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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121화 (121/176)

121화

“연극은 어떤 걸 좋아해요?”

결혼 후 1년이 지났을 때, 맞은편에 앉은 아내가 물었다. 제 비천한 밑바닥이 드러날까 침묵으로 일관하던 윈터가 입을 열었다.

“연극 싫어해.”

“아…… 그럴 수 있죠. 가끔 지루하거나…… 어둡고 큰 소리가 나는 걸 싫어하는 사람도 있으니까요.”

당황한 바이올렛이 열심히 윈터의 말을 포장했다. 윈터는 열심히 수습하려 하는 바이올렛의 행동이 불편하게 느껴졌다.

나름대로 수습한 바이올렛이 물크러질 때까지 진한 육수에 삶은 고기를 입에 넣었다. 음식을 삼킨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이제 당분간은 남부에 있을 건가요?”

“글쎄.”

“아직 남부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이쪽 지리를 잘 몰라요. 혹시 가 볼 만한 곳이 있으면 추천해 줄래요?”

“…….”

윈터가 포크를 내려놓더니 집사에게 손가락을 까딱였다. 집사가 다가오자 바이올렛을 턱짓했다.

“같이 다녀.”

“예, 알겠습니다.”

그러자 바이올렛이 멈칫했다가 이내 미소를 지었다.

“신경 써줘서 고마워요.”

“…….”

“그리고…… 쉬엄쉬엄 일해요.”

“참견하지 마.”

“……미안해요.”

그 이후 다시 침묵이 흘렀다. 바이올렛은 성실하게 미소를 지으며 눈을 마주치려 애썼고, 윈터는 식사를 최대한 빨리 끝낸 후 집무실로 들어갔다.

*

이런 게 주마등인 모양이다.

윈터는 총을 맞은 저를 보고 얼어 버린 바이올렛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남부에 뭐가 있는지 추천해 달라는 게 아니라 같이 외출을 하자는 데이트 신청이었다는 것을 하필 지금 깨달았다. 그녀는 자주 눈꼬리를 휘어 웃어 보였는데, 동시에 빤히 보이는 설움이 드러나는 눈동자와 입술의 떨림을 윈터는 모른 척했었다.

이대로 죽으려는 모양이었다. 이런 기억이 나는 걸 보니.

자리에 쓰러진 윈터의 눈에 그 즉시 하옐이 달려와 칼슨을 쏘는 것이 보였다.

그는 흐려지는 시야 속에서 바이올렛을 다시 찾았다. 그녀는 안전했지만 사색이 되어 있었다.

손으로 피가 흐르는 배를 움켜쥐었다.

‘젠장, 우리 공주님 울겠네.’

아내는 자기가 아플 땐 독하리만큼 울지 않았지만, 남이 아플 땐 종종 울었다.

총에 맞고도 아무렇지 않은 척할 정도로 튼튼하진 않았는지 그의 몸이 바닥으로 풀썩 쓰러졌다. 이대로 눈을 감으면 영영 못 뜰까 봐 어떻게든 정신을 바짝 차렸다.

내가 아내에게 사랑한다고 말했던가. 제대로 눈 똑바로 보며 당신이 내 세상이라는, 머릿속에서는 지극히 당연한 사실을 입 밖에 낸 적이 있었나.

이대로 죽을 수 없었다. 아직 남부 구경도 못 시켜 줬는데. 그날 데이트 신청 거절한 거 미안하다는 사과도 못 했는데.

살고자 마음 먹어봐도 눈이 자꾸 감겼다.

칼슨에게 총을 쏘자마자 마차로 달려간 하옐이 사용인들에게 소리쳤다.

“의자 뜯어내! 전부!”

그 즉시 사용인들이 마차에 달려 들어가 의자를 뜯어내기 시작했다. 바이올렛은 들것에 실려 가는 윈터의 옆에 서 따라 걸으며, 용케 비틀거리지 않고 그의 손목을 감싸 생명을 확인했다.

늘 부부와 함께 이동하는 의사가 지혈을 하는 상태로 마차에 올라타며 소리쳤다.

“깨끗한 물과 수건을 가져와 주십시오. 최대한 많이!”

하녀 몇이 별장으로 달려 들어가고, 하인들은 마차 안에 윈터를 눕혔다.

물과 수건이 도착하자마자 윈터와 의사, 그리고 바이올렛이 동승한 마차가 출발했다.

의사가 지혈 상태를 계속 확인하며 바이올렛에게 말했다.

“계속 대표님께 말을 걸어서 의식 상태를 확인해 주십시오.”

그 말에 바이올렛이 고개를 크게 끄덕이고 윈터의 손에 깍지를 끼며 말했다.

“정신 차려요. 윈터, 나 보여요?”

