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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118화 (118/176)
  • 118화

    “정말 상석이군요.”

    바이올렛이 마렌에게 하는 말에 윈터가 그녀를 보며 맞장구쳤다.

    “아주 마음에 드는군.”

    그들의 반응이 폭발적이라 마렌이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잘못을 했으면 보상을 해 드려야지요. 헤스턴가에서 부인께 저지른 잘못도, 경의 호의도 잊지 않고 있습니다.”

    마렌이 부드럽지만 힘 있는 어조로 말하고 자리로 돌아갔다.

    그녀가 떠나고 어느새 열두 시가 가까웠을 즈음, 부부의 뒤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윈터.”

    캐서린 블루밍의 목소리였다.

    바이올렛이 불쾌해하는 윈터의 팔을 잡아 조용히 말했다.

    “두 분이 먼저 악수를 청하지 않을 수도 있어요. 관계가 좋지 않으니까. 그럼 당신이 힘으로 붙잡아요.”

    “……무례한 거 아니야?”

    “주지 않으려는 작위를 뺏으려는데 어떻게 무례하지 않을 수 있겠어요.”

    바이올렛의 조용한 목소리에 윈터는 심장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저 조곤조곤하고 강경한 목소리로 저에게 명령하면 무엇이든 듣게 될 수밖에 없으리라 생각했다.

    윈터가 딴생각을 하는 사이 바로 앞까지 다가온 제임스 블루밍이 악수를 청했다.

    “여기 있었구나, 윈터. 카르잔 경에게 인사를 하자꾸나.”

    “…….”

    윈터가 이제 어떡하냐는 듯한 얼굴로 바이올렛을 보았다.

    바이올렛은 약은 편은 못되어 블루밍 공작 부부의 빠른 태세 전환에 바로 대응할 방법을 찾지 못했다.

    가주들은 보통 제 후계자를 찾아서 계승식의 주인공에게 데려가 소개를 했다. 바이올렛은 블루밍 공작 부부의 기회주의적 태도에 입매가 굳어졌다. 그와 동시에 그들이 이토록 빠르게 굴복할 만큼 윈터의 위세가 강하다는 사실에 공연히 섬뜩해졌다.

    윈터가 신경질적인 얼굴로 악수를 받아들이자 제임스가 그의 손을 두 손으로 감싸 잡으며 카르잔 헤스턴에게 다가갔다.

    “카르잔 경.”

    “아, 어서 오십시오.”

    카르잔이 정중히 인사하자 제임스가 윈터를 소개했다.

    “이쪽이 내 아들인 윈터 블루밍이오.”

    그러자 카르잔이 저도 모르게 미간을 좁혔다. 윈터 역시 황당한 표정을 짓고 있었으나, 일단 카르잔이 먼저 악수를 청했다.

    “또 뵙는군요.”

    “이거 불편하네요. 제 아내와 결혼하려 들던 분은.”

    윈터의 비꼬는 말에 카르잔도, 제임스도 멈칫했다. 조금 떨어진 곳에 서 있던 바이올렛도 한숨을 쉬었다. 저러지 말라고 그렇게 가르쳤는데, 말을 듣지 않았다.

    그녀가 물가에 내놓은 아이 보듯 윈터를 걱정하는 사이, 캐서린이 바이올렛에게 말을 걸었다.

    “바이올렛, 잘 지냈니?”

    “네, 잘 지냈습니다.”

    “남편이 윈터를 후계자로 받아들이도록 블루밍 가문 친척들을 설득했단다. 나도, 내 본가도.”

    “…….”

    “이제 만족하니?”

    캐서린이 분노가 서린 눈으로 바이올렛을 바라보았다. 바이올렛은 별말 없이 윈터를 보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아뇨.”

    “뭐?”

    “남편은 그걸로 만족하고 남부 사업 접는 것을 중단해 줄지 모르죠. 하지만 저는 만족 못 해요. 저는…….”

    바이올렛이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앞으로도 두 분을 용서할 수 없어요. 용서할 이유도 없지요. 두 분께서 저에게 용서를 구한 적이 없으니.”

    “우리가 너에게 뭘 잘못했다는 거니.”

    그녀의 뻔뻔한 말에 바이올렛이 기가 차서 말했다.

    “지난 3년간 저를 고립시키고, 아이가 있다 믿게 속이셨죠.”

    그러자 캐서린이 우아하게 웃었다.

    “너는 참, 남을 나쁜 사람으로 만드는 재주가 있구나. 그러니 우리 아들도 네 말에 깜빡 속아 우리와 절연을 한 게지.”

    “…….”

    “바이올렛, 부모와 아들 사이를 갈라놓은 너보다 나쁜 사람이 여기 어디 있단 말이니?”

    바이올렛은 윈터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씀씀이라는 것이 갑자기 확 늘리는 건 쉬워도, 조금이라도 줄이는 건 어렵다는 말.

