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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119화 (119/176)
  • 119화

    계승식이 끝난 것은 2시가 넘어가는 시간이었다. 그리고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헤스턴 가문의 새로운 변경백을 축하하는 파티가 시작되었다.

    비교적 어두운 대강당을 개방하기 위해 바이올렛과 헤스턴 가문 사람들이 함께 생각한 것은 모든 문과 창문을 전부 열어 두는 것이었다.

    그들의 예상대로 모든 외부로 향하는 문들을 개방하자 호수에 비친 달빛과 맑은 하늘에 쏟아지는 별빛이 근사한 분위기를 만들어 냈다.

    모든 문이 열린 후 밖에 모여든 파티 손님들을 본 윈터가 바이올렛에게 말했다.

    “굉장하군. 이렇게 인기 있는 행사인 줄 몰랐어.”

    “나도 이렇게 큰 행사가 될 줄은 몰랐네요. 하기야 계승식은 자주 있는 일이 아니니까요.”

    “하긴, 누가 죽어야 작위가 생기니까.”

    “……꼭 그렇게 말해야겠어요?”

    바이올렛이 한숨 쉬며 핀잔하고 있을 때였다.

    에쉬가 짜증이 난 얼굴로 다가온다 싶더니 그보다 먼저 가까이 있던 마리얀 헤스턴이 다가왔다.

    그는 오늘 작위를 계승한 카르잔 헤스턴의 고명딸이며, 지난번에 찾아왔다가 만취해 돌아갔던 야니스 헤스턴의 동생이었다.

    올해 막 열여섯 살이 된, 이제 겨우 두 번째 무도회에 참여한 마리얀이 두 사람에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전 마리얀 헤스턴이라고 하고요, 드릴 말씀이 있어요.”

    그러자 윈터가 귀찮다는 듯 손짓했다.

    “저리 가, 꼬마 아가씨.”

    “꼬마 아닙니다.”

    기사 가문의 딸답게 기백이 넘치는 마리얀은 제 오빠가 그랬듯이 윈터에게 쉽게 기가 죽지 않았다. 바이올렛이 부드러운 말씨로 그녀에게 물었다.

    “무슨 일인가요? 마리얀 양.”

    그러자 마리얀이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제가 중요한 정보를 드릴 테니 윈터 경께서 북부의 임업에 관심을 가져 주셨으면 좋겠어요. 남부 사업을 정리하고 계신다고 들었거든요.”

    바이올렛은 관심 있는 표정을 지었고, 반대로 윈터는 전혀 관심 없다는 듯 말했다.

    “꼬마 아가씨가 중요한 정보를 가져와 봤자.”

    “듣고 판단하시죠?”

    마리얀이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에쉬 전하께서요.”

    의외의 이름이 나오자 바이올렛이 그녀를 가만히 보았다. 마리얀이 은밀하게 말을 이어 갔다.

    “칼슨 경을 매수하셨잖아요.”

    “그걸 어떻게 아시는 겁니까?”

    바이올렛이 놀라서 묻자 마리얀이 움찔하더니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팬이라서요.”

    “아…….”

    바이올렛이 뒤늦게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어쩐지 마리얀이 저를 보는 눈빛에서 느껴지는 불쾌감이 제가 좋아하는 가수와 혼담이 오간 사람에 대한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리얀이 말을 이었다.

    “매수하게 된 것이…… 에쉬 전하께서 칼슨 경의 마약 조달을 눈감아 주고 있기 때문이라는 팬들 사이의 이야기가 있어요. 그래서 칼슨 경께서 에쉬 전하가 시키는 일이면 꼼짝 못 하고 하는 거라고요.”

    그녀의 말에 바이올렛의 눈이 커졌다. 마리얀이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전 에쉬 전하가 내 가수를 망가뜨렸다고 생각해요.”

    “그랬군요.”

    “두 분 다 에쉬 전하와 앙금이 있을 거라고 들었어요. 어떠세요? 증거를 잡아 올까요?”

