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화
그러자 눈물에 흠뻑 젖은 바이올렛의 맑디맑은 눈동자가 의사를 보았다.
의사가 멍해져 있어 먼저 입을 연 것은 젠이었다.
“어, 어떻게 됐어요?”
그러자 의사가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키고 말했다.
“분명히…… 분명히 출혈이 아주 심해서 여기 오시는 중에 쇼크로 사망하실 가능성이 높다고 봤습니다. 그런데…… 생각보다 출혈이 심하지 않았습니다. 놀랍게도…….”
“…….”
“주술이라도 걸려 있지 않고서야…….”
넋이 나간 듯이 말하던 의사의 시선이 바이올렛에게로 향했다. 반대로, 바이올렛은 그 피를 뺏기기라도 한 것처럼 창백해져 있었다. 우윳빛이던 목덜미가 가엽도록 창백해져 푸른 정맥이 드러나 보였다.
그때, 때맞춰 병원에 도착한 하옐이 불쑥 끼어들었다.
“그래서, 괜찮다는 뜻입니까?”
그가 묻자 의사가 신중하게 대답했다.
“탄알은 제거를 했습니다. 장담드릴 수는 없지만 의식을 회복하실 가능성을 높게 보고 있습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바이올렛이 거친 숨을 토해 냈다.
젠이 그 말만 기다렸다는 듯이 바이올렛의 옆에 웅크려 앉았다.
“대표님이라면 분명히 회복하실 거예요. 워낙 튼튼하시잖아요!”
“그래. 네 말이 맞아. 정말로 네 말이 맞구나.”
바이올렛의 얼굴에 미약하게나마 생기가 돌아오자 젠이 참지 않고 와락 그녀를 끌어안았다. 바이올렛의 등 뒤에서 플립이 차마 손끝 하나 못 대고 손을 들었다, 내렸다가를 하고 있었다.
저희 귀하디귀한 작은 마님이 찬 바닥에서 울고 있으니 두 사람 다 속이 말이 아니었다.
세 사람이 감정을 쏟아붓는 사이, 하옐은 늘 가지고 다니던 봉투를 꺼내 의사에게 쥐여 주며 기자들에게 대답할 말을 미리 지정해 주었다. 마지막에는 주술같이 쓸데없는 말은 차별이니 절대 하지 말라는 말을 덧붙였다.
바이올렛은 그제야 아내인 제가 해야 할 수습을 하느라 슬퍼할 겨를도 없는 하옐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해서 그에게 감사를 전하려 벽을 짚고 일어서다가 극심한 어지럼증을 느낀 바이올렛이 자리에 주저앉았다.
“작은 마님!”
세 사람이 동시에 비명을 질렀으나 바이올렛은 오히려 기뻤다.
온몸의 피가 싹 빠져나간 이 기분은 여섯 살의 바이올렛이 심장병을 앓던 소년과 마주치던 날과 같았다.
살아오며 대신 아파 주고 싶었던 사람이 그 소년 하나는 아니었으나 실제로 대신 아파 줄 수 있었던 사람은 하나였다.
하옐이 서둘러 바이올렛을 부축하더니 걱정스레 말했다.
“혹시 경관들에게 진술을 하실 수 있으십니까?”
“아, 해야지. 진술. 칼슨은 어디에 있나?”
“병원에 있습니다.”
“그러니까, 어디?”
바이올렛의 조용한 목소리에 하옐이 저도 모르게 움찔했다.
억울한 일이 있어도 차분히 경관에게 신고를 하고 가만히 기다리는 것이 가장 정확한 방법이라 믿던 바이올렛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지금 누구라도 알 만큼 사적인 복수를 원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하옐이 헛기침을 하고 말을 이었다.
“이 병원의 옆 건물에 경관들과 있습니다. 피해자와 가해자를 한 병원에 둘 수는 없다지만 여기서 다른 병원은 너무 멀어서요.”
“에쉬가 뒤를 봐줄 가능성이 있네.”
“예에?”
“약에 취해 저지른 일이니, 경관이 약의 유통 경로도 조사하지 않겠나. 그러니 에쉬가 나서서 경관의 입을 막으려 할 거야.”
“서, 설마 그냥 풀려나지는 않겠죠?”
“기껏해야 국외 추방 정도겠지.”
그녀의 말에 하옐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가 툭하면 제 상사 말에 대들고, 무조건 작은 마님 편부터 들었다고 해서 윈터 블루밍을 고깝게 여기는 것은 아니었다.
반대로 나락에 떨어져 있던 제 삶을 원하는 건 무엇이든 살 수 있는 삶-물론 그걸 살 수 있는 시간은 주지 않았지만-으로 만들어 준 윈터를 은인으로 여겼다.
바이올렛이 말했다.
“남편이 회복하기까지 시간이 좀 걸릴 테니까…… 그사이에 진술을 해 두는 것이 좋겠어. 기억이 더 흐려지기 전에.”
“정말 괜찮으신 겁니까?”
“괜찮고말고. 지금 가지.”