윈터가 고통을 견디느라 눈에 핏발이 선 채로 바이올렛을 보았다. 바이올렛은 괜찮을 거라는 의미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는 모질던 제 열등감을 감내하던 아내의 떨리는 입술을 떠올리고 있었다. 지금 바이올렛의 표정이 딱 그날 같았다. 슬퍼서 견딜 수 없는데도 억지로 웃는 얼굴.

내가 뭐라고, 당신은 항상 그렇게 웃어 주려고 해. 나 같은 쓰레기도 남편이라고, 당신은 도대체 나 같은 놈의 어디가 좋아?

내가 왜 좋아. 나를 왜 사랑해. 당신이 다른 남자와 살아 보질 못해서 그래. 다른 놈과 연애를 안 해 봐서 그래. 그래서 나에게 만족하는 거야. 당신이 순진해서.

윈터는 그런 진심들을 농담처럼 늘어놓고 싶었으나 입이 열리지 않았다. 그는 제가 한 마디 할 수 있는 게 고작이란 걸 알고, 온 힘을 끌어내 말했다.

“……난 괜찮아.”

그렇게 말하는 동시에 윈터는 후회했다.

한 마디를 할 수 있으면 사랑한다고 말할걸. 이대로 죽으면 다시 뒈질 때까지 후회하게 생겼다.

반대로, 그가 원하는 농담을 하는 것은 바이올렛이었다.

“총을 든 사람을 자극하는 바보가 어디 있어요? 당신은 정말 이상한 사람이에요. 그런 이상한 사람을 사랑하는 나도 이상해지는 기분이에요. 그거 알아요? 당신을 떠나 키론에서 지낼 때요. 나는 당신이 곁에 있는 것 같은 착각을 할 때가 많았어요. 식사를 하기 전에 당신이 언제쯤 집에 오나, 기다릴 때도 있었죠. 당신은 내 첫사랑이지만 마지막 사랑도 될 거예요.”

바이올렛. 우리 공주님.

나는 다시 태어나더라도 당신만은 기억할 것 같아.

윈터가 있는 힘껏 바이올렛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바이올렛을 향해 식은땀이 흐르는 얼굴을 한 채 필사적으로 무언가를 말했다.

“공주님.”

바이올렛이 입술을 물고 고개를 끄덕이자 윈터가 겨우 말을 이어 갔다.

“나는 당신을 사랑해.”

“…….”

“정말이야.”

그가 그렇게 말하고는 남은 힘을 다 소진해 눈을 감았다.

제 생명이 남의 것처럼 아득하게 멀어지고 있다는 것이 온몸으로 느껴졌다. 끝인가, 생각하던 그때, 신기하게도 잠깐 다시 정신이 돌아오며 귓가에 속삭이는 바이올렛의 목소리가 들렸다.

“내가 여섯 살, 당신이 열두 살이던 해. 그 차가운 길에 쓰러져 있었던 것이 당신이었다면, 내가 당신의 심장의 약함을 가져간 거라면, 그래서 우리가 서약으로 맺어진 거라면 이번에도 당신의 아픔을 나에게 줘요. 대신에 당신이 가져가서 살 수 있는 건, 내 피든 생명이든 무엇이든 가져가요. 분명히 가능할 거예요. 당신 일족의 신이 당신을 돌보고 있을 테니, 분명…….”

그게 무슨 말이야?

바이올렛.

그게 도대체 무슨 소리…….

눈을 감은 윈터는 꿈에서 들리는 듯한 그 목소리에 대한 의문을 가지며 정신을 잃어 갔다.

*

폭죽 소리 때문인지 이 소란은 밖으로 쉽게 퍼지지 않았다. 하옐이 빠르게 입단속을 시킨 덕도 있었다. 계승식을 취재하러 왔던 기자 몇이 사고가 난 것을 눈치채고 기웃거리고 있었는데, 하옐은 그들에게 나중에 자료를 보내 주겠다, 설득했다.

수습을 마친 하옐은 부하들을 시켜 칼슨을 곧장 경찰서로 연행하게 한 야니스를 발견하고 서둘러 사건 개요를 전했다.

카닉사 입장에서 유일무이한 대표가 생명이 위험할 정도의 사고를 당했다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처럼 야니스 입장에서도 계승식 같은 큰 행사에서 이런 불미스러운 일이 일어났다는 것을 널리 알리고 싶지는 않았다.

하옐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하여 죄송하지만 후원의 수습을 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도련님.”

“그렇게 하지. 윈터 경의 쾌유를 비네.”

“예, 감사합니다.”

하옐이 정중히 인사한 후 바로 병원으로 출발했다.

야니스는 그 즉시 부하들을 이끌고 후원에 도착했다. 그는 칼슨과 윈터의 피가 흐른 곳을 먼저 확인하기 위해 가져온 등불을 들어 올렸다.

“……생각보다 심각하네.”

칼슨이 있던 곳의 피는 점점이 몇 방울 떨어진 정도였으나, 윈터가 있던 곳은 그렇지 않았다.

생각보다 훨씬 많은 피가 쏟아져 있어 병원까지 가는 길에 목숨을 잃을 가능성이 높아 보였다.