    마리얀이 묻는 말에 바이올렛은 난처해하는, 반면 윈터의 입꼬리는 즐거움으로 끌려 올라갔다.

    “그거 굉장히 구미가 당기는군.”

    그 말에 마리얀이 화색이 돌아 말했다.

    “그렇죠? 절대 나쁜 제안은 아니에요.”

    “꼬마 아가씨가 증거를 찾아 오면 그때부터 거래를 하지.”

    “그럼…… 뭐 증서라도 써 주세요.”

    “여기 내 아내가 듣고 있는 게 증명이지.”

    그의 말에 바이올렛이 무슨 소리냐는 듯 윈터를 돌아보자 마리얀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야니스에게 윈터 경은 아내의 말이면 달도 따다 올 사람이라고 들었어요.”

    “어머. 그 정도는 아니에요, 마리얀 양.”

    “그렇죠. 달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하죠. 하지만 그럴 때 방법을 만들어 내는 것이 사업가 아니겠어요? 저는 그 능력이 필요하고요.”

    마리얀의 말에 윈터가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제법이군. 꼬마란 말은 빼 주도록 하지.”

    “와, 진짜요? 아니지, 좋아할 일이 아니구나…….”

    얼떨결에 좋아하던 마리얀이 바로 증거를 찾겠다며 그곳을 떠났다. 그러자 윈터가 기분 좋은 표정을 지었다.

    “정말로 증거를 찾아 오면 좋겠군.”

    “그러게요.”

    “자, 우린 파티 구경이나 하자.”

    바이올렛이 고개를 끄덕였다. 윈터가 그녀의 손을 잡고 걸어가며 말을 이었다.

    “오늘은 일이 잘 풀리는군.”

    “정말이네요. 당신에게 후계자 자리도 확정될 거고, 에쉬의 약점도 잡게 되면…… 오늘은 일이 잘 풀리는군요.”

    두 사람이 이야기하며 정원으로 걸음을 옮겼다.

    밖으로 나가 보니 파티의 시작을 알리기 위해 악사들이 경쾌한 음악을 연주하고 있었다. 형형색색의 차림새를 한 사람들이 벌써부터 흥이 올라 춤을 추고 있었다.

    그리 덥지 않은 북쪽에서 열린 여름밤의 파티는 모든 사람들을 들뜨게 했다. 악사의 연주가 끝나고, 사람들의 호응에 못 이기는 척 끌려 나온 칼슨이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윈터는 예쁘장한 얼굴에 여자들의 마음을 녹이는 목소리를 가진 칼슨이 못마땅해 인상을 썼다.

    바이올렛 역시 그가 있는 쪽을 보았다. 여전히 실력이 좋았지만 이전만큼은 못했다. 높은 음이 잘 나오지 않는지 일부러 피하는 것이 느껴졌다.

    휘청거릴 정도로 마른 그를 보던 바이올렛은 문뜩, 어린 시절의 칼슨을 떠올렸다.

    *

    칼슨의 아버지는 왕성에서 사용하는 모든 음악을 담당하고 있었다.

    그런 아버지의 손을 잡고 따라온 칼슨은 또래인 바이올렛과 자주 어울려 식사를 하거나 놀곤 했었다.

    그러다 바이올렛이 열 살 되던 해 큰오빠인 웨인이 세상을 떠났다. 바이올렛은 매일매일 침대에서 울기만 했고, 그즈음 칼슨은 친구를 위로하러 매일 소녀를 찾아왔었다.

    그러다 어느 날은 소년이 제 몸만 한 꽃바구니를 들고 찾아왔다.

    “바이올렛, 이것 봐. 네가 좋아하는 꽃을 가져왔어.”

    그런데도 바이올렛이 울기만 하자 칼슨이 쩔쩔매고 이리저리 침대 근처를 맴돌더니 별수 없이 구두를 벗고 침대에 폴짝 올라왔다.

    “바이올렛, 꽃구경할래?”

    “나중에 볼래…….”