그렇게 말하는 바이올렛의 어느 한 부분도 괜찮지 않아 보였다. 그녀를 제외한 세 사람 모두, 지금 윈터가 깨어 있었다면 아내의 팔을 잡아 묶어서라도 꼼짝 못 하게 했으리라 확신했다.
바이올렛은 비교적 아픔에 강했다. 쭉 건강이 안 좋기도 했고, 결혼 후 3년 내내 모든 아픔이 꾀병으로 불렸기 때문에 ‘아프다’라는 기준 자체가 높아진 탓도 있었다.
바이올렛은 시체처럼 창백한 얼굴을 하고서 금방 반듯한 걸음걸이를 되찾았다. 복도를 우아한 자세로 걸어가는 그녀의 모습은 그녀를 매일 보던 세 사람의 눈에도 신비로운 것이었다.
하옐이 서둘러 따라붙어 경관에게로 안내하는 것을 뒤에서 보던 젠이 플립에게 소곤거렸다.
“플립, 우리 작은 마님은 어떻게 저런 분이실까요?”
어떻게, 저런 분, 하고 제대로 된 표현이 없었음에도 플립이 다 이해하고 공감한다는 듯 여러 번 고개를 끄덕거렸다.
*
옆 건물로 이동하며 하옐이 확신하는 얼굴로 물었다.
“작은 마님께서 말씀하신…… 여섯 살 때 일이 이번에 반복된 거죠?”
바이올렛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하옐이 한숨을 쉬었다.
“대표님은 몇 번이나 작은 마님께 목숨을 빚지는군요.”
“어차피 그 사람 혈통 때문에 일어나는 일 아닌가. 남편이 일어나면 같이 알리카에 가서 어떻게 된 건지 자세히 알아봐야 할 것 같아.”
“알리카는…… 접근이 쉽지 않으실 겁니다. 혼혈도 배척한다고 들었거든요.”
“저런.”
두 사람의 걸음이 옆 건물 앞에 멈추고, 하옐이 말했다.
“그럼 제가 경관을…….”
“바로 병실로 가겠네.”
“아, 안 됩니다. 어떻게 작은 마님을 위협하던 자와!”
“괜찮아. 칼슨은 수갑을 차고 있을 테니.”
바이올렛이 하옐을 달래고는 조용한 병원 복도를 걸었다.
칼슨이 있는 방의 문이 열려 있었다. 팔에 박혀 있던 탄알을 꺼내는 수술을 마친 칼슨은 어느 정도 약에서 깨 담요를 덮고 온몸을 덜덜 떨고 있었다. 양 손목에는 수갑이 걸려 침대와 연결되어 있었다.
바이올렛을 발견한 칼슨이 멍한 얼굴로 바이올렛을 보았다.
“바이올렛?”
바이올렛은 저도 모르게 병실 벽장의 유리문을 들여다보더니 안에서 붕대를 자르는 가위를 꺼내 들었다. 그녀의 행동에 놀란 경관 세 사람이 다급하게 바이올렛의 팔을 붙잡았다.
“부인! 진정하십시오!”
멈춰 선 바이올렛이 칼슨을 서늘하게 바라보았다.
“내가 괜한 걱정을 했어. 네가 너를 해할까 봐 걱정하다니. 너는 그것보다 훨씬 이기적인 자인데.”
그녀의 말에 경관들은 물론 함께 그녀를 말리러 온 하옐, 젠과 플립이 움찔하며 멈춰 섰다. 늘 예의 바르던 바이올렛이 저렇게 이성을 잃고 말하는 것은 처음 보았다.
플립이 조심스럽게 두 손을 뻗더니 아주 공손히 가위를 잡았다. 그의 손이 얼마나 조심스러웠는지 거의 두 사람의 손이 닿을 일도 없는 정도였다.
하옐이 윈터에게 보고하듯 바이올렛의 귓가에 작게 소곤거렸다.
“경관의 앞입니다. 국외 추방 후의 처리도 카닉사에서 할 테니 너무 염려 마세요.”
바이올렛은 그제야 손의 힘을 풀었다.
하옐은 정말로 아무렇지 않게 ‘처리’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바이올렛은 제가 아는 것보다 윈터와 카닉사가 훨씬 불법적인 일을 많이 저질렀을 것임을 무심코 생각했다.
그 생각을 하고 나니 그녀는 오히려 마음이 차분해지는 것을 느꼈다.
윈터가 살아 있는 한, 하옐을 비롯한 카닉사의 악당들은 제 회사의 가장 큰 자산인 윈터 블루밍을 공격한 자를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그가 아무리 로우 가문의 아드님이라도 그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러니 칼슨 로우는 카닉사에 맡겨 두면 될 것이다. 그들이 재물로 목을 조르든, 실제로 목을 조르든 할 테니까.
대신에 지금 바이올렛이 해야 할 것은 그 뒤의 배후를 치는 일이었다.
그녀가 경관들을 보았다.
“잠시 나가 주겠어요? 잠깐 이야기를 하고 진술할 테니.”
“예? 아…… 예, 알겠습니다.”