부하들이 그에게 다가오려 하자 야니스가 막아 세웠다.

“여긴 내가 하지.”

“예? 저희 시키십시오. 왜 도련님께서 이런 일을…….”

“계승식 준비로 한동안 너무 도련님 행세를 했더니 몸을 쓰고 싶어서 그래. 삽 이리 줘.”

야니스가 저에게 일 시키기를 망설이는 부하에게서 삽을 뺏었다. 그리고 윈터가 있던 곳의 흙을 파서 뒤집어 손수 증거를 인멸했다.

그렇게 얄미워하던 윈터 블루밍이지만 쏟아진 피를 보니 동정과 염려가 들었다. 그것을 감내해야 할 바이올렛 역시 안쓰럽기 짝이 없었다.

‘부인을 위해서라도 살아남아야 할 텐데.’

야니스가 그리 생각하며 흙을 말끔히 다져 총격전이 있었던 장소를 정리했다.

*

밖에서는 즐거운 여름의 파티가 이어지는데, 손이며 머리칼에 묻은 피를 닦아 내지도 못한 바이올렛은 별장에서 마차로 20분 떨어진 병원 복도에 주저앉아 있었다.

상태가 워낙 심각해 다른 병원에 있던 의사들까지 중간에 전부 달려와 합류하고 있었다.

함께 온 젠과 플립이 발을 동동 구르며 바이올렛을 찬 바닥에서 벗어나게 해 보려 했으나 그녀는 꿈쩍을 않았다.

몇 시간째 바이올렛이 죽은 사람처럼 굴고 있으니 젠이 이제는 거의 애원조로 말했다.

“작은 마님, 바닥이 차요. 어디 좀 들어가세요. 네?”

아무리 말해도 바이올렛이 듣지 못하자 결국 젠의 목소리가 커졌다.

“작은 마님!”

그제야 바이올렛이 고개를 들어 그녀를 보았다. 젠이 따듯한 우유를 내밀었다.

“이거라도 드세요. 대표님이 좀 튼튼하세요? 금방 괜찮아지실 거예요.”

젠의 호언장담에 바이올렛이 잠시 평소의 부드러운 그녀로 돌아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남편이 일어나기 전에 정신을 차려야지…….”

“그럼요. 그러셔야죠. 대표님 깨셨을 때 쓰러져 계실 순 없잖아요.”

젠의 설득이 통했는지 바이올렛이 그녀가 건넨 따듯한 우유를 받아 한 모금을 마셨다. 플립 역시 뒤에서 담요를 들고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작은 마님께 건네서 거절당하지 않을 타이밍을 노리고 있으니 바이올렛이 손짓했다.

“그것도 주게.”

“정말이십니까?”

플립이 바이올렛이 앉은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그녀에게 담요를 조심스럽게 덮어 주자 젠도 옆에 쪼그리고 앉아 담요를 여몄다.

“비서님은 뒷정리가 다 끝나면 오실 거래요.”

“그랬구나.”

바이올렛은 고개를 끄덕였으나, 사실 옆에서 하는 말 중 어느 것 하나 제대로 듣고 있지 못했다.

바이올렛은 어느 순간부터인가, 윈터 블루밍을 불안하게 여기기 시작했다.

돌이켜 보면 윈터는 한순간도 제 목숨을 귀하게 여긴 적이 없었다. 바이올렛이 처음 그의 앞에서 총을 꺼내던 날에도 그는 기꺼이 제 심장을 가리켰었다.

바이올렛은 한순간 사는 것을 싫어한 적이 있었으나, 이제는 집요하리만큼 삶을 사랑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런 저를 위해 총구를 마다않는 윈터는 못 견디게 미웠다.

그는 사랑한다는 말에 처음으로 온 진심을 담았다. 제가 죽으리라 예상했음이 분명했다.

그는 반대로, 바이올렛의 사랑을 믿지 않는 것이었다.

고작 정원이 제 사랑을 대신한다, 믿고 있으리라. 바이올렛의 곁에 정말로 필요한 것은 여전히, 제가 아닌 정원으로 알았으리라.

바이올렛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후에야 울음이 터졌다.

그를 이렇게 자라게 만든 모든 이들이 미웠다. 그를 이렇게 자라게 한 모든 이들이 결국은 저를 남부에 고립시키는 것에 일조했던 자들이었다.

그녀가 울기 시작하자 젠과 플립의 얼굴이 더욱 어두워졌다.

열여덟, 결혼하던 순간부터 어느 누구보다 어른이었고, 고고했으며, 참을성이 강하던 바이올렛이 어린애처럼 소리 내어 우는 것은 어느 누구도 그려 보지 못한 일이었다.

그녀가 섧게 울고 있을 때, 수술실의 문이 열렸다. 그리고 의사가 헛것이라도 본 듯한 얼굴로 걸어 나왔다.

당신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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