    “아니면 바이올렛, 내가 노래 불러 줄까?”

    “……노래?”

    바이올렛이 훌쩍거리며 처음으로 반응하자 칼슨의 표정이 밝아졌다.

    “응, 나 노래 엄청 잘 부르거든! 어른들이 다 칭찬해 줬어.”

    “정말?”

    “정말이야.”

    그러더니 침대에서 다시 내려가서는 의자를 끌고 와 무대처럼 그 위에 올라서서 오페라의 한 소절을 부르기 시작했다.

    웨인이 떠난 이후부터 계속, 잠시도 그치지 못하고 울던 바이올렛이 잠깐 울음을 그친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제가 한 말처럼, 칼슨은 노래를 아주 잘했다.

    *

    윈터가 바이올렛의 팔을 감싸 쥐며 말했다.

    “바이올렛.”

    “아, 미안해요. 잠깐 어릴 때 기억이 나서.”

    바이올렛이 곧 기억에서 벗어나자 윈터가 물었다.

    “어릴 때?”

    “네, 칼슨이 순진하고 착한 아이였던 때.”

    그런 그녀의 말에 윈터가 저도 모르게 혀를 찼다. 그렇게 편하게 자라서는 왜 저 꼴이 됐는지 윈터로서는 모를 일이었다.

    대강당 앞 호수에는 조각배들을 전부 끌어다 놓고 그 위에 전부 등불을 가져다 놓았다.

    바이올렛이 그 근처에서 제 어머니 엘라를 발견하고는 윈터에게 말했다.

    “윈터, 어머니와 이야기를 좀 하고 올게요. 지난번에 다툰 이후로 거의 이야기할 일이 없었어서.”

    “그래, 그럼 난 잠깐 직원들과 있지.”

    그가 그리 말하며 파티에 온 카닉사 직원들을 턱짓하자 바이올렛이 고개를 끄덕였다.

    바이올렛과 눈이 마주치자 엘라가 다가왔다. 그러자 윈터가 엘라에게 우선 인사를 해 보이고 그녀에게 물었다.

    “뭐 요즘 불편한 거 없으십니까?”

    “아직은 없네. 이미 워낙 잘해 주고 있어서.”

    그녀의 말대로 아직까지 윈터는 엘라에게 장모에게 해 줄 수 있는 나름의 대우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윈터를 보는 엘라의 시선에는 여전히 이방인에 대한 못마땅함이 있었다.

    윈터는 그것을 알고 있었으나 엘라만 그런 것이 아닌데다 바이올렛의 어머니이기까지 하니 별로 개의치 않았다.

    “별말씀을. 가 보겠습니다.”

    윈터가 말하며 제 직원들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바이올렛의 시선이 그의 뒷모습을 따랐다.

    그는 바이올렛이 다른 남자와 이야기하는 걸 영 껄끄러워했지만, 바이올렛 역시 남편이 저렇게 아름다운 얼굴로 파티에서 돌아다니는 것이 껄끄러울 때가 있었다. 남들보다 목 하나는 커서 가뜩이나 눈에도 잘 띄는데.

    그가 걸어가니 칼슨의 노래에 폭 빠져 있던 여자들까지도 윈터를 힐끔거렸다.

    바이올렛이 제가 왜 이리 질투를 하나, 한심해하며 다시 어머니 쪽을 보았다.

    “그동안 연락 못 드려 죄송했어요. 헤스턴가와 결혼 이야기 꺼내셨던 게, 그때는 화가 많이 나서.”

    “아니다. 일이 이렇게 되고 보니 나도 너에게 너무했어.”

    엘라 역시 그날 딸에게 지나치게 모질었던 게 마음에 걸렸는지 일부러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바이올렛이 물었다.

    “잠깐 배를 타며 이야기 좀 하시겠어요?”

    “그럴까. 좋구나, 모처럼.”

    엘라가 허락하자 모녀는 곧 배에 올랐다.

