그녀가 남들이 몰라야 할 말까지 내뱉자,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캐서린의 손이 날아와 바이올렛의 뺨을 세게 때렸다. 그 순간 복도가 조용해지고, 캐서린이 눈을 부릅뜨고 말했다.

“할 말 못 할 말이 따로 있지, 세상에 어떻게 어미에게 그런 말을 해!”

고개가 돌아갔던 바이올렛은 뒤이어 그녀가 죽었다가 다시 깨어나도 못 하리라 여겼던 행동을 했다. 그녀의 손이 방금 캐서린이 한 것과 똑같이 뺨을 때리고 떨어진 것이었다.

바이올렛의 행동에 워호슨들은 물론 그녀의 사용인들까지 숨을 들이켰다. 캐서린이 경악하며 손으로 제 뺨을 감쌌다.

“네, 네가 어떻게…….”

결혼 후 3년 내내, 바이올렛은 워호슨들이 파티에서 물어뜯을 놀잇감이었다. 사람들의 야유를 받아도 죄인처럼 고개를 떨굴 뿐이었다.

그런 그녀에게 뺨을 얻어맞으니 캐서린은 분노보다도 충격이 몰려왔다. 그녀가 판단하기에도 바이올렛은 결코 폭력을 쓸 사람이 아니었다.

그때 복도에 흐르는 침묵을 깨고 병실 문이 열렸다.

식은땀을 뒤집어쓴 윈터가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서 있었다. 아내가 맞는 소리에 귀신같이 눈을 뜬 그는 침대에서 문까지 걸어올 상태가 아니었던지라, 붕대로 감은 배 위를 움켜쥐더니 못 견디고 문틀에 머리를 기댔다.

캐서린의 눈에서 순식간에 눈물이 쏟아졌다.

“윈터!”

그녀가 두 손으로 윈터의 팔을 감쌌다.

“괜찮은 거니?”

열두 살 이후 줄곧 제 마음을 사로잡던 캐서린의 눈물과 다정함을 외면한 윈터가 괴로운 얼굴로 문 옆에 선 플립을 보았다.

“누가 누굴 때린 거야, 지금.”

그러자 플립이 곧바로 보고했다.

“마님께서 작은 마님을 때리셔서 작은 마님께서 반격하셨습니다.”

“거짓말 마, 우리 공주님이 폭력을 썼다고?”

“예.”

“내가 알던 세상이 아니네. 뒈진 게 분명하군.”

윈터가 거친 목소리로 중얼거리더니 캐서린을 밀어내고 문틀에 기대 주저앉았다. 그리고 굳어 있는 바이올렛의 손을 잡아당겼다.

“손 괜찮아?”

“…….”

“저것들 다 해고해야지, 우리 공주님 다치도록 뭐한 거야.”

아픔을 참느라 혈관이 툭툭 튀어나와서는 태연히 농담하는 윈터를 내려다보던 바이올렛의 어깨가 바르르 떨렸다.

“……나쁜 자식.”

바이올렛의 말에 윈터가 키득거렸다.

“거봐, 뒈진 거 맞네.”

당신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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