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화
플립의 말에 바이올렛이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별장에서 목숨을 끊으려 한 이야기는 하지 않아 다행이지만, 이것도 안 했으면 하는 이야기이긴 했다.
그래도 플립 입장에서는 엘라의 말에 계속 함구할 수만은 없었을 테니 이 이야기만 내놓는 것은 좋은 대처였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바이올렛이 엘라의 마음을 걱정하는 사이, 플립은 바이올렛이 차마 제 어머니에게 하지 못했던 것들을 묵묵히 대신하여 말했다.
“에쉬 전하를 귀히 여기시는 마음은 압니다. 귀하신 분이니까요. 하지만 에쉬 전하께서는 작은 마님께서 말을 듣지 않는다고 벽장에 가두기까지 하셨습니다. 그러니…….”
그의 말에 엘라가 기가 찬다는 듯 말했다.
“거짓말 말게. 내 아들은 그럴 사람이 아니네.”
“제가 어떻게 감히 거짓을 말하겠습니다. 그날 일은 거기 있던 사용인들도 압니다. 작은 마님께서는 혼절하실 때까지 갇혀 계시다가…… 그날은…….”
그날 바이올렛이 제 스스로에게 총을 겨눴다는 사실을 알게 된 플립의 신중하던 목소리가 잠겼다. 처음에는 그의 말을 거짓이라 부정하던 엘라의 표정이 차츰 복잡해졌다. 그녀가 바이올렛을 보았다.
“바이올렛, 저게 정말이니? 그 애가 그랬어?”
“……그랬었죠.”
“그럼 왜 말을 안 했니?”
어두운 가운데도 엘라의 얼굴이 조금씩 굳어가는 게 보였다. 훌륭하게 자랐다고 믿었던 제 아들이 제 딸에게 이런 폭력을 저지를 수 있는 사람이란 걸 몰랐다는 것도 충격이었고, 제 딸이 그걸 저에게 말하지 않았다는 것도 충격이었다.
바이올렛이 작게 한숨을 쉬었다.
“별일 아니었어요. 때릴 수는 없으니 나름의 방식으로 벌을 준 거겠죠.”
“왜…… 왜 말을 안 해, 나한테. 내가 네 어미인데. 나에게 말을 했어야지.”
엘라가 혼란스러워하자 바이올렛이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말하면 놀라실까 봐요.”
“아무리 그래도!”
“어머니는…… 에쉬를 사랑하잖아요. 말하면 마음이 아프실까 봐 못 했어요. 죄송해요.”
“바이올렛, 나는 에쉬만큼 너도…….”
“아뇨. 아니에요.”
바이올렛이 쓰게 웃었다.
“그건 아니에요, 어머니.”
엘라가 귀부인답게 금방 진정을 찾으며 말했다.
“그럴만한 사정이 있었던 게지. 이유가 뭐였니?”
“이혼 이야기 때문에요. 제가 이혼하면 에쉬의 입장이 곤란해졌던 거겠죠. 에쉬는 제가 받았어야 할 땅도 빼돌리고 있었으니까.”
“그 애가 오죽했으면.”
엘라가 슬픈 목소리로 말하자 바이올렛이 저도 모르게 웃었다.
“어머니는 항상 그러셨죠. 제 것을 에쉬가 가지고 싶어 하면 늘 에쉬에게 주라고 하셨어요. 에쉬도 제 것을 뺏는 걸 당연하게 여기죠. 심지어는 제 남편의 것까지도.”
“내가 언제 그런…….”
말하던 엘라는 방금 전, 제가 딸이 가진 것을 아들에게 건네주라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했다는 것을 떠올렸다.
그녀는 방금 바이올렛이 폭력을 당했다는 말을 듣고도, 저도 모르게 아들을 감싸고 있었다.
그것을 지금에서야 깨달았다.
바이올렛이 조용히 말했다.
“죄송해요.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전 이제 에쉬에게 아무것도 뺏기지 않을 거예요. 어머니께서 무슨 말씀을 하셔도.”
그 이후 배 위에는 침묵이 흘렀고, 플립 역시 말없이 노를 저었다.
한참이 지나서야 엘라가 입을 열었다.
“……그렇게 하렴. 그래도 가문 회의는 열도록 하마.”
“감사합니다.”
엘라는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말이 없었다.
*
배에서 내리자마자 엘라는 레이크하우스로 돌아갔다. 여기 더 있고 싶지 않고, 있을 힘도 없는 듯했다.
바이올렛이 마음이 무거워져 한숨을 쉬자 플립이 고개를 숙여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쓸데없는 말을 해서.”
“죄송은. 플립 덕분에 왕성을 안 넘겨도 되게 되었는걸?”
바이올렛이 농담조로 말하자 플립이 쑥스럽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리고 다시 꾸벅 인사한 후 제 일을 하러 사라졌다.
예상보다 너무 뱃놀이가 빨리 끝나 버렸다. 바이올렛이 바로 남편을 찾았지만 막 불꽃놀이가 시작되어 정원이 소란스럽고 복잡했다.