    두 사람이 탄 배의 노는 근처에서 기다리고 있던 플립이 젓게 되었다. 배가 아름다운 호수 위를 미끄러질 때, 엘라가 입을 열었다.

    “네가 잘 지내는 것 같아 좋구나. 그래도 두 아이 중 하나는 행복하니 다행이네.”

    “네, 요즘 행복해요.”

    바이올렛은 얼마 전 만났던 엔나의 말을 떠올렸다. 그녀는 바이올렛에게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말했었다. 반면에 어머니는 바이올렛이 행복하다고 이미 결정한 상태로 말했다. 이상한 일이었다. 아예 타인을 사랑하는 것이 자식들을 고루 사랑하는 것보다 쉬운 일인 걸까, 바이올렛은 생각했다.

    배가 호숫가를 따라 천천히 움직였다.

    바이올렛이 말했다.

    “드릴 말씀이 있어요, 어머니.”

    “듣지 않아도 알아. 이번 국책에 관한 에쉬의 계획은 나도 반대다.”

    의외로 협조적인 엘라의 말에 바이올렛의 눈이 커졌다.

    “정말이세요?”

    윈터가 오늘은 일이 잘 풀린다더니 정말 그랬다. 엘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너희 아버지이며 내 남편이 몸과 마음에 병을 얻어 가며 추진한 법이야. 그걸 헛되게 할 마음은 없단다.”

    그녀의 말에 바이올렛은 마음에 있던 무거운 짐 하나를 내려놓는 기분이었다.

    “다행이네요.”

    “그래서 계획은 있니?”

    “네, 일단 저는 의회에서 로렌스 가문이 가진 세 자리를 선출직으로 돌렸으면 해요.”

    “그래, 그 정도는 필요하겠지. 그러려면 로렌스 가문 회의가 필요하겠구나. 그건 내가 조만간 주최하마.”

    “정말이세요?”

    바이올렛은 지금껏 없었던 어머니의 협조에 표정이 밝아졌다. 엘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런데 나도 부탁 하나 해도 괜찮겠니?”

    “네, 그럼요. 무슨 부탁이세요?”

    바이올렛이 들뜬 얼굴로 묻자 엘라가 서글픈 얼굴로 입을 열었다.

    “에쉬가…… 오죽하면 그러겠니. 그 애는 원래 왕이 되었어야 해. 그런데 지금은 아무것도 가진 게 없잖아.”

    “……어머니, 더 이상 남편에게 손 벌릴 생각은 마세요.”

    “남편까지 갈 게 뭐가 있니. 왕성의 땅 일부가 네 소유로 들어왔다고 들었단다.”

    “…….”

    “그걸…… 에쉬에게 넘겨주면 어떠니? 넌 특별히 필요하지도 않잖아. 원래 에쉬의 것이기도 하고.”

    그 말에 노를 젓던 플립이 힐끔 두 사람을 보았다.

    그러자 엘라가 인상을 쓰며 말했다.

    “감히 어딜 보는 겐가.”

    “죄송합니다.”

    플립이 고개 숙여 사과하자 바이올렛이 미소를 지었다.

    “내 걱정 안 해도 되네.”

    그러나 바이올렛의 얼굴에는 다 감추지 못한 설움이 담겨 있었고, 그것이 플립의 마음을 매우 아프게 했다.

    말수 적던 그가 입을 열었다.

    “아침에 작은 마님 말씀을 듣고 나니 계속 걱정이 됩니다.”

    “플립, 그건 비밀로…….”

    바이올렛이 부탁하자 플립이 입을 다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엘라가 물었다.

    “무슨 비밀 말이냐?”

    “아무것도 아니에요.”

    “뭐가 아무것도 아니야. 자네, 말해 보게.”

    엘라가 재촉하자 플립이 머뭇거렸다.

    “말해 보래도.”

    엘라의 언성이 살짝 높아지자 플립이 다시 입을 열었다.

    “작은 마님께서 벽장에 갇히신 적이 있습니다. 에쉬 전하의 명으로.”

    당신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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