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화
바이올렛은 못 본 척하려 했으나, 노래를 시작했을 때부터 그녀를 발견했던 칼슨이 곧 배를 타고 빠르게 그녀 쪽으로 다가왔다. 그러더니 유쾌한 얼굴로 물었다.
“경께서는 어디 가시고 혼자 식사해?”
“혼자 아니고 셋이 먹고 있었어.”
“부리는 사람들과 먹는 건 같이 먹는 게 아니지.”
칼슨의 웃음 섞인 말에 바이올렛은 인상을 썼지만, 다른 귀족들과 일해 본 경험이 있는 플립과 젠은 대수롭지 않은 표정이었다. 저희 작은 마님이 특별한 것이지, 일반적인 일은 아니란 걸 둘 다 알고 있었다.
칼슨이 말했다.
“매번 혼자 있네. 경께서 아직도 혼자 둬?”
“지금 잠깐 바빠서 그래.”
“잠깐이라니. 결혼 후부터 늘 바빴지.”
칼슨이 안쓰럽다는 듯 바이올렛을 보았다.
“외롭겠네.”
“외롭지 않아. 그보다 칼슨.”
“응.”
“무기를 들고 다니지 않는 게 어떨까?”
그녀의 나지막한 권유에 칼슨이 묘하게 웃었다.
“왜?”
“너의 심리 상태가 온전하지 않으니까. 혹여 너 스스로를…….”
“잠깐만. 내가 자해를 할까 봐 하는 말이야?”
칼슨이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냐는 듯 물었다. 바이올렛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런 걱정도 있어. 그러니 약을 끊기 전까진 그래 줘.”
“너도 여전하구나.”
칼슨이 매력적인 미소를 지은 후 그녀 쪽으로 몸을 숙이며 말했다.
“그런데 바이올렛. 예전의 넌 이런 생각을 하지 않았어.”
“무슨 의미야?”
“취한 사람이 총을 가지면 그게 남을 위협할까 걱정을 했지, 자기 자신을 죽일 거라 예상하는 사람이 아니었다고.”
칼슨이 말문이 막혀 입을 다물어 버리는 바이올렛을 애증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원인은 윈터 블루밍에게 있겠지.”
“그렇지 않아.”
“아니, 넌 알아야 해. 네 남편이 널 계속 다치게 할 거라는 걸.”
그가 그리 말하고는 무대에서 인사하듯 모자를 벗고 허리 숙여 인사해 보인 뒤 다시 멀어졌다. 그가 떠나자 젠이 오들오들 떨며 바이올렛에게 말했다.
“아휴, 꽃처럼 생겨선 위험한 분이시네요!”
“그러게…….”
바이올렛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플립이 다시 숙소로 노를 젓고, 젠이 먼저 짐을 가지고 내리며 말했다.
“차 마저 드시고 오세요. 전 먼저 가서 드레스 꺼내 놓을게요, 작은 마님!”
“그래. 곧 올라갈게.”
젠이 바이올렛을 꾸밀 생각에 신이 나서 올라간 사이, 바이올렛은 잠시 배에서 남은 차를 마셨다. 그때 플립이 입을 열었다.
“작은 마님, 무례라는 건 알지만…….”
바이올렛이 다정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자 플립이 굳은 얼굴로 말을 이었다.
“저도 걱정이 되어서요. 저 도련님께서 하신 말…… 왜 도련님께서 남이 아닌 본인을 해할 거라고 생각하신 겁니까?”
플립은 여간해선 이런 것을 물을 사람이 아니었다. 그것을 아는 바이올렛이 잠시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그런 생각이 든 적도 있었네. 지금은 아니지만.”
“……예전에 블루밍 가문 별장지기 할머니가 총 하나가 꺼내져 있었다고 하신 적이 있었습니다. 작은 마님께서 그곳에 가셨을 때요.”
그날, 바이올렛이 벽장에 갇혔다는 것을 알고 가장 걱정하고 있었던 것은 플립 하나였다. 그래서 그날 바이올렛을 주의 깊게 살폈던 것 역시 플립뿐이었다.
바이올렛이 가만히 플립을 바라보다가 미소를 지었다.
“비밀로 해 주게.”
“작은 마님…….”
“지난 일이야. 남편밖에 모르고 있네.”
“대, 대표님께서는 아십니까?”
“응. 그래서 내가 떠나려 할 때 보내주던걸.”
바이올렛의 씁쓸한 목소리에 플립이 조용히 말했다.
“비밀로 하겠습니다, 작은 마님.”
“고마워. 그날 나를 걱정해 준 것은 더 고맙고.”
바이올렛이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때 레이크하우스에서 윈터가 걸어 나왔다. 두 사람의 모습에 표정이 굳어 걸어오는 윈터를 본 플립이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배 위에 가만히 앉아 있는 바이올렛은 하얗고 아름다운 새 같았고, 다가오는 윈터는 새까맣고 거대한 맹수처럼 보였다.
플립은 정말 바이올렛에게 윈터가 해로운 건 아닐까 걱정이 되었다.
바이올렛이 그에게로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일은 끝났나요?”