남편이 어디 있나, 열심히 살피고 있을 때 허리에 매어져 있던 장식의 진주가 툭 끊어졌다.
“어머.”
바이올렛이 당황하며 장식의 끝을 잡아 묶었지만 한 알이 건물 뒤로 굴러갔다.
그녀가 진주를 찾아 걸음을 옮겨 건물 뒤에 서는데, 먼저 거기 와 있던 남자가 진주를 주웠다.
“여기.”
거기 칼슨이 있었다.
바이올렛은 그에게서 풍기는 술 냄새와 알싸한 약냄새에 본능적으로 뒷걸음질을 쳤다. 그는 방금 이곳에서 투약을 한 모양이었다. 바닥에 주사기가 떨어져 있고, 그의 행동이 수상했다.
“왜. 네 거잖아. 받아.”
칼슨이 한 걸음 더 걸어오더니 바이올렛의 팔을 움켜쥐었다. 취해서인지 힘 조절을 못 해 그의 아귀힘이 바이올렛의 팔을 짓눌렀다.
“칼슨, 아파. 이거 놔.”
바이올렛이 침착한 목소리로 그를 달랬지만 칼슨은 그녀를 놓아주지 않았다.
그의 손에는 심한 떨림이 있었고, 눈빛도 기괴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바이올렛, 나 좀 살려 줘.”
“나중에 얘기해. 맨정신에.”
“나 좀 살려 줘. 이러다 죽을 것 같아. 자제가 안 돼. 처음에는 됐거든? 그런데 지금은 안 돼.”
“알았으니까…….”
“나는 너 밖에 못 구해.”
칼슨이 바이올렛을 벽으로 밀어 넣었다. 그의 눈동자는 약에 완전히 지배당해 흐리멍덩한 색을 띠고 있었다. 그는 잠시 기억을 더듬었다.
*
그날 칼슨은 막 공연을 마치고 바이올렛을 찾아온 참이었다. 수많은 사람들의 환호를 받으며 공연을 하다가 무대에서 내려오면 가슴이 텅 빈 것 같았다.
도저히 허망함을 참을 수 없었다.
딱 하나. 바이올렛을 만날 때만 그 허망함이 채워졌다.
칼슨은 여느 때처럼 커다란 꽃바구니를 들고 있었다. 어릴 때는 질질 끌고 다니던 것을 이제는 어른이 되어 가뿐히 한 손으로 들고 들어설 수 있었다.
정원을 거닐던 바이올렛은 칼슨이 들고 온 꽃바구니를 보며 즐겁게 미소를 지었다.
“이젠 울지도 않는데 왜 자꾸 꽃을 사 와?”
“네가 좋아하잖아.”
“공연을 한 건 너잖아. 받아도 네가 받아야지.”
“난 이미 엄청나게 받았어.”
칼슨이 유쾌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리고 안 울긴. 아직도 넌 웨인의 이야기만 나오면 울잖아.”
“이제 안 울어. 정말이야.”
칼슨은 제 오빠를 잃고 울던 바이올렛을 보던 날부터, 이 애는 내가 안 울게 지켜 줘야겠다고 마음먹었었다. 제 노래를 듣고 그제야 배시시 웃는 소녀를 보며, 목이 쉬도록 노래를 불러 줘야겠다고 다짐했었다.
그때 바이올렛이 입을 열었다.
“칼슨, 있잖아. 블루밍 가문에서 들어온 혼담.”
“응. 거절했지?”
“아니. 하려고, 그 결혼.”
“……뭐?”
“하겠다고 했어. 그래서…… 다음 달에 남부로 가.”
그녀의 말에 칼슨이 가슴이 철렁해 말했다.
“안 돼. 네가 왜 그런 미천한 이방인 서자와 결혼을 해? 그게 말이 돼?”
“아버지의 실패야. 내가 책임져야지. 게다가 다행히 그분의 필요도 맞았고.”
“가지 마. 넌 수도 사람이잖아. 평생 왕성에서만 살았던 사람이 어떻게 남부에서 살아?”
“모르겠어. 가 봐야 알겠지, 아마도?”
칼슨이 다급하게 고개를 젓더니 바이올렛의 손을 붙잡았다.
“나와 결혼하자. 지금 당장 결혼하면 그 망할 책임에서 벗어날 수 있을 거야.”
“칼슨.”
“응? 결혼하자.”
“난 이미 마음을 정했어.”
안 돼.
칼슨의 손에서 바이올렛의 손이 빠져나갔다.
공허함이 다시 그를 채웠다. 이번엔 무대에서 느낀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공허함이었다. 마음 한구석이 아니라 아예 마음 전체가 텅 비어 버린 것 같았다. 이제 나는 무대에서 내려서면 어디로 가야 하나.
네가 다른 남자와 결혼해 버리면 나는…….
*
칼슨은 물끄러미 바이올렛의 눈을 바라보았다. 처음에는 몸을 마비시키고 싶은 마음에 진통제를 먹다가, 그게 마약성이 되고, 이제는 아예 착란을 일으키는 약으로 비어 버린 마음을 채우게 되었다.