    그 말 그대로였다. 그들은 씀씀이를 줄이느니 안면몰수하기를 택했다.

    캐서린이 말을 이었다.

    “우린 그렇게까지 나쁜 짓을 네게 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아.”

    “두 분은 저를 죽음으로 몰아넣으셨지요.”

    바이올렛의 목소리는 여전히 담담했으나 그녀의 눈빛은 죄를 가늠하는 신처럼 냉정했다. 캐서린의 입가에서 미소가 조금씩 지워졌다.

    “그만두렴. 엄살 부리는 건 여전하구나.”

    “엄살 부린 적 없어요.”

    “어차피 이제 우린 윈터를 후계자로 삼겠다고 마음먹었다. 디에브에게 미안하지만 어쩌겠니. 저 애가 우리에게 소중한 것을.”

    “…….”

    “부모 자식의 관계는 그렇게 쉽게 끊어지는 게 아니잖니. 우리는 차차 다시 관계가 회복될 거다. 너도 받아들이든지, 싫으면 떠나든지 하렴. 또 이간질하려 들지 말고.”

    캐서린의 목소리는 단호하고 꽤 높았기 때문에 주변의 사람들에게까지 그 다툼 소리가 들렸다.

    바이올렛은 그녀의 이야기를 들으며, 지금만큼은 제가 윈터처럼 쉽게 욕설을 내뱉는 사람이었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하기야 그랬어도 아마 자신은 윈터가 적어도 열두 살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부모라 믿고 따른 자들에게 함부로 대하지 못했을 것이다.

    바이올렛이 입을 열었다.

    “이제 남편은 두 분 자식이기 이전에 제 남편이에요. 두 분과 관계가 회복되는 건 제가 막을 거예요.”

    바이올렛은 또렷한 눈으로 캐서린을 보며 단언했다.

    “남편은 지금까지 어마어마한 부를 누적했고, 앞으로도 그럴 겁니다. 그걸 두 분은 이제 누리지 못하시겠지요. 그럴 기회가 있었음에도.”

    “바이올렛!”

    “남편은 제 말을 믿어요.”

    바이올렛이 단호히 말하고 윈터를 보았다. 그러자 그가 이야기를 멈추고 바이올렛 쪽을 보았다.

    바이올렛이 중얼거렸다.

    “우린 더 이상 돈과 권력 때문에 결혼한 부부가 아니에요. 나는 남편을 사랑하고, 남편은 나를 사랑해요. 그런…… 평범한 부부예요, 이제는.”

    그녀는 곧 윈터에게서 시선을 떼고 캐서린을 보았다.

    “그러니 어디 또 해 보세요. 또 그런 몹쓸 약을 가져와 보세요. 결코 이전처럼 쉽게 헤어지지 않을 테니까. 나는 이제 더 이상 남부에 고립되어 있지 않아요. 더 이상 왕녀는 아니지만, 그 사실이 나에게 아무 힘도 없다는 증명은 아니에요.”

    그녀의 말에 알 수 없는 위압감을 느낀 캐서린이 저도 모르게 입을 다물었다.

    이어서 윈터가 다른 귀족들은 내지 않을 구두 소리를 내며 아내에게 걸어왔다.

    “무슨 일 있어?”

    “아뇨. 당신이 잘하고 있나 궁금해서 봤어요.”

    “잘하고 있었어.”

    대답을 마친 윈터가 아내의 팔을 잡아 제 뒤로 감추며 캐서린을 내려다보았다.

    “아내에게 또 무슨 말씀을 하신 겁니까? 표정이 안 좋잖아요.”

    “말은 바이올렛이 했다. 네가 우리와 절대 화해하지 못하게 할 거라는구나.”

    캐서린이 바로 윈터에게 그걸 이르자 강경하던 바이올렛이 그제야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래도 이건 너무 독단적인 말이었나, 싶어 윈터에게 해명하려는데 그가 인상을 쓰고 말했다.

    “전 제가 받을 작위만 받으면 두 분 일에 관심이 없습니다. 남부에도 안 갈 거고.”

    “윈터…….”

    “바쁘실 텐데 가셔야죠?”

    윈터가 꺼지라는 듯한 눈빛으로 다른 사람들을 턱짓하자 캐서린이 더 말을 하지 못하고 자리를 떠났다. 바이올렛이 한숨을 쉬더니 윈터의 손을 당겼다.

    “너무 속상해하지 말아요.”

    “왜 속상해? 작위를 준다는데.”

    “그래도…… 아, 후계자가 되면 남부 사업은 어떻게 해요?”

    “되도 안 되도 결과는 같았어, 애초부터. 정리할 사업은 정리하고, 남길 사업은 남기지. 물론 후계자가 되었으니 좀 더 자연스럽게 남길 사업을 남길 수 있게 되겠군.”

    “사업을 다 뺀다고 한 건…….”