윈터가 대답 대신 플립에게 명령했다.
“내려.”
플립이 고개 숙여 인사하고 배에서 내려 떠나자 윈터가 배 안에 훌쩍 올라탔다. 바이올렛이 물었다.
“아침 식사는 했어요?”
그러자 무릎을 구부려 앉은 윈터가 대뜸 물었다.
“본인이 매력적인 건 알지?”
“……네?”
“예쁜 것도 알고.”
“그게 무슨…….”
바이올렛의 당황한 얼굴에도 윈터의 표정은 오히려 험상궂게 구겨졌다.
“당신 하녀가 칼슨이 말을 걸었다고 알려 줘서 왔더니, 이번엔 다른 사내놈이 당신을 안쓰러워 어쩔 줄 모르는 눈으로 보고 있잖아.”
“아. 그럴 만한 대화였어요.”
“무슨 대화.”
“그게…….”
말해도 되는 이야기인가, 바이올렛이 멈칫하자 윈터가 그녀 쪽으로 몸을 가까이 했다.
“무슨 얘긴데.”
“……화났어요?”
“아니, 질투해.”
그가 숨기지 않고 대답했다. 그의 행동이며 말투에 바이올렛은 신기함을 느꼈다.
아까도 칼슨이 비슷하게 가까운 곳에 있었는데, 그에게서는 말끔한 비누 냄새와 우아한 향수 냄새 같은 것이 났고 목소리도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웠다.
그런 그에게서는 꽃에게 가까워지는 기분이 났다. 가시가 많은 장미 같았다.
그런데 지금 남편이 가까이 접근하는 것은 완전히 기분이 달랐다. 번뜩이는 생명이 그녀를 덮쳐 오는 듯했다.
심장이 사정없이 뛰고, 그의 남자다운 매력에 목덜미를 끌어안아 매달리고 싶어졌다.
바이올렛은 이 순간 처음 제가 남편에게 정말로 성적인 매력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받아들였다. 같은 남자인 칼슨에게는 전혀 들지 않던 감정이 윈터 블루밍에게만 들었다.
“바이올렛, 무슨 생각 해?”
윈터가 슬슬 이성이 끊어져, 이따가 플립과 칼슨 둘 다 멱살을 잡아 호수에 처박아야겠다고 마음먹었을 때였다. 차향이 남은 바이올렛의 입술이 열렸다.
“당신은 다르다는 생각을 했어요.”
“무슨 소리야.”
“다른 남자와 달라요. 나에게 당신은…… 달라요.”
그녀의 말에 윈터가 말없이 바이올렛을 보더니 혀를 한 번 차고 그녀의 입술에 쪽 소리가 나게 입을 맞춘 후 몸을 일으켰다.
그는 먼저 배에서 내려 손을 내밀었고, 바이올렛은 그 손을 잡고 배에서 내렸다.
바이올렛이 살피니 윈터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가 있었다.
다른 남자와 다르단 말에 금방 얌전해지는 그가 바이올렛 입장에서는 참 별나게 느껴졌다.
대충 길들여졌다는 윈터의 표현이 맞는 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
바이올렛은 길게 낮잠을 자고, 정확히 밤 12시에 있을 계승식에 참여하기 위해 드레스 룸으로 향했다.
헤스턴 가문의 가주가 될 카르잔 헤스턴 변경백이 전야제 형식으로 손님들과 인사를 하고, 12시에 계승식이 열리고 나면 밤을 새워 큰 규모의 파티가 열릴 것이었다.
대귀족의 계승식은 몇 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이벤트였다. 계승식에 참석하는 사람은 몇 되지 않았지만, 그 이후 며칠씩 이어지는 파티에는 라크라운드는 물론 인근 국가들에서까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바이올렛이 계승식을 위해 가져온 드레스는 살구색의 얇은 소재로 된 여름용 드레스였다. 드레스의 허리 부분을 진주로 장식하여 늘어뜨리고 연결 고리는 다이아몬드와 루비로 되어있었다. 그 위에 섬세하게 만든 흰색 레이스 볼레로를 걸칠 예정이었다.
젠은 바이올렛의 머리칼을 완전히 위로 틀어 올리고 로렌스 가문의 상징인 진회색의 진주가 촘촘히 박힌 핀으로 완벽하게 고정했다.
그리고 드러난 쇄골과 등에 반짝거리는 펄을 발라 두었는데, 요즘 밤에 열리는 파티의 유행이라고 했다.
준비를 마친 바이올렛이 나와 보니 턱시도를 입은 윈터가 침대에 걸터앉아 있었다. 녹초가 된 아침의 모습은 사라지고, 깔끔하게 면도를 하고 머리칼을 신경 써서 포마드로 매만진 세련된 남자가 되어있었다.
턱시도는 늘씬한 모양새로 된 것이었는데, 윈터의 긴 팔다리에 아주 잘 맞아떨어졌다.
바이올렛의 모습을 바라보던 윈터가 물었다.
“꼭 가야 되나?”
“그게 무슨 소리예요?”
“당신과 침대 위에서 뒹굴다가 파티에서 배나 채우고 싶은데.”
“안 돼요.”