바이올렛은 겁에 질려 떨고 있었으나 칼슨의 흐릿한 눈에는 그게 보이지 않았다.
“싫어하지?”
“누구를?”
“윈터 블루밍.”
“아…….”
“그렇지? 그 남자가 싫지? 어쩔 수 없었던 거잖아. 넌 책임감이 강하니까. 별수 없이 그 작자와 결혼했던 거잖아. 그렇지?”
바이올렛은 침착해지려 애썼으나 쉽지가 않았다. 폭죽 소리 때문에 이 소란이 묻히고, 여기에는 지나가는 사람조차 없었다. 바이올렛이 대답이 없으니 칼슨이 총을 꺼내 그녀의 얼굴을 겨누었다.
“대답해. 싫다고 말해.”
“칼슨, 제발…….”
바이올렛은 칼슨을 설득하려 애쓰면서도, 그가 이성적으로 판단할 수 없는 상태임을 두려워했다.
그가 다른 한 손으로 바이올렛의 뺨을 쓰다듬었다.
“네가 속은 거야. 넌 고지식하니까. 그 남자를 사랑한다고 착각하고 있는 거야. 너는 그 남자가 싫은 거야. 그렇지?”
바이올렛은 칼슨을 일단 진정시키고 싶었다.
그런데 그 한 마디가, 그 남자가 싫다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녀가 대답이 없으니 칼슨이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약에 취하면 네가 있는데, 깨면 네가 없어. 어떻게 해야 이게 끝나.”
칼슨은 환각 상태가 아니라면 절대 여자에게 위해를 가할 사람이 아니었다.
망가진 그의 모습에 바이올렛은 그 와중에도, 여기서 살아남으면 마약 유통에 연관된 자들을 찾아내야겠다고 생각했다.
제 오빠인 에쉬가 포함되어 있다면, 반드시 그를 단죄하리라.
만약 살아남는다면.
바이올렛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총구가 그녀의 목에 닿았다. 그와 거의 동시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이봐. 이쪽을 봐.”
그 낮은 목소리에 칼슨과 바이올렛의 시선이 돌아갔다. 그 자리에는 삐딱한 자세의 윈터가 서 있었다.
그 역시 바이올렛이 보이지 않아 찾다가 이곳에 온 참이었다. 턱시도에는 총을 걸 곳이 없었고, 결국 빈손이었다.
윈터가 혀를 차더니 칼슨을 향해 말을 이었다.
“지금 어디다 화를 내는 거야. 낼 거면 나에게 내야지. 네놈을 두들겨 팬 것도 나고, 저 여자를 뺏어 온 것도 나잖아.”
“윈터, 뭐 하는 거예요?”
바이올렛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으나 칼슨은 이미 물러나 윈터 쪽으로 총을 겨누고 있었다. 칼슨이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윈터의 심장을 겨누었다.
윈터가 태연히 두 손을 들어 보였다.
“하마터면 착각할 뻔했지. 죽일 거면 날 죽여야지, 왜 좋아하는 여자한테 그래. 덜떨어져서는.”
“입 닥쳐.”
“도련님들도 그런 말을 쓰는군. 뭐, 가끔이겠지.”
“닥치라니까!”
윈터가 어깨를 으쓱이더니 미소를 지어 보였다. 바이올렛이 다급하게 칼슨을 달랬다.
“칼슨, 이제 내려놔. 나중에 후회할 거 아냐. 지금 내려놓으면…….”
“바이올렛, 내가 말했나?”
“뭐, 뭘?”
“네가 불행했으면 좋겠어.”
칼슨이 시선으로 잠시 바이올렛을 보며 중얼거렸다.
“난 네가 불행하길 바랐어.”
“하지 마, 제발. 제발 멈춰, 칼슨.”
바이올렛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리고 있을 때였다.
총성이 울리고, 바이올렛이 놀라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 그리고 다시 총성이 울렸다.
첫 번째 총성으로 윈터가 쓰러졌고, 두 번째 총성에는 칼슨이 신음하며 제 팔을 붙잡았다. 저 멀리서 하옐이 상비하던 총으로 칼슨의 팔을 쏘고 윈터에게 달려가고 있었다.
칼슨이 제가 움켜쥔 총으로 스스로를 쏘려들기 직전 뒤이어 달려온 사람들이 칼슨을 제압했다.
하얗게 질린 바이올렛은 저를 부축하려는 사람들을 뿌리치고 윈터에게로 향했다.
“윈터…….”
잔디 위로 피가 툭툭 떨어졌고, 윈터는 눈을 감고 있었다.
“아, 거짓말…….”
바이올렛이 비틀거리며 윈터에게로 걸음을 옮겼다.
윈터는 제가 어머니에게 버려지던 날보다 끔찍한 것이 바이올렛이 제 앞에서 죽던 날이라고 했었다.
지금, 바이올렛은 그의 마음을 완벽히 이해했다.
당신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