보통 때였다면 절대 피해자와 가해자, 그것도 가해자를 해할 가능성이 있는 피해자를 남겨 두고 떠나지 않았겠지만, 방금 이것을 부탁한 것은 보수적인 경관들이 여전히 왕실이라 믿는 로렌스 가문의 적녀였다. 그녀의 말은 부탁이 아니라 절대 명령이었으므로, 경관들 모두 고개 숙여 인사한 후 병실을 나섰다.
그들이 떠나자 바이올렛이 가까이 다가가 침대에 걸터앉았다. 그리고 부드러운 손길로 칼슨의 뺨을 감쌌다.
“칼슨.”
“……응?”
“너는 내가 결혼한 후 3년 내내, 내가 가진 것을 빼돌렸었지. 내가 가지고 있던 롱 리우드의 땅.”
“…….”
“그 땅에서 나온 소작료, 네가 수령해서 에쉬에게 줬지?”
하나씩, 차근차근. 그것이 바이올렛 블루밍의 인생이었고, 성격이었다.
그녀의 부드러운 추궁에 칼슨이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바이올렛의 바로 뒤에서 하옐이 플립이 겨우 받아 낸 가위를 쥐어 칼슨이 위해를 가하면 언제라도 찌를 태세를 취하고 있었지만 그는 느끼지 못했다.
칼슨의 눈에는 어려서부터 유일무이하게 사랑하던 여자가 보일 뿐이었다.
“……아니야.”
그가 가까스로 부정했다.
그러자 바이올렛이 고개를 조금 기울였다.
“왜 에쉬의 편을 들어? 넌 항상 내 편이었잖아.”
“…….”
“소작료, 준 거 맞지? 응?”
“바이올렛…… 나 이 얘기를 하면 정말로 죽어.”
“나도 알아.”
바이올렛이 안쓰럽다는 듯 말을 이었다.
“그래도 상관없어. 넌 나에게 총을 겨누었잖아. 그런데 내가 너의 목숨을 걱정해야 하니?”
“…….”
그녀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제 목을 조르자, 칼슨은 드디어 판단이라는 것을 할 수 있는 상태가 되었다.
자신은 윈터 블루밍이 아니었다. 바이올렛에게 용서를 받을 수 있는 건 그 남자뿐이었다. 그녀에게 사랑은 그런 것이고, 영원히, 어떤 방법을 써도 다른 남자는 향하지 않을 견고한 것이었다.
그 사실을 떠올리고 나니 약에서 깨어날 때 느끼는 지독한 허망함과 뒤섞여 정말로 죽고 싶어졌다.
칼슨이 저를 바라보는 바이올렛을 황홀하게 바라보았다. 그에게 왕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바이올렛 로렌스였다. 그녀를 처음 보던 날부터 지금까지, 언제나 그랬다.
그는 에쉬가 바이올렛을 증오한다는 것을 알았다. 바이올렛이 알고 있는 것 이상이었다. 그는 의외로 바이올렛에게 어마어마한 질투심을 느꼈다.
그것은 웨인이 세상을 떠나고 얼마 후, 제가 왕이 될 거란 생각에 기세등등해진 에쉬가 넌 무슨 일이 있어도 왕이 되지 못할 테니 이거나 쓰라고 바이올렛의 앞에 던져 주던 대관식 연습용 종이 왕관을 보았던 날 알게 된 일이었다.
“에쉬. 이게 정말로 왕관이라면 한 손으로 들어서는 안 돼.”
“가짜잖아, 멍청하긴.”
“가짜여도 왕은 왕관을 귀하게 여겨야 한다고 배웠어. 함부로 결정하면 많은 사람이 피해를 보는 자리에 있다는 걸 잊으면 안 되니까.”
눈을 동그랗게 뜬 바이올렛은 그 종이 왕관을 두 손으로 들어 대관식에서 어른들이 하는 그대로, 올바르고 우아한 자세로 관을 머리에 얹었다.
그 모습을 보자마자 에쉬는 짜증을 내며 왕관을 망가뜨려 버렸고, 칼슨은 몽롱한 눈으로 그 모습을 머리에 담았다.
칼슨이 입을 열었다.
“롱 리우드 땅의 소작료를 에쉬 전하에게 주면, 전하께서 마약상을 통해 약을 구하게 해 주셨어.”
“…….”
“내가 산 게 약이라는 증거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에쉬 전하께 전달된 증명서류는 수도에 있는 내 전용 극장 바닥에 숨긴 금고 속에 있어.”
“……아, 내 재산을 빼돌린 걸 기사화할 수 있겠네.”
바이올렛이 중얼거렸다. 바이올렛의 결혼 이후 에쉬는 줄곧 농사를 짓는 시늉을 하며 서민적인 이미지를 보여 왔었다.
그런 그에게 매달 막대한 소작료가 넘어갔다는 증거가 있다면, 에쉬의 이미지에 큰 타격이 될 것이 분명했다.
그녀가 하옐을 돌아보며 말했다.
“수도에 연락해 문서를 찾아 주겠나?”
“예, 바로 전보를 보내겠습니다.”
하옐이 수도로 연락하기 위해 달려 나갔다.
당신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