바이올렛이 서둘러 대답했다. 제 속을 들킨 것 같아 당황스러웠다.
윈터가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바이올렛에게 손을 내밀었다. 바이올렛이 그의 손 위에 장갑을 낀 제 손을 올려놓으며 물었다.
“당신 장갑은요?”
“이따가.”
윈터가 제 주머니를 턱짓했다. 그의 주머니에 장갑이 구겨져 있는 게 정말 딱 윈터다웠다.
바이올렛은 별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마차에 타서 대강당으로 향했다. 윈터는 아내에게 수작을 부리지 않기 위해 아예 창밖으로 고개를 돌려 버리고 있었다.
바이올렛이 그런 윈터의 옆모습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당신은 턱시도가 잘 어울려요.”
그녀의 말에 윈터가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바이올렛이 윈터의 이마를 살짝 손으로 감싸며 말을 이었다.
“머리도 예쁘고요.”
그녀의 예의 바른 칭찬에 윈터가 이내 어깨를 들썩이고 웃었다. 그리고 그녀 쪽으로 몸을 숙이며 말했다.
“공주님 마음에 든다니 다행이군.”
“인사치레 아니고 정말이에요.”
“키스하고 싶어.”
그의 단도직입적인 말에 바이올렛이 멈칫했다. 그러나 이성적으로 생각했을 때 립스틱이 지워지면 젠이 성화할 것 같아 안 된다는 의미로 고개를 저었다.
그러곤 잠시 생각하다가 장갑을 벗고 손등을 내밀었다. 그녀의 공주님 같은 행동에 윈터가 실소가 터져 키득거리더니 손등 대신 손바닥을 당겨 입을 맞추고 말했다.
“당신의 행동에 내 대응이 무례할까봐 걱정하던 때도 있었지.”
“지금은요?”
“예의 없어도 내가 좋다며?”
윈터가 짓궂게 말하곤 바이올렛의 손가락에 이번엔 조금 길게 입을 맞췄다.
바이올렛은 얼굴이 달아올라 서둘러 손을 빼내고 아무렇지 않은 척 장갑을 꼈다.
그사이 마차가 대강당 건물에 도착했다.
*
하나둘 들어서는 손님을 맞이하기 위하여 대강당 안에서는 고전 음악이 연주되고 있었고, 조명이 밝지는 않았으나 우아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손님들은 헤스턴 가문에서 제공하는 볼거리를 구경하며 이 사교행사에 참여하고 있었다.
에쉬 로렌스는 다른 명문가의 또래 자제들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바이올렛 부부를 불쾌한 얼굴로 보았다. 시간이 변하긴 했는지, 대귀족들이 그들 부부와 대화를 할 기회를 엿보는 분위기에 부아가 치밀었다.
계승식 시간이 가까워지자 헤스턴 가문 사람들이 그들에게 자리를 안내하기 시작했다.
바이올렛과 윈터를 데리러 온 것은 헤스턴 가문의 가장 어른이며 카르잔 헤스턴의 어머니인 마렌 헤스턴이었다.
싸늘한 인상의 마렌이 바이올렛에게 말을 걸었다.
“오셨습니까, 부인.”
“오랜만에 뵙습니다.”
바이올렛의 인사에 마렌이 미소를 지었다.
“두 분의 자리를 떨어뜨리지 않으려다 보니 고민이 많았습니다.”
“그렇습니까?”
“예, 각자 가문을 대표하셔야 하니.”
대강당의 단상 아래 오른쪽에 헤스턴 가문 사람들이 있고, 왼쪽에 바이올렛과 윈터의 자리가 있었다.
마렌이 자리를 가리켰다.
“여기가 두 분 자리입니다.”
그때 에쉬 로렌스는 야니스 헤스턴의 안내로 조금 더 뒤에 자리를 찾은 참이었다. 에쉬가 앉으려 하자 야니스가 막았다.
“잠시 기다려주시지요.”
그의 말에 에쉬가 인상을 썼다. 그러나 일단 초대한 가문 후계자의 말이니 별수 없이 자리에 서있으려니, 야니스가 바이올렛이 먼저 자리에 앉는 것을 확인했다.
그제야 그가 에쉬에게 말했다.
“이제 앉으셔도 됩니다.”
그의 말에 에쉬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었다.
다른 가문은 집안 어른을 가장 먼저 앉히는 것이 예의지만 로렌스 가문은 왕가였으므로 의전 서열이 존재했다.
저보다 바이올렛이 먼저 앉았다는 것은 헤스턴가에서 그녀를 로렌스 가문에서 가장 서열이 높은 것으로 간주함을 의미했다.
태어나서 한 번도 받은 적 없는 대우에 에쉬는 분노를 못 참고 주먹으로 애꿎은 의자를 내려쳤다.
제게 이야기하는 어른의 이야기에 집중하며, 결코 두리번거리지 않는 바이올렛과 달리 늘 돈 될 것을 찾는 윈터는 그 모습을 처음부터 쭉 보고 있었다.
상황을 대충 파악한 윈터는 에쉬와 눈이 마주치자 속을 숨기지 않고 비웃음을 지었다.
당신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