    “겁 준 거지. 원래 사업은 기세싸움이 절반 아닌가?”

    윈터의 뻔뻔한 대답에 늘 고지식한 바이올렛은 충격받은 표정을 지었다.

    “작위를 받아도 정리할 사업은 정리할 생각이었군요.”

    “이 기회에 내게 달라붙어 있던 돈 안 되는 블루밍 가문 거머리들은 떼어 낼 수 있게 됐지.”

    그가 태연히 답하고 비열하게 웃었다.

    바이올렛은 지금껏 윈터와 내기를 하면 매번 지는 기분이 들었던 걸 떠올렸다.

    그게 기분 탓이 아니라 윈터가 지금까지 이겨도 지는 내기를 제안해 왔던 게 아닌가, 바이올렛은 뒤늦게 눈치챘다.

    *

    잠시 후, 12시를 알리는 종이 울리고 계승식이 시작되었다.

    윈터는 이런 중요한 대귀족들의 행사에 처음으로 참여했기 때문에 바이올렛의 말을 최대한 들으려 했다. 그러나 아무리 그래도 거의 태어날 때부터 예법 교육을 받은 다른 귀족들과 비교해 봤을 때 어딘가 삐딱해 보이는 것은 여전했다.

    대강당의 불이 전부 꺼지고, 사제가 기다리는 곳으로 카르잔 헤스턴이 성큼성큼 걸었다. 그는 라크라운드의 기사식 걸음걸이를 가지고 있었다. 어깨가 흔들리지 않는 걸음으로 걸어간 카르잔이 사제로부터 헤스턴가의 가보인 다이아몬드가 박힌 검을 받아 들었다.

    바이올렛은 원래 저를 보상으로 하여, 저기 저 사제의 자리에 서 있으려 계획했던 에쉬 로렌스를 무심코 돌아보았다. 예상대로 그는 매우 불쾌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리고 그 역시 분노가 섞인 눈으로 바이올렛을 보았다.

    바이올렛은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유치하지만 이긴 기분이 들었다. 어릴 때부터 뭘 하든 오빠에게 짓눌리기만 했던 터라, 그 이겼다는 느낌이 살짝 통쾌했다.

    그리고 그 뒤에는 어머니 엘라 필리체가 있었다.

    그녀는 제 아들 대신 사제가 계승식을 진행하는 모습이 서글펐는지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아 내고 있었다.

    그 모습에는 다시 진 기분이 들어 씁쓸해하는데, 그녀의 허리에 윈터의 팔이 감겼다.

    “집중해야지, 공주님. 카르잔 헤스턴이 섭섭해하겠어.”

    “위, 윈터. 경건한 자리에서…….”

    “뭐. 자기도 딴짓하던 주제에.”

    윈터가 못되게 말하고는 아내가 보던 쪽을 힐끔 보다가 그녀가 다시 앞을 보게끔 자세를 돌렸다.

    사제와 카르잔 헤스턴이 있는 곳을 제외하고 불이 다 꺼져 있긴 하지만 이렇게 딱 달라붙는 건 명백히 예의가 아니었다. 게다가 불이라도 켜지면 사람들이 얼마나 수군거릴는지.

    바이올렛이 얼굴이 붉어져 그의 팔을 떼어 내려 했지만 놔주질 않았다. 오히려 그녀의 목덜미에 입술이 닿았다가 떨어지는 것이 아닌가.

    바이올렛은 순간 소리라도 지를 뻔해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어머니와 오빠 일은 물론 아까 블루밍 공작 부부를 만났던 일까지도 단번에 머릿속에서 날아갔다.

    “어떻게 이런 자리에서 그런 짓을 해요…….”

    바이올렛이 울 것 같은 목소리로 말하자 윈터가 웃는 것이 느껴졌다. 곧 그의 팔이 바이올렛에게서 떨어졌다.

    그때 타이밍 좋게 횃불을 든 예비 사제들이 다시 불을 켜기 시작했다. 안도의 한숨을 쉬며 윈터를 돌아본 바이올렛이 눈이 커져서 손수건을 꺼내 그의 입술에 묻은 펄을 닦아 냈다.

    “아, 정말. 당신 같은 사람은 처음 봤어요.”

    그녀의 잔소리에 윈터가 미소를 지었다. 그러다 저희를 보는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돌려 보니 거기 칼슨이 있었다. 지금은 부부를 보고 있지 않았지만, 방금 전까지 저희 쪽을 본 것이 분명했다.

    바이올렛이 윈터의 시선을 따라서 고개를 돌리고는 입을 열었다.

    “칼슨이…… 총을 가져왔어요.”

    “카닉사 직원들 중에도 가져온 사람 있어.”

    “하지만 저렇게 불안정한 사람은 없죠?”

    “약쟁이 자체가 없지.”

    윈터가 무심코 말하고는 생각해 보니 좀 거슬리는지 미간을 좁혔다.

    